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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9205300 / 197쪽 135 x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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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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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시인은 아내의 시편들을 2000년 4월 3일에 일단 마감한다. 그러나 같은 해 6차례나 퇴고를 반복하고 이듬해 2001년 3월 「초례청」, 「흑룡엉겅퀴」, 「조양동 단칸 셋방」, 「아가에게」를 추가하고 두 번 더 퇴고한다. 20002년에도 역시 두 번을 수정한다. 7년 후 2009년 또 한 번 다듬고 2010년 2월에는 시 일부를 고치고 순서도 바꾼다. 그리고 9년 뒤인 이제야 이 시편들은 책으로 묶여 상재되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이 시집 아내를 읽고 있는 지금 정작 함께 즐거워해야 할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시집 원고의 말미에 10여 년 동안 작품들을 고치고 다듬었던 내력을 날짜별로 메모형식으로 달아놓았다. 덕분에 나도 글의 서두를 위와 같이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인이 얼마나 이 시집에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왔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시편들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이 정녕 ‘아내’를 대하는 듯 서리서리 구비치고 있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신부
꽃이요 열매요 그 뿌리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여인
시내요 강이요 바다요 갈잎이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나무
바위요 산이요 골짜기요 대지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친구
갈대요 허공을 날으는 새요 별이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모성
논밭이요 저녁놀이요 그늘이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미궁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없는
안개요 버들강아지요 바람이요
쑥내음이요 들깻잎이요 허공이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주인
씨앗이요 생명이요 우주 현빈
오 아내 당신은 신비로운 물방울
돌밭이요 돌밭을 일구는 강물이요
질경이풀이요 물잠자리요
물잠자리를 기르는 새봄의 들녘이다.
아내 당신은 내 영원한 우주
-「아내, 나의 신부」 전문
위 시는 시인 자신의 아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영원한 신부이자, 여인이자, 친구다. 영원한 모성이자, 미궁이자, 주인이다. 신비로운 물방울이요 영원한 우주이기도 한다. 이렇게 나간다면 작품은 자칫 통속적인 사랑타령이 될 뻔 했다. 그러나 왜 아내가 그런 존재인지 부연 설명이 되기도 하고, 이유가 되기도 하는 수많은 대자연의 생명, 사물, 현상들이 반짝거리며 시의 미학적 구성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연 가름은 없지만 문장은 언제나 “아내 당신”이란 주어로 시작되어 그 애정의 깊이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작품의 음악적 운율을 제고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첫 문장에서 아내는 “꽃이요 열매요 그 뿌리다.” 나무의 필요·충분한 속성을 모두 지닌 말이다. 나무가 땅 위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었다면 자신의 모든 소임을 훌륭히 수행해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는 뿌리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가능했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시인의 “영원한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영원한 신부”이기 때문에 “꽃이요 열매요 그 뿌리”가 될 수 있기도 하다.
