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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저 | 뚜르게녜프 역 | 범우 | 2018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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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3652238 / 144쪽 / 144g / 183 x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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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예술적 표현의 서정성을 담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투르게네프는 작품을 통해 농노해방 이후 수년에 걸친 러시아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다. 철학?윤리적 문제, 인생의 의의, 인간의 의무와 권리, 사랑과 죽음 그리고 러시아의 본질적인 역사성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룬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어조와 우아한 필치, 미에 대한 섬세한 감각은 그가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감각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방관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인 정열과 주관적인 감정의 불길을 간직한 인물을 묘사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의 전반적인 객관성을 확보한다. “마차는 농장을 지나쳤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지평선은 가도 가도 벌판으로 덮여 있었다. 아르카디는 생각에 잠겼다. 찌그러진 집, 가난한 농부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농부들은 하나같이 헌 누더기를 걸치고 바짝 여윈 말을 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교육이었다.” 발표된 후 이처럼 논란거리가 된 작품도 드물다. 보수와 진보진영에서 찬반양론을 낳았고 보수진영의 평가도 둘로 나뉘었다. 급진적인 청년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러시아 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호평하는 한편, 그에 대한 부당한 예찬이라며 작가를 비난하기도 했다. 바자로프는 실제 투르게네프에게 강한 인상을 줬던 젊은 의사가 그 모델이며 이와 대립하는 파벨 페트로비치는 귀족적 문화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이 책을 읽는 분에게)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요.” “니힐리스트라니?”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파벨은 나이프 끝에 버터를 찍으면서 말했다. “니힐리스트라면, 내가 알기로는 허무라는 뜻의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온 말이다. 아무것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인간을 뜻하는 것일 테지? 아니,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 파벨 페트로비치는 참견하고 빵에 버터를 마저 바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디가 말했다.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닌가.” “아니요, 아무래도 좋은 것은 아니지요. 니힐리스트란 어떤 원리 앞에도 굽히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 원리가 어떠한 존경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조금도 동하지 않는 인간이지요.”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그게 좋단 말이냐?”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나쁘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우리들과는 아주 다르구나. 구세대인 우리는 원리(파벨 페트로비치는 이 말을 프랑스식으로 부드럽게 발음했고 아르카디는 반대로 첫 음절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없이는, 이른바 네가 말하는 그 믿을 수 없는 원리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고 숨 쉴 수도 없다는 말이다. 참 뭐라고 했지…….” “니힐리스트요” 하고 아르카디는 똑똑하게 말했다. “그래, 전에는 헤겔학파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니힐리스트로군. 너희들이 그 공허, 진공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나갈지 두고 보겠다.”” ““배고플 때 빵 한 조각 입에 넣기 위해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추상적인 논리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파벨은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정말 자네를 이해할 수 없네. 자네는 러시아 국민을 모독하고 있어. 원리와 규칙을 어째서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도대체 자넨 무엇에 의해 행동하고 있나?” “큰아버지, 제가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아요.”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것에 의해서만 행동합니다. 지금은 부정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말인가?” “예, 모든 걸 말입니다.” “어떻게 예술이나 시뿐만 아니라 그리고 또…… 입밖에 내기도 무섭군.” “모든 것을요.””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바스락 소리가 나는 건조되긴 했어도 아직 푸른 빛깔이 남아 있는 풀을 두 아름쯤 밑에 깔고 마른 풀더미 그림자에 누워 있었다.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야, 이곳에서 아버지가 보내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먹고 마시면서 가장 옳고 분별 있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니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권태에 짓눌려 있는 거지. 그래서 인간은 교류하고 싶어하는 거라네. 비록 서로 헐뜯을지라도 관계 맺고 싶어하는 거야.” “그 순간순간이 의미를 갖도록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지.”” (본문 중에서) 분량이 많거나 어려운 책을 읽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체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느 시인의 문장처럼 “펼쳤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를 하게 된다. 범우다이제스트는 독자들이 문학의 향취를 물큰 느끼면서 또한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다이제스트(Digest)는 ‘요약’ ‘소화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요약은 자신이 소화한 내용으로 자기만의 이해의 속도를 정리하는 일이다. 다이제스트를 통해 속도와 깊이를 갖는 독서의 방식을 고민했다. 독자들과 나눌 수 있는 고민이기를 고대하며 다이제스트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독서가 가능하길. 새로운 독서와 독자의 자리를 고민했다. 조금 다르고 특별한 읽기를 통해 부정적 긍정성으로서 읽기의 효용을 생각했다. 범우다이제스트를 통한 세계문학의 복기. (편집자의 말)

저자 소개

  • 저자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1818년 11월 9일 중앙 러시아의 오룔 스파츠스코예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병 대령, 어머니는 부유한 여지주였고 형 니콜라이, 아우 세르게이(16세에 사망)가 있다.
