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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6851999 / 216쪽 145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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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용인 수지의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동네 청년인 필자가 중학생들과 1년간 함께 읽은 책 이야기에 대한 기록. 봄에는 학교 이야기를, 여름에는 집(가족) 이야기를, 가을에는 마을 이야기를, 겨울에는 세상 이야기를 읽었고, 이 책들을 읽으며 중학생들과 나누었던 대화나 그들이 썼던 글 등을 함께 실어 중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책 이야기와 함께 담아 냈다. 한없이 익숙하면서도 턱없이 낯선 학교와 집, 늘 그 안에 속해 있지만 인식 밖에 있는 마을과 세상에 대해 읽고 이야기와 글을 나누며 동네 청년과 중학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수업이 펼쳐진다.
출판사 리뷰
지은이 인터뷰 중에서 1. 『일요일 오후 2시, 동네 청년이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는 1년 동안 선생님께서 중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중학생이라니! ‘중2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존재들이 중학생 아닌가요?^^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은 중학생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선생님과 책을 함께 읽게 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중학생들과 함께 책 읽는 수업을 한다고 말하면 늘 받는 질문이 그거였어요. “힘들지 않아? 걔들이 감당이 돼?” 중2병, 질풍노도의 시기, 그리고 기타 등등……, ‘중학생’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마다 전 이렇게 대답했죠. “애초에 책 읽는 수업 들으러 오는 애들이면 어느 정도는 다 얌전한 애들이야.” 그럼 또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납득하더군요. 글쎄, 정말로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함께 수업한 친구들 중에서는 대놓고 수업 중에 떠들어 댄다거나 일부러 방해를 한다거나 하는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들 그다지 말이 없는 편이었지요. 자기 스스로 온 경우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온 경우가 많았고, 힘겹게 책을 읽어 오기는 해도 적극적으로 자기 감상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말이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성격이 내성적인 친구도 있었고,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었고, 자기 의지로 온 게 아니다 보니 의욕이 별로 없는 친구도 있었고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자기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아마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같은데 그 침묵이 난감하긴 해도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비단 중학생이 아니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갖는다고 하면 누구나 처음엔 어색하고 어쩔 줄 모르지 않겠어요? 그건 당연한 것이고, 다시 말해 평범한 것이죠. 그 당연한 침묵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들 저마다의 목소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고요. 그렇게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비로소 서로가 조금은 특별해지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저는 평범한 중학생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었고, 그 애들이 저에게 있어 평범한 친구들이 아니게 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2. 중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차례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봄에 읽은 학교 이야기’, ‘여름에 읽은 집 이야기’, ‘가을에 읽은 마을 이야기’, ‘겨울에 읽은 세상 이야기’ 이렇게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일단 집보다 학교가 앞서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고요, 또 어떻게 이런 주제로 책읽기를 하게 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이 수업을 맡았을 때 가장 먼저 제게 주어진 과제는 일 년 동안의 커리큘럼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 사계절 동안 네 개의 서로 다른 주제들로 커리큘럼을 구성하되, 그 네 개의 주제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흐름이 있을 것’을 과제로 삼았죠. 그 과제에 맞춰 저 스스로도 몇 가지 단서들을 달았습니다. 첫번째로 제가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 힘으로도 어젠다를 구성할 수 있는 주제여야 했어요. 수업 초반에 아이들이 어색해할 때에는 여차하면 제가 주도적으로 수업을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주제여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렇게 단서들을 달아 놓고 보니 생각보다 답이 쉽게 나오더군요. “아이들에게 가장 익숙할 주제인 아이들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과 인간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저마다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중요한 공간과 관계들을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볼 수 있도록 하자.” 그런 것이라면 아이들도 관심을 가질 것이고, 저도 말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어쨌거나 저도 십수 년 전에는 중학생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먼저 나온 게 학교와 집이었습니다. 집보다 학교가 먼저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학생 즈음 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수면 시간을 제외한다면―슬슬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죠. 중학생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 관계라는 게 학교랑 집 빼면 뭐가 있을까? 그게 도시이고 마을이었습니다. 분명 아이들의 삶의 기반을 구성하는 곳이면서도 학교와 집을 오가면서 지나치는 중간경로로만 인식되는 곳. 그리고 마을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그 너머, ‘국가’, ‘민족’, ‘세계’와 같은 것도 인식할 수 있게 되지요. 마을과 마찬가지로 자신들 삶의 기반을 구성하지만 평소에는 인식 밖에 있는 영역들. 그러니까 이 네 개의 주제는 인식이란 층위에서는 단계적입니다. 마치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내 세계를 구성하는 영역들 중 가장 가깝고 좁은 영역에서 시작해 더 멀고 넓은 영역을 인지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영역들은 단계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을-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이 ‘가정’의 풍경에 영향을 주고, ‘세상’―국가에서 결정된 교육 정책이 바로 ‘학교’ 생활에 영향을 주죠.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연결망들이 있고요. 