둘째 문장에서 아내는 “시내요 강이요 바다요 갈잎이다.” 작은 시냇물은 모여 강물이 되어 흐른다. 그리고 모든 강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섬세한 시인의 촉수는 물위에 떠 함께 흐르는 ‘갈잎’의 존재까지 포착한다. 이 문장은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의 긴 여행길을 압축하고 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35억 년 전 지구 최초의 생명이 물에서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 어떤 생명도 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물처럼 약한 것이 없다. 자기의 형태를 갖지 않은 약한 존재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넣으면 모 날뿐이다. 허나 어떤 굳세고 강한 것도 물의 힘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 한 방울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도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 그런데 아내는 바로 그 물을 담고 흐르는 “시내요 강이요 바다”다. 시인의 “영원한 여인”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문장에서 아내는 “바위요 산이요 골짜기요 대지다.” 땅에는 바위와 골짜기가 있는 산도, 넓은 들판인 대지도 있다. 땅 또한 생명 그 자체나 진배없다. 흙 일 그램에는 일억이 넘는 미생물이 살고 있다고 하니 흙덩어리는 바로 ‘생명의 덩어리’다. 그 자양으로 모든 초목이 자란다. 시인의 “영원한 나무”도 바로 그 흙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아내는 봄볕 맛있다 하며 얼른 간장독 망사를 풀어놓습니다. 숙성해 까매진 간장 얼굴이 드러납니다. 봄 하늘이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개살구 빈 나뭇가지도 얼른 그리로 뛰어내립니다. 간장독 안은 금방 딴 세상이 됩니다. 봄햇살이 장난쳐 금방 파란 딴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내도 파란 그리로 내려가 이쪽 세상을 올려다봅니다. -?봄눈 내린 다음날? 부분 아내는 모처럼의 봄 햇살이 아까워 “얼른 간장독 망사를 풀어”놓는다. 살뜰한 주부의 모습이다. 까맣게 숙성한 “간장 얼굴이 드러”나자 ‘봄 하늘’도, ‘개살구 나뭇가지’도 “얼른 그 속으로 뛰어”든다. 햇살이 장난친 간장독 안은 금방 파란 딴 세상이 된다. 이번에도 자연 현상과 사물이 부부를 거들고 있다. 시간 끌지 않고 바로 행동하는 ‘얼른’이란 부사어의 반복이 신선하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런데 말이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는 데 “아내도 파란 그리로 내려가 이쪽 세상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내도 자연사물의 하나로 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그린 많은 작품 중 ?조양동 새마을 단칸 방?, ?장 담그던 날?, ?봄눈 내린 다음날? 등이 있는데, 시인이 보여주는 발군의 창작 정신과 태도를 읽어 낼 수 있다. 감동을 주는 문학작품에 관해 토로되는 가장 흔한 독자반응의 하나는 그것이 삶에 대한 진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진실은 이성에 의한 과학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성에 대립하는 ‘상상’에 의한 진리 파악이다. ‘상상력’은 일상의 온갖 ‘경험’을 토대로 하여 새롭고 의미 깊은, 즉 진리를 닮은 형상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소박한 감정을 토로하는 서정시에도 진실성은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문학은 허구다. 그러나 그 허구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경험적 사실, 비록 그것이 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사실과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다. 진실에 대한 반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이런 소박한 반응은 의외로 완강하고 끈질기다. 시인은 이를 꿰뚫어 보고 있다. 부끄러운 것은 감추고 잘난 것은 내세우려 하는 게 인간의 기본 성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솔직하다. 신혼 때 어렵게 살았음을 “쌓여 올라오던 똥덩어리”와 “산불처럼 번지던 빈대 떼”라는 말로 과감하게 드러낸다. ‘똥’이나 ‘빈대’는 보통사람이면 시어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시가 아름답던 고통스럽던 모든 경험을 소재로 하듯 아름다운 어휘뿐 아니라 상스럽고 더러운 말도 얼마든지 작품에 도입될 수 있다. 시인의 연금술 같은 상상력을 거치면서 그런 어휘들 역시 보석처럼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장 담고 간장독에 볕을 쬐게 하는 일은 남정네라도 흔히 보고 겪은 틀림없는 ‘경험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둘이 ‘메주를 담고 짓찧는 일’, 봄 햇살을 담기 위해 ‘간장독 망사를 풀어놓는 일’은 이런 경험적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상상력은 설악과 동해 바람, 떨어지는 살구꽃이 장에 섞이게 하고, 봄 하늘과 살구 나뭇가지가 간장독 에 뛰어들게 한다. 아내까지 그리로 내려가 이쪽 세상을 올려다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일상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새롭고 의미 깊은 형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시인의 상상력으로 표현된 놀라운 형상들이 여기저기 산견된다. 송아지를 낳느라 “우리집 암소가 내어지른/ 새벽 비명소리에 놀라/ 동해에 하현달이 떴다.”(?암소?) 상현달은 어떤가. 동해 하늘은 ‘상현달’을 풀어놓고 “새똥을 갈기는 듯/ 별들을 마구 흩뿌려대”고 있었다.(?오징어배를 타던 날의 기억?) 빙모님이 사시던 함경북도 성진에서는 “저녁이면/ 해마가 하품을 하며 육지로 올라”오고 “바다에 떨어진 별들을 청어들이 주어먹기도 했다”고 한다.(?처가?) 얼마나 새로운 의미를 담지한 눈부신 형상들인가.
