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구간

주희의 역사세계 - 하

위잉스 저 | 이원석 역 | 글항아리 | 2015년 10월

미리보기 북트리

정가
$72.00
판매가
$39.60 (45%↓) 최저가 보상
적립금
$0.79 (2%P)
출고예상일
2026년 10월 08일 수령예상일 안내
북카트 담기 바로구매하기 위시리스트담기

평점 -  ·  리뷰 0

리뷰 쓰기

ISBN : 9788967352530 / 816쪽 152 x 224 (㎜) / 양장본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추천inside
Adobe Flash Player 가져오기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

아래의 도서와 구매하시면 이 도서들의 적립금을 즉시적용해 드립니다.

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택민澤民’, ‘합리적 인간 질서의 재수립’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걸머진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 이학파 사대부들이 관료 집단 및 황제와 벌이는 힘의 상호작용 내성외왕의 실현, 천하무도를 천하유도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했던 12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의 중국 정치문화사 * * * 『주희의 역사세계』는 현대 신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위잉스가 2004년에 완성한 송대 정치문화사 연구의 금자탑이다. 송대 정치문화 구조 형태를 문화·정치의 주체였던 사대부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파악한 상편과, 주희의 시대에 이학파 사... ‘택민澤民’, ‘합리적 인간 질서의 재수립’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걸머진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 이학파 사대부들이 관료 집단 및 황제와 벌이는 힘의 상호작용 내성외왕의 실현, 천하무도를 천하유도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했던 12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의 중국 정치문화사 * * * 『주희의 역사세계』는 현대 신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위잉스가 2004년에 완성한 송대 정치문화사 연구의 금자탑이다. 송대 정치문화 구조 형태를 문화·정치의 주체였던 사대부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파악한 상편과, 주희의 시대에 이학파 사대부들과 관료 집단 사이의 복잡한 정치공학 관계를 서술한 하편은 총 1400페이지(한국어판)가 넘는 대작이다. 논쟁만으로도 책 한 권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동양 정치문화사 역작이다. 저자는 사서四書와 『주역』 등의 경전, 『송사宋史』 『실록』 등의 역사 기록물, 『주자문집』 『주자어류』 『근사록』 등의 주희 관련 문헌, 각 이학자들이 올린 「봉사封事」 「주차奏箚」 「주장奏狀」 「사면辭免」 등의 상소문류, 각 이학자의 문집과 연보, 일기류뿐만 아니라, 책에서 자료로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학자들이 주고받은 편지까지 온갖 자료를 그야말로 총망라하여 다루고 있다. 기존의 자료뿐 아니라 저자 위잉스 자신이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발굴해낸 사료에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을 풀어주거나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주는 자료를 또다시 찾아내 자신의 입론을 확실히 하는 그의 학문적 태도와 방법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에 더해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 근인近因과 원인遠因, 언어의 영역과 사건의 영역, 선택과 집중, 분석과 통합을 아우르는 그의 학문 솜씨는 “송대 정치사 연구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전조”(히라다 시게키平田茂樹 오사카시립대학원 교수)라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송대 사대부의 정치문화 연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문화사와 정치사 간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주희는 송대 유학의 전체 동향과 사대부 정치문화 간 상호 영향을 연구하는 데서 선대를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축심의 위치에 있다. 책은 송대 신유학을 중심으로 삼는 문화적 발전과, 개혁을 기본 경향으로 삼는 사대부들의 정치적 동태 둘 다에 초점을 맞춘다. 이학자들은 내성지학內聖之學’과 ‘형이상학적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현실 정치에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사학계의 굳어진 상식이다. 이 책은 이러한 편면적 관점 때문에 그동안 도외시되어온 유가(이학파) 사대부들의 정치적 이상과 실천의 역동적인 다면성을 다룬다는 데서 기존의 연구서들과 다른 확실한 변별점과 미덕을 갖는다. “세상 경영과 구제經濟는 일찍이 지향했던바, 은거하여 숨음은 평소 바람이 아니었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以天下爲己任” ― ‘정치적 인간’ 혹은 ‘호모 폴리티쿠스’ 주희 이 책의 시간적 범위는 11, 12세기다. ‘주희(1130∼1200)의 역사세계’는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여서 그 2세기 동안 일어난 유학의 변화가 책의 핵심 줄기를 이룬다. 