그 연결망이 바로 아이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각자의 세상일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렴풋이나마 그러한 자신들의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고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감을 잡길 바랐습니다(물론 수업 시간에는 이렇게 어려운 말들로 풀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게 결코 자신의 실제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각자에게 즐겁고 유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제가 수업에서 바랐던 건 그것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선생님, 저 여기 올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 “왜? 책이 어려워?” “아뇨. 그게 아니고, 책에서는 이렇게 학교에 문제가 많고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배우잖아요. 근데 전 내일이면 다시 그 학교에 가야 된다고요. 이제 매일 학교에 갈 때마다 책에서 짚어 준 문제들이 막 눈에 보이는데, 저는 그래도 계속 학교에 다녀야 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 그날, 희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깊이 고민했던 기억은 난다. 까딱하면 무책임하고 의미 없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한마디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내일이면 다시 학교를 가야 하는 희진이, 어쨌거나 학교를 졸업한 나 자신. 그 간극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렇기에 무엇을 가르칠까를 고민한다는 것―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를 고민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 시간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그 사실을 곱씹게 되고, 막막함이 찾아온다. 그것은 일생에 걸쳐 던져야 하는 물음이 아닌가. 그 대답을 구하지 못하면 가르친다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1부 봄에 읽은 학교 이야기_가르침은 ‘삶’으로써], 46~48쪽)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족다움’이라는 관점인데, 그런데 이때 가족의 사랑이란 자연의 산물로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사회의 산물로서 ‘수행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모순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의무로 수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을 법률로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가족다움이라는 환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은폐한다―설령 가족 관계라 하더라도 애정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러 구체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며, 따라서 ‘가족다움’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통일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형태와 함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하고 본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랑을 ‘회복’한 게 아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홈 파인 공간에서 벗어나 캘리포니아로의 길 위에 내던져짐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러한 자신들로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가족′으로 만난다.(2부 여름에 읽은 집 이야기_가족이라는 ‘홈 파인 공간’) 집에서만 이야기하던 것들을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것들을 집으로 가져온다. 집에서 하던 방식대로 밖에서 하다가 갈등을 빚기도 하고 밖에서 하던 방식을 집으로 가져와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을 공동체의 탄생이 의미하는 ‘새로운 인간관계’는 또 하나 낯선 외부 영역의 탄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관계 맺기의 과정 속에서 항상 익숙했던 사적 영역과 항상 낯설었던 공적 영역이 함께 확장되어 서로의 영역을 침식, 종국에는 그 경계를 흐트러뜨리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마을’은 새로이 감각되는 것이자, 나 자신의 감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아이들과 했어야 했던 것도 마을장터를 구경하고 투어를 하는 것보다 함께 공간을 청소하고 간식 준비를 위해 머리를 맞대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가을의 수업이 끝나 갈 무렵 나는 뒤늦게 그러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3부 가을에 읽은 마을 이야기_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 159~160쪽) “나치는 그렇다 치고 카포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렇게 엄청나게 사람들이 죽는데, 중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유태인들을 감시하고 때리고… 아무것도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또 그때 독일 사람들은 뭘 했어요…? 독일 사람들 중 아무도 이런 일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은 거예요? 그냥 자기네 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몇 가지 대답들을 떠올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아이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자기 생각에 잠긴 녀석도 있고 눈치를 보는 녀석도 있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 또한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바로, 『쥐』와 같은 텍스트를 읽고 녀석들이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4부 겨울에 읽은 세상 이야기_1940년 폴란드 남쪽의 기억, 167~168쪽)
▶지은이의 말
실제 수업을 진행하면서는 ‘중학생’들을 만난다는 게 생각 이상으로 난감한 일이란 걸 깨달아야 했다. 내 딴에는 녀석들에게 더 쉽게 책 내용을 설명하고자 준비했던 예시들조차 녀석들에게 낯선 경우가 있었고(『원피스』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녀석들에게서 무언가 말을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울 때도 많았으며 녀석들이 일상에서의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 마땅한 대답을 주기 어려웠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이 있었기에 나의 말이 녀석들에게 가닿을 때, 녀석들의 말이 나에게로 와닿을 때의 짜릿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려움과 짜릿함, 그것이야말로 동네 청년인 내가 중학생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나와는 다른 일상을 살고 다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며 다른 것들을 고민하는 그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우연하고 낯선 만남을 통하여 서로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더 많은 변화가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삶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구태여 책으로까지 옮긴 것은 바로 그 경험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이다. 얼핏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말들을,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들께 전하고 싶어서이다.
