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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고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고백

신창호 저 | 추수밭 | 201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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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5400449 / 256쪽 152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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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정약용은 왜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야 했을까? 정약용은 무덤 속에 묻었던 글에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다산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인생을 정리한 글, 자찬묘지명 정약용의 마지막 고백으로 그와 정조의 시대, 그리고 그의 삶에 다가가다 출판사 서평 허름한 방에 초로의 사내가 앉아 있다. 한때 그는 어디서든 중심에 서 있는 게 당연했다. 한국에서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철학자였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올린 공학자였다. 마흔에 이미 국무총리까지 지낸 유능한 관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빛나던 ... 정약용은 왜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야 했을까? 정약용은 무덤 속에 묻었던 글에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다산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인생을 정리한 글, 자찬묘지명 정약용의 마지막 고백으로 그와 정조의 시대, 그리고 그의 삶에 다가가다 출판사 서평 허름한 방에 초로의 사내가 앉아 있다. 한때 그는 어디서든 중심에 서 있는 게 당연했다. 한국에서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철학자였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올린 공학자였다. 마흔에 이미 국무총리까지 지낸 유능한 관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빛나던 순간은 찰나와 같았고, 추락은 길었다. 그는 이십 년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다음에야 세상으로 돌아왔다. 갇혀 지낸 생을 꼽아보니 삶의 3분의 1이나 차지했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많아진 그는 더 이상 천재도 무엇도 아니었다. 다시 만난 바깥 또한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젊은 사자와 같았던 동지들은 옛사람으로 사라졌다. 과거는 마치 어제와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육십이다. 환갑을 맞았지만 감히 자신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 기념되리라 기대하지 못 한다. 대신 그는 낡은 정장 차림으로 홀로 앉아 오래된 카메라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환갑을 맞아 자신의 영정을 스스로 촬영하고자 한다. 그는 그 기록에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정약용이 남긴 자신의 삶, 〈자찬묘지명〉 대중교양서로 최초 소개! 《정약용의 고해》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지금 여기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새로 풀어쓴 결과입니다. 〈자찬묘지명〉이란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으로, 정약용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글입니다. 그동안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독자들이 다가갈 수 없는 전문서나 또는 여러 유언/묘지명을 엮은 책에 요약되어 공개된 게 전부였습니다. 《정약용의 고해》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가운데 집중본을 대중교양서로서 최초로 소개하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정약용 지음 신창호 옮김’으로 표기해야 하나 이 책은 ‘신창호 지음’으로만 설명됩니다. 선비가 쓰는 글의 참뜻은 글줄이 아니라 행간에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자찬묘지명〉을 충실히 번역하고자 시작된 글은 한 선비가 죽음을 직시하는 순간까지 행간에 감춰뒀던 말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지은이와 옮긴이의 목소리가 겹쳐지게 되었습니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에 이른 정약용의 고백에 저자가 동화된 것입니다. 그만큼 정약용이 직접 들려주는 그의 삶은 굴곡지고 먹먹했지만, 누구나 깊이 공감할 만한 생의 절절함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또 다른 정약용들을 위해 정약용이 남긴 고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연민한다” 고해苦海에서 고해告解하다 그래도 우리는 정약용을 모른다 정약용은 익숙한 이름입니다. ‘다산학’이라고 지칭되는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유학자이자, 성호 이익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실학자입니다. 화성 축조에 참여한 공학자였고, 정조에게 상방검을 받은 비밀공작원이기도 했습니다. 법의학자이자 수사관이었으며, 40대에 이미 정승에까지 오른 관료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배교자로, 혹은 독실한 천주교도로 엇갈리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는 격정이자 혼돈이었으며, 18세기 조선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중문화에서 수없이 변주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조선의 셜록 홈즈로 그려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정약용’들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저술은 대부분 말년에 이룬 성취입니다. 정약용은 일흔다섯 해를 살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정약용의 얼굴은 30대, 정조와 함께 활동했던 극히 짧은 시기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조차 중년 무렵에 이뤄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정약용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집니다.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네 얼굴이 있습니다. 강퍅한 인상을 가진 작자 미상의 초상, 무속적 색채가 짙은 초의선사가 그린 초상, 단아한 인상의 장우성 화백 표준 영정, 신지식인과 같은 모습의 김호석 화백 새 영정입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신이 외가의 피를 진하게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외조부는 우리에게 귀기 서린 초상으로 알려진 윤두서입니다. 실제로 그는 20년 가까운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정도의 강골이었습니다. 어쩌면 정약용은 상상과는 다르게 선이 굵은 인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지는 올해(2016년)로 세 갑자(18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천 년 전 사람인 것처럼 자신이 남긴 수많은 흔적들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문제적 인간’이고, 수다쟁이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우리는 그의 삶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다행히 정약용은 회갑을 맞아 자신의 고해와 같은 삶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리해 남겼습니다. 《자찬묘지명》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정약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약용은 왜 자찬묘지명을 썼을까? ‘자찬묘지명’은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을 가리킵니다. 묘지명은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써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은 묘합니다. 자서전도, 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합니다. 예부터 선비들은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자 할 때 죽음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다스렸습니다. 그럼에도 ‘자찬묘지명’이 마치 정약용의 글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그의 개인사가 곧 18세기 조선사를 관통하기 때문이고, 그의 자찬묘지명 자체가 가진 독특함이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속삭이듯 써내려간 솔직함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리에서조차 끝내 삼켜야 했던 말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들 사이에서 맴도는 번민까지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썼던 다른 선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의 처지일 것입니다. 환갑에 이르러서야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를 다독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묘지명을 기대하는 것도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그는 환갑잔치 대신 자신의 영정을 셀카로 찍는 초로의 노인과 같았습니다. 정약용은 어떤 심정으로 스스로의 묘지명을 적어 내려갔을까요. 고해를 건너는 생의 독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호는 ‘다산’입니다. 강진에서 그가 거했던 곳의 이름 또한 다산초당이지요. 그러나 얄궂게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는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이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만 짧게 언급되었습니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썼을 때가 예순이었으니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글에서 무심한 척 그때를 흘려보냅니다. 대신 아주 짧은 기간이었던 정조와의 교류를 비중 있게 다룹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예뻤던 그때를 수없이 반추하며 모진 시절을 버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의 학문을 일컬어 ‘다산’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바탕이 된 저술들을 묶은 다음 정약용 스스로는 ‘여유당’전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정약용을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할까요. 정약용은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자찬묘지명》에는 간접적으로 그 심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지은 호인 여유당은 《도덕경》에 나온 “여혜與兮, 약동섭천若冬涉川, 유혜猶兮, 약외사린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 겨울에 살얼음 냇가를 건너듯 삼가하고 두려워

