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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3635492 / 276쪽 / 390g / 152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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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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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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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 카차라는 여자를 알고 지낸 적이 있다. 20대 초반에 그녀와 몇 주를 함께 지냈다. 카차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데다 엄청난 다혈질이어서 관계를 유지하기가 정말 고되고 힘?들었다.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언젠가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안 그러면 날 오래 참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물론 나는 그녀를 오래 참지 못했지만 그녀의 그 충고는 훗날 내게 자주 도움이 되었다. 정말로 견딜 수가 없을 땐 사랑만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노화에도 그 말이 해당되는 것이다. ” ▷▷ 개 ... “ 카차라는 여자를 알고 지낸 적이 있다. 20대 초반에 그녀와 몇 주를 함께 지냈다. 카차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데다 엄청난 다혈질이어서 관계를 유지하기가 정말 고되고 힘들었다.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언젠가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안 그러면 날 오래 참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물론 나는 그녀를 오래 참지 못했지만 그녀의 그 충고는 훗날 내게 자주 도움이 되었다. 정말로 견딜 수가 없을 땐 사랑만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노화에도 그 말이 해당되는 것이다. ” ▷▷ 개 요 “내가 왜 뱃일을 그만두고 피자 가게를 차렸는지 알아요?” “왜요?” 그가 되묻는다. “나중에 피자 가게에서 배 타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예요.” 가게 주인은 이어 말한다. “포르투갈이 해양국이 된 건 지극히 논리적이에요. 여기 리스본에서 딱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리스본 사람들처럼 쉬지 않고 산과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정말 산이고 계단이고 정나미가 딱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바다로 간 겁니다. 물에는 계단이 없잖아요. 스페인 사람들은 황금을 캐러 바다로 갔고 영국 사람들은 식민지를 세우겠다고 바다로 나갔지만 우리 리스본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저 단 몇 주라도 계단 없이 살고 싶은 거지요.” 그리고 당연히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덧붙인다. 호어스트 에버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든 오직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그가 지금껏 들어 본 인생의 의미 중에서 가장 명확한 이유라고. “사부아르 비브르savoir-vivre, 이런 게 인생이지!” 남을 공격하지 않고 여유 만만하며 호기심과 즐거움을 잃지 않는 팔랑귀 인생 인생이 매일 금요일 같지는 않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마냥 달릴지, 죽치고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헷갈린다. 줏대 없이 팔랑거리다 보니 몸만 피곤하고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다. 그렇게 나쁘진 않다. 가끔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기도 하고,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면 그런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서 방황하는 한량 혹은 잉여의 자유를 부르짖던 독일의 작가 호어스트 에버스. 그는 이 책에서 또 한 번 어이없을 만큼 유쾌하고 허를 찌르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에버스는 그렇게 에버스다. 중년이 되었다 하여 갑자기 삶에 대한 통찰을 늘어놓아 당황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게으른 로맨티스트의 유유자적 사는 이야기를 소풍 가듯 따라가 보는 것은 여전히 즐겁다. 개운하다. 저자는 에피소드들을 모두 다섯 개의 부로 나눠 소개한다. 각 부마다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부제목에서 연상되는 나름의 공통점들을 갖고 있는 동시에 각자의 개성 또한 뚜렷하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에버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실소 때로는 폭소가 터져 나오는 엉뚱하고 발랄한 실수담과 우스꽝스러운 작태들이 신나게 벌어진다. 1부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에서는 끔찍하게 시작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나름의 해답을 던져 준 에피소드들이, 2부 ‘몰락의 개화’에서는 허울만 좋을 뻔했던 마지막이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3부 ‘큰 기대’에서는 말 그대로 기대와 달리 식은땀만 쏙 빼게 만든 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든 소동들이 벌어진다. 4부 ‘재능과 현실’에서는 타인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독특한 재주를 쓸모 있게 활용하는 이들의 경험담이 등장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5부 ‘위풍당당 행진곡’에서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에버스 식 인생관을 선보이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이게 정말 실화인지 허구인지 헷갈리지만, 계속해서 읽다 보면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진다. 에버스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머릿속 한구석에 딱지처럼 눌러앉아 있던 우울한 잡생각, 고민거리는 모두 잊혀진다. 책장을 덮고 나면 어느새 그와 똑같이 “사부아르 비브르savoir-vivre!(이런 게 인생이지!)”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의 특징 ‘잉여 중년’ 호어스트 에버스가 돌아왔다 머리숱도 적고 키도 작은 데다 배까지 나온 우리의 호어스트 에버스. 그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꽃중년’, ‘미중년’이라기보다는 ‘잉여 중년’에 가깝다. 