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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미안해 유난히 아팠던 한 병사와 엄마가 나눈 이백스물한 통의 편지

김명옥, 임종인 저 | 해피데이 | 201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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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1078352 / 256쪽 / 500g / 15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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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관심 병사 아들과 엄마가 편지로 주고받은 군대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잘생기고 장래가 촉망되는 명문대학교 학생입니다. 그런 그가 군대에 가서는 관심병사가 되었습니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행된 불법과 왕따는 그를 유령 사병이 되게 하고 결국 파열음이 났습니다. 최근 총기난사 사건의 임병장이 처참한 결과를 낳은 것처럼 또 다른 임병장인 그도 지급 받은 총기를 만지작거렸을 것입니다. 그도 그 임병장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극복해 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엄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과정을 잘 극복하고 결국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입영을 앞둔 우리의 많은 아들들과 엄마들이 안전한 병영에서 국방의 의무도 잘 수행하고 안전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 왔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임병장과 같은 관심 병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책은 그런 마음으로 탄생했습니다.

엄마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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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동안 엄마와 아들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습니다. 엄마의 격려와 아들의 투정이 담겨 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은 잘 자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군대에서 잘 살아남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때론 동문서답이 오가기도 하고, 그럴듯한 개똥철학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민간인 나라와 군인 나라 국경 사이를 오간 220여 통의 편지에는 엄마와 아들이 21개월을 버텨 낸 비법이 담겨 있었습니다. 큼지막한 3호 택배 박스를 두 개나 가득 채운 편지 뭉치는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엄마의 서문 중에서

아들은 이런 변론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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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심병사 고백을 2년이나 주저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분에 넘칠 정도로 가진 것이 많은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부대 밖에는 언제나 위로를 건네는 가족이 있었고, 따뜻한 집이 있었고, 학벌 좋은 대학 친구들이 있었다. 군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나는 언제나 어려움을 털어놓을 곳이 있었다. 중대 안에서는 왕따였지만, 그 밖의 공간에서는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관심병사 극복기는 실상 반쪽짜리도 못 되는 것이다. 말마따나 엄살과 생색이 될까 우려스러웠다. 비빌 언덕 하나 없고, 기댈 곳 하나 없어 외로워하고 힘겨워하는 진짜배기 관심병사 전우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한없이 죄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다만 기대한다. 나의 글이 힘이 있기를. 나의 고백이 용기 있는 다른 진짜배기 고백들을 이끌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병사들이 씩씩하게 견뎌냈음을 증명하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고, 폭언에 시달리고, 아무도 모르게 흐느끼는 친구들이 더 이상 망설이면서 군화 끈과 소총을 만지작거리지 않기를. 다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합세해서 부대 왕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잠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를.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간부들이 외양간의 소를 든든히 지켜주기를. 이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병사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아들의 서문 중에서

저자 소개

  • 저자 : 김명옥, 임종인
저자 : 김명옥
엄마 김명옥은 낭만파입니다. 도시의 아스팔트보다 시골의 오솔길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낭만도 없이 휙휙 달라지는 요즘 세상이 영 어색합니다. 엄마는 건강하고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에서 삶의 뜻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을 걷습니다. 엄마는 대학에서 문헌 정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집 책꽂이는 하나도 정리를 안 합니다. 도서관도 아주아주 가끔 갑니다. 대학 졸업장이 진짜인지 약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도 대학원 수료증은 진짜입니다. 만나는 분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뒤늦게 상담학을 전공했습니다.  

저자 : 임종인
아들 임종인은 안암골에서 우리말과 문학,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만 햇수로 20년이 넘어갑니다. 다섯 살에는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청소부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엔 불쑥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고등학생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인도 오지의 의사가 되고 싶다고 어려운 생물책, 물리책, 화학책을 한아름 받아 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책들을 한 번도 안 펴본 채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 지금, 마지막 20대를 불태울 장래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머리말

“엄마, 미안해!” 라는 말

 

아들딸이 쭈뼛거리며 방에 들어와 어려운 부탁을 하며 ‘엄마, 미안해’하고 말할 때,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식사 약속을 지키기 어렵겠다고 ‘엄마, 미안해!’로 말문을 열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오래 전 가족처럼 지내던 분의 딸이 ‘엄마, 미안해!’라는 전화 한 통을 남기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후부터 생긴 지병입니다. 딸이 떠난 후 무시로 정신을 잃고, 혼이 떠난 지 오랜 사람 같았던 그 어머니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렇게 ‘엄마, 미안해’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슬픔이 됐습니다.

