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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378 / 352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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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이제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던 김정희의 발길을 따라 그가 빚어낸 금석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세한도』『서재에 살다』의 저자 박철상,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6년 7월 어느 날, 김정희는 북한산 승가사 뒤쪽의 비봉(백운대)에 올라가 마침내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 대사 또는 신라 도선 국사의 비석이라고 구전되어오던 옛 비석의 정체를 밝혀낸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비석이다.”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첫발이었다. 김... “이제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던 김정희의 발길을 따라 그가 빚어낸 금석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세한도』『서재에 살다』의 저자 박철상,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6년 7월 어느 날, 김정희는 북한산 승가사 뒤쪽의 비봉(백운대)에 올라가 마침내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 대사 또는 신라 도선 국사의 비석이라고 구전되어오던 옛 비석의 정체를 밝혀낸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비석이다.”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첫발이었다. 김정희 개인에게는 추사체의 출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고,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금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각인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청조 문사들에게는 조선 금석문에 대한 광적인 수집은 물론 조선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어떤 연유로 금석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김정희의 학문 세계에서 금석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은 조선시대 출판과 장서 문화, 간찰, 금석문, 연행 등의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세한도』(2010) 『서재에 살다』(2014)를 출간하며 고수의 내공을 선보인 저자 박철상이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이다. 김정희를 빼놓고 19세기 학문과 예술 세계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박철상은 “김정희 학문의 본령이 고증학이고, 금석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금석학이야말로 추사체가 탄생한 까닭이자, 추사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 하며 금석학을 통해 김정희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박철상의 김정희 연구에서 2002년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 기폭제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출간과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 『해동비고』의 발굴이었다. 200군데가 넘은 오류를 지적한 박철상의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 학자의 연구 성과는 유홍준의 연구 성과로 바뀌어 있었고, 고증 없는 서술로 일관되어 있었다.”라 평한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김정희란 인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앞의 논문을 발표한 다음날, 절묘한 인연으로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김정희의『해동비고』를 찾은 것이다. 『해동비고』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이 글에서도 후술하겠지만 김정희 사후 150년 동안 이제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저자는 『완당평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동비고』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김정희의 학문과 연구 세계로 잡아끄는 듯 했다고 소회한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에 부처 “내년이면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지 200년이 된다. 조선에 금석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이 김정희의 학예를 기리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한다. 이제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던 김정희의 발길을 함께 따라가며 그가 빚어낸 금석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추사 김정희는 최근 ‘연예 한류’에 비견할 만한 ‘학예의 조류(朝流)’를 만들어낸 한류 스타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는 먼저 조선시대 금석학 자료들을 정리하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 금석문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시기에 따른 흐름을 살펴본다. 조선시대에 처음부터 금석학이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서법 수련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감상의 대상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금석학이 학문으로 그 맹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북학파 지식인들이 금석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저자는 그 중에서도 김정희 금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금석학자로 영재 유득공에 주목한다. 유득공이 조선 금석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한객건연집』『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등의 유득공의 저작들에는 언제나 고대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는데 그런 그에게 있어 금석문은 사료였다. 그 때문에 그는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내용을 분석한 첫 번째 학자가 된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19세기를 ‘연행을 통한 북학의 시대’라는 배경을 펼쳐놓고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김정희가 젊은 시절 연행을 갔다가 옹방강(翁方綱) 옹수곤(翁樹?) 부자와 완원(阮元) 등 대가와 교유하는 장면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다. 옹방강은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완원은 추사체 탄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의 교유는 김정희 금석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옹수곤은 조선 학자들을 통해 조선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 중심에 김정희가 있었다. 김정희는 자신과 친분 있는 인물들이 연행 갈 때면 옹방강 부자에게 편지를 써서 소개해주었고, 옹방강 부자는 김정희를 통해 신분을 확인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김정희가 금석학을 학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옹수곤과 편지로 교유하면서부터였다. 옹수곤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을 김정희에게 물었고, 김정희는 그 과정에서 금석문의 연구 방법론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1815년 옹수곤이 요절하자, 옹방강은 옹수곤의 금석학 연구 자료를 김정희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김정희의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아이가 대아(大雅, 김정희)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가르침과 사랑을 자주 받았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이 아이는 일찍부터 친구가 적었고, 오직 존형과의 우정을 일찍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이니, 존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너무도 슬퍼할 것입니다. (중략) 몇 년 동안 오형이 멀리서 보낸 고비(古碑)의 탁본들을 받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석하면서 얻은 것이 꽤 있습니다. 그 아이는 또 모방(摹?), 향탑(響?), 구록, 전랍 등의 방법을 세밀한 데까지 파고들어 이 아이가 지은 금석문을 연구한 여러 건은 대아에게 한두 가지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 것입니다.”- 본문 123~124쪽, 옹방강이 추사에게 옹수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 중에서 이후 김정희는 본격적으로 조선 금석문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앞서 전술한 1816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다.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은 탁본과 함께 중국에도 알려졌다. 김정희는 일약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이후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817년 고적 답사를 위해 경주로 떠난다. 주요 목적은 금석문을 찾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답사를 통해 우리 금석문 연구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거둔다. 대표적으로 진흥왕릉과 다른 세 왕릉의 위치를 고증한 「진흥왕릉고」와「화정국사비」「문무왕비」「무장사비」등의 비석을 발굴하고 고증한 일이었다. 답사의 요체는 탁본과 책을 통해서만 보고 연구했던 내용을 실사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15일 여행은 그의 연구 업적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후 한양에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김경연의 기록은 당시 김정희가 금석학 연구에 얼마나 몰두했었는지 알려준다. 이렇게 김정희는 명실상부한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정축년 가을 황산·추사가 내 동리서당으로 찾아와 「역설」과 「시의」몇 조목을 서로 토론하고 금석문자 1천 권을 읽었다.” - 본문 157쪽 중에서 「진흥왕릉」「화정국사비」「문무왕비」「무장사비」등
옹수곤이 조선 지식인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금석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김정희 덕분이었다. 신위, 심상규, 이광문, 홍현주 등도 김정희의 소개가 있었기에 교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김정희와 옹수곤의 관계는 긴밀했다. 특히 옹수곤은 자신의 자인 ‘성원星原’과 김정희의 호인 ‘추사’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성추星秋’라는 인장을 새겨 사용하기도 했다. 얼마 후 김정희의 소개로 자하 신위와 정벽 유최관을 알게 되자, 자신의 서재에 ‘성추하벽지재 星秋霞碧之齋’라는 편액을 걸기도 했다. 그것은 ‘성추星秋’에 ‘자하紫霞’의 ‘하霞’, ‘정벽貞碧'의 ’벽碧‘을 더하여 만든 서재 이름이었다.