하지만 이 책은 학술사나 사상사의 내적 연구가 아니며, 그 초점을 정치·문화·사회 각 분야와 유학 사이의 실제 관련성 및 상호작용에 두고 있다. 주희는 송대 사대부를 대표하는 전형이다. 주희는 학문과 정치를 함께 한 사대부였고 이는 양송(북송과 남송) 사대부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송대 사대부의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는 정치적 사유 방식과 정치적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정치적 사유 측면에서, 송대 사대부는 처음부터 합리적 인간 질서(당시 말로는 ‘하·은·주 삼대의 통치’)를 수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치적 행동 방식 측면에서, 송대 사대부는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 “황제는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려야 한다” “천하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다”고 인식했다. 송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정치적 이상에 따라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자부했고 정치 공간에 뛰어들어 민民에게 은택을 베풀려는 ‘택민’의 중임을 실천하려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위잉스는, 대표적 이학자 주희와 육구연이 유학에 끼친 불후의 공헌이 ‘내성’ 측면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나 깨나 생각한 것은 ‘외왕’의 실현이었다고 본다. 주희에게 “세상 경영과 구제는 일찍이 지향했던 바”이고 “은거하여 숨음은 평소 바람이 아니었”다.(주희의 시 「감회感懷」)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주희의 이학 체계를 정치적으로 독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면 주희가 ‘내성’을 관통할 뿐 ‘외왕’에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기존의 견해와 주희의 역사적 면모는 전면적으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희의 정치적 행동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는 것이 시종일관 주희의 행동에서 보이는 뚜렷한 특색이었고, 이는 주희의 정식 정치활동이 시작된 효종 시기뿐 아니라 이후 광종과 영종 시기에도 내내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송대 유학의 전체적인 동향이 ‘질서의 재수립’이고, ‘치도治道(정치 질서)’가 그 시발점이라고 판단한다. 이학은 ‘내성’을 그 분명한 특색으로 삼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인간 질서를 재수립하는 데, 선진 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천하무도天下無道’를 ‘천하유도天下有道’로 바꾸는 데 있었다.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하고 나서 즐거워한다” 역사적 변동기에 송대 지식인들이 보여준 고도의 공적·사회적 책임의식 그렇다면 사대부 계층이 송대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뭘까? 송대는 당 말부터 시작된 장기적 사회변동으로 변화된 사회구조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여 유가적 질서를 세워야 했다. 황제는 민심에 순응하기 위해 문치 질서를 확립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은” 사 계층에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대부들 역시 국가에 대한 이질시에서 동일시로 나아가면서 일종의 ‘시민’ 의식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공무를 처리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의식의 현현(곧 ‘외왕’)을 실현하려 했다. “굉장하구나! 신종은 [천하에] 뜻을 품었고 공[왕안석]은 군주를 얻었도다”라는 주희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 것”은 송대 ‘사’들의 집단의식이었지 특별히 이상이 높은 극소수 사대부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시 주희가 지적하듯,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하고 나서 즐거워한다”는 범중엄의 명언이 사대부의 좌우명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라는 집단의식은 현대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대부의 정치적 주체 의식이다. 그들은 “권력의 근원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전혀 주저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대임이 자신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분명히 여겼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를 적극적으로 제창한 이들은 송대 사대부이지 황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질서 재수립에 대한 송대 유학의 요구는 곧 송대 사대부라는 당시 지식인들이 현실세계에서 보여준 고도의 공적·사회적 책임의식으로 나타났다. “좋은 사람 한 명을 재상으로 등용하면 현자들은 자연스럽게 줄지어 나온다.” ‘무위’로서 다스리는 입헌군주를 지향한 사대부 ― 서양 근대의 ‘시민’에 상응하는 정치적 주체 진한 이래의 “군주는 존귀하고 신하는 비