어엿한 작가이자 만담가이지만 나가야 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 시간도 없는지라, 남들에겐 그가 딱히 정해진 직업 없는 한량처럼 보인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네 반 학부모들이나 친구들로부터 휴일이면 애들을 봐 줄 대역으로 뽑히기 일쑤다. 그는 매번 순발력 있게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지만 결국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설득에 떠밀려 기꺼이(?) 아이들을 도맡는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아이들까지 그를 좋아해 주니 ‘팔자 좋은’ 에버스의 인생은 조용할 날이 없다. 호어스트 에버스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정치 풍자꾼 카바레티스트(극장식당 카바레 무대에서 다양한 주제로 재담을 선보이는 배우)이다. 택시기사와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카바레티스트로서 만담가 활동을 시작했고, 무대에서 낭독했던 이야기들을 엮은 대표작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이후 작가로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에버스는 여러 권의 작품집을 통해 어딘가 모르게 ‘잉여스럽고’ 엉뚱하며 위트가 넘치는 자신의 일상 이야기들을 재기 발랄하게 소개해 왔다. 신간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에서도 그의 글은 변함이 없다. 마치 무대 위에서 만담을 들려주듯 생생하며 활기가 넘친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체에도 그만의 독보적인 개성과 유머러스한 감수성이 드러나 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버스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전보다 더 느긋해지고 여유 만만해졌다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서 혈기 넘치고 엉뚱 발랄하던 베를린 청년은 이제 자식의 교육에 이바지하며 늘어나는 뱃살과 각종 노화성 질환을 걱정하는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가는 세월이야 항상 아쉽고 시절은 하 수상하니 아무리 호어스트 에버스라 해도 더 이상 그의 ‘똘끼’가 변함없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전보다 더 차진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의 유머에 오히려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월 따라 변한 몸과 달리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또한 여전히 예리하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동네 수영장, 열차 도착이 지연되는 기차역, 딸과 함께 나선 벼룩시장, 대형 슈퍼마켓, 등산길……. 에버스는 이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려 낸다. 아무 생각 없이 키득대면서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심리를 포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딸에게 흥정의 가장 중요한 단계를 알려 준다. “일단 천천히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거야. 상대가 안달복달한다 싶으면 그때 착! 그럼 상대가 바로 미끼를 무는 거지.” 비록 흥정에는 결국 실패했어도 바보 노릇으로 상인의 마음을 녹였던 것처럼, 에버스는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는 데에도 성공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세상에 유쾌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지하철에서 원고를 들고 낄낄거리다 사방에서 ‘정신줄 놓은 거 아냐?’라고 묻는 듯한 의혹 어린 시선을 자주 받곤 했다. 그러나 어쩌랴. 지뢰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현란한 언어유희와 엉뚱한 작태를 우아하고 기품 있게 참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입만 열면 헛소리
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학부모의 밤 행사에서 헤어지기 전 세르게이의 아빠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교실 저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들리도록 나한테 묻는다. 학생의 날 애들을 수영장에 데려간다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나는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예?”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어차피 낮에 할 일도 없는데 애들 데리고 수영장 가서 느긋하게 오전 시간 보내면 되겠네요.”
나는 당혹감이 묻어나는 침묵으로 첫 번째 대답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른 부모들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정말 멋진 아이디어예요! 낮에 수영장에도 갈 수 있고, 정말 좋겠어요. 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
수영장은 만원이다. 정말, 제대로 만원이다. 당연하다. 학생의 날 아닌가. 기나긴 하루가 죽을 맛인 부모들이 자기 아이와 다른 집 아이들을 끌고 모조리 수영장을 찾았을 것이다. 탈의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벌써부터 고온다습한 수영장 공기가 일격을 가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수영장의 마취제가 곧바로 밀어닥친다. 열기의 격랑을 동반한 채. 갓 부친 계란프라이 위에 몸뚱이 전체를 올려놓은 느낌이다. 듣기엔 상당히 에로틱하지만 효과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아이들은 고함을 지른다. 무섭거나 좋아서가 아니다. 일종의 전통이다. 수영장에 가면 누구나 고함을 지른다. 아이들에겐 그런 전통을 습득하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 나는 땀을 흘린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악틴이 팔꿈치를 어딘가에 부딪치는 바람에 먼저 위로해 주어야 한다. 세르게이의 보관함이 뻑뻑하다. 율레는 덥다고 난리다. 마틸다는 이중으로 묶은 나비넥타이가 안 풀려 끙끙댄다. 나는 땀을 흘린다. 악틴이 무릎을 부딪친다. 젤린은 목이 마르단다. 레오, 나오미, 카롤리네는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서 얼른 수영장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 다른 부모들이 악을 쓰면서 얼른 나가라고 소리친다. 마틸다는 도로 옷을 다 입고 당장 집에 가겠다고 난리다. 세르게이가 보관함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져서 괴성을 지른다. 악틴이 등을 부딪친다. 미차는 팬티를 입고 물에 뛰어들겠단다. 젤린은 내 꼴이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땀을 많이 흘려서……. 눈앞이 새카맣다. (본문 38~44페이지 중에서)
보람 없는 별장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물 밖으로 나가 해변으로 돌아간다. 아마 시간이 상당히 지났을 것이고 나도 상당히 떠내려왔을 것이다. 손수건으로 덮어 놓은 우리의 금고를 기준으로 본다면 확실히 그러하다.