아들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애국가만 들어도 태극기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우연히 군복 입은 사람만 봐도 내 아들같이 반가웠습니다. 군대 뉴스에만 눈과 귀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연평도 도발, 해병대 총기 사건, 따돌림과 가혹 행위 때문에 사망한 병사, 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한 병사들의 사건 사고가 잇다랐습니다. 깨알 같은 기사들 사이에 한 마디가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엄마, 미안해!’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전우들에게 총을 난사한 병사에게 쏟아진 수많은 질문에, 그 아들은 단지 ‘엄마, 미안해!’로 침묵을 대신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병사들이 스스로 삶을 끝내며 남긴 마지막 말은 한결같이 ‘엄마, 미안해!’였습니다.

매년 물난리와 산사태와 크고 작은 사고들이 벌어질 때마다 방송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아서 더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안전 예방에 소홀했던 인재(人災)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렸다가 잊혀지는 ‘엄마, 미안해!’는 아무래도 인재가 아니라 심재(心災)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재앙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한테, 하다못해 따뜻한 친구나 선생님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과 어려움을 말할 수 있었다면, 그 아들들이 그토록 뼈아픈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칩니다.

아들이 전역하고 해를 두 번 넘겼습니다. 만날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미뤘습니다. 그러던 중, 임 병장의 총기난사 사건과 윤 일병의 사망 사건이 많은 아들들과 엄마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라는 인터넷 댓글이, 희미해지던 마음 속 ‘엄마 미안해!’를 깨웠습니다. 다시 아들을 군대로 보내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 기도처럼 일기처럼 썼던 글들을 다듬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동안 엄마와 아들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습니다. 엄마의 격려와 아들의 투정이 담겨 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은 잘 자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군대에서 잘 살아남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때론 동문서답이 오가기도 하고, 그럴듯한 개똥 철학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민간인 나라와 군인 나라의 국경 사이를 오간 220여 통의 편지에는 엄마와 아들이 21개월을 버텨 낸 비법이 담겨 있었습니다. 큼지막한 3호 택배 박스를 두 개나 가득 채운 편지 뭉치는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됩니다.

 

 

한 관심병사의 변론

 

아! 엄마에게 못내 섭섭하다. 아들은 군에 다시 입대하는 꿈만 꿔도 가슴이 벌렁대는데, 엄마는 아들의 군 생활이 ‘힘겨웠지만 행복했던 추억’인가 보다. 군대 추억을 담은 글 좀 써보자는 엄마의 말이 야속했다. 제대를 두어 달 앞두고 군대 글 좀 쓰라고 했을 때, 단박에 거절했어야 했다. 2년 넘게 원고 독촉에 시달렸다. 제안이 독촉이 되고, 독촉이 잔소리가 됐다. 견딜 수가 없었다. 갑이 아니면 알아서 바닥을 기어야 한다는, 군대에서의 깨달음은 우리 집 권력 구조에서도 똑같이 통했다.

나는 군대가 싫었다. 궁금했다. 나는 정말 신성한 국토방위를 위해, 내 젊은 날을 온전히 바친 것일까? 오히려 군대에서 어떻게 하면 약삭빠르고 요령 있게 인생을 살 수 있는지를 홀랑 배워 온 것은 아니었을까? 군대는 소시민을 양성하는 가장 강력한 교육 기관이라던 말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뭔가 잘못된 것에 용감하게 나서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눈치만 살살 살피는 소시민 말이다. 내 선임들은 항상 내게 가르쳤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 없는데, 다만 들키지만 마라!’ 라고 말이다.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속이 헐어날 것만 같은 세월호의 충격과 그 후속 처리 과정 뉴스를 볼 때마다 자꾸 선임들의 목소리가 망령처럼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될 것이 들킨 날, 쉬쉬 숨겨오던 부조리가 들통난 날의 무책임한 모습하고 꽤 닮아 있었다.

