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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비원의 바람을 따라 흐르다

김창환 저 | 행복에너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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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6020776 / 272쪽 / 381g /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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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누구나 구불거리는 질곡 같은 삶을 헤쳐나간다.
그들의 길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인 에세이가 아닌 ‘우리들의 길 찾기를 위한 새로운 발상’


낯설고 당혹스럽다. 이 책은 일반적인 에세이나 인문학의 저술 형태가 아니다. 이색적이다. 이 같은 이색성이 참신함과 독창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감동을 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저자가 사물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이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주어진 주제의 특성과 그의 치밀하고 적극적인 탐구정신 때문이다. 눈길을 끌고자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니다.

저자는 해방이라는 찬란한 선물과 함께 안겨진 분단 시대에 태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흔히 이들을 베이비부머 세대라 부른다. 그들은 전쟁이 휩쓸고 이념이 휩쓸고 간 불모의 땅에서 때로는 인간다운 삶을 철저히 박탈당하고 살아왔다. 여기서 인간다운 삶, 인간적 권리의 회복이 선명하게 얼굴을 내민다. 그 얼굴이 저자가 우선적으로 설정한 주제다.(하이데거의 말에 의하면 이는 피투된 존재에서 기투된 존재로의 자각이다.)

때로 저자는 작품에서 극과 극을 동시에 등장시켜 쌍방 시각의 입체적 조명방법을 쓰고 있다. 한쪽에서만 바라보는 편향적 감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우리는 편향성의 오류로 현실을 판단하는데 익숙해있고 또 이를 개선하는데 소홀했다. 편향성은 나에게 직접적인 삶의 편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불행한 우리나라 역사의 기반 위에서.

저자는 이와 함께 자신이 살아 온 대한민국을 말한다. 어린 시절의 반공교육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필수과목이었지만 저자는 직업군인으로서도 참으로 긴 세월동안 오직 반공 이념 교육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을 살아 온 사람이다.
남북의 첨예한 이념 논쟁의 선봉에 있던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 가슴을 열고 이야기 한다. 극과 극의 만남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인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념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인간은 이념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유산을 물려받고 강대국들에 의해서 분단되어 비극을 연출하도록 강제되고 있는 땅. 인간적 자긍심을 포기하며 타락하고 남을 짓밟아야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우리가(적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살고 싶지 않은 사람) 이를 거부하며 저항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것이 이 상생의 원리다.
누구도 비교논리에 의해서 상처받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며 상생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 이런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어서 달라지고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 김창환 작가가 이 장편 에세이들을 통해서 전해 주는 소중한 메시지다.

(김우종金宇鍾 문학평론가의 評說을 요약)

저자 소개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푸른 군복을 입고 젊음을 보냈으며, 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에 근무하고 있다. 들길을 지나 산을 오르며 만나는 들꽃이나 나무들과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을 전하는 일을 큰 즐거움으로 알고 지낸다. 2009년〈에세이스트〉로 등단했으며, 수필집으로 《내 마음의 등불》《천상 촌놈인 스물두 가지 이유》가 있다.