아이들이 저기 누워 스무고개를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손수건을 봤냐고 물어보니 이쪽이 볼 게 더 많아서 손수건을 집어 들고 오른쪽으로 약 50미터를 옮겼다고 대답한다. 나는 아이들을 노려본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아이들이 묻는다. 옮겨 봤자 해변이 다 똑같은 해변인데 무슨 문제가 되냐고. 나의 대답. “바로 그게 문제야.”
난 원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돌아가 귀중품을 파묻은 곳을 찾아 헤맨다. (…) 한참 떨어진 해변에서도, 심지어 해안 길에서도 귀중품 구멍을 못 찾는 얼간이를 구경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모두가 땅을 파지만 소용이 없다. 묻은 장소를 도저히 못 찾는다.
친구 부부의 열한 살짜리 아들 율리안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간다.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가 우물쭈물 말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게……. 장소를 옮기면서 손수건을 들었더니 뭔가 파묻은 자리 같아서요. 우리가 아까 파서 귀중품이 든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어찌나 놀라는지 너무 재미있어서 말씀 안 드렸어요. 그러다 아저씨가 모래를 파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그 아줌마하고 재미있게 노셨잖아요. 그래서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그냥 있었는데……. 자꾸 일이 생각대로 안 돌아가서요.”
나는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쩜 저렇게 표현이 다를 수가.’
우리는 몰래 짐을 꾸려 빠져나가기로 결정한다. 내일부터는 저 구석 서쪽 해변에서만 놀기로 한다.
우리가 별장으로 돌아오자 어른들이 막 나가려는 참이다. “해변에 난리가 났다며?” 그들이 외친다. “보물찾기 같은 거야? 잘하면 우리가 찾겠는걸.” 우리는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 주고 그들과 교대하여 집을 지키기로 한다. (본문 129~130페이지 중에서)
지각에 대한 독창적인 변명
카페에 앉아 홀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왔다. 홀거는 약속 시간에 늦어도 내가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상대다. 그의 변명을 내가 무척 아끼기 때문이다. 언젠가 홀거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나서 그의 그 재미난 변명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무척 아쉬울 것이다. 다행히 홀거는 엄청 늦었고 지금 막 신이 나서 뻥을 있는 대로 치고 있다.
“전철을 탔거든. 늦어 봤자 아주 조금 늦겠다, 아니 거의 약속 시간에 맞추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열차가 멈추는 거야. 어떤 사람이 유모차를 밀고 가다가 유모차 바퀴가 그만 철로에 끼인 거지. 그런데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를 않아. 흔들어도 보고 잡아당겨도 봤지만 도무지 꼼짝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비용을 계산해 봤지. 어느 쪽이 더 비싸냐? 유모차냐 아니면 전철 운행을 계속 못 하는 것이냐?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투표를 시켰는데 결과는 안 봐도 뻔했어. 모두가 한목소리였거든. 유모차를 깔고 지나가자! (…) 그런데 말이야, 이 유모차가 완전 현대식 티탄 알루미늄 강철 유압식 범퍼 쿠션인 거야. 어디든 갈 수 있게, 심지어 비포장도로도 우아하게 갈 수 있게 만든 거지. 피레네 산맥이든 아마존 삼각주든 베링 해협이든 달이든 어디든 가게 말이야. 이 유모차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문제없이 갈 수가 있는 거야. 그러려고 티탄 알루미늄 강철 유압식 범퍼 쿠션을 장착한 거지. 실제로 그 모든 지역에서 테스트를 해 봤어. 산에서도 하고 빙판 위에서도 하고 열대 늪에서도 하고……. 근데 아쉽게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바로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인 거야. (…) 어쩔 수 없이 거기서부터 걸었고 그러느라 이렇게 살짝 늦은 거야.”
