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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된 사람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저 | 오월의봄 | 201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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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7889648 / 344쪽 153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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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한국판 ‘아우슈비츠’ 형제복지원의 진실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수면 위로 드러났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형제복지원은? 원장 박인근을 비롯한 개인의 악마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법령과 공무원 사회의 적극적인 협조로 가능했던 ‘국가폭력’의 산실이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많은 생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은 피해생존자들 11명의 이야기를 인권기록활동 저자들이 재구성... 한국판 ‘아우슈비츠’ 형제복지원의 진실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수면 위로 드러났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형제복지원은 원장 박인근을 비롯한 개인의 악마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법령과 공무원 사회의 적극적인 협조로 가능했던 ‘국가폭력’의 산실이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많은 생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은 피해생존자들 11명의 이야기를 인권기록활동 저자들이 재구성해낸 결과물이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는 2014년 6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이들 중 6명이 모여서, 피해생존자들 삶에 깊이 각인된 그날들의 흔적을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사회에 전달하고자 결성됐다. 약 반년에 걸쳐 인터뷰이 탐색과 설문조사, 두세 번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간의 언론 보도가 미처 다루지 못한 생존자들 각각의 세세한 삶의 결, 감정의 파동까지 오롯이 담아냈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오롯이 재조명하고 특별법 제정을 포함해 책임을 촉구하고자 기획되었으며, 독자들은 폭력이 삶을 규정지어버린 피해자들의 고백 속에서 인간 존엄과 자기치유의 목소리,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할 ‘부랑인’이란 과연 누구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만나게 될 것이다. 숫자에 갇힌 사람들, 그러나 너무 인간적인 고통 형제복지원 대책위 집행위원장인 조영선 변호사는 형제복지원을 일컬어, “형제도 복지도 없는 지옥 그 자체” “국가가 위탁이라는 형식으로 만든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말한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동안 부산시 사상구 주례동에서 ‘사회복지시설’로 운영됐던 형제복지원은 당시 약 3,146명을 수용하고 있었고, 납치·감금·강제 노역·학대·성폭력 등으로 유지됐으며, 밝혀진 사망자 수만 513명에 달했다. 피수용자들에게는 몇 년도에 몇 번째로 들어왔느냐에 따라 78-374, 80-3038, 82-2222, 82-4714, 86-1360…… 식으로 번호가 매겨졌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운영 당시 매년 20억 이상의 국고 지원을 받았는데, 그 액수의 기준이 되는 것은 피수용자들의 ‘머릿수’였다. 이들의 존재가 박인근에게는 두당 얼마씩의 재산이었던 것이며, (그들을 검속해 형제복지원에 넘긴) 경찰에게는 두당 얼마씩의 짭짤한 근무 평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기보다 등록번호, 몸값, 누군가의 점수 등 ‘숫자’로 취급됐다. 반면 이들이 형제복지원 안에서 겪은 고통은 철저하게 ‘인간의 고통’이었다. 11명의 생존자들 이야기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수용자들이 일상적으로 견뎌야 했던 폭력에 대한 묘사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구술자 박경보 씨는 더없이 차분한 어조로 “형제원 안에서 맞고 기합받는 건 일상이었어요. 손가락을 잡고 부러뜨리는 건 흔한 일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연약한 아이들, 여성들, 노인들도 열외가 없는 군대식 점호와 기합, 구타는 그의 말대로 일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지는 증언들에 정작 듣는 이는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 ‘일상’은 때로 사망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목격자들은 그들이 정확히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김희곤 씨는 열두 살의 나이에 성인 소대장에게 가슴 100대를 가격당했던 일을 회상하며 “차라리 죽었으면 편했을지도 모르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와 나란히 맞았던 다른 아이는 다음날 식사하러 걸어가던 길에 쓰러져 그대로 사망했다. 남자 아동소대의 경우에는 밤에 소대장이 와서 소년들을 강간하기도 했다. 하안녕 씨는 사무실에서 원장이 피수용자의 배를 형광등으로 가르더니 거기에 소금을 뿌리는 모습을 봤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인간의 상식으로 믿기지 않는 폭력에 대한 증언은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이들은 낚시 용품, 봉제, 건축, 나전칠기 등 다양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이로 인한 수익은 전혀 배분되지 않았다. 일당 300~500원, 요양원은 3일에 토큰 1개(100원) 상당의 임금 기준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임금을 받았다는 증언은 없다. 너무나 집요한 폭력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꿈꾸기조차 힘든 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하는 환경 속에서도 존엄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여러 증언들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박경보 씨는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도망을 쳤어요. 왜 그랬을까요”라고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숟가락, 면도칼 따위를 스스로 삼키거나 자기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들도 많았다고 말한다. 하안녕 씨는 오직 탈출을 위해서 일부러 소대의 서무직을 자청하고 동료들과 계획을 짜 탈출에 성공한 과정을 생생히 들려준다. 다시 잡혀온다면(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많았다) 더 큰 보복과 폭력을 당해야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탈출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황송환 씨는 “사회에선 죄를 짓더라도 형량이 있고 만기가 있는데 형제원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영영 나갈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들의 갈망을 자극했고 탈출은 계속됐다. 한 시설을 탈출해도 곧 다른 시설에 잡혀들어가고, 또다시 탈출하는 일을 반복한 경우도 많았다. 국가의 위탁으로 운영된 지옥 그 모든 인권유린이 ‘사회복지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업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국가였다. 단순히 ‘복지시설’에 돈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정부는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발령해 소위 ‘부랑인’ 단속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 훈령에 따르면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제1장 제2절)이 단속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역 앞이나 거리에 있는 아무 사람들을 애매하고 임의적인 기준으로 잡아다 감금하고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수호하라는 명령이다. 박인근 자서전에 자랑스럽게 실린 한 사진(전두환 대통령과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형제복지원 운영은 국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총리에게 지휘서신을 보내 전국적으로 부랑인 검속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하안녕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일명 ‘시찰’이 나올 때마다 벌어졌던 해프닝들을 자세히 그려낸다. 원장이 허울 좋게 보이기 위해 형제복지원 내에 각종 ‘부서’들을 신설하면 부산시에서 견학을 왔다. 그런 날만 옷이나 신발 등이 더 깨끗한 것으로 지급되고(시찰이 끝나면 다시 뺏어간다), 돌계단을 닦아내고 줄을 서서 박수를 치는 등 ‘갖은 쇼’를 해야 했다. 매년 운동회 때 보여줄 공연을 연습하는 시기에는 한 달 동안 잠을 못 자고 혹사당했다. 교양 있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박인근의 아내는 자주 친구들을 데려와 “우리는 이렇게 밖에서 동냥하는 애들을 데리고 와 교육을 시켜서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렇듯 형제복지원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섬 같은 것이 아니라, 국가와 부산시 공무원 사회가 충분히