21개월 ‘군대 학교’를 졸업할 즈음, 내 모습이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부대 생활에 요령이 생기면서, 눈속임을 할 줄 알게 되면서, 고참이 되면서 슬슬 많은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나태해진 나 자신을 볼 때마다 고생했던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가 된 것만 같아서 문득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죽어라 싫어하던 선임의 잔소리를 똑같이 읊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오히려 마음 졸이고 몸 피곤하던 쫄병 시절이 가장 나 자신다운 시간이었다. 아니 차라리 군대에 가기 전의 내 모습이 더 순수했다. 내 안의 소시민을 느낄 때마다 나는 괜히 군대를 더 미워했다.

나의 영원한 카리스마 캡틴, 수송관이 한 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는 것이 슬픈 것은 몸이 쇠약해지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나어린 시절 꿈꾸던 희망과 믿음이 하나 둘씩 망가지고 쪼개져 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삶이 슬퍼지는 이유라고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 벼 밑동만 널린 늦가을 논두렁 길 위에서, 부대에서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중년 남자의 눈빛이 이내 축축해졌다. 고작 몇 년이나 살면서 인생의 무엇을 맛보고 알았겠냐마는, 스물 셋 먹은 나도 덩달아 침묵을 지켰다.

군대야말로 삶이 얼마나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지, 얼마나 인생이 녹록지 않은지 알려준 곳이었다. 내 희망과 믿음이 기만당한 곳이었다. 집단의 문화를 거슬러가며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고발하는 비판 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배웠다. 여러 사람이 얼마나 손쉽게 한 사람을 무력한 바보로 만들 수 있는지도 알았다. 처음으로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는 대로, 생각없이 따르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방법이었다. 아마 데카르트가 내 동기로 군 생활을 같이 했더라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위대한 선언이 목구멍 뒤로 쑥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오히려 몇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실존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을 것 같았다. 우리 부대는 내가 기름칠 잘 된 톱니바퀴 부속품이 되기를 원했지만, 나는 선임들이 바라는 ‘적절한 부속품’은 아니었다.

부대 생각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군에서 ‘썩었던’ 기간만큼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조금씩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관심병사 타이틀이 부끄러워서 쫄병 시절의 기억을 깨끗하게 도려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결함마저 내 삶의 일부분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생각의 폭이 넓어진 덕분일까.

한동안 신문과 방송에서 관심병사라는 말이 엄청 많이 나왔다. 전역할 무렵만 하더라도 관심병사는 몇몇만 아는 군대 용어였는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관심병사를 알 법하다. 그러나 관심병사는 절대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아니었다. ‘불미스런 사고의 장본인이 알고보니 관심병사였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소를 잃고 나서 슬쩍 눈가림으로 외양간 점검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관심병사라고 불린 저 친구한테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었을까 싶었다.

내 관심병사 고백을 누차 주저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분에 넘칠 정도로 가진 것이 많은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부대 밖에는 언제나 위로를 건네는 가족이 있었고, 따뜻한 집이 있었고, 학벌 좋은 대학 친구들이 있었다. 군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나는 언제나 어려움을 털어놓을 곳이 있었다. 중대 안에서는 왕따였지만, 그 밖의 공간에서는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관심병사 극복기는 실상 반쪽짜리도 못 되는 얄팍한 것이었다. 말마따나 ‘가진 자’의 엄살과 생색이 될까 우려스러웠다. 비빌 언덕 하나 없고, 기댈 곳 하나 없어 외로워하고 힘겨워하는 진짜배기 관심병사 전우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한없이 죄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다만 기대한다. 나의 고백이 용기 있는 다른 고백들을 이끌어내는 시작이 되기를,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병사들이 씩씩하게 군 생활을 견뎌냈음을 알아주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고, 욕먹고, 구석에 숨어 몰래 숨죽여 우는 친구들이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군화끈과 소총을 만지작거리는 일이 없기를,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 휩쓸려 동료를 따돌리는 자들이 부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수 있게 되기를, 더 많은 간부들이 부하 병사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기를, 이 사회가 관심병사를 위로해주기를.

