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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반환 청구소송

강정민 저 | 바다 | 201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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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5617344 / 384쪽 / 540g / 145 x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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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우리에게 간도는 무엇인가? 간도는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 너머에 위치하는 땅이다. 간도가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과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지역이라는 뜻에서 사이 간(間) 자와 섬 도(島) 자를 써서 간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가 다스리는 한민족의 영토였으나 926년 발해 멸망 후 우리에게 900여 년 동안 잊혀진 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9세기 말 가렴... 우리에게 간도는 무엇인가? 간도는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 너머에 위치하는 땅이다. 간도가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과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지역이라는 뜻에서 사이 간(間) 자와 섬 도(島) 자를 써서 간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가 다스리는 한민족의 영토였으나 926년 발해 멸망 후 우리에게 900여 년 동안 잊혀진 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9세기 말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조상들은 무인국경지대였던 간도로 넘어가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조상들은 힘들여 개간한 땅을 차지하려는 청인들에게 수난을 받으면서도 청으로 귀화하지 않았고 일제가 청에 간도를 넘겨줬을 때도 그 땅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민족은 간도에 자리 잡았고,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는 우리에게 독립운동의 터전이자 또 하나의 조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또 다시 간도를 잊어가고 있는가.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은 독도만이 아니다 민족혼의 요람이자 독립투쟁의 터전이었던 간도의 영유권 분쟁 현직 변호사가 《독도반환 청구소송》에 이어 파고든 문제적 ‘재판소설’ ‘많이 들어본 단어인데, 간도가 어디더라?’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토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야당 후보가 당선되고, 대한민국은 중국 영토가 된 간도를 되찾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다. 대통령 당선인의 간곡한 부탁에 독도반환청구소송을 승소로 이끌었던 김명찬 변호사와 소송팀이 다시 뭉쳐 법정 공방을 준비한다. 독도와 달리 간도를 되찾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처음 부딪히는 난관은 간도의 위치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을 왜 되찾아야 하는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김 변호사는 간도를 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네? 간도가 원래 우리 땅이기 때문에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단지 그것뿐입니까?” “……?” “간도는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제공해준 땅입니다.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줬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넘겨준 간도가 있었기에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간도는 식민지시절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준 또 하나의 조선이었습니다. 일본에게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는 간도는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래서 간도참변을 일으켜 우리 조상들을 무참히 살육해버렸죠. 독립을 위해 싸우던 조상들이 간도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런 간도를 내버려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조선시대의 봉금지역(비무장지대처럼 선이 아닌 공간으로 설정한 국경)이었던 간도는 먹고살기 힘들던 조선 백성들에게 비옥한 토지를 제공했고, 일제강점기 한민족에게 독립의 발판을 마련해준 땅이었다. 간도를 되찾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이 풀어내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는 법정. 현직 변호사인 저자는 한국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조건 간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라, 간도라는 땅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함이다. 간도는 과연 한국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소송 자격, 권리의 시효 등 이어지는 중국 측 공세 백두산정계비와 간도협약 효력을 둘러싼 치열한 법리 싸움 “‘피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원고 대한민국에게 사건대상 간도를 반환하라’는 판결을 구합니다.” 소장을 받은 중국은 한국이 말도 안 되는 소송을 걸어왔다고 여긴다. ‘한국이 북한처럼 간도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에 편입된 간도에 대해 묵인해왔다. 그런 한국이 이제 와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러나 한국 소송팀은 생각지도 못한 이론으로 중국의 생각을 뒤집는다. ‘아버지’ 대한제국의 영토 분쟁 문제는 ‘두 아들’인 한국과 북한에게 모두 승계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에 중국은 일제강점기 당시 간도협약을 통해 일본에게 간도를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이 소송은 이유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맺어진 협약은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상반하는 것이었다. 한국 측은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일본이 체결한 협약 또한 무효라는 주장을 펼친다. 양측의 공방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계속되고, 그 와중에 한국은 1882년을 결정적 기일로 주장한다. 결정적 기일은 영토분쟁이 처음 일어난 일자를 말하며, 이것이 정해지면 재판부는 그 시점 이전의 상황만을 토대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의 결정적 기일 주장에 따라 백두산정계비가 중요한 증거로 떠오른다. 西爲鴨錄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하여 두 강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분수령에 비를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한다. 1885년과 1887년에 이미 청과 조선 사이에도 국경을 정하고자 하는 회담이 있었지만 모두 결렬되고 만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명시한 백두산정계비 비문 내용을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은 송화강 상류인 홍토수라고 주장했으나 결국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논란이 135년이 지난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소송으로 이어진 것이다. 900년 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땅 백두산 화산 폭발설로 드러나는 발해 멸망의 비밀 역사적 증거들을 낱낱이 제시하며 계속되던 영토 소송은 급기야 역사 전쟁으로 번진다. 중국은 간도 지역이 한국의 역사였던 적이 없다며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한 번이라도 점령한 역사가 없었던 땅이 한국의 땅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소위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이다. 이에 한국 소송팀은 《삼국지》《삼국유사》 등 역사서의 기록을 증거로 제시하며 중국의 억지를 일축한다. 피고의 역사서 중에 진수의 《삼국지》가 있습니다. 위촉오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변, 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수가 이들 국가들을 모두 같은 동이족으로 인식하였다는 점, 나아가 위촉오 삼국의 역사와 별개의 역사로 인식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 측 변론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한국의 역사라고는 해도, 발해 멸망 후 900년 동안 간도 지역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중국의 변론에 한국 측은 혼란에 빠진다. 조선의 유학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두 번의 감계회담을 치렀던 이중하 등이 남긴 글에는 ‘토문강이 두만강’이며 간도는 조선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다. … 조선의 영토가 금구와 같이 확고한데 쓸모없는 땅을 가지고 다툴 이유가 없다.” - 성호 이익 ‘도대체 왜 이런 글을 남긴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글에 좌절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김명찬 변호사와 한국 소송팀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만큼 강성했던 발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멸망했고 그 후에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부흥운동이랄 만한 것도 없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그 원인이라는 사

