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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84319134 / 352쪽 152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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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라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노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어떤? 역사책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증언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한국 현대사의 질곡 거리의 언론인, 성유보의 일생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일제 말에 태어나 일본식 이름(나리오카 다카히코)을 가져야 했고, 2살 때 해방을 맞았으며, 5살 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면서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훗날 ‘유보’라고 개명...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라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노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어떤 역사책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증언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한국 현대사의 질곡 거리의 언론인, 성유보의 일생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일제 말에 태어나 일본식 이름(나리오카 다카히코)을 가져야 했고, 2살 때 해방을 맞았으며, 5살 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면서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훗날 ‘유보’라고 개명을 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철수’였다. 한국전쟁으로 전쟁의 공포와 배고픔에 싸워야 했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환란의 시대였다. 그의 삶이 본격적으로 현대사와 맞물린 것은 4월 혁명 때부터다. “공자 말씀의 입지(立志) 나이였던 고등학교 2~3학년 때 겪은 4월 혁명은 내게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꿈을 깊이 새겨주었다.” 그는 공대에 진학하려던 꿈을 접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4?19를 계기로 ‘민주 정치’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해 찬란한 봄날을 기대했던 그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16 쿠데타를 겪으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다. 1960년대 한국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으며, 수십만 명이 빨갱이로 몰렸다. 1971년 대선에 승리하며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유신 정권은 언론 통폐합과 긴급조치로 한국 사회에 싹트고 있던 시민민주주의 운동을 말살했다. 그는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며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동참했다가 해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언론계, 문학계, 종교계, 재야인사들에서 유신 체제의 무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처절했던 민주화 운동사가 1979년 10?26 사태로 마무리되자 1980년 5?17 쿠데타로 전두환이 집권했다. 전두환은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보도지침을 내리고 사전검열을 통해 언론을 장악하면서 한국 사회 전체가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전두환의 폭압 정치에 맞선 1980년 5월 광주 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중의 새로운 각성의 표현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는 1988년, “말하고 싶은 자는 누구나 말하고, 듣고 싶은 자는 누구나 듣는” 새 시대의 신문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다. 1991년 논설위원을 끝으로 [한겨레]를 떠난 이래 마지막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그는 한 번도 언론 민주화와 진보 운동의 현장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사명이 위태로운 지금, 언론과 역사에 대한 정학한 인식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이 책에서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와 맞물린 그의 삶이 마치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처럼 전개된다. 언론 독립 만세! 한평생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한 민주 언론의 길 한국의 언론 민주화 운동의 한켠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를 봐왔던 임재경 선생은 그를 “자타분한 이해타산에 매달리지 않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겨레> 창간 초기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은 광고국장의 자리나 모금특별위원장직을 두말하지 않고 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작고하기까지 20여 년간 [사회평론]대표, 개혁신당 부대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총선연대 공동대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희망래일 이사장,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 이사장 등 셀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했으나 그중 보수를 받은 일은 3년간 지냈던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이 전부였다. 임재경은 “가난을 타고난 팔자라고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인지 모르겠으나 자유 언론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투사들 중에서 정말 특이한 존재”라고 평한다. [한겨레]김경애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머리글을 마무리한다. “1988년 [한겨레] 창간 초기 몇 년간 편집국을 진두지휘하던 때에도, 신문사를 떠난 이래 대선배이자 언론 운동가로 가끔 오가며 인사를 나눌 때에도, 선생에게는 한결같은 인상이 있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고, 어투며 차림새며 표정이며 권위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다. … 그런 선생의 평소 품성에 비추어, 집필 요청을 고심 끝에 승낙한 이유 역시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사명감에 따른 것이었다는 생각을 새삼 깨닫는다.” 