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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 유산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김자현 저 | 김백철, 김기연 역 | 너머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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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484 / 448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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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종합적으로 저자는 조선의 국왕이 도덕적 군주상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지만 왕이 단지 군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들어 '상호작용적인 군주상'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군주상 역시 왕좌를 차지한 사람에 따라 변화했다는 것이다. 영조 치세 중 가장 유명한 주제이자 영조의 정치와 거의 동의어가 된 탕평책에 대해 김자현 교수는 “한국학계의 탕평론은 끊임없이 유해하기만 한 붕당론에 대항하여 쓰였고, 그 붕당론은 종국에 왕조의 멸망을 이끈 타성과 혼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 종합적으로 저자는 조선의 국왕이 도덕적 군주상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지만 왕이 단지 군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들어 '상호작용적인 군주상'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군주상 역시 왕좌를 차지한 사람에 따라 변화했다는 것이다. 영조 치세 중 가장 유명한 주제이자 영조의 정치와 거의 동의어가 된 탕평책에 대해 김자현 교수는 “한국학계의 탕평론은 끊임없이 유해하기만 한 붕당론에 대항하여 쓰였고, 그 붕당론은 종국에 왕조의 멸망을 이끈 타성과 혼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차라리 영조가 붕당정치의 대안을 모색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유용할 것임을 지적한다. 또한 “사도세자는 영조의 성군상을 향한 갈망과 정당성 입증을 위한 열망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며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의 주의와 종합적인 그림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사건의 실체에 다가선다. 김자현 교수는 마르티나 도이힐러(런던대), 존 던컨(UCLA)과 함께 서구의 한국학 2세대의 선구적인 인물로 꼽힌다. 중국과 조선의 비교, 사료의 발굴과 활용, 시공을 넘나드는 빼어난 수사력 등 이 책이 지닌 장점은 이화여대에서 영문학, 미시간대에서 중국문학, 컬럼비아대에서 한국역사를 전공한 공부 이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서구 한국학 연구의 입문서로 유명하다. 미스코리아 한국일보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향년 69세로 별세했다. 최근에 나온 유고집으로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2016 컬럼비아대출판부, 2018 너머북스 출간예정) 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군주상과 왕권 조선시대 국왕의 권위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이상적인 유교적 군주상의 수사에 기초했다. 성인군주의 개념과 수사를 공유했던 중국의 황제가 천자(天子)로서 거의 신화적 영역에 봉인된 가운데 아무런 제재 없이 스스로 성인군주라는 수사를 자신의 이미지에 이용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왕들은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천자도 아니었고 제국의 통치자도 아니었다. 환관이나 종친, 외척 등의 친위부대도 없었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 인민들의 대표일 뿐이었다. 중국의 천자와 조선의 국왕을 비교하는 저자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성스러운 수사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고 본다. 관료 사대부 또한 권력 기반과 함께 유교적 유산에 대한 고유의 주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이 영조처럼 성군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왕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더 높은 도덕적 기대 수준을 충족해야했다. 저자는 왕과 관료의 치열한 경쟁이 적어도 668년 신라의 통일부터 한국의 정치형태로 특징지어졌지만 유교혁명이었던 조선왕조 개창 이래 16세기 조정의 유교화와 더불어 최소한 수사적으로는 도덕적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었다고 말한다. 양측은 유교적 기준 아래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다. 