저자 소개

한양대 법대 및 경희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제4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오랜 기간 변호사로 활동해온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전공인 법률지식과 시사적 이슈를 결합하여 가상의 재판과정을 그리는 첫 소설 《독도반환 청구소송》을 쓰게 되었다. 
그는 상반되는 두 입장을 총체적으로 표출하는 소송방식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이자 문학 아니겠느냐는 소신으로 글쓰기에 임했다 한다. 첫 작품 독도 이야기를 세상에 선보인 그는, 이제 그 소신으로 ‘법과 삶’을 다룬 일련의 재판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나갈 계획이다. 잃어버린 또 하나의 우리 땅인 간도를 반환받고자 재판을 벌이는 《간도반환 청구소송》을 집필 중이며, 재건축 재개발 조합의 현실을 다룬 《매몰비용 청구소송》 이야기도 구상 중이다.



 

책 속에서

어떻게든 이번 회담을 결렬시켜야만 하는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냈다.
사실 홍토수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중하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이라고 한다면 홍단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토문강이 아닌 두만강을 국경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었다. 청은 토문강이 아닌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홍단수를 인정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백두산정계비는 분명 압록강과 토문강이 양국의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정계비가 세워진 지점에서 솟는 물은 분명 토문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처음부터 이중하는 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홍토수를 주장함으로써 회담을 결렬시킬 작정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으면 이번 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다. 추후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 강토를 지킬 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회담은 그렇게 결렬되었다.
그리고 135년 뒤. _18쪽

“당선인께서는 왜 간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김 변호사의 질문에 대통령 당선인이 말을 멈추고 김 변호사를 빤히 바라본다.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가 어렸을 때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본 적도 없고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를 드린 적도 없습니다. 명절 때면 어김없이 선산을 찾아 인사드렸는데 할아버지 묘만 없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궁금해서 아버지께 여쭤보았지요. 아버지는 어린 저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는데 할아버지께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간도로 가셨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답니다. 일본 관동군과의 전투에서 돌아가셨는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는 간도에서 온갖 고생을 하시다가 해방 후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오셨습니다.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빈손이라 가지 못했고 명절 때만 성묘하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하시면서 가정을 꾸리셨는데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이 하셨습니다. 독립지사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었다고 하시더군요. 김 변호사님, 역대 정부가 간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잖아요. 오랜 냉전이 끝나고 중국과 수교하게 되었는데 간도 문제로 인해 한중관계가 악화되면 국익 차원에서 여러 가지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 아닌가요?”
“그건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합니다.”
“표면상의 이유라고요?”
“네. 간도 문제는 친일파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간도는 항일운동의 터전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지역입니다. 간도 문제가 불거지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고 필연적으로 친일파 문제가 대두되게 되어 있습니다. 버젓이 정치판에서 행세하고 있던 친일파들이 중국과의 관계악화를 명분으로 간도 문제를 회피해버린 것입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친일파들도 모두 운명을 달리했기에 비로소 이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_37쪽