 

2010년 가을. 22세. 쫄병 임종인을 다시 읽는다.

책 속에서

엄마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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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동안 엄마와 아들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습니다. 엄마의 격려와 아들의 투정이 담겨 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은 잘 자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군대에서 잘 살아남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때론 동문서답이 오가기도 하고, 그럴듯한 개똥철학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민간인 나라와 군인 나라 국경 사이를 오간 220여 통의 편지에는 엄마와 아들이 21개월을 버텨 낸 비법이 담겨 있었습니다. 큼지막한 3호 택배 박스를 두 개나 가득 채운 편지 뭉치는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엄마의 서문 중에서


아들은 이렇게 변론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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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심병사 고백을 2년이나 주저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분에 넘칠 정도로 가진 것이 많은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부대 밖에는 언제나 위로를 건네는 가족이 있었고, 따뜻한 집이 있었고, 학벌 좋은 대학 친구들이 있었다. 군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나는 언제나 어려움을 털어놓을 곳이 있었다. 중대 안에서는 왕따였지만, 그 밖의 공간에서는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관심병사 극복기는 실상 반쪽짜리도 못 되는 것이다. 말마따나 엄살과 생색이 될까 우려스러웠다. 비빌 언덕 하나 없고, 기댈 곳 하나 없어 외로워하고 힘겨워하는 진짜배기 관심병사 전우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한없이 죄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다만 기대한다. 나의 글이 힘이 있기를. 나의 고백이 용기 있는 다른 진짜배기 고백들을 이끌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병사들이 씩씩하게 견뎌냈음을 증명하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고, 폭언에 시달리고, 아무도 모르게 흐느끼는 친구들이 더 이상 망설이면서 군화 끈과 소총을 만지작거리지 않기를. 다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합세해서 부대 왕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잠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를.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간부들이 외양간의 소를 든든히 지켜주기를. 이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병사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아들의 서문 중에서

 

 