통치자에 대한 관료의 충성은 여전히 강조된 반면에 왕의 도덕적 조언자로서 그들의 조언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숙종 초부터 경종 말까지 50년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정치적 갈등의 시기로 영조가 물려받은 '왕이라는 유산'은 그야말로 취약했고 더욱이 영조의 출생이라는 정통성의 결함과 경종 시해 혐의 앞에서 왕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찾도록 하였다. 그 대안이 곧 도덕적 군주상의 수사였고 영조의 성학 추구가 만들어진 배경이었다. 전통과 최고위 사제이자 위대한 도학자, 그리고 전범(典範) 영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덕치’에 관한 레토릭 밖에 없었다. 성학을 추구하는 정신,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진정한 헌신을 강조하는 수사를 주도면밀하게 고수하는 것이 영조의 이미지 구축 방식이었다. 도덕적 권위가 가지는 힘은 관료 사대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붕당 간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조차 반대 붕당의 일원에 대한 사적인 암살 기도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단적인 사례처럼 이는 유교 왕정의 정치 문화였다. 그러나 덕치로 이뤄지는 선정은 군주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관료들도 인정해야만 했다. 영조는 최고위 사제이자 위대한 도학자, 그리고 전범(典範)이었다. 의례 준수는 영조를 하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이자 왕조의 통치권을 전수하는 사람으로 상징화함으로써 그에게 유교적 군주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가장 중요한 의례는 제례였다. 영조는 자연 신보다는 역사와 관련된 제례에 관심을 더 두었다. 의례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잠재적 손익을 확실히 파악했던 것이다. 청과 관련된 필수 의례를 엄수할 때 영조는 치밀하고 정확하게 대처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대보단에 명의 홍무제와 숭정제의 합사를 관철시키면서 당시 절대 선과 같았던 재조지은을 이용해 조선 왕실을 명의 상징적 계승자이자 문명의 수호자로서의 위치를 관료들에게 각인시켰다. 명과 청에 관한 위신과 권력의 상징 사용을 왕의 특권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영조는 중국에서 제공한 모든 기회를 향유했지만, 중국의 계보에서 벗어나 있는 토착왕조의 태곳적 시조 즉, 단군, 기자와 삼국의 시조 등에 제사를 지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정통을 이은 신라와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였다. 조선의 독립적이고 내적인 정통성의 상징을 찾는 데 여전히 상당히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특별한 존숭을 표했지만 선대 20명의 왕들 중 선조, 인조, 효종을 특별히 예우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이 모두 성인이 되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왕좌에 올랐으며, 자신도 그러한 의례의 전통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신료들의 많은 반대에도 사친인 숙빈 최씨를 왕비에 준하는 위치까지 추숭할 수 있었다. 사친에 대한 추승은 영조의 출신상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경연에서 왕의 역할은 잠정적으로 이중적이었다. 왕은 학생이었지만 스승도 고전에 관한 한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학문적으로 스승과 경쟁할 수 있었다. 국왕의 스승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임금과 국정을 함께 운영하는 신하였다. 경연에서 누가 더 성인을 잘 이해했는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관료들이 알아챌 때쯤엔 영조는 이미 그 경기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 관료들은 시작할 때에 우세했으나 후반전에는 단지 구경꾼으로 조연을 맡았을 뿐이었다. 재위 20년부터 영조는 학생에서 군사(君師), 즉 임금이자 스승으로 탈바꿈했고, 30년부터는 스스로 성인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영조는 유교적 군주에게 부여된 도덕적 요구를 감수함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결국 영조는 성인군주를 추구하는 데 자기 생애를 바쳤는데, 이는 한 인간으로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했는지에 따른 것이기에 영조가 성학을 추구한 것은 그의 사고방식이자 동시에 시대정신이었다. 유교적 통치의 수사, 영조의 군부일체론 최고위사제, 학자, 전범(典範)과 같은 다양한 역할의 주된 목표는 현실적인 정책 시행에서 관료들에게 도덕적 우월성을 세우는 데 있었다. 이 책은 영조가 사회정책을 시행하는 데 유교적 통치의 수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조가 판단하기에 양역변통(균역법)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양반은 양역(良役)에서 면제되었는데, 이것이 국가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에게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양역문제는 양반이 단순히 면세되었을 뿐 아니라 면세층의 절대적인 숫자와 인구 중 비율이 모두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에게 세제개혁