간도협약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재산을 인정하고 청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조선인들의 간도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왜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간도에 주로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 변호사는 당시 간도 거주 인구조사통계표를 찾아보았다. 거주 인구의 8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파출소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일본은 1907년 8월 19일 용정촌에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를 개설했다. 헌병 46명, 조선 순검 19명, 기타 8명 등 총 64명 규모였다. 파출소장은 사이토 중좌, 총무과장은 시노다였다. 사이토는 조선 주차군 사령부 소속으로 러일 전쟁 당시 여순 군정관을 지냈고 중국통으로 알려져 있던 자인데 파견 직후 대좌로 승진하였다. 총무과장 시노다는 국제법학자 겸 변호사로 러일전쟁 당시 국제법 고문관으로 종군하였고 나중에 《백두산정계비》를 저술하였다.
파출소를 설치하여 간도를 관리하던 일본은 1909년 느닷없이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버렸고 1년도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이 이루어졌다.
‘간도가 한국 영토라고 강변하던 일본이 돌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이 간도를 청에 넘겨준 이유가 무엇일까?’ _138쪽

“피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국들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전체를 피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피고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에 의하여 사건대상이 피고의 영토로 확정 귀속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건대상을 포함한 만주 전체가 피고의 영토로 귀속되었다고 한다면 피고가 북한과 위와 같은 조약을 체결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피고가 사건대상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신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 변호사가 잠시 말을 끊고 재판관들을 훑어본다. 재판관들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그것은 만주에 대한 연합국의 최종적인 입장이 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후처리를 종결하였습니다. 동 조약은 1952년 4월 28일자로 발효되었습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어디에도 사건대상을 포함한 만주에 대한 처리규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질문과 함께 김 변호사가 왕 교수를 바라본다. 그의 질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상 만주의 귀속 처리에 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왕 교수가 김 변호사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아버린다. 그 모습을 본 김 변호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 이유는 바로 사건대상 간도를 포함한 만주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건대상을 포함한 만주 전역이 연합국에 의하여 피고의 영토로 인정되었다는 피고의 주장은 부당합니다. 이상입니다.” _171쪽


“보시는 바와 같이 이중하는 백두산정계비상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킨다는 점, 이것이 비변사 공식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 을유감계회담 시에 이러한 고적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토문과 두만이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점, 이렇게 된 이상 구계를 정확히 밝혀 본토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점 등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중하는 국경선으로서의 두만강의 상류 수원을 결정함에 있어 본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상류 수원인 홍토수가 두만강의 본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청의 감계위원들이 이중하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지류에 불과한 홍토수를 두만강의 본류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 교수가 몸을 돌려 한국 소송팀을 바라본다. 딱딱하게 굳은 김 변호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왕 교수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가더니 이내 목청을 돋우고 낭랑한 목소리로 마무리한다.
“그동안 참 지루한 소송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 사건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지부터 시작하여 간도협약에 의해 분쟁이 모두 해결되었는가 하는 점까지 많은 쟁점들이 있었지만 결국, 백두산정계비에 의하여 청과 조선의 국경이 획정되었고 그것이 현재의 국경보다 한국 측에 불리하지 않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명확해졌습니다. 원고와 피고는 이웃한 국가로서 서로 협력하여 발전적인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모든 오해가 해소된 이상, 이 소송을 끝으로 원피고 간의 국경분쟁을 마무리 짓고 발전적인 미래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재판관님들의 현명하신 판단을 기대합니다.” _257쪽

“백두산 화산 폭발이 최근 수천 년간 지구상 최대 폭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되는 건가요?”
“지구상에 있었던 몇 번의 큰 화산 폭발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0년 4월 아이슬란드 에이야파들라이외퀴들 화산 폭발로 유럽은 항공대란을 겪었습니다. 화산 폭발 지수 4에 불과한 소규모 화산 폭발이었습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밝혀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화산 폭발은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폭발도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산재가 지구 전체를 떠돌아 유럽에 미니 빙하기와 대기근을 몰고 오기도 했습니다. 다음 해 여름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화산 폭발지수 7.1의 규모입니다. 그런데 백두산 화산 폭발은 이것보다 더 큰 7.4 규모로 밝혀졌습니다.”
AD 79년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시가 묻혀버렸다. 화산재에 갇힌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화석이 되고 말았다.
6미터 두께의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는 1784년 부르봉 왕가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화산 폭발 지수 5로 밝혀졌다.
이번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한 교수가 질문했다.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발해가 백두산 폭발로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1992년 마치다 히로시 교수에 의하여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 백두산 화산 폭발은 926년 이후에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_334쪽


목차

목차
들어가는 말
프롤로그
제1부 공약
제2부 당사자 적격
제3부 한일합병
제4부 간도협약
제5부 결정적 기일
제6부 백두산정계비
제7부 봉금정책
제8부 동북공정
제9부 백두산은 알고 있다
에필로그
작가후기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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