저자 소개

  • 저자 :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저자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는 2014년 6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태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인권기록활동에 뜻을 모은 6명이 모 여 생존자들의 구술 기록 단행본을 펴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존자들의 경험과 삶의 맥락이 파편화되지 않고 좀 더 온전히 사회적으로 전달될 방법을 고민했다. 생존자의 목소리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자 사회를 일깨우는 죽비이며, 우리 모두의 존엄함을 지키는 투쟁이다.
명 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박희정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기록활동가
서중원 자유기고가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이묘랑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책 속에서


우리에게 진짜 따뜻한 위로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거예요. 이 사건은 박인근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부산시 공무원, 경찰 몇몇의 문제도 아니고요. 그 시대, 부산시, 언론, 지식인들, 경제인들 모두가 한통속이 돼서 묵과했어요. 87년에 형제원 사건이 터졌을 때 잠깐 시끄러웠다가 결국 다 침묵했잖아요.
남대문에 살았을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봤고 6월항쟁도 봤어요. 그때 우리도 뭔가를 해보려고 했어요. 물론 아무것도 못했지만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그런 것과 우리 문제는 좀 다르잖아요. 우리 피해자들은 문제를 제기할 방법도 몰랐고 기회도 없었어요. 언론에 투서한 사람들도 모두 문전박대당했죠. 박종철은 그렇게 죽어서 열사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수백, 수천 명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갔는데도 이렇게 묻혔어요.
박경보, <잃어버린 13년,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예요>, 37~38쪽