저자 소개

고전학자이자 교육학자. 고려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사서四書의 수양론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중용中庸의 교육론을 연구했다.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에서 후학들에게 한국 교육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고려대학교 입학사정관실장, 교양교육실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고전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되짚어보고 지금 여기에 적용하려는 저술 작업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극소수만이 누리는 박제된 영역이 아니라 일상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인문학이라는 화두를 고민하며,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동양고전특강을 비롯해 각종 시민대학과 자유교양 강좌 등에서 고전과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주요 학력 및 경력
고려대학교 학사(교육학·철학) /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철학) /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Ph.D, 교육사철학) 
고려대학교 입학사정관실장/교양교육실장/교육문제연구소장/평생교육원장 
한국교육사학회 편집위원장 /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장 / 한중철학회 회장 


주요 저서 및 역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배려의 철학을 위하여』 『교육과 학습』 『함양과 체찰』 『대학』 유교의 지도자 철학』 『유교 사서의 배움론』 『유교의 교육학 체계』 『민주적 삶을 위한 교육철학』 『논어의 지평』 『정약용의 고해』 『정조 책문』 『한국교육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1,2)』 『네오 에듀필로소피』 『진시황평전』(역) 『공자평전』(역) 『노자평전(공역) 『관자』(공역) 『한글 논어』(역) 『한글 맹자』(역) 『한글 중용·대학』(역) 『주역절중』(공역) 『논어집주상설』(공역) 『대학장구상설』(공역) 외 다수


 

책 속에서

《도덕경》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풀이된다. 허나 어느 《도덕경》이라도 첫머리는 ‘선비[士]’와 인간의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선비로서 나를 정돈하기 위해 호를 지으면서 그것에 스스로를 투영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갔던 삶과, 내가 가려 했던 삶에 대해 반추한다. _살얼음 위를 걸었던 삶 중에서.