언제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주변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의 성정은 개인사가 아니라 동시대가 함께 겪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다는 이 책의 집필 의도에서도 드러난다. 잔인한 왜곡과 거짓이 만무한 세상, 정부의 품에 안긴 언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가 바라던 언론 자유의 꿈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오늘날의 언론이 있기까지 그의 한숨과 피와 땀이 새기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온 길속에서 우리는 한국 언론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전두환 정권은 ‘언론기본법’이 발동되자마자 문공부에 홍보조정실을 설치해, 신문과 방송에 매일 지침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보도 가(可)부터 보도 불가(不可)까지, 사진을 실어라 마라, 기사는 몇 면에 몇단으로, ‘권장 제목’과 ‘불가 제목’에 이르기까지, 지침은 아주 세세했다. 아물 ㅣ문공부 장관이 생살여탈권을 가졌다 해도, 언론사들이 독재 권력의 충견이 되어 문공부 지시사항대로 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언론인 행세를 했던 전두환 시대를 우리는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_261쪽 1986년 9월 민언협은 [말]특집호로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 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발간했다. 전두환 정권의 문공부가 신문과 방송에 매일매일 전화로 지령한 10개월간의 보도지칠(1985년 10월~1986년 8월), 즉 비밀통신문을 요약, 정리해 폭로했다. 신문 제목에 ‘호헌’이나 ‘개헌’이라는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말 것, 신민당 광주 개헌 집회에서 시위 군중들이 ‘축 직할시 승격’ 아치를 불태우는 장면을 꼭 실을 것, ‘전국 대학 학생회 사무실을 수색했더니 화염병과 총기 등이 나왔다’는 것을 꼭 제목으로 뽑을 것 … 이 비밀 통신문의 원자료는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당시 편집부)가 편집국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복사해 민언협에 제공한 것이었다. _312~313쪽 6월 항쟁은 1987년 ‘6?10 국민대회’,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민주 헌법 쟁취”,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국민들이 20일 동안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인 현대 한국사 최장 최대의 민중 운동 파노라마였다. 어림잡아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 1987년 6월 10일을 ‘국민대회의 날’로 잡은 것은, 민정당이 이날 노태우를 ‘체육관 선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국민대회 시간을 오전 10시로 하자고 제안했다. 민정당 전당대회와 야당?재야의 군부 독재 반대 시위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국제적 매스컴을 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반대했다. 최근의 박종철 군 추모 집회를 통해 점점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
나는 1943년 경북 경산에서 아버지 성태후와 어머니 신순득의 팔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일제시대 말기 대부분의 ‘조선인’이 그러했듯이 우리집도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내 일본식 이름은 ‘나리오카 다카히코’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호적에 새로 이름을 올리면서 내 이름을 엉겁결에 ‘철수’로 적었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놀림을 받던 그 이름이 싫어 대학을 졸업한 뒤 ‘유보(裕普)’라고 스스로 개명했다. _23쪽
아버님의 은근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대에 가려고 생각해왔던 나는 3학년 때 정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전적으로 ‘4월 혁명’ 때문이었다. ‘민주 정치란 무엇인가?’ ‘민주 정치는 어떻게 현실화 되는가’를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님은 법대 지방을 바라셨으나 강요는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대신 내가 자원한 대학에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나는 고3 때 평생 공부를 다 해버릴 것처럼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1961년 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자 말씀의 ‘입지(立志)’ 나이였던 고등학교 2~3학년 때 겪은 4월 혁명은 내게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꿈을 깊이 새겨주었다. 이 ‘입지의 시대’에 이대우가 준 영향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_62쪽
사실 신문, 방송의 ‘유신 지지 성명’은 한국 ‘제도 언론’ 사주들, 고위 경영진이 박정희 정권에 완전히 굴복해 “일체의 뉴스를 국민의 편에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재 권력의 눈으로 보기로 했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흔히 언론은 보도의 기본수칙으로 ‘육하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들 한다. 언론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육하원칙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원칙은 ‘뉴스를 국민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명제이다. 뉴스를 권력자 편에서 보는 순간, 그 언론은 시민들이 배척해야 할 반민주적 언론으로 전락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972년 언론사 사주와 고위 경영진이 ‘유신 지지 성명’을 낸 순간부터 한국의 신문, 방송은 ‘민주 언론 대열’에서 이탈했다. _131~132쪽