국회에서 서로 간에 이해타산을 떠나서 정확하게 잘잘못을 한번 따져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정치적으로 타협 안 하고 진실 그대로 밝혀가지고. 공무원들 중에서도 형제복지원 원장하고 어울려서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거라고. 왜 그런 법안이 생겨나야만 했나.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
나한테 ‘국가’라는 거는 억압받게 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사람 기를 못 펴게 한 존재인 거지. 동사무소나 구청이라든가 관공서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한테 권위주의로 나오고. 국가 충성도는 제로인 상태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거 자체를 많이 저주했으니까. 다음 생에는 대한민국이 아닌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김희곤,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 69~70쪽

그때 (철창 사이로) 사람 어깨만 빠져나올 수 있으면 몸이 다 나온다는 걸 알았어요. 나오더만요. 지금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벽을 뛰어오르는데 서로 손이 안 잡혀갖고 머리채를 뜯어 올리기도 하고. 인근에 헌병대가 있어서 그리루 가면 안 될 거 같애서 다른 쪽으로 가니 총을 겨누더라구요. 진짜 부대를 넘어간 거죠. 그 사람은 내가 피를 흘리고 있으니까 도망 나온 줄 알았겠죠. 분명히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벽 뛰어오를 때 내가 제일 먼저 올랐는데, 여자소대는 담이 낮다고 유리를 박아놨거든요. 그걸 밟은 거죠. 거기에 찔렸는데 제가 지금 기억으로는 한 5초를 생각한 거 같애요. 다시 내려가 빼고 와도 또 그럴 테니까 그대로 올라가자. 3일 정도 맨발로 다니니까 제일 먼저 낫는 데가 발바닥이더만예. 그래서 나는 제일 많이 움직이는 데가 제일 빨리 상처가 낫는 부위라고 생각해요. 발바닥이 제일 먼저 아물더라구요. 유리는 안에서 살이 차오르면서 빠져나오더구만요. 그때 느꼈어요. 아, 사람이 살아서 계속 움직이면 뭐가 박혀도 빠져나오고 낫는다고.
하안녕, <내 인생의 비어버린 시간들, 형제복지원>, 97쪽

행복하다, 그런 거는 못 느껴봤습니다. 꿈이라는 거,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어렸을 때 무슨 생각 하면서 살았냐. 얼라 때 기억나던 때부터 먹고사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그냥 어떻게 해서라도 남한테 나쁜 일 안 하고 살까. 쓰레기통 가서 오물 같은 거 줍고, 고무신 같은 거, 수저 같은 거, 사발 그릇도 주워 팔고, 남긴 밥 주워 먹고, 아무 데서나 자고. 희망이라는 거를 갖게끔 사회에서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담에 크면 뭘 해야 되겠다, 사업을 해야 되겠다, 선생이 돼야 되겠다, 변호사가 돼야 되겠다, 의사가 돼야 되겠다, 이런 꿈을 꿔봤던 적이 없었습니다. 영화숙, 재생원에 끌려가고 형제원에서 얻어맞고 그리 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어떻게 살아온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형제원에 다시 들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다른 시설도 힘들었지마는 거기는 인간 도살장이에요, 도살장. 해서 내가 형제원 그 생각만 하면 진절머리가 나는데, 아직도 1년에 두세 번씩 꼭 형제원 꿈을 꿔요, 악몽을. 그런 악몽은 안 꿨으면 좋겠는데, 그런 데는 꿈속이라도 두 번 다시 끌려들어가면 안 되니까. 거기 끌려들어가게 되면 인생이……
황송환, <반평생을 시설에서 살았습니다. 듣고 계십니껴?>, 120~121쪽
형제복지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 나 안 쪽팔립니다. 그건 나를 불쌍하게 알아달라는 게 아니고 사회가 잘못된 거 바로잡자고 모인 거니까. 사람들이 “형님아 잘됐으면 좋겠다”고 해요. 아는 누나들도 이제는 “서명할 거 있으면 갖고 온나, 다 해줄게” 그래요. 친목계하는 사람들한테 얘기해서 다 해준다고. 옛날에는 그걸 안 믿었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옛날 사건이지만 인권유린은 공소시효가 없다잖아요. 국가도 잘못한 거고. 원장 그 새끼, 전두환 그 새끼도 나쁜 놈이고. 그 안에 있던 분들 못 배운 사람 많잖아요. 그것 때문에 회사도 못 다니고 지금 일용직 다니는 사람 많더라구요. 그런 사람들 평생 그리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기술이 있어요? 학벌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 사람들 인권 찾아주고 그 사람들 안에서 고생한 만큼 보상해주고. 보상금 때문에 이런 거 아니잖아요. 우리 인권 찾고 우리가 어릴 때 그렇게 당한 거 국가한테 사과도 받고. 지금 정부도 박근혜 지네 아버지 때 그런 거니까 사과해야 하고. 자기들이 먼저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우리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인권 찾고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안하다 사과 한마디라도 받아야지.
이상명, <27년 만에 손잡으니까 좋데요>, 152~153쪽