저자 소개

餘英時 
1930년 텐진에서 태어났다. 1949년 옌칭대(현 베이징대) 역사학과에 입학했으나 1950년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다. 1955년까지 홍콩신아서원香港新亞書院(현 홍콩중문대)의 첸무錢穆 밑에서 수학했다. 1956~1961년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1975년 홍콩중문대 부총장을 역임했고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다. 2006년 인문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은 이에게 수여하는, 이른바 ‘인문학 노벨상’ 클루그 상(미국 국회도서관 주최)을 수상해 “우리 시대에 지적으로 가장 위대한 중국 역사학자”로서 그 학문적 권위를 공인받았다. 2014년에는 타이완중앙연구원에서 “혁신적인 연구” 업적을 쌓은 학자에게 수여하는 ‘중국학 탕장唐獎’ 상을 받았다. 두웨이밍杜維明, 리슈쉬안劉述宣, 청중잉成中英 등과 더불어 일명 ‘현대 신유학 제3세대’로 불리며 주로 미국에서 활동해온 그는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폭넓은 지적 식견으로 동서양에서 고루 사랑받는 대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공산당을 향해 비판적 목소리는 내는 민주주의자이지만 중국 대륙에서 그의 저서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 『중국 전통적 가치체계의 현대적 의의』 『역사와 사상』 『사학과 전통』 『흙과 중국 문화』 『홍루몽의 두 가지 세계』 『현대 유학론』 등 중국어와 영어로 30권 이상의 책을 썼다. 


역자 소개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 「북송대北宋代 인성론 연구」로 민음-인문학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을 수상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했으며, 서울대, 청주교대, 한신대에서 강의했다.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노재 허형의 생애와 철학사상」 「남명의 수양론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펑유란 자서전』(공역) 등이 있다.

책 속에서

이 책은 송대 문화사와 정치사에 관한 종합 연구이지만, 별도로 특수한 연구 중점이 들어 있다. 이 책의 초점은, 송대 신유학을 중심으로 삼는 문화적 발전과, 개혁을 기본 경향으로 삼는 정치적 동태에 놓여 있다. 배후의 최대 동력은 당시의 신흥 ‘사士’ 계층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 책의 부제는 ‘송대 사대부의 정치문화 연구’가 됐다. 송대의 ‘사’는 문화적 주체로서 자처했을뿐더러 정치적 주체의식을 고도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以天下爲己任”는 말은 그것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슬로건이다. (12쪽)

이 시기 신종과 왕안석王安石 사이에서 공통 원칙이 생겨났는데, 황제는 반드시 사대부와 더불어 “공동으로 국시를 정한다共定國是”는 원칙이었다. 이는 북송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대원칙이었고, 왕안석은 그로 인해 변법의 대임大任을 결연히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바로 이 원칙에 따라 왕안석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士 가운데서] 도가 높고 덕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그를 북쪽에 두고 물어야 하며 그와 더불어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바꿔야 한다.” 그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문언박文彦博은 신종을 향해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고, 정이程頤는 “천하의 통치와 혼란은 재상에게 달려 있다”는 명언을 할 수 있었다. (30쪽)

그렇지만 왕안석이 신종을 만나고 그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사건은 남송의 이학자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격려가 되었다. 주희와 육구연을 사례로 들자면, 설사 그들이 왕안석 변법의 내용과 수단에 제기한 비판은 상이했지만, 그들은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 왕안석의 보기 드문 행운에 대해서는 사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것은 남송 이학자들의 뚜렷한 정치적 특색을 구성한다. 이 특색을 파악해야만, 그들이 어째서 그토록 열심히 효종 말년의 개혁적 조치에 참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문화 관점에서 보자면, 주희의 시대는 후後 왕안석 시대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447쪽)

송대는 중국 역사상 사士 계층이 그 정치적·문화적 기능을 가장 자유롭게 발휘한 시대다. 이런 논단은 대량의 사료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서 결코 흔들릴 수 없다. 그러나 어째서 이 시대에 사대부들은 여전히 정치적·사상적 박해를 끊임없이 받았을까? 이 의문에 철저하게 답하기 위해, 우리는 송대 당쟁 방식의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해야 한다. 송대 당쟁 방식이 비록 세 차례에 걸친 단계적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매 단계의 당쟁은 모두 사대부 내부의 사상적 분화 및 권력 경쟁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그 동력이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이 송대 당쟁의 가장 뚜렷한 특색이다. (532쪽)

우리의 최후 관찰 내용은 이학자와 황권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특히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得君行道”는 문제가 중요하다. 필자는 제8장 서두에서 과거에 상당히 널리 퍼졌던 견해를 하나 소개했다. 남송 이래 유학이 ‘외왕外王’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내성內聖’의 추구로 나아갔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주희를 수장으로 하는 이학자들은 대체로 마음과 본성의 수양을 중시하고, 정치 개혁은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학술사상사와 정치사의 철저한 격리로 인해 성립한 것으로, 이제는 분명 크게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송 이학이 ‘내성’을 특히 중시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주희·장식·여조겸·육구연 같은 이학자들은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1249쪽)

