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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5115398 / 424쪽 147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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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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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공주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는 흥미, 재미에 가까웠다. “그러니 저와 거래를 하셨으면 합니다. 공주님께서 제자가 되시면 저도 폐하께 삽량의 일을 영원히 함구하겠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이화가 얼굴을 한층 가까이 붙였다. 청아한 사내의 얼굴이 숙명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몸 안에 천둥번개를 담은 양 그녀의 가슴속이 우르르 흔들렸다. “안 믿으면 어쩔 건가요?” 나긋나긋한 권태 뒤에 숨겨졌던 새로운 모습.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면면에 숙명은 적응이 어려웠다. “좋아. 그... “공주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는 흥미, 재미에 가까웠다. “그러니 저와 거래를 하셨으면 합니다. 공주님께서 제자가 되시면 저도 폐하께 삽량의 일을 영원히 함구하겠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이화가 얼굴을 한층 가까이 붙였다. 청아한 사내의 얼굴이 숙명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몸 안에 천둥번개를 담은 양 그녀의 가슴속이 우르르 흔들렸다. “안 믿으면 어쩔 건가요?” 나긋나긋한 권태 뒤에 숨겨졌던 새로운 모습.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면면에 숙명은 적응이 어려웠다. “좋아. 그리 하지. 널 스승으로 삼겠다.” 말로는 제자가 되겠다 하지만 공주의 눈빛은 반항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여태 여러 번 만났으나 두 사람 다 제대로 서로를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충격적인 첫 만남에서부터 스승과 제자로 마주하기까지, 우여곡절에 휘둘린 연이 질기다면 참으로 질겼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주.” 책속으로 추가 휘영청한 달빛이 소녀를 비추었다. 진주처럼 은은하게 광을 뿜는 피부에 바람결에 쓸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신비하게 대조되었다. 비록 독이 바짝 오르긴 했지만 옥진 같은 눈망울에 작고 동그란 코, 붉고 도톰한 입술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달빛은 분명 고루고루 세상을 비추고 있을 터인데도 오직 소녀만이 달의 연모를 받는 것 같았다. 월하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처럼, 참으로 어여쁘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신경 끄고, 계집놀음이나 잘하다가 꺼져!” 헌데 그 속은 천하에 막돼먹은 망나니라도 든 듯하니……. 소녀의 커다란 간극이 이화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상관있지. 신경을 끌 것이었으면 뭣 하러 내가 기생집에 여인을 들였겠소?” “여기 들어가게 해 줬다고 이 몸이 너한테 절이라도 해야 해? 사사건건 보고라도 해야……, 가만.” 숙명이 마뜩잖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지금 그 말은, 내가 흑립을 쓰고 있을 때부터 이미 여자란 걸 알았단 말이야? 어떻게?” “변장은 그럭저럭 잘한 것 같소. 내 친우처럼 여인을 멀리하고 불전에만 파고드는 사내는 물론이고, 고두기도 속였고, 심지어 같은 여성인 기녀들도 깜빡 속아들었으니 말이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고, 넌.” “뭐, 하필 상대가 본인이라서?” 이화가 부채로 자신을 콕 찍었다. 눈썰미가 걸출하고 여성을 잘 아는 자신으로선 모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숙명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독기 대신 호기심이 눈동자에 오르자 그제야 한결 보기가 흐뭇하였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날 선 목소리로 소녀가 따지고 들었다. “그렇담 너, 여인인 걸 알면서 왜 날 기루에 들인 거야?” “취향을 존중해서.” “취햐앙?” “여성의 몸으로 기생집에 들어오고 싶어하기에.” 