1827년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사한다. 베이덴간멜 기숙학교에 들어가 2년 남짓 지내고
1829년 알메니야 전문학교(뒤의 라자료프 전문학교) 부속 기숙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정교사에게 배운다.
1833년 9월에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에 입학한다.
1834년 가을에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으므로, 페테르부르크 대학 철학부 언어학과에 편입한다. 11월에 아버지가 사망한다.
1836년 6월에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리어 왕〉, 바이런의 〈맨프레드〉 등을 번역한다. 이 무렵 바이런, 하이네 등의 영향을 받아 시작에 몰두하며 그리스 고전을 연구한다.
1838년 시 〈해질녘〉을 잡지 《현대인》에 발표한다. 베를린 대학에 유학. 헤겔 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한다.
1839년 가을에 러시아로 귀국한다.
1840년 1월에 외국으로 출발하여 이탈리아, 독일에 체류한다. 스탄케비치, 바쿠닌 등과 알게 된다.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841년 5월에 베를린 대학 과정을 마친다. 잡지 《조국잡지》에 단시를 발표한다.
1842년 4월에 어머니의 침녀에게서 딸을 낳는다(폴리나라고 이름하고 나중에 파리로 데리고 갔다). 5월에 철학박사 시험에 합격하고 그해 말 페테르부르크에 정주한다.
1843년 비평가 벨린스키와 알게 된다. 4월에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하고 《조국잡지》에 시와 희곡 〈경솔〉을 발표한다.
1844년 11월에 중편소설 〈안드레이 콜로소프〉를 발표하고 네그라소프와 가까이 지낸다.
184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알게 된다.
1846년 희곡 〈돈이 궁하다〉를 발표한다.
1847년 1월에 《사냥꾼의 수기》의 첫째 작품 〈호오리와 칼리느이치〉를 잡지 《현대인》에 발표하고 연초에 외국으로 떠나 7월까지 독일에 체류하다가 그후 비아르도 부인을 따라 파리로 가서 《사냥꾼의 수기》 집필을 계속한다. 이 무렵 상드, 메리메, 구노 등과 알게 된다. 비알드 부인의 남편과 함께 러시아 문학(고골리의 작품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1848년 파리에서 게르첸, 바쿠닌 등과 만난다. 《사냥꾼의 수기》의 여러 편을 계속 《현대인》에 발표한다.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1849년 2월, 〈시치그로프 군의 햄릿〉을 발표한다. 희곡 〈식객〉은 발표 금지 처분을 당한다.
1850년 희곡 〈마을의 한 달〉, 중편 〈쓸모없는 인간의 일기〉를 발표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므로 귀국하여 이듬해 농노 해방과 인두세 제도를 고치는 등 이상주의적 귀족으로서의 신념을 실천으로 옮긴다.
1851년 10월에 모스크바에서 배우 시추프킨과 함께 고골리를 방문한다. 11월에 고골리에 의한 〈검찰관〉의 낭독회에 참석한다.
1852년 2월에 〈세 해후〉를 발표한다. 고골리의 죽음 즈음하여 발표한 추도문이 원인이 되어 스파츠스코예 마을에 연금당한다. 그동안 단편 〈무무〉를 쓴다. 8월에 《사냥꾼의 수기》의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 리포프가 면직당한다.
1853년 12월에 스파츠스코예 마을에서의 연금이 해제되어 페테르부르크로 온다.
1854년 《사냥꾼의 수기》가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된다.
1855년 1월에 모스크바 대학 기념 축전에 참석한다. 4월에 중편 〈야코프 파신코프〉를 발표하고, 여름에는 스파츠스코예 마을에서 장편 《루딘》을 집필한다.
1856년 1~2월 《현대인》에 〈루딘〉을 연재, 8월 런던의 게르첸을 방문한다. 10월에 장편 《귀족의 보금자리》를 쓰기 시작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투르게네프 저작집》 3권 발간한다. 연말 파리에 체류하며 프랑스 작가 루콘 드 리르, 빅토르 위고 등과 알게 된다.
1857년 파리에서 네그라소프, 톨스토이, 페에토, 곤잘로프 등과 만나고 런던에서는 게르첸, 카알라일 등과 만난다. 중편 〈짝사랑〉을 쓴다.
1858년 1월 〈짝사랑〉을 발표한다.