콩쥐 이병

연평도 도발에 이어 북핵 6자회담 정보를 알리는 기사들이 신문에 많이 등장했다. 그 사이사이에 고참들의 괴롭힘으로 백혈병을 앓다가 사망한 의경 사건이 보도됐다. 때맞춰 가혹행위를 못 견딘 6명의 전경들이 자대를 탈출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아이들이 수험생일 때는 신문의 교육과 문화 지면만 보였는데, 아들을 군에 보내 놓으니 나라 안팎의 정세와 군 관련 소식만 눈에 크게 띈다.
나쁜 나라다. 나라를 위해 정부를 믿고 군에 입대했는데, 어떻게 선임들의 가혹행위로 스트레스를 받아 몹쓸 병에 걸려 죽게 했을꼬?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북과 대치하는 이 나라의 정치 현실, 가혹행위를 당해도 명쾌한 해결이 어려운 군의 행정과 시스템, 선임들의 폭력적인 인격장애와 이상심리가 주범이었다. 시대의 아픔과 겹치고 꼬인 악연으로 한 젊은이가 입대 9개월 만에 불치병을 얻었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죽음을 맞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간간이 부대에 복귀했을 때, 취사병에게 죽 한 그릇 청한 것도 거절당했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알려졌다.
아들을 잃은 엄마는 나라와 선임병들에게 책임을 물었고, 군은 그제야 허둥지둥 재조사를 지시하며 사건 수습에 나섰다. ‘백혈병 사망 의경’의 가혹행위와 관련된 17명은 사법처리됐고, 그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2명에겐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아직은 살 만한 나라다. 새벽에 탈영하여 가혹행위를 고발한 6명의 전경들은 자대 배치 직후부터 선임들로부터 수차례 구타 당했다고 했다. 군기라는 명목으로 수면과 휴식을 박탈 당했다. 탈영자들은 군가와 선임 이름 외우기를 강요당했다고 호소했다.
군은 과감하게 일처리를 했다. 탈영한 대원들을 내부고발자로 대우해 피해가 없도록 했다. 가혹행위에 관련된 선임 병사들을 형사 입건했다. 고질적으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잔존해 온 해당 부대를 해체시켰다.
신문에 군 관련 기사만 나오면 오려서 읽고 또 읽었다. 사법적인 처리와 해결들로 표면에 떠오른 문제들을 해결했지만, 생명을 잃은 젊음은 어찌할까?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그 무엇이 위로가 될까? 전경과 의경으로 자식을 보낸 부모들은 또 얼마나 불안할까? 또 우리 아들은 구타와 가혹행위에서 얼마나 안전할 것인가?
가끔 걸려오는 전화 외엔 군에 있는 아들의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잘 지낸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래도 엄마는 그 목소리에서 자식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정말 평안한 것인지 모든 감각을 세워 상황을 가늠해두어야 했다.
그러던 한겨울 깊은 밤에 느닷없는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 나 숨이 막혀요…….”
“왜? 무슨 일인데? ”
“······.”
“너, 똑바로 말해봐! 너 구타당하는 거 맞지?”
“······끄억. 끄으윽······”
수화기 너머로 목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고, 손가락 마디 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 잘 견딜게요. 읍! 으음! 엄마 목소리라도 들으면 힘이 날 것 같아서요.”
주변이 의식되는지, 전화도 다 검열을 받는지, 아들은 짧게만 작은 조약돌을 흘렸다. 작은 단서만으로도 아들에게 닥친 버거운 상황이 감지됐다.
아들은 입대한 지 3개월 된 콩쥐 이병이었다. 영하 16도에도 맨손으로 얼음물 세차를 했고, 청소와 내무반 잡무를 도맡아 했다. 밥 먹다가도 불려가서 면박 당하고 폭언을 듣는 일은 일상인 것 같았다. 업무와 관련된 암기사항들을 수첩에 들고 다니며 외워도 늘상 탈탈 털리는 듯했다. 책도 못 읽게 통제하고, 편지조차도 새벽에 화장실에 가서 읽는다고 했다. 개인 관물대도 무시로 침범 당하고. 무슨 빽으로 1호차 운전병 후보로 뽑혀왔느냐며 협박도 당했다. 이런 일들 외에 어떤 상황이 겹쳐진 것일까? 얼마나 위협적인 분위기였으면 숨이 막힌다고 할까?


엄마, 미안해!