사실, 주희가 제공한 핵심 문헌이 없었더라면 남송 중기 정치사의 ‘잃어버린 고리’는 재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희가 남긴 사료를 읽은 후, 그의 전체 생명이 ‘내성’을 관통할 뿐 ‘외왕’에 대해서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기존의 견해를 다시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한 걸음 더 나아가 주희의 ‘내성’ 관련 문헌을 정치적으로 독해한다면, 그의 역사적 면모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정치적 행동에 입각해 말한다면,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는 것이 시종일관 그 행동의 주요한 특색이었다. 효종 시기에 그랬을 뿐만 아니라 제8장에서 서술했다시피 광종과 영종 시대에도 그러했다. 순희 16년(1189) 광종이 즉위한 후 주희를 불러올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주희는 이미 ‘봉사’를 다 쓰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최후로 갈필의 “사악한 기운”이라는 말 한마디에 의해 가로막혀서 서울 행차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 5년(1194), 주희는 영종에 대해 꽤 높은 기대를 품고서, ‘황제의 직접 소환 명령親批召旨’을 접한 후 “수레에 말 매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갔다.” 그로 인해 “40일간 조정에 설立朝四十日” 평생 유일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주희에게 “관리가 되고 싶은 마음宦情”이 전혀 없었음은 전적으로 믿을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책임의식으로 인해, 정치질서를 재수립할 어떠한 기회라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송대 유가 사대부들이 스스로 규정한 ‘천직calling’이었기 때문이다. (1251∼1252쪽)

주희와 숱한 이학자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는 이상은 어째서 마침내 속절없이 사라지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답은 이 절의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이 장의 논의에 바탕을 두고서 좀 요원한 힌트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대략 말하자면, “도를 행할” 군주를 얻기가 어렵다는 것과 황권 내부의 제한이라는 두 가지는 경시되면 안 되는 양대 요소다. 효종을 사례로 들자면, 그는 최초 20년 동안 자유롭게 황권을 운용할 공간을 조금도 갖지 못했다. 그는 최후 1년의 “천하를 홀로 통어할” 기간에도, 위로는 누차 압력을 행사하는 태후[고종의 헌성태후]가 있었고, 아래로는 황위 계승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태자[광종]가 있었기에, 정치적 배치를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급히 황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1252쪽)

목차

목차
서설
제8장│이학자와 정치적 경향
1. ’내성’과 ‘외왕’의 긴장 2. ‘내성’에서 ‘외왕’으로
3.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주희와 육구연 4.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장식과 여조겸
5. 남은 논의
제9장│권력세계 속의 이학자
1. 서언
2. 육구연의 축출 3. 유청지의 ‘도학 자부’ 사건
4. 왕회의 재상 파면 과정 5. 주필대와 이학자
제10장│효종과 이학자
1. 서언
2. 효종 만년의 인사 배치 1-주필대, 유정, 조여우라는 세 재상
3. 효종 만년의 인사 배치 2-이학형 사대부의 발탁
4. 이학자 집단의 배치-대간의 재정비와 인재 추천
제11장│관료 집단의 기원과 전승
1. 서언 2. 기원: 진가의 ‘위학 금지’로부터
3. 관료 집단의 전승 4. 광종대의 관료 집단
5. 유덕수의 자서 6. 강특립-관료 집단과 황권
7. 결론
제12장│황권과 황극
1. 효종의 3부곡: ‘삼년상’ ‘태자의 국무 참여’ ‘내선’
2. 개설: 역사학과 심리 분석의 상호작용 3. 입궁에서 수선으로-효종의 심리적 여로
4. 정체성 위기와 심리적 좌절 5. 효종 ‘말년의 정치’와 그의 심리적 차원
6. “착해지라고 질책하면 사이가 멀어진다”-효종과 광종의 심리적 충돌
7. ‘황극’을 둘러싼 논쟁
8. 결론을 대신하여: 세 가지 관찰
부록 : 부가 논의 세 편
1. ‘추출’ ‘전환’, 그리고 ‘내성외왕’-류수셴 선생에게 답함
2. 나는 주희의 가치세계를 훼손했는가--양루빈 선생에게 답함
3. 유가의 전체 계획에 대한 시론-류수셴 선생의 「회답」을 읽고서
주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