이화가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동성에게 대접받는 걸 즐기는 줄 알았지. 밴대질(여성끼리의 성행위)하려던 거 아닌가?” 숙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는 결코 추워서도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순수한 분노가 그녀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저 사내, 기생오라비 자식은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부채나 흔들어대고 앉았다. 숙명의 어깨가 강하게 떨렸다. 일국의 공주인 자신에게, 가까운 미래 태자를 생산해 낼 자신에게 이 무슨 모욕이란 말인가! 숙명은 할 말조차 잊고 머릿속의 생각을 새하얗게 태워 버렸다.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저 음란한 기생오라비는 분명히 수위를 넘어섰다. 숙명이 어금니를 콱 깨물고 말없이 서 있자, 이화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는 숙명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라도 난 듯 몸을 떨자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숙명의 이마에 손을 대며 부채의 방향을 틀어 소녀의 얼굴에 바람을 일으켜 보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팔랑이는 부채는 열을 식히기는커녕 오히려 숙명의 분노에 더욱 강한 불길을 일으켰다. 모욕감에 치를 떨던 소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이화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가 터지면서 숙명의 정신이 돌아오고 교체라도 되듯이 이화의 얼이 빠졌다. 숙명은 이것으로도 분통이 다스려지지 않아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허나 그 순간, 이화의 새하얀 얼굴에서 핏방울이 툭 터져 나온다. 그녀의 손톱이 그의 백옥 같은 피부를 찢어 버렸던 것이다. 핏물이 그의 볼에서 흐른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었지만 차마 그 뺨에 또 손을 휘두를 자신은 없었기에, 숙명은 손을 내렸다. “이,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 할퀴지만 않았어도 세 대는 더 때렸을 거야.” 예상보다 생채기가 더욱 커서 숙명은 말을 더듬었다. 저 곱상한 얼굴에 흉이 질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총총 빠르게 걷는 걸음이 죄책감에서 소녀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화는 팩 토라져서 모퉁이를 도는 소녀를 보며 탄식과 비슷한 소리를 뱉었다. “성질머리하곤.” 그가 상처 입은 제 볼을 감쌌다. 후끈후끈한 것이 손맛이 어지간히도 매웠다. 하! 숨이 토해졌다. 그러고는 곧. “하하…….” 어이가 없어서인지 공허한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화는 찬바람을 맞으며 골목에 덩그러니 섰다. 그러다 풉! 왜인지 모르겠지만 실없이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시원한 웃음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터진 웃음보를 수습하지 못하였다.
서라벌 높은 곳
아름다운 님의 개꽃.
붉은빛 아름다우나
먹을 수 없는 꽃.
삽량의 달빛 아래
어여쁜 참꽃.
그 다디단 맛에는
나비도 벌도 취하고야 말지.
꽃 중의 꽃은 참꽃.
꽃 중의 꽃은 참꽃이라네!
“너, 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아이지?”
상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가녀렸지만 아이에게 그런 것을 가늠할 여유는 없었다. 금동은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천녀관의 깨동이잖아! 형이 찰덕인지 찰떡인지 하는 놈이고!”
‘놈’ 자에 금동의 머리털이 바짝 섰다.
“우리 형, 욕하지 마!”
“꼴에 발끈한단 말이지? 남은 갖다가 먹느니 못 먹느니 개소리를 지껄여 놓곤 제 형을 욕하니 성이 나나 봐? 눈물 나는 우애네! 촌닭들끼리.”
“우리 형 촌닭 아니야! 우리 형은, 형은! 화랑도가 될 사람이야!”
금동은 형과 화랑도를 부러 힘주어 발음하였다. 그 자부심이 숙명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그녀는 더더욱 이를 갈았다.
“아니지, 낭도 사환이나 하다가 시골 촌부로 늙어 죽겠지.”
“아니야! 약속해 줬단 말이야! 높은 화랑이 약속해 줬단 말이야! 우리 형, 꼭 낭도로 데려가 준다고 했어!”
“화랑이 예까지 내려와서 약조를 해 줬다고? 꿈은 잘 때나 꾸고 노래를 알려 준 이가 누군지 그것부터 말해! 여인이었지? 그렇지?”
“약속했으니까 말 안 해 줄 거야, 이 못생긴 되야지야!”