내는 이 인터뷰 말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 중에서 지금 무연고자 대표로 나온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 내보다 못 살고 고통받는 무연고자 피해자들, 내를 명예복지사를 시켜주면, 내 그 사람들을 찾아서 수급을 받을 수 있도록 조사를 돕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복지시설로만 보내면 되겠어요? 수급 받아서 임대주택도 얻어주고. 시설생활이 아니라 개인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도록 실태 조사 같은 걸 돕고 싶어요. 기회를 줘야지, 그 사람들 찾아서. 배운 것도 없고 그런데……
누가 무연고자들에 대해 알겠어요? 내는 그럴 자격만 준다면, 월급을 받겠다는 게 아니고, 그럴 소명만 준다면 내는 전국에 있는 무연고자들 찾아다니면서 수급도 받고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해주고 싶어요. 내가 이득을 보고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 나는 진짜, 보건복지부 사람들, 장관한테 교육받을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와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사람들은 모른다고
김영덕, <서류철 하나에 집약된 인생>, 184~185쪽

알코올중독자나 마약중독자들은 그룹을 이뤄서 치유하는 시스템이 있잖아요. 우리도 전문적이진 않지만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제가 좀 특이한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하고 만나니까 이게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제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할까. 어느 누구한테도 말 못한 상황인데, 이 사람들한테는 설령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나를 몰아붙인다든가, 손가락질하지 않을 거라는. 뭐라 꼭 집어 표현할 순 없는데 마음이 그냥 평온한 거예요, 굳이 감춰야 할 필요도 없고. 그게 치유인지 힐링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전보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생활하는 데도 변화가 많이 생겼어요. 그때의 일을 생각하는 횟수도 많이 줄고. 전에는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하면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계속 신호가 와요. 그런데 지금은 그 신호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안 좋았던 상황이 떠오르는 게 밤에 자려고 누운 시간 외에는 점점 줄어들었어요. 그러다보니까 회사에서도 업무에 집중이 되고, 사람에게도 집중이 되고 그런 것 같더라고요.
김철웅, <다 내 탓이라고 자책하며 살았어요>, 212~213쪽

그때부터 가출을 하기 시작해서 집에 있었던 적이 거의 없어요. 신문배달하면서 보급소에서 자기도 하고요. 아버지한테 잡혀 들어가면 주머니에 있는 돈 다 뺏기고 안 죽을 만큼 맞고 또 가출했어요. 그 와중에도 신기하게 학교는 꼬박꼬박 나갔어요. 그런 생활을 몇 년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부전역전 파출소에 처넣어버린 거죠.
경찰이 나를 유치장에 가뒀어요. 아버지가 빵하고 우유를 넣어주면서 “네가 먹고살 만한 데를 보내준다고 하니까 거기서 생활하면서 잘 살아라” 하더니 가버렸어요. 그때 기분은 별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요. 이제 아버지랑 같이 안 살아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정도죠. 그날 밤에 형제원으로 보내졌어요. 우리 집은 잘살았어요. 그 시절에 의상실을 3개나 운영했을 정도니까요. 내가 형제원으로 가게 된 건 다른 피해자들처럼 가난해서가 아니었어요. 아버지 때문이었죠.
이향직,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노력했어요>, 223~224쪽