책 속에서

책을 펴내며

산등성이는 구불거리며 오르다가 다시 구불거리며 흘러내린다. 산등성이가 흘러내린 곳으로 개울도 구불거리며 흘러내려 간다.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산등성이와 개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했고 고샅길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길은 구불거리며 마을을 이어놓고 신작로를 따라 대처(大處)로 이어졌다. 개울도 구불거리며 흐르다가 강으로 이어지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자연에서 반듯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반듯한 것은 인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반듯한 것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편의를 위해 자연에 가한 횡포였고 억압이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도 강이나 길처럼 구불거리며 흐른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구불거리며 흐르는 것이었다.
이 땅에 처음 철길이 놓인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당시의 철길은 산과 들의 이어짐처럼 구불거리기도 했지만, 두 선로의 간격 차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반듯한 것을 추구하고 지향했다. 기차가 다니게 되면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대처로 가는 것에도, 시간의 억압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왕조가 몰락해가면서 열강의 침탈이 시작되었고 분열과 자폐(滋弊)는 결국 일제의 침략을 불러왔다. 대륙과 이어지며 대양의 물길이 흘러드는 반도는 숙명처럼 끝없이 외세에 시달렸다. 해방과 분단, 군정으로 양분된 이념의 대립은 끝내 동족 간의 사변을 불러왔다.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의를 앞세워 구부러진 것들을 반듯하게 만들겠다는 시작점은 같다. 그들은 정의를 내세워 구불거리며 흐르던 길을 반듯하게 만들었고 역시 구부러진 돌담을 허물어 반듯한 벽돌담을 만들어갔다. 자신들의 잣대로 구부러진 사람들을 억압하고 한 줄로 반듯하게 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들도 결국 구부러진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구불거리며 흐르는 것이었고 인생사도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는 구부러진 길을 직선으로 만드는 방법에 있다. 합의에 의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강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구부러진 길을 직선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서투른 정의를 시대의 화두인 양 급히 빼들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모 문학단체의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장소였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계신 두 분은 초면이었고 60대 후반쯤의 연배로 보이는 분들이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으로 두 분은 강단에서 은퇴하신 전직 교수님들이셨다. 당시 나누었던 대화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이더라.”
물론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의미 있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수까지 지내신 학자이신 분들이니 그저 그런 농담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때때로 그 말이 생각난다. 그것은 어쩌면 그 말이 일견 타당성이 있다는 내 속내일 듯하다. 그러나 다시 명징한 사유를 시작해본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단순하게 ‘운’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그러나 ‘운’을 또 완전히 버리기에는 여러 가지 제반 현상들이 이를 제어한다.
인생을 결정짓는 요소를 세 가지로 한정해 보기로 한다.
한 가지는 역시 ‘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는 유전과 사주팔자이다. 두 번째의 것은 환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격이다. 이 세 가지 것들은 각각 별개의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호 유기적으로도 작용한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人間’은 혼자서 인간일 수 없다. 객체로서의 존재, 즉 관계가 사람을 이룬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한 사람의 존재는 그 스스로 주체와 외부에서 그를 보는 타자로서의 관계에서 그 존재가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인생사는 관계라는 말과도 상통할 수 있다. 결국, 운이라는 것의 본질 또한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운이 좋아서 출세한 사람. 능력이 출중해서 성공한 사람. 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 몫을 훌륭히 해냈음이 분명하다. 물론 자본주의의 특성상 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소수 부류에 속하지 않고 ‘운’ 하나로 인생을 재단한다면 세상사 너무 살맛이 나질 않을 것이다.

만났었고 만나야만 하는 사람, 우연처럼 만나지는 숱한 사람들, 구불거리며 질곡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배우고 학습하는 것들은 지혜가 아니라 지식이다. 성현이나 종교를 통해 학습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학자는 물론 수도승이나 성직자가 모두 지혜로운 이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 지혜라는 것은 살아가는 현실의 희로애락에서 발현되는 것들이다.
살아가면서 다양하게 만나는 사람들, 누구나 구불거리는 질곡 같은 삶을 헤쳐나간다. 그들의 길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도 흔히 희망을 이야기한다.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 오체투지의 정신으로 자신의 인생을 극복하려는 사람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자신의 저주스런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있다. 이 책은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어둠 속에서-그것이 자의든 타의든-사는 사람들의 그 힘겨운 삶의 단면들을 보고자 한다.
저마다의 삶은 바람과도 같이 흐르는 것이어서 실체가 불분명한 거짓과 진실의 혼재일 수 있다. 거짓은 나에게서 진실의 외피로 포장되기도 하고 진실을 거짓으로 감추기도 한다. 산을 오르고 내리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 비원의 바람을 따라 흐른 이야기들이다. 나의 삶 속에서 거짓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비원의 바람을 따라 흐르면서는 진실도 따라 흐르는 것이었다.
죽지 않은 이상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주어진 삶의 멍에를 벗어날 지혜가 저마다 샘솟기를 기원한다. 지식이 아닌 지혜가 희망을 불러온다. 고로 얕은 지식으로 섣부른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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