금동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별 의미 없이 그저 제 기준에서 가장 나쁜 말을 입에 올린 것이었겠지만 숙명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되야지? 못생긴 되야지?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천것이!”
세상의 온갖 귀한 수식으로 칭송받았던 공주는 난생처음 겪는 치욕스런 지칭에 노기 띤 눈을 부라렸다. 숙명에게 금동은 나이의 높낮이 이전에 감히 자신과 눈도 마주쳐선 안 될 아랫사람이었다. 골품의 경계가 분명한 한, 아이건 어른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숙명은 성큼성큼 금동에게 다가갔다. 범상치 않은 기세에 금동이 뒷걸음질 쳤으나 독안에 든 쥐였다. 숙명이 한 손으로 아이의 멱살을 틀어잡고 다른 한 손을 높이 올렸다. 언제 팔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하나를 손보는 건 아무런 일도 아니다. 허니 어서 너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준 이가 누구인지, 그걸 밝히거라. 사도이냐, 옥진이냐? 어쨌건 대원신통의 사람이겠지?”
숙명의 목소리는 위엄을 넘어서서 퍽 고압적이었다. 금동은 겁먹었지만, 보통의 아이와는 정반대로 그 무서움을 극복하려 했다.
“그게 뭐야! 그런 거 난 몰라! 되야지야! 이거 놔! 놓으라고!”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내저었다. 강하게 버둥대면 버둥댈수록 금동을 잡은 숙명의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이는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날 수 없자, 발길질마저 시도하였다.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국에 제 정강이가 걷어차이자 숙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었다.
찰싹!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금동의 움직임이 멎었고 숙명 또한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소리는 분명 살 부대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볼과 소녀의 손바닥이 아니라, 사내의 손바닥과 소녀의 손목이 내는 소리였다.
“귀공,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이화는 제법 단호한 태도로 숙명의 손목을 잡아채 억지로 눌렀다. 제삼자의 등장에 기회를 잡은 금동은 그길로 숙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형! 찰덕 형아!”
어수룩이 정신을 빼놓던 숙명은 제 손이 허해짐을 느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으나 가르는 것은 허공,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금동의 뒤통수였다. 숙명의 발이 자연스레 금동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한 발자국, 이내 팽팽하게 제 팔이 당겨지자 어깻죽지가 아파 왔다.
“어디를 가려고?”
이화는 여전히 숙명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숙명이 신경질적으로 팔을 뿌리쳤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방해였다. 숙명은 노여움에 더 이상 앞뒤 재지 않고 호통하였다.
“넌 또 뭐야? 감히 누구 손목을 잡아? 죽고 싶어?”
“아가씨치곤 말본새가 거칠군.”
“내 말본이 거칠든 어쨌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황급히 숙명은 입을 가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화살은 쏘아진 뒤였다. 소녀의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이미 입 밖으로 뛰쳐나간 지 오래였고, 사내 또한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화가 넉살좋게 숙명의 말을 받았다.
“아가씨를 천녀관에 입성시킨 것은 본인이니, 어찌 상관이 없겠소?”
이쯤 되면 더 이상 망과 갓이 필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머리를 눌러 오던 갓에 시달린 참, 숙명은 시원스레 흑립을 거두었다.
휘영청한 달빛이 소녀를 비추었다. 진주처럼 은은하게 광을 뿜는 피부에 바람결에 쓸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신비하게 대조되었다. 비록 독이 바짝 오르긴 했지만 옥진 같은 눈망울에 작고 동그란 코, 붉고 도톰한 입술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달빛은 분명 고루고루 세상을 비추고 있을 터인데도 오직 소녀만이 달의 연모를 받는 것 같았다. 월하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처럼, 참으로 어여쁘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신경 끄고, 계집놀음이나 잘하다가 꺼져!”
헌데 그 속은 천하에 막돼먹은 망나니라도 든 듯하니……. 소녀의 커다란 간극이 이화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상관있지. 신경을 끌 것이었으면 뭣 하러 내가 기생집에 여인을 들였겠소?”