“선생님, 저 여기 올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
“왜? 책이 어려워?”
“아뇨. 그게 아니고, 책에서는 이렇게 학교에 문제가 많고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배우잖아요. 근데 전 내일이면 다시 그 학교에 가야 된다고요. 이제 매일 학교에 갈 때마다 책에서 짚어 준 문제들이 막 눈에 보이는데, 저는 그래도 계속 학교에 다녀야 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 그날, 희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깊이 고민했던 기억은 난다. 까딱하면 무책임하고 의미 없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한마디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내일이면 다시 학교를 가야 하는 희진이, 어쨌거나 학교를 졸업한 나 자신. 그 간극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렇기에 무엇을 가르칠까를 고민한다는 것―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를 고민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 시간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그 사실을 곱씹게 되고, 막막함이 찾아온다. 그것은 일생에 걸쳐 던져야 하는 물음이 아닌가. 그 대답을 구하지 못하면 가르친다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1부 봄에 읽은 학교 이야기_가르침은 ‘삶’으로써], 46~48쪽)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족다움’이라는 관점인데, 그런데 이때 가족의 사랑이란 자연의 산물로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사회의 산물로서 ‘수행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모순이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의무로 수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을 법률로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가족다움이라는 환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은폐한다—설령 가족 관계라 하더라도 애정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러 구체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며, 따라서 ‘가족다움’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통일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형태와 함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하고 본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의 주인공들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랑을 ‘회복’한 게 아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홈 파인 공간에서 벗어나 캘리포니아로의 길 위에 내던져짐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러한 자신들로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가족′으로 만난다.(2부 여름에 읽은 집 이야기_가족이라는 ‘홈 파인 공간’)
집에서만 이야기하던 것들을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것들을 집으로 가져온다. 집에서 하던 방식대로 밖에서 하다가 갈등을 빚기도 하고 밖에서 하던 방식을 집으로 가져와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을 공동체의 탄생이 의미하는 ‘새로운 인간관계’는 또 하나 낯선 외부 영역의 탄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관계 맺기의 과정 속에서 항상 익숙했던 사적 영역과 항상 낯설었던 공적 영역이 함께 확장되어 서로의 영역을 침식, 종국에는 그 경계를 흐트러뜨리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마을’은 새로이 감각되는 것이자, 나 자신의 감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아이들과 했어야 했던 것도 마을장터를 구경하고 투어를 하는 것보다 함께 공간을 청소하고 간식 준비를 위해 머리를 맞대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가을의 수업이 끝나 갈 무렵 나는 뒤늦게 그러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3부 가을에 읽은 마을 이야기_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 159~160쪽)
“나치는 그렇다 치고 카포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렇게 엄청나게 사람들이 죽는데, 중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유태인들을 감시하고 때리고… 아무것도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또 그때 독일 사람들은 뭘 했어요…? 독일 사람들 중 아무도 이런 일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은 거예요? 그냥 자기네 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몇 가지 대답들을 떠올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아이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자기 생각에 잠긴 녀석도 있고 눈치를 보는 녀석도 있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 또한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바로, 『쥐』와 같은 텍스트를 읽고 녀석들이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4부 겨울에 읽은 세상 이야기_1940년 폴란드 남쪽의 기억, 167~168쪽)
들어가며
1. 봄에 읽은 학교 이야기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학교를 ‘사용’함으로써
다니엘 페나크, 『학교의 슬픔』|교사로 ‘일’함으로써
김명길,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가르침은 ‘삶’으로써
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바보’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무지’로 평등함으로써
2. 여름에 읽은 집 이야기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독립이라는 ‘자유’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오이대왕』|아버지라는 ‘두려움’
김고연주, 『우리 엄마는 왜?』|어머니라는 ‘익숙함’
조너선 데이턴·밸러리 패리스, <미스 리틀 선샤인>|가족이라는 ‘홈 파인 공간’
3. 가을에 읽은 마을 이야기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리고 도시가 태어났다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도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장성익,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다 (1)
장성익,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말한다 (2)
4. 겨울에 읽은 세상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 『쥐』|1940년, 폴란드 남쪽의 기억
한강, 『소년이 온다』|1980년, 광주의 기억
임정은,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2008년, 서울의 기억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2019년 용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