이처럼 조선 문사들과 교유가 깊어지면서 옹수곤의 서재에는 김정희를 비롯한 조선의 문인들이 보내준 금석문 탁본이 가득했다. 그러나 금석문에 대한 학문적 연구 상대는 김정희 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김정희가 옹수곤에게 보낸 편지 초고를 확인했다. 실물이 아닌 복사본이라는 게 아쉬웠지만 금석문을 매개로 두 사람의 교유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사실 귀국 당시만 해도 김정희는 금석학보다는 경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경학과 옹방강의 저술을 구하는 데 있었다. 이미 간행된 것들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간행되지 않고 필사본 형태로 남아 있는 자료였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김정희는 옹수곤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옹수곤 역시 조선의 금석문에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김정희는 옹수곤에게 금석문의 탁본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금석문을 해독하는 데 필요한 정보도 제공했다. 김정희가 옹수곤에게 보낸 편지 초고에서도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후략) - 본문 109~110쪽 중에서
김정희는 「문무왕비」의 비편을 새롭게 발굴했다. 「문무왕비」에 대해서는 홍양호가 남긴 「제신라문무왕릉비」를 통해 먼저 그 존재가 알려졌다. 홍양호는 1760년 7월부터 1762년 6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는 동안 문무왕릉을 찾아갔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돌 조각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 36년이 지난 정조 말년에 경주의 한 지역민이 밭을 갈다가 들판에서 고비(古碑)를 발견했다. 그것이 「문무왕비」의 일부였는데, 글씨는 한눌유가 쓴 것이었다. 홍양호는 이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현전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이때 홍양호는 탁본을 떠서「문무왕비」를 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사실은 유득공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홍양호와 유득공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홍양호가 가지고 있던 탁본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4면의 탁본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후 「문무왕비」는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다가 1817년 경주에 갔던 김정희가 다시 발굴했다. 홍양호가 탁본으로만 보았던 「문무왕비」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홍양호가 탁본을 구한 지 20년이 흐른 뒤에 김정희가 다시 발굴한 것인데, 비석의 하단부는 밭두렁의 돌무더기 속에 묻혀 있었고, 상단부는 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이는 홍양호가 금석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본인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 확인한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을 시켜 탁본만을 얻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금석문은 감상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후 김정희는 자신이 직접 발굴한 「문무왕비」를 친구들과 함께 판독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는데, 수신자는 확실하지 않다.
-본문 153~155쪽 중에서
목차
머리말
1장 조선시대 금석학, 취미인가? 학문인가?
조선 전기의 금석학
임진왜란 이후의 금석학
조선 후기 금석문, 감상에서 고증으로
금석학,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다
2장 유득공의 선구적 업적
고대사의 열쇠, 금석문에서 찾다
시 속에 담긴 금석문
필기 속에 남긴 금석문
김정희는 어떻게 유득공의 금석학을 만났을까?
3장 금석학 대가와의 교유
북학의 바람과 김정희의 연행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
중국 최초의 조선 금석문 연구가 옹수곤
옹수곤의 조선 금석문 연구 성과
4장 추사의 역사고증 조선 금석문 비석 한 조각이 역사를 말한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옛 비석의 정체를 밝혀내다
김정희의 경주 답사
사라진 비석을 찾아서
『해동금석원』, 조선 문사들의 금석학 지식을 만나다
5장 추사 금석학의 국제적 명성
김정희를 아시나요?
추사 금석학의 계승
6장 추사학과 다산학의 만남
다산과 추사의 학문을 계승한 윤정기
「진흥왕북수비가」에 담긴 역사 이야기
7장 『예당금석과안록』은 실재하는가?
『예당금석과안록』의 등장과 이본
『예당금석과안록』의 편찬 시기
『예당금석과안록』의 서명, 무엇이 문제인가?
8장 『해동비고』, 추사 금석학의 집대성
『해동비고』톺아보기
평백제비 | 당유인원비 | 경주문무왕비 | 진주진감선사비 | 문경지증대사비 | 진경대사비 | 경주무장사비
9장 추사체의 창조, 금석학의 또 다른 정수
김정희의 서법에 대한 이해와 연구
왕희지의 서법 어떻게 익힐 것인가?
완원의 비학 이론과 추사체
한예의 고증이 빚어낸 추사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