이에 나는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차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으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는 도구였다. (중략) 드디어 수원 화성이 만들어졌다. 임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행히도 기중가를 쓸 수 있어 4만 냥이나 줄였구나.” _임금께 화성을 올리다 중에서

봉은사에서 경전을 읽으며 과거 공부를 하던 시절이니 돌이켜보면 아련하다. 자부 이승훈은 황인점의 서장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 여행은 열렬히 천주교를 연구하던 이벽과 셋째형 약종, 그리고 나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북경으로 떠나기 전에 이벽은 자부를 찾아가 간절히 부탁했다._이승훈을 소개하다 중에서

임금께서 앉아 계신 바로 앞에서 붓을 뽑자, 땅이 평평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계신 자리 위에 시축을 올려놓고 쓰도록 명하셨다.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 하자, 여러 번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셨다. 할 수 없이 임금께서 거하시던 자리로 나아가 붓을 휘둘렀다. 임금께서는 가까이 보시고는, “잘 쓴다!”라고 칭찬하셨다. 내가 임금께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와 같이 넘치게 받았다.
(중략) 그날 (귀양을 떠나는 내게) 이렇게 이르셨다. “길을 떠나는 순간부터 다시 살아서 한강을 넘어올 방도를 모색하도록 하라.”_꽃이 피었던 어느 날을 돌아보다 중에서


내가 조용히 나아가 말했다. “신근봉臣謹封이라고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자 채제공이 눈짓으로 주의를 주며, 함부로 말하지 말도록 눈치를 줬다. 이때 민종현과 심이지가 바로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써야 하는가.”
내가 대답했다. “(중략) 지금 우리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옥책 등을 만들어 대전大殿에 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대전은 그 효성으로 태비와 태빈께 바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대전에게 어떻게 신이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채제공이 가만히 듣더니 “아주 좋다”고 말했다._임금께서 아버지의 휘호를 올리다 중에서

“전하실 말씀을 하실 때에 안색이 몹시 그리워하고, 말씀하시는 뜻 이 따스하고 정성스러웠는데, 좀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서리가 나간 뒤 마음이 울컥하고 편하지 못 했다.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옥체가 편하지 않았다.
6월 28일,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바로 그날 밤에도 서리를 보내 서 적을 하사하시며 이것저것 물으셨는데, 그것이 영원한 작별이 되었다. _하늘이 무너지다 중에서

나에게 닥칠 화색禍色이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날로 사정은 급해졌다. 처자식을 고향마을 마현리로 돌려보내고, 홀로 한양에 머물면서 시세를 살피고 있었다. 겨울에 임금의 상복을 마친 뒤에는 한강 가의 소내로 아주 돌아왔다._유배의 여명 중에서

하루는 시름에 젖어 있는데 꿈에서 노스승이 이렇게 꾸짖었다. “소무蘇武는 19년 동안 참았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고통도 참지 못하는가?” (중략) 감옥에 있었던 날을 계산해보니 19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감옥살이와 귀양살이 한 날을 계산해 보니 또 19년이었다. 그러니 인생에서 막힘과 트임이 정해진 삶이 없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리고는 드디어 혼연히 기꺼워했다_ 유배 이후, 회상의 길목에서 중에서

춘추시대에는 상을 당했을 때 그 기간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예司隷(224~284)가 은나라 고종이 아버지 소을小乙의 상을 치르면서 오두막에서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두고, 천자가 상을 치르는 집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그 기간을 짧게 하려는 잘못을 저질렀다. 말은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_ 나는 춘추를 이렇게 읽었다 중에서