나는 웃는다. 그는 지금 고독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심리 치료사로 일한다. 그 일을 정말로 잘한다. 주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그는 정말 말하는 걸 좋아하고 정말로 많이, 빨리,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한다. 그런데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다. 상담 이틀째 되는 날 그는 같은 고객을 찾아가서 계속 이야기를 해 준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다시 한 번 찾아가면 대부분은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걸로 이미 그 사람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외롭지만 혼자라는 사실을 갑자기 아주 편안하게, 큰 선물로 느끼게 된다. (본문 164~167페이지 중에서)
나는 호박이었다
촬영 감독이 내 손에 쪽지를 쥐어 준다. 사회자가 내게 던질 예정인 세 가지 질문이 적혀 있다. “라인란트팔츠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도 라인란트팔츠가 나오나요?”, “라인란트팔츠에서 재미난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나는 쪽지를 노려보다가, 난생 처음으로 세 가지 질문을 읽기만 했는데도 바로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사회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라인란트팔츠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당장 다시 기절을 하려고 용을 쓰지만 몸이 거부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신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린다.
“오렌지요.”
사회자가 당황한다.
“네?”
“오렌지요. 오렌지 색깔. 그게 라인란트팔츠에선 제일 마음에 들어요. 오렌지색인 건 전부 미치게 좋아요.”
“아, 네.”
“다른 지방에, 그러니까 예를 들어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에 가면 파란색인 게 전부 멋지거든요. 왜일까?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라인란트팔츠에선 오렌지가 제일 좋아요.”
“아, 네, 그렇군요……. 정말……, 재미있네요. 다른 건 없나요?”
“9요.”
“네?”
“라인란트팔츠에선 숫자 9도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9가 들어간 건 다 좋아요. 예를 들어 식당에 갔는데 음식 값이 9유로가 나오면 기분이 정말 좋아져요.”
“왜 아니겠어요?” (본문 232~233페이지 중에서)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건, 너무 위험해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리고 너무 위험해.”
“뭐가?”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거 말이야. 너무 위험해.”
“뭐가 위험해?”
“한번 생각해 봐. 내가 30년 동안 맥주를 마시다가 어느 날 깨닫는 거야. 이런, 이 돈을 모을걸. 그 돈을 지금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는 자신의 고민을 보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저 멀리 일방통행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그 1만 2천 900유로를 다시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반대로 30년 내내 절약만 하다가 깨닫는다고 생각해 봐. 이런 이런, 차라리 맥주를 마실걸. 그럼 30년 동안 못 마신 맥주는 어떻게 회복해야 하지? 매일 0.5리터씩 30년이면 약 5천 400리터야. 그건 절대로 회복할 수가 없어. 설사 한다고 해도 다른 일은 전혀 못 할 거야. 여생을 쉬지 않고 맥주만 마셔야 하는 거지. 얼마나 스트레스가 크겠어. 재미도 없을 거야. 인생의 황혼을 그런 식으로 보내다니. 술만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는 거야. 그러느니 지금부터 여유 있게 준비하는 거지. 그래야 노후가 편안해질 테니까. 또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셔도 되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매일 저녁에 마시는 이 맥주가 너한테 일종의 노후 준비인 셈이네.”
“바로 그거지. 내 노후 준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매일 저녁 마시는 이 맥주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절약하여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항상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 그러느라 돈을 못 모았다면 그건 노후에…….”
안타깝게도 남은 말은 엄청난 트림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그의 친구는 알아들은 것 같다. (본문 270~271페이지 중에서)
목차
1.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진짜 독감은 훨씬 더 심해요
치커리 소시지
협박
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오리지널 베를린 버블티
양을 잡아먹을 수 없다면 늑대에게 자유가 무슨 소용
칠판
2. 몰락의 개화
길이가 너무 짧은 에스컬레이터
어떤 환생
기분 좋은 쇼핑
천천히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거야
즉흥 음악회
싱싱한 생선
소극적으로 깨어 있었을 뿐이야
마지막 유언
고품격 신데렐라
두터운 발
3. 큰 기대
마드리드와 베를린의 차이
자판기 프랑스어
메일로 보낸 소시지 빵
되고죽기
미래의 파편
보람 없는 별장
알람 소리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지붕 위의 비둘기
산, 산, 산
현대극
4. 재능과 현실
바이킹 자격증
행운의 술꾼들
지각에 대한 독창적인 변명
빈 샴푸통에 마요네즈를 넣는 법
칭기즈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뼈한테 물어봐
특별한 재능
유튜브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의 모험, 세 번의 승리
도둑의 역사
날쎈돌이 칼레
굼벵이 속도
세계적인 수준의 헤어스타일
이사의 달인
이해할 수 없는 것
문 열어
나는 호박이었다
착한 지그프리트의 날
5. 위풍당당 행진곡
그런 건 기계가 더 잘해요
잼의 일생
일상의 책임
‘안 들려요 자루’
바꾼 하루
기다리다
사람들이 어떤지 잘 알잖니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건, 위험해
인생은 랄랄라 팔랑귀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