저자 소개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전공은 조선시대 법사학 및 정치사상이다.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한신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국민대학교·한국전통문화대학교대학원 강사, 전북대학교 HK교수 등을 거쳐,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 조선전기 국법체계 형성사󰡕,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속대전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 󰡔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 󰡔영조: 민국을 꿈꾼 탕평군주󰡕,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이 있고, 공저로󰡔규장각소장 왕실자료 해제・해설집󰡕3・4, 󰡔국왕, 의례, 정치󰡕,󰡔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상・하, 󰡔영조대왕 자료집󰡕1, 󰡔규장각󰡕, 󰡔18세기: 왕의 귀환󰡕이 있다.


 


이화여대 영문학부를 졸업했고, 미시간대에서 중국문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 교수를 거쳐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를 지냈다. 2011년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대표 저서로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한 A Heritage of Kings: One Man’s Monarchy in the Confucian World(컬럼비아대 출판부, 1988, 보급판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2001)가 있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영역(캘리포니아대출판부, 1996)으로 1997년 문예진흥원의 제3회 한국문학번역상을 받았다. 최근 유고집으로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컬럼비아대출판부, 2016)이 나왔다.

역자 소개

  • 역자 : 김백철, 김기연
김백철
부산대 사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 대표 저서로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속대전』의 편찬과 백성의 재인식』(2010), 『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2014),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 조선전기 국법체계 형성사』(2016),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 조선후기 국법체계 재구축사』(2016) 등이 있다.
옮긴이 김기연 서울여대 사학과 및 국제학과 문학사.

머리말

지은이의 말

"사도세자는 영조의 성군상을 향한 갈망과 정당성 입증의 열망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었다. 자신의 굴욕을 되갚아주는 사적인 아들이자, 공적인 왕위계승자인 동시에 미래의 성인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이 상충되는 요구는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통해 탈출구를 찾도록 이끌었지만, 사도세자는 그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서

그러면 영조가 효제에 관심을 표한 것은 어떤 의미였는가? 이것은 연로한 군주의 웅얼거림이 아니었다. 효제에는 다양한 측면이 내재했다. 일정한 단계에서 최악의 의심을 샀던 자신과 경종에 대한 관계를 분명히 언급한다. 유교 왕정에서 선왕에 대한 효와 충의 중요성을 고려해보면 황형 시해 혐의에 대해 영조가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자신의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된 이 혐의에 맞서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면 통치할 수 없다고 느낀 것은 당연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일상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왕이 맞서야 할 붕당과 연루혐의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조가 무엇을 하려고 선택하든 간에 황형과 선왕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는 유용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충忠은 주로 부왕에게 있었으므로 효제의 명분 아래에서 경종의 대신들을 사후 처벌하고 영조의 결백을 주장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영조가 한다면 황형에게 효제를 다하지 못한다고 비춰질 수 있었으나, 사도세자가 한다면 부왕에게 효를 다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효는 영조의 효제를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영조는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해주기를 강요할 수 없었으나, 통치자의 미덕을 강요할 수는 있었다. 또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유교적 군주인 영조는 덕치를 바랐고 세자를 덕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적인 아들은 공적으로 사적인 사람[아버지]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영조 마음속에는 사도세자가 부왕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한 행동으로 공적인 사람으로서 사도세자의 덕성을 확실히 시험할 수 있었고, 이것이 영조의 지속적인 딜레마dilemma에도 완벽한 해결책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사도세자가 부왕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이것은 완벽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조의 하교는 언제나 희망에 차서 효제로 계속 회귀했다. 부왕이 사도세자에게 질문할 때면, 어김없이 효제를 물었다. 그리고 영조는 역사적 일화나 자신이 쓴 글 또는 효의 귀감인 성군 순임금 등을 언급할 때마다 사도세자에게 효제를 말했다. 효제를 통한 정당성 입증은 부왕이 아들에게 바란 주요한 것이자 아마도 유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부왕이 가슴에 품은 뜻을 이해했는지 보여주지 못했다. 세자는 부왕이 끊임없이 효제를 언급하는 것에 혼란스러웠고, 점점 더 부왕을 만족시킬 수 없음에 좌절했던 듯하다. 심지어 세자가 부왕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의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확인할 수단도, 시험할 용기도 없었다. 본문 261~262쪽

목차

보급판 서문
인사말
범례
역자 범례
서설
1장 조선왕조의 유교적 군주상과 왕권
성인군주의 이상理想
조선왕조의 권위
2장 영조의 치세: 성군상聖君像
중흥
최고위 사제
육상궁毓祥宮의 제례관
위대한 도학자
위대한 전범典範
3장 영조의 통치: 군부일체君父一體
정부 정책과 18세기 조선 사회
양역良役
양역변통과 영조의 군부일체론
4장 영조의 조정: 장엄한 조화[蕩平]
왜 탕평인가
붕당정치에 대한 환멸
탕평책의 탄생
무신란戊申亂
탕평정치
반란의 그림자
“과인이 곧 국가다”
출구 모색
세 명의 충직한 신하
5장 영조의 비극: 사도세자
뒤주대왕
영원한 희망, 요람의 희망
창덕궁의 두 조정
효제, 물거품이 된 희망
“나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 환수
도피
실록
세자빈 홍씨의 『한중록』
「이광현일기」
사도세자思悼世子
뒤에 남은 것들
부록
1. 조선 왕실 계보
2. 붕당 발전 경과표
3. 영조·숙종 경연 교육과정
4. 다양한 자료의 사료적 검토와 평가
주
참고문헌
역자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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