노을꽃
요즈음 나에게는 그녀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라보기만 해도 묘한 파동이 일어나 신비로운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청춘으로 만나 장년을 넘어서기까지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서 밥숟가락을 함께 나누며 살아왔다. 그 시공이 33년, 아스라하다.
블록 담집 관사로부터 단칸 사글셋방 전세로 이어지던 시절 그녀는 아기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 가련해 하면서도 아기를 길러냈고 기다림과 헌신으로 일관해 왔다. 혹한풍설을 거의 알몸으로 배겨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별로 해준 게 없다. 간혹 정신의 아찔함은 찾아왔었지만 그 흔한 사랑이란 말조차 별로 하지 못했다. 울렁거림은 약했고 파릇한 감흥의 순간 같은 것도 드물었다. 오히려 무덤덤해 하거나 투정을 부리곤 했다. 밋밋이 흘러가 버린 강물 같은 생,
돌아보면 그건 한 인간에 대한 모독이었다. 가혹한 일이었으며 시련이었다. 무례며 학대였다.
사실 각각 다른 개체가 만나 하나를 이룰 때 그 순간은 극적이고도 장엄하다. 마음과 마음이 어르고 몸과 몸이 결합할 때 들려오는 속삭임, 그 풀무 소리야말로 바로 천지가 하나를 이루는 소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순간들을 우리는 온전히 하나로 만들어갈 줄 몰랐다. 하나이되 그 하나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음미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눈빛은 멀리 있었고 가슴은 낡아 펄럭댔다.
그런 지난날들이 몹시 미안하다, 고 되뇌며 섰던 어느 별 아래서 나는 이런 시 101편을 썼다. 그 사람이 이걸 모두 읽을 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고해의 편린들은 내 나뭇가지에서 떠나간다. 이제 나는 쉬고 싶다. 따스한 물가에 기대앉아 가물히 이울어가는 그녀 눈빛을 바라보며 그저 한가해지고 싶을 뿐이다.
벌써 땅거미가 진다. 산기슭으로 어둠살이 밀리고 바람 소리가 스산하다. 계곡으로 그림자들이 깊게 쏠리고 산봉우리에는 노을꽃이 눈물방울처럼 핀다. 처연히.
오 그 사람 내 아내 우렁각시여!
2003년 9월 26일
설악산 달마봉 아래서
최명길
너와 나
너와 나는 잠시 스치는 갯바람 아니다.
우리 서로 갈잎에 우는 기러기처럼 만났어도
네가 강물이라면 나는 산이다.
그보다는 내가 강물이고
너는 거기 담겨 흘러가는 꼭두서니 풀 그림자다.
우리 서로 갈잎에 우는 겨울 기러기처럼 만났어도
나는 하루종일 네 곁에 홀로여도 외롭지 않고
삶이 괴로워도
나는 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너의 눈동자에 이는 들냉이 내음
나는 산 그리메로 오늘도 홀로 네게 머문다.
눈부심으로
사람과
사람들
그 수많은 얼굴 속에서 나는 너를 만났다.
너는 눈부심으로 가득했다.
눈부심으로 너는 나에게 왔고
눈부심으로 나는 너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나는 너의 내력을 잘 모른다.
너 또한 나의 전력을 잘 몰랐으리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리
우리들의 조우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너는 그때 바로 그 자리에 한 여인으로 있었고
나는 그때 바로 그곳에 한 사내로 있었다.