나는 《목민심서》를 통해 목민관을 옹호하거나 관청의 입장에서 지방 행정의 원리를 논의하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보다도 백성의 편 에 서서 목민관이나 관청의 횡포, 부정부패 등에 대해 폭로하고 고발 하며 탄핵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호소했을 따름이다. _백성을 아끼고 섬기기 위한 실천, 목민심서 중에서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돌아본 지금, 다시 나를 고백한다. 나는 건륭 연간 임오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도광 연간 임오년을 다시 만났다. 나는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고자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나아가고자 한다. _다시, 나 정약용 중에서

 

 

목차

목차
머리말 정약용의 고해를 열며
1부 나 선비의 아들 열수
나의 죽음 이후를 쓰다
살얼음 위를 걸었던 삶
나의 뿌리와 이파리
내가 딛고 서 있는 터전
나의 학문이 시작된 때
성호를 좇다 | 이가환을? 그리다 | 이승훈을 소개하다
나의 벗, 나의 성균관
중용을 고민하다 | 다시 중용을 고민하다 | 나는 유학을 공부했다
2부 나 임금의 신하 약용
나의 임금을 받들다
임금께서 시험하시다 | 옥사에 휘말리다 | 임금께 인재를 추천하다 | 나의 벗, 나의 적 이기경
나의 아버지를 여의고, 나의 임금을 받들고
임금께 화성을 올리다 | 임금께서 아버지를 받들다 | 임금의 눈과 귀가 되다 | 임금께서 아버지의 휘호를 올리다 | 임금께 상소를 올리지 못 하다 | 임금께 넘치는 은혜를 받다 | 꽃이 피었던 어느 날을 돌아보다 | 임금께서 상방검을 내리시다
천주교와 마주하다
조선에 온 주문모 | 거듭된 천주교 박해 |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좌천되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은을 받다
임금께 책을 올리다 | 백성을 기르고 폐단을 막다 | 역병을 통해 앞날을 내다보다 | 교화와 형정 으로 다스리다 | 소인배들의 시기를 받다
하늘이 무너지다
3부 당신 유배지로 떠난 다산
유배의 여명
새 임금께서 오시다 | 거듭 누명을 쓰다
유배의 시작
유배, 강진 시절
유배지에서 이 땅의 근간을 궁리하다
육향의 제도 | 사람을 가르치는 세 가지, 향삼물 | 현실에 적용되는 여섯 가지 공부
유배 이후, 회상의 길목에서
4부 나 유학자 여유당
내 사유의 흔적
나는 시경을 이렇게 읽었다
시경의 핵심과 작법, 육의 | 올바름의 갈구, 시 | 지도자에게 보내는 간절한 호소, 오성과 육률
나는 서경을 이렇게 읽었다
위작을 밝히다 | 삶에 대한 기준, 홍범 | 홍범의 아홉 가지 규범 | 제왕의 법칙, 황극
나는 역경을 이렇게 읽었다
미래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 역을 다시 해석하다
나는 예기를 이렇게 읽었다
떠난 이를 기리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법
나는 악경을 이렇게 읽었다
오성과 팔음 | 악을 다시 해석하다
나는 춘추를 이렇게 읽었다
하늘을 받들고 본받다, 춘추의 도 | 춘추를 다시 해석하다
나는 논어를 이렇게 읽었다
구체적인 일상의 말, 논어 | 예에서 인으로, 논어의 영향 | 논어를 다시 해석하다
나는 맹자를 이렇게 읽었다
타고난 덕의 배양, 왕도 | 맹자를 다시 해석하다
나는 중용을 이렇게 읽었다
충실한 삶의 실천, 중용 | 중용을 다시 해석하다
나는 대학을 이렇게 읽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대학 | 대학을 다시 해석하다 |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 인의 실천
나는 이렇게 써왔다
보다 나은 나라를 위한 실천, 경세유표
백성을 아끼고 섬기기 위한 실천, 목민심서
억울한 사연을 살피기 위한 실천, 흠흠신서
나는 다만 이렇게 써왔다
종장 다시 나, 정약용
정약용 〈자찬묘지명〉 원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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