한국 현대사의 지형이 바뀌기 시작한 1974년 여름, 한국 언론은 종교계 반유신 움직임이나 학생 운동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에 동아노조는 본격적인 ‘언론 자유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 10월 24일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날로 잡았다. … 나는 이날 대회장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신문에 꼭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이유는 언론 자유를 향한 동아일보사의 각오를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동아일보사가 쉽사리 언론의 자유를 배반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기관원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통해 그들이 그동안 한국 언론의 실질적 편집국장, 데스크, 논설위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_162쪽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아투위가 저항을 계속하자, 박 정권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동아투위 안에 빨갱이가 있다고 몰아세운 것이다. 그 첫 그물에 걸려든 것은 이부영과 바로 나였다. 그해 6월 25일 아침 동료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정문 앞 침묵 집회를 마치고 신문회관 쪽으로 행진하던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 4~5명에게 납치당하듯 체포됐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그 악명 높은 남산 분실이었다. 곧 40대 남자가 나타나 “이곳에는 이부영과 정정봉도 잡혀와 있다. 당신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청우회(靑友會) 사건’이다. _198쪽
닷새 만에 남영동에서 풀려난 나는 곧바로 아버님을 뵈로 경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아버님은 “네가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은 네가 나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숲’에는 호랑이도, 여우도, 늑대도 토끼도 한다. 옳고 그름을 너무 날세우면 피곤해서 못사느니라.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만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해라”라고 유언처럼 당부하셨다. 아버님은 이듬해 돌아가셨다. 2000년대 들어 이메일 주소를 만들 때 나는 문득 아버님 말씀이 떠올라 주소를 ‘태림(泰林)’이라고 지었다. _252~253쪽
전두환 정권은 ‘언론기본법’이 발동되자마자 문공부에 홍보조정실을 설치해, 신문과 방송에 매일 지침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보도 가(可)부터 보도 불가(不可)까지, 사진을 실어라 마라, 기사는 몇 면에 몇단으로, ‘권장 제목’과 ‘불가 제목’에 이르기까지, 지침은 아주 세세했다. 아물 ㅣ문공부 장관이 생살여탈권을 가졌다 해도, 언론사들이 독재 권력의 충견이 되어 문공부 지시사항대로 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언론인 행세를 했던 전두환 시대를 우리는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_261쪽
1986년 9월 민언협은 〈말〉특집호로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 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발간했다. 전두환 정권의 문공부가 신문과 방송에 매일매일 전화로 지령한 10개월간의 보도지칠(1985년 10월~1986년 8월), 즉 비밀통신문을 요약, 정리해 폭로했다. 신문 제목에 ‘호헌’이나 ‘개헌’이라는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말 것, 신민당 광주 개헌 집회에서 시위 군중들이 ‘축 직할시 승격’ 아치를 불태우는 장면을 꼭 실을 것, ‘전국 대학 학생회 사무실을 수색했더니 화염병과 총기 등이 나왔다’는 것을 꼭 제목으로 뽑을 것 … 이 비밀 통신문의 원자료는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당시 편집부)가 편집국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복사해 민언협에 제공한 것이었다. _312~313쪽
6월 항쟁은 1987년 ‘6‧10 국민대회’,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민주 헌법 쟁취”,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국민들이 20일 동안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인 현대 한국사 최장 최대의 민중 운동 파노라마였다. 어림잡아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 1987년 6월 10일을 ‘국민대회의 날’로 잡은 것은, 민정당이 이날 노태우를 ‘체육관 선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국민대회 시간을 오전 10시로 하자고 제안했다. 민정당 전당대회와 야당‧재야의 군부 독재 반대 시위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국제적 매스컴을 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반대했다. 최근의 박종철 군 추모 집회를 통해 점점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침부터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거꾸로 저녁 시위를 하면 퇴근하던 시민들이 구경꾼에서 응원군으로, 나중에는 시위대의 일원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_328쪽
목차
여는 글 _김경애
저자 서문: 멈출 수 없는 언론 자유의 꿈
1부 민주의식의 태동
1장 철수에서 유보로
1943년 양띠, 암흑기에 태어나|경산 민간인 학살의 기억|4월 혁명의 선구자들|학생들의 발칙한 발상?|끓어오르는 국민의 불만|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승만 하야, 성공한 민중 혁명
2장 사회의 목탁을 꿈꾸다
민주 정치를 고민하다|“박정희 하야하라”|‘백수’로 사회에 첫발을 딛다|“굴욕외교에 분노하라”|박정희가 뿌린 한일조약의 유산|레드콤플렉스가 만든 비극, 동백림 사건
2부 광기의 시대, 포기할 수 없는 꿈
1장 언론 수난사
폭압의 시대, 언론인이 되다|편집기자 시절 마주한 전태일의 죽음|입 틀어막은 박정희|10월 유신, 종신 독재 겨울왕국의 개막|유신 독재의 시녀가 된 재벌 언론|잔인한 왜곡과 은폐1장 사건과 재현
2장 자유언론 실천 운동, 격동과 시련의 시기
침몰하는 언론, 노조의 탄생|민주 언론 말살 작전|민청학련 조작 사건의 공범은 언론|언론인의 양심과 소신을 위해|1단 벽 깨기 운동|저항적 문인들 ‘자실’ 띄우다|언론 길들이기|다시 타오르는 학생 운동
3장 언론 독립 만세
폭력배에 내쫓긴 기자들|봄은 곧 오고야 말 것이다|‘자유 혼’ 저당잡힌 [동아일보]|그렇게 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감옥서 만난 아름다운 우정|거리의 기자들|‘자유의 혼’ 불댕긴 두 위원의 죽음
3부 암흑 속에서 희망을 일구다
1장 너무나도 짧았던 서울의 봄
‘긴급조치 9호’의 시대|노동자와 농민의 의식 혁명|닫힌 문 열리며 자유의 포옹|안종필이 꿈꾼 ‘새 시대 언론’|신군부의 정치 야욕|아버지의 마지막 당부|5?17 쿠데타, 다시 국가폭력 시대로|땡전뉴스의 시대
2장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부활하는 학생 운동|전두환 정권의 노조 파괴 공작|1980년대 민주화 운동|암흑기의 언론|민주?통일?민중 시대로
3장 민중 시대로의 출발
민중의 입이 되고자 한 [말]|반미의 진원지는 민청련이다?|폭력기관으로 회귀한 국가|언론인 쫓아내고 보도지침 내리고|국민 모두가 상주다|6월 항쟁의 성공 조건|암측 천지 속에서 희망을 구하다
보론: 성유보의 가을 _임재경
주/사진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