그것만이 우리의 환희였다.
우리의 무상한 노래였다.
너와
나
우리의 눈부심으로
나무 해인
산에 들어 처음 그 나무를 만나고서
나는 그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보았다.
몇 해 지난 다음 다시 그 나무를 만나고서는
나는 그 나무를 성자라 생각했다.
산정 거친 바위벽을 안고 몸부림쳤을
그를 깨닫고 난 후였다.
세상은 나무를 그냥 두지 않았다.
나무는 육신을 비틀었다.
가지는 떨어져 나가고 흔적만 남았다.
키는 낮아 더 낮아질 수 없다는 듯
지옥처럼 붉어 몸통 전체가
울금향을 담은 그릇 같았다.
동쪽으로 난 서너 줌의 잎사귀 타래
그것만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천지와 어울리자면 다만 그러해야 했던가
순종의 끝은 다만 그러했던가
나는 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천지 그 법이 얼른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속 모든 나무가 성자,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나무 같은 사람들은 성자다.
나무를 싹 틔워 기르는 이 땅은 해인의
도독한 무릎이다.
첫 포옹
첫 포옹의 순간
너와 나는 너와 나가 아니라 별이 아니라
꽃망울 우주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온전한 하나
하나의 빛남이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충격이요 기적이었다.
그 포옹의 순간
너와 나는 너와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혼돈으로서
찰랑임으로서
아니, 엉긴 몸으로서만 의미를 지닌
하나의 진실
반 쪼가리 하나가 아니라 반 쪼가리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그런 달항아리였다.
너와 나는 너와 나가 아니라
풀향기 같은 것으로
꽃향기 같은 것으로
하늘의 장난
눈 온 다음 날
설악산은 눈을 이고 있고
흰 눈빛에 놀라
하늘이 금방 파래졌다.
아내와 그걸 한참 바라보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하늘이 장난하네.”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단풍 든 빨딱고개를 오르다
힘들어하기에
누운 막대기 하나 주워 건네던 일 생각나
다시 얼굴을 마주하니
보얗던 얼굴에는 잔주름 가득 고였다.
“꼬물꼬물 시간이 장난쳤네.”
하니 그녀가 다시 웃었다.
사랑의 제물
아내와 함께 살아온 지 사십 년
돌아보면 어머니 생각난다.
세상의 모든 딸들 생각난다.
달마다 한 바가지씩 피를 쏟아내고
사랑이란 달콤한 말에 꼬이어
연꽃풋살 깊고도 그윽한 그곳으로
어여쁠 것도 향기로울 것도 없는
괴이한 그 물건을 받아들인다.
회임과 출산의 죽을 고비를 왜 모를까마는
그 순간만은 침묵한다.
누가 마취주사를 꽂아 두었다는 말인가
사랑의 제물이 되어
뱃가죽이 찢어지고
골반이 어긋나 몸뚱어리가 어기적거려도
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여인이여 그 일 하나만으로도
나 그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어라
세상의 모든 창조의 모성이여
딸이여 어머니여
용구새
처음 그녀와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가던 날은
우리 아버지가 용구새를 뱆고
어머니는 마당 가에서 고추를 열었다.
그해 밭뙈기는 풍요로워 고추빛깔이 곱고
쪽동박 열매 영그는 소리가 산울타리를 붉혔다.
초가 추녀 끝으로 일찍 가을이 와서
밤나무 가지 탐스러운 밤송이들은
누가 먼저 입을 벌리나 내기를 하고
가지마다 풀매미들이 달라붙어 째지게 울었다.
우물 속에 더러 먼저 떨어진 감나무잎들
그 새로 물기 머금어 더욱 노래진 낮 반달
우리는 나란히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천장에 드러나 댓진처럼 까매진 서까래를 보며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구멍 뚫린 지창으로 마른 햇살이 들어와
고소하게 들깨 칠을 한 방바닥 한켠에 와서 놀고
나는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했다.