1859년 1월 《현대인》에 《귀족의 보금자리》 발표하고 2월 모스크바 대학 부설 ‘러시아 문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된다. 가을에는 스파츠스코예 마을에 살며 장편 《그 전야》를 완성한다. 문예기금회의위원으로 선출된다.
1860년 1월 문예기금을 위한 독서회에서 〈햄릿과 돈 키호테〉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잡지 《러시아 통보》에 《그 전야》를, 《독서문고》에 중편 〈첫사랑〉을 발표한다. 《그 전야》에 관한 도브로류보프의 논문 〈그날은 언제 오느냐?〉가 《현대인》에 게재된 것을 둘러싸고 발행자 네크라소프와 충돌한다. 표절 문제(《그 전야》 속에 곤잘로프의 미발표 작품 〈벼랑〉의 유명한 대목이 인용되었다고 비난)로 곤잘로프와 절교한다. 5월부터 꼬박 1년 동안 주로 파리에서 지낸다. 11월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1861년 2월에 농노해방령이 공포되어 이 개혁을 환영한다. 5월에 귀국, 톨스토이와 언쟁을 일으켜 그 후 17년 동안 절교한다. 7월에 장편 《아버지와 아들》을 완성하고 9월에 파리로 떠난다.
1862년 3월 《러시아 통보》에 《아버지와 아들》을 발표한 후, 신·구 양 세대로부터 혹독한 공격을 받는다. 연말에 게르첸과의 서신 왕래가 위법이라 하여 32명이 고발당하고 재판을 받는다.
1863년 푸슈킨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비아르도와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한다.
1864년 1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원로원의 재판에서 32명을 위한 증언을 한다. 2월 잡지 《세기》에 단편 〈환영〉을 발표한다. 곤잘로프와 화해하고 3월에 외국으로 출발한다.
1865년 딸 폴리나가 파리에서 프랑스인 가스톤 프류엘과 결혼한다. 5월 투르게네프가 프랑스어로 산문역한 레로몬도프의 서사시 〈무치리〉가 출간된다. 장편 《연기》에 착수하고 단편 〈충분하다!〉를 발표한다.
1867년 잡지 《러시아 통보》에 《연기》를 발표한다. 니힐리스트 비평가 피사레프와 알게 된다. 피사레프에게 《연기》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7월 작가로서의 사회적 견해 차이로 도스토예프스키와 충돌한다. 장편 《연기》를 메리메의 감수 하에 프랑스어로 번역한다.
1868년 《유럽 통보》에 중편 〈여단장〉을 발표하고 〈문학적 회상〉을 집필한다.
1869년 2월 《러시아 통보》에 중편 〈불행한 여인〉을 발표한다. 4월에 《유럽통보》에 〈벨린스키의 추억〉을 발표하고 11월에 〈문학적 회상〉 발표한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난다. 6월 《유럽 통보》에 르포르타주 〈트로프맨의 사형〉을 발표한다. 8, 9월 《페테르부르크 통보》에 〈보불전쟁 통신〉을 게재한다. 10월 《유럽 통보》에 중편 〈광야의 리어 왕〉을 발표한다.
1871년 1월 《유럽 통보》에 단편 〈돈, 돈!〉을 발표한다. 3월 ‘가르바르지 당원 구명운동’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의 예술가 클럽 ‘문학과 음악 모임’에서 〈여단장〉을 낭독한다. 4월에 중편 〈춘수〉를 집필한다. 8월에 W. 스코트의 ‘성탄 백년제’ 참석을 위해 에든버러에 간다. 11월 정주할 생각으로 파리로 돌아온다.
1872년 이 한 해 동안 마지막 장편 《처녀지》 집필에 몰두한다. 1월 《유럽 통보》에 〈춘수〉를 발표한다.
1873년 장편 《처녀지》를 구상한다.
1874년 《유럽 통보》에 〈푸닌과 바브린〉을 발표하고 단편 〈살아 있는 유해〉를 써서 《사냥꾼의 수기》에 추가한다. ‘5인의 회식회’(투르게네프, 플로베르, 공쿠르, 졸라, 도데)가 시작된다.
1876년 스파츠스코예 마을에서 《처녀지》를 발표한다. 프랑스어 번역판을 동시 출간한다.
1877년 1, 2월 《유럽 통보》에 《처녀지》를 발표한다.
1878년 틈틈이 《산문 시》를 노트에 써넣는다. 톨스토이로부터 화해 편지가 온다. 여름 귀국하던 중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톨스토이를 찾아간다.
1879년 봄에 러시아로 돌아와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옥스퍼드 법학부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1880년 프랑스의 신문 《19세기》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소개한다.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푸슈킨에 관하여〉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7
아버지와 아들 13
연보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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