울릉도에서 며칠 동안 쉬고 있는 중이었다. 멀미약을 하도 먹어 비몽사몽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저녁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해병대 병사가 기수열외에 원한을 품고 내무반 동료들을 네 명이나 사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사고를 낸 병사는 수류탄으로 자폭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국군병원에서 치료 중이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잘은 모르지만, 2005년 연천 사건 이후로 가장 심각한 총기 사건이라고 했다.
기수열외란 해병대 내에서 왕따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투명인간처럼 아예 인간 취급을 안 해주는 경우라고 했다. 후임병들까지 무시하고 자존심을 극도로 무너뜨리는 악습이었다. 기수열외와 가혹행위가 사라져야 한다고 사건을 일으킨 사병은 병원에서 필답했다. 하루가 다르게 그 병사는 문제아로 취급되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다. 해병대뿐 아니라 전군의 가혹행위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서 언론은 오히려 모든 원인을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몰아갔다. 공범이 있다고 떠벌리면서.
공범으로 체포된 정 이병이 받은 가혹행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선임을 하나님으로 믿으라고도 했고, 사타구니 부분에 모기약을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기도 했다. 자극적인 성분의 연고를 얼굴에 바르고 씻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선임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롭게 두 병사의 인격을 짓밟았다. 총기로 동료들을 사살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죄이다. 하지만, 선임들의 가혹행위가 분노로 쌓이고 쌓여 극단적인 결말을 가져왔다는 것에는 왜 초점을 두지 않는 것일까? 군기라는 명목 하에 암묵적으로 허락되었던 가혹행위가 살인을 불러올 만큼의 분노와 적의를 만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절망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인생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충격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고병사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글만 끄적였다.
낙서처럼 쓴 글 끝에 눈에 확 들어온 네 글자.
“엄마, 미안해!”
해병대의 군기와 고된 훈련 가운데도, 살의를 주체할 수 없는 피폐함 가운데도 작은 햇살처럼 남아있는 따뜻하고 선량한 마지막 양심.
“엄마, 미안해!”
가혹행위를 했다지만 너무 큰 대가를 지불한 사망 병사들의 엄마. 더 이상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살인자 아들의 엄마. 모든 언론과 군 책임자들의 단편적인 손가락질로, 사건을 일으킨 병사는 아무에게도 변호받지 못하고 있었다. ‘공공의 적’이 된 아들을, 남은 세월 내내 죄수로 매장되어 생을 마감해야 하는 아들을 바라봐야하는 엄마에게, 이미 죽은 목숨일 엄마에게, 아들은 정말 미안하다고 한다.
가혹행위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뀐 값이, 부화뇌동하는 군중심리에 휩쓸려 분별없이 가혹행위에 합세한 값이, 결국 다섯 아이들과 다섯 엄마들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엄마들에게나 자신의 엄마에게나, 김 상병은 모든 엄마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이 알 수 없는 분노와 답답함으로 저항할 수 없는 약자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있는지, 혹은 반대로 폐쇄된 공간에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는지 엄마들이 헤아려볼 삶의 여유들은 없었을까? 아들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엄마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불화와 애정 결핍으로 얼룩진 가정이, 폭력적인 경쟁을 조장하고 권하는 사회가, 괴벽스러운 성격 장애자를 걸러내지 못하고 무조건 군 입대를 강행한 병무청이, 여하한 사건 사고에 노출된 군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정치가들과 군 책임자들이,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다 엄마가 잘못했다. 다 엉터리고 다 뒤죽박죽이었어도,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을 목숨처럼 지켜내지 못한 엄마가 다 미안하다. 내 아들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아들들이라도 함께 지켜내지 못한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잘못한 거다. 미안한 거다. 우리의 아들들이 숨 막히는 갈등과 위기 가운데 치열하게 고민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일상을 살아간 엄마들이 미련하고 어리석었다.
구조적인 제도나 정치적인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 바르게 세워지도록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단절되고 고립된 군대에서 다스려지지 않은 분노와 원망을 약자에게 가혹행위를 하면서 풀고 있지는 않는지 아들들을 세심히 살펴야 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분노와 원망을 다스리고 정화시킬 수 있도록, 아들들과 공감하고 소통했어야 했다.
아침에 신문을 펴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군대 내 자살 소식이 연이어 전해진다.
“나는 이제 삶을 마감하려 한다. 엄마도 되게 슬퍼하시겠지.”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엄마가 가장 눈에 걸렸겠지. 차마 힘내서 극복하고 견디지 못하고 슬픈 삶을 마감하려는 마지막 순간의 진실.

“엄마 미안해!”