산빛을 돌아서면 실댕기 같이 아련하던 퉁소 소리
그러나 가파른 능선길이 거기 또 있었다.
멀리서 보면
멀리서 보면 너에게는 내가 어떨까
나는 네가 버들새로 보인다.
고개 갸웃거리는 몸짓 아니라
눈매 파리한 산수국 빛 하늘을 날아서
날아서 오는 버들새
아주 멀리서 보면 너에게는 내가 어떨까
나는 네가 별로 보인다.
밤 구름에 틀어박힌 몸짓 아니라
물먹어 노르끼리한 들국화로 몸을 태워서
태워서 오는 별로
나는 네가 짐승으로 보일 때도 있다.
어여쁜 꽃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
짐승 같은 꽃
멀리서 네가 있는 곳 떠올려 바라보면
너는 네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내게 와 머문다, 머물다 간다.
아주 더 멀리서 보면 너는 네가 아니라
너인 다른 그 무엇이다.
너와 나·12
눈부심으로·13
나무 해인·14
첫 포옹·16
하늘의 장난·17
사랑의 제물·18
용구새·19
멀리서 보면·20
화채봉과 산똥·22
수레와 마부·24
홍반 이슬·26
부분과 전체·27
아기집·28
첫 말문·30
당신의 마음 뜨락·32
눈 흘김·33
녹두꽃잎 무늬·34
초가을 밤 앵속이 싸르르 타는 듯한·36
마지막 편지·38
돌나물김치·40
축복·41
암나사와 수나사·42
눈물·43
영원한 어머니·44
거리·46
작은 여울·47
장 담그던 날·48
오징어배를 타던 날의 기억·50
별거·52
갈대꽃·53
비를 좋아하는 사람·54
내가 모를 일·55
이쪽과 저쪽·56
토담집·58
하얀 길·60
쇠뜨기꽃·61
어떤 새벽·62
서낭당 아래 청밀밭·64
그 나무·66
태풍 끝나고·67
당신에게 드리는 예물·68
각시붓꽃 피었던 자리·70
처가·71
장마 오기 직전의 하늘·72
물 안의 아내·73
초례청·74
저녁 강가·76
호롱불·78
사주·79
출생기·80
푸른 빛 푸른 세계·82
봄눈 내린 다음 날·84
홀로 타는 사랑·86
방울토마토·87
갑자기 문이 열리면·88
너와 함께라면·90
새아기·91
여우불·92
새벽 달항아리·93
그녀 가슴에 도는 아지랑이·94
유리보석·96
그 사람 마음이 급하게 움직이니·97
노랑만병초꽃·98
조양동 새마을 단칸방·100
산·101
두루거리상 바닥의 물고기·102
좀싸리꽃·104
홀로 손님·106
꽃융단·107
젖·108
모과 한 알·110
얼레지꽃·112
아내의 기도·114
슬픈 알몸 덩어리·116
그 아이·117
빚 물던 날·118
딸은 창조의 신·119
황홀한 몸을 알고부터·120
괭이밥·122
열쇠·123
소방울집·124
누워 백일몽·126
피·127
당신의 행복·128
금강석·130
내 가슴에 묻혀서 슬픈·132
한밤에 부르는 노래·134
백로의 춤·136
내 청춘에게 붙이는 시·138
우리 빙모님 첫 살림집·140
물고지엿·142
암소·143
오 눈물 같은·144
아가, 이렇게 된 것은·145
성 우파니샤드·146
최초의 투명한 빛·148
흑룡강변 엉겅퀴·150
보름달이 초생달 될 때까지·152
오직 하나인 당신·153
아내, 나의 신부·154
아가의 여행·156
■ 해설 | 호병탁
놀라운 눈, ‘현빈의 진리’와 ‘똥 덩어리’를 조화롭게 함께 보는·158
■ 최명길 시인의 연보·1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