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998.
장혁주는 1905년 10월 7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구(舊) 한국군 장교였던 장두화의 서자로 태어났다. 출생과 관련된 생래적 열등의식은 그의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구고보 3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인 언사를 문제 삼아 돌입한 동맹휴학에 참가해 무기정학을 당했다가 10월경에 복학하는 사건이 있었다. 1927년경부터 소설에 뜻을 두어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교원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어 작품을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투고했지만 몰수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일본어 창작에 비중을 두게 된다.
1930년 일본 잡지 ≪대지에 서다≫에 일본어 단편 <백양목(白楊木)>을 게재했다. 또 1932년에는 ≪개조≫지의 소설 현상 모집에 <아귀도(餓鬼道)>가 2등으로 입선했다. 이후 조선어 장편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등을 발표했고 일본어 소설 <형의 다리를 자른 남자>, <권이라는 사나이>, <쫓기는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5월 무렵에는 소설가 백신애와 사귀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발각되어 6월 하순에 도쿄로 건너가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하숙집 주인의 친척인 노구치 하나코[통명(通名)은 게이코(桂子)]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고 나가노현 가미스와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1939년 2월 장혁주의 친일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을 발표하고 대륙개척문예간화회가 발족하자 이에 참가했으며, 6월에는 척무성 산하 대륙개척문예간화회에서 파견한 제2차 펜부대에 참가해 3개월간 만주 등을 시찰했다.
일제의 패전 이후 장혁주는 자신의 친일 행적에서 기인한 부담감으로 인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1952년 10월 일본에 귀화를 신청하고 창씨명이던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를 일본인 이름으로 등록했다. 이때부터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라는 필명을 사용해 재일 조선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단편 <협박>(1953년), 한국전쟁을 그려낸 ≪무궁화(無窮花)≫(1954년), 자전적 소설 ≪편력의 조서≫(1954년)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98년 뇌혈전으로 사망했다.
아키타 현에서 태어났고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중퇴했다. 잡지 기자로 일하다가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주로 사회 문제를 주제로 시대의 물결에 시달리는 인간의 삶을 여실히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 1935년에 남미 이민 문제를 다룬 소설 《창맹》을 발표해 제 1회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인간의 벽》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1년 8개월 동안 사가 현 교사들의 휴가 투쟁을 소재로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작품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데만 8개월을 쏟았다. 교육 관련 법률을 공부하고 전국에서 열리는 교육 연구 집회에 참여하고 사가 현, 가나자와, 오사카 등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교사들의 모습과 고민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교사들 사이에서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1980년대 교육운동이 치열하던 때 교사들에게 필독서로 읽혔다. 이 책 외에 대표 작품으로는 《금환식》《살아 있는 군대》《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시카와 다쓰조 작품집》(전 25권)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