성인이 되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들려고 하는데 제 주소가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18번지로 되어 있는 거예요. 국가가, 공무원이 협조했으니까 이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국가는 진짜, 이기주의적입니다. 남은 어떻게 되든 말든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 사람으로 하여금 돈 욕심을 내게 만들었잖아요. 그 돈 때문에 부랑아도 아닌 사람들까지 잡아가게 만들었잖아요.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입니다.
그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엄마랑 살던 네 살, 다섯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가 저를 참 애지중지하며 곱게 키웠어요. 그때 당시에 모자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으니까요. 나를 아껴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행복했던 그 시절로.
최승우, <묻어놓고 살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살아요>, 264~265쪽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진상 규명이라는 것을 한 번 보고 아픔을 씻고 갔으면 좋겠어요. 나는 다른 거는 상관 안 합니다. 그게 내 전부예요. 보상이야 받아봐야 내가 뭐 할 건데요. 그거 받아갖고 아픈 몸 수술해봐야 평생 살 것도 아니고. 나는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면 또 하나 분명히 바라는 게, 시신을 못 찾은 가족들이 있어요. 그 유가족들에게 시신이 돌아갔으면 합니다. 부산 영락공원에 묻힌 형제복지원 희생자들 중에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것을 왜 그렇게 그냥 방치해두는가. 그게 난 참 그래요. 그 유가족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요. 대한민국 땅 어디엔가 있다고요. 시신조차도 가족들한테 안 가면은 그건 좀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국가에서 외면하고 있다고요. 왜? 자신들이 책임져야 될 일이 더 많으니까. 내가 청와대 블로그에 대통령님한테 호소한 글이 있는데, 거기 답변에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렇게 많은 유가족이 살아 있는 줄 몰랐다, 여기에 대해서도 참조하겠다’ 하더라고요. 참조하겠다? 나는 그런 대답 듣고 싶지 않아요.
홍두표, <혼자 살 수 없는 이 삶 자체가 어디서 왔나>, 289~290쪽

저도 초반에는 학교 친구들한테는 말을 못했구요. 사회 친구들이나 아는 오빠나 언니나 선배들을 접하게 되면서 가끔 정말 친한 친구들한테만 말했는데 믿지를 않았어요. 그런 데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어딨냐고, 양치기 소녀 취급을 당했지요.
처음에는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았어요. 뭔가 숨겨야 되는 부분인 걸로 알고 친한 사람들에게만 말했어요. 저한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말해줬어요. 남들하고 다른 생활을 했잖아요. 고아원에서 살았다는 거 자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어요. 형제복지원도 저희한테는 어찌됐든 고아원이었잖아요. 어린 나이에 고아원이니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나봐요. 지금도 인식이 좋지 않지만 고아원 자체가 옛날에는 인식이 더 안 좋았잖아요. 거의 부모님한테 버려지거나 그런 사람들이 가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들한테 말을 못했던 거 같아요.
이혜율, <동생한테 늘 미안했어요>, 315쪽

목차

목차
들어가는 말 |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주길…… 6
1부 숫자에 갇힌 시간
잃어버린 13년,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예요 16
박경보 구술 - 홍은전 기록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 43
김희곤 구술 - 박희정 기록
내 인생의 비어버린 시간들, 형제복지원 73
하안녕 구술 - 이묘랑 기록
반평생을 시설에서 살았습니다. 듣고 계십니껴? 103
황송환 구술 - 유해정 기록
27년 만에 손잡으니까 좋데요 128
이상명 구술 - 명숙 기록
2부 시간을 찾는 사람들
서류철 하나에 집약된 인생 160
김영덕 구술 - 서중원 기록
다 내 탓이라고 자책하며 살았어요 188
김철웅 구술 - 유해정 기록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노력했어요 219
이향직 구술 - 홍은전 기록
묻어놓고 살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살아요 243
최승우 구술 - 이묘랑 기록
혼자 살 수 없는 이 삶 자체가 어디서 왔나 268
홍두표 구술 - 박희정 기록
동생한테 늘 미안했어요 294
이혜율 구술 - 명숙 기록
부록
여전히 지옥 속에 사는 생존자들,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라 322
조영선(변호사·형제복지원 대책위 집행위원장)
국가에 의해 버려졌던 삶, 사람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려 합니다 334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형제복지원 연혁 340 / 글쓴이 소개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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