“여기 들어가게 해 줬다고 이 몸이 너한테 절이라도 해야 해? 사사건건 보고라도 해야……, 가만.”
숙명이 마뜩잖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지금 그 말은, 내가 흑립을 쓰고 있을 때부터 이미 여자란 걸 알았단 말이야? 어떻게?”
“변장은 그럭저럭 잘한 것 같소. 내 친우처럼 여인을 멀리하고 불전에만 파고드는 사내는 물론이고, 고두기도 속였고, 심지어 같은 여성인 기녀들도 깜빡 속아들었으니 말이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고, 넌.”
“뭐, 하필 상대가 본인이라서?”
이화가 부채로 자신을 콕 찍었다. 눈썰미가 걸출하고 여성을 잘 아는 자신으로선 모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숙명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독기 대신 호기심이 눈동자에 오르자 그제야 한결 보기가 흐뭇하였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날 선 목소리로 소녀가 따지고 들었다.
“그렇담 너, 여인인 걸 알면서 왜 날 기루에 들인 거야?”
“취향을 존중해서.”
“취햐앙?”
“여성의 몸으로 기생집에 들어오고 싶어하기에.”
이화가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동성에게 대접받는 걸 즐기는 줄 알았지. 밴대질(여성끼리의 성행위)하려던 거 아닌가?”
숙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는 결코 추워서도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순수한 분노가 그녀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저 사내, 기생오라비 자식은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부채나 흔들어대고 앉았다. 숙명의 어깨가 강하게 떨렸다.
일국의 공주인 자신에게, 가까운 미래 태자를 생산해 낼 자신에게 이 무슨 모욕이란 말인가! 숙명은 할 말조차 잊고 머릿속의 생각을 새하얗게 태워 버렸다.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저 음란한 기생오라비는 분명히 수위를 넘어섰다.
숙명이 어금니를 콱 깨물고 말없이 서 있자, 이화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는 숙명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라도 난 듯 몸을 떨자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숙명의 이마에 손을 대며 부채의 방향을 틀어 소녀의 얼굴에 바람을 일으켜 보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팔랑이는 부채는 열을 식히기는커녕 오히려 숙명의 분노에 더욱 강한 불길을 일으켰다.
모욕감에 치를 떨던 소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이화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가 터지면서 숙명의 정신이 돌아오고 교체라도 되듯이 이화의 얼이 빠졌다. 숙명은 이것으로도 분통이 다스려지지 않아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허나 그 순간, 이화의 새하얀 얼굴에서 핏방울이 툭 터져 나온다. 그녀의 손톱이 그의 백옥 같은 피부를 찢어 버렸던 것이다. 핏물이 그의 볼에서 흐른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었지만 차마 그 뺨에 또 손을 휘두를 자신은 없었기에, 숙명은 손을 내렸다.
“이,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 할퀴지만 않았어도 세 대는 더 때렸을 거야.”
예상보다 생채기가 더욱 커서 숙명은 말을 더듬었다. 저 곱상한 얼굴에 흉이 질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총총 빠르게 걷는 걸음이 죄책감에서 소녀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화는 팩 토라져서 모퉁이를 도는 소녀를 보며 탄식과 비슷한 소리를 뱉었다.
“성질머리하곤.”
그가 상처 입은 제 볼을 감쌌다. 후끈후끈한 것이 손맛이 어지간히도 매웠다. 하! 숨이 토해졌다. 그러고는 곧.
“하하…….”
어이가 없어서인지 공허한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화는 찬바람을 맞으며 골목에 덩그러니 섰다. 그러다 풉! 왜인지 모르겠지만 실없이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시원한 웃음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터진 웃음보를 수습하지 못하였다.
목차
제5장 관계의 사이에 있는 것
제6장 숨겨진 패
제7장 낭도 비무전
제8장 점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