하나님의 눈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내게 군대에 딱 맞는 신체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코끼리 가죽만큼 튼튼한 발바닥이었다. 나는 행군의 신에게 축복이라도 받고 태어난 모양이다. 입대 전에 군인 사진을 찾아봤을 때, 행군을 마친 군인의 발 사진을 보고 덜컥 겁을 먹었지만, 내게 그런 영광의 상처는 한 번도 없었다. 기껏 훈련소에 챙겨간 물집 방지용 스티커나 스타킹을 쓸 일도 없었다. 결국 발바닥 패드 스티커는 별 모양으로 오려서 전투모에 붙여가며 장군 놀이에 써먹었고, 스타킹은 야한 농담 소품으로 써먹었다. 자대에서도 40Km 야간 행군 한 번 다녀오면, 분대 후임은 발바닥에 피물집이 터져 며칠 동안 벽을 짚고 걸어 다녔지만, 나는 슬쩍 발바닥이 뜨끈뜨끈하다가 말았다. 뭐든 잘 하면 좋아하는 법이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행군을 좋아했다. 상병이 된 이후에 뒤늦게 들어간 수송부 행정반의 잉여자원이어서 행군 인원으로 발탁되기도 했지만, 짬이 차서 눈치껏 행군을 빼먹을 수 있는 상황에도 자원해서 ‘야간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시간이 좋았다.
산 속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짙다. 휴전선과 채 20Km도 떨어지지 않은 산자락에 이백여 명의 어린 군인들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걷는다. 10분짜리 휴식 시간이면, 모두들 군장을 맨 상태로 벌러덩 나자빠져 누워 말없이 밤하늘을 응시하곤 한다. 부산스러운 소리 너머에선 밤의 소리가 들린다. 햄버거 빵에 뿌려 놓은 깨알 같은 별 아래 소쩍새가 울고 저 멀리 동네에선 잠에서 깬 개들이 짖는데, 바스락대는 밤벌레들이 여기저기 귀를 간지럽힌다. 소변을 보네 담배를 피우네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느끼는 묘한 적막감과 고독은 운치가 있다. 나홀로 거대한 밤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온갖 공상과 상상으로 수놓는 밤은 꽤 중독성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은거하는 도인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쉬는 시간 초코파이 한 입 베어 물고, 멍하니 어둠을 바라볼 때, 한 마리 반딧불이라도 반짝이며 날아가면, 감성으로 넘치는 완벽한 밤이 완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감동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치고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훈련 중에 나 정도 수준의 ‘변태 감성’을 공유하기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쥐어 박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모두 죽을상을 쓰고 있는데 홀로 실실거리면서 좋아라 하고 있으니, 가끔 이상한 놈 취급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마저도 즐거웠다. 날 보고 어이없어 하는 선임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즐길 만했다. 점점 ‘돌아이’가 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돌아이였던 녀석이 제 본모습을 깨달은 것일까.
때는 바야흐로 유격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행군 길이었다. 산길을 뱅글뱅글 돌다가 비로소 평지에 내려와 저수지 옆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날따라 컨디션도 좋았다. 힘겨웠던 유격 훈련을 끝낸 성취감도 가득했다. 가능하다면, 며칠이고 이 밤길을 걷고픈 마음이었다. 실낱같은 바람이 방탄모 위를 훑고 지나갔다. 청개구리도 잠든 깊은 밤, 적막한 저수지에서 아주 작게 물거품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라도 한 줄기 그을 것 같은 하늘을 보니 글 한 토막이 생각났다. 비를 ‘하나님의 눈물’로 그려 낸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였다. 옆에 발라당 누워버린 선임한테 기운이라도 북돋울 겸 말을 건넸다.

“비가 내리면, 마른 땅에 딱 닿는 첫 방울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
“다른 물방울보다 앞서서 맨 처음으로 땅을 적시는 1등 물방울 말입니다.”
“어, 그게 왜.”
“그거 신의 눈물방울일지도 모릅니다.”
“.......”
“땅이 그동안 지치고 고생했다고 위로하고 적셔 주는 그 첫 빗방울은, 연민 섞인 하나님의 눈물일지도 모릅니다.”
“...... 하아...... 미친 씨발.”

미친놈은 약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때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었는지, 그 진저리치는 반응조차도 내심 즐거웠다.
오지랖 넓은 내 혓바닥이 천기를 누설한 까닭일까. 나 때문에 하나님이 쌍욕을 먹어서 그랬을까. 그때부터 행군의 막바지 한 시간 반 동안 죽어라 비가 내렸다. 완벽했던 밤은 ‘고난의 행군’이 됐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썩은 우비를 뒤집어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곰팡내 풀풀 풍기며 쫄딱 젖은 모양이 하나님의 눈물보다는 오줌을 맞은 것에 가까웠다. 그때 내 옆에 앉았던 모 상병아, 내가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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