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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피니토 미완의 철학 삶을 충동질하는 철학의 일곱 단계

원제 : Non Finito: Les sept stades de la philosophie (2011년)

파스칼 샤보 저 | 정기헌 역 | 함께읽는책 | 2014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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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7680092 / 164쪽 14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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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동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최고의 재능을 가진 철학자들 그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철학자 파스칼 샤보 ▶논 피니토의 철학, 그리고 파스칼 샤보 “간결하고 세련된 수사,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채워진 삶과 사유의 즐거움” 《르몽드Le Monde》 “삶과 이론 사이의 싸움에서 우리는 항상 삶의 편을 들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질문하는 책은 드물다. 저자는 정면으로 이 질문과 대면한다. 그는 사유로부터 인간의 감정과 온갖 결함들, 초보적 이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지 않으려는 진... 동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최고의 재능을 가진 철학자들 그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철학자 파스칼 샤보 ▶논 피니토의 철학, 그리고 파스칼 샤보 “간결하고 세련된 수사,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채워진 삶과 사유의 즐거움” 《르몽드Le Monde》 “삶과 이론 사이의 싸움에서 우리는 항상 삶의 편을 들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질문하는 책은 드물다. 저자는 정면으로 이 질문과 대면한다. 그는 사유로부터 인간의 감정과 온갖 결함들, 초보적 이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지 않으려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답을 찾아 나선다. 삶과 욕망은 개념에 선행한다. 철학은 여러 가지 목적을 추구한다. 각각의 목적은 철학적 전개 과정의 각 단계와 연관된다. 그 마지막 단계인 ‘기쁨을 주기’는 “터져 나오는 웃음, 환희다. 그것은 철학에 보내는 작별인사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으로 다시 돌아온다.” 《필로조피 마가진Philosophie Magazine》 “명료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독특한 저서” 이 책은 철학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분명한 기능을 수행해 왔으며 철학적 욕망들에 지속적인 원천을 제공했음을 확인해 준다. 그 욕망이란 진실을 밝히고, 해방하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조사하고, 변형하고,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철학의 주요한 일곱 단계이자, 삶과 이론의 낯선 부딪힘의 단계이다. 《아마존 프랑스Amazon France》 ▶논 피니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철학자들이 좀처럼 던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철학 속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철학자들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파스칼 샤보는 신중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이 반성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저자는 난해하고 불투명한 것에 자족하는 철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매우 젊은 나이에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이미 《시몽동의 철학》(2003)과《진보 이후》(2008) 등 두 권의 책을 냈다. 그에게 철학이란 이를테면 삶과 이론, 감정과 통찰력의 만남과 같은 것이다. 경험 속에서 시작되고, 저자가 성찰의 “일곱 단계”라고 명명한 철학적 과정들 속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는 순수한 만남이다. 저자는 “철학자는 자신의 추상(抽象)들이 새로운 경험에 의해 효력을 상실하고 파기되는 것을 반긴다. 즉, 자신의 생각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고 미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개념과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기를 그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이 여전히 형성 중이라는 것, 자신의 이론이 언제나 반증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삶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경이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이론 사이의 싸움에서 우리는 항상 삶의 편을 들어야 한다. 이는 철학하는 자세에 첫 번째로 요구되는 원칙이다. 그의 이론은 미켈란젤로의 몇몇 조각 작품처럼 논 피니토(non finito), 즉 완성되지 않은,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학문분과에 대한 추도사’라는 적절한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철학의 지속성과 영원함에 대해 질문한다. 일찍이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철학은 태어나기가 무섭게 소크라테스와 함께 숨을 거두지 않았던가? 철학은 태생부터 허약함을 타고 난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이 살아남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파스칼 샤보는 유머 감각과 겸손함을 두루 갖춘 철학자이다. 야심차지만 드러내 놓고 내세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철학은 무엇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로부터 관념들 사이의 유익한 충돌, 하나의 변증법이 시작된다. 무한한 과정, 즉 논 피니토이다. *논 피니토 작품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으로 남기는 기법을 흔히 ‘논 피니토(non finito)’라 부른다. ‘논 피니토’라고 하면 당장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떠오를 거다. (……) 완성작은 완전범죄처럼 범행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하지만 논 피니토에는 정과 망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 위대한 범죄(?)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의도된 논 피니토는 이 ‘과정으로서의 창작’, ‘생성으로서의 작품’의 탁월한 예가 된다. (……) 고전주의 미학은 예술에 데카르트적 명료함을 요구했다. 작품 속의 모든 것이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명석·판명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 외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애매모호한 것이 예술언어의 특성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 피니토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작품’의 고전적 예가 된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미완성작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이 완성됐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든다”. 물론 보는 이마다 그 모습을 다르게 상상할 것이다. 논 피니토는 이렇게 관찰자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과정이자 생성으로서 삶을 이어간다. _씨네21 [진중권의 아이콘] ‘완성으로서 미완성’ 중에서 책속으로 추가 이 작업은 이를테면 모든 것을 해체하는 연금술의 제1단계에 해당하며, 플라톤이 동굴을 빠져나오고, 베이컨이 우상들을 해체하고,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전개하고, 후설이 세계를 괄호 치면서 하고자 한 작업이었다. 모든 해방은 일종의 정화(淨化)이다. 해방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작업이다. 해방의 과정에서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보다 무엇을 거부하는가가 더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비판만 할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왜? 왜 철학자들은 공격을 하기 위해 대안적인 계획을 제시해야만 하는가? 그들은 정치인이 아니다. 그 무엇도 그들에게 건설적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왕이 벌거벗었다고 폭로하는 것은 왕에게 다시 옷을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부당한 권력을 조롱하는 것은 자신들이라면 더 정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해방의 단계에서는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독립성을 증명한다. (……)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한 후에 동일한 세계를 다시 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구도 그런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해방은 부정적인 행위, 파괴의 충동이다. 그러나 재건의 욕망이 이것들을 은밀하게 추동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는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렸다. 그는 삶과 사유의 관계를 밝히고 불필요한 사유로부터 삶을 해방시켰다. 그는 존재한다. 그리고 호흡한다. 이것으로 이제 족하지 않은가? _‘해방하다’ 중에서 철학자들은 탐색의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의 관계가 그랬고 니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치즘이 그의 철학을 이용한 것은 가증스럽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니체의 사유 속에 포함된 전쟁 예찬과 인간 유형학 때문이다. 이 주제들은 본래의 맥락을 벗어나면 그릇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런 경험들은 철학자들의 탐색에의 욕망을 진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20세기의 사상들은 이 점과 관련해 이전 시대의 철학보다 더 신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이제는 어떤 섬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과도 같다. 여기서 섬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다. 서구 사상 탐색의 작업 속에서 섬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그 유명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섬,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新)아틀란티스, 홉스의 섬,

저자 소개


파리 4대학(소르본)과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질베르 시몽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2004년, 벨기에 국립과학연구재단(FNRS)의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현대철학, 윤리학, 미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저서와 글들을 발표했다.
저자는 《시몽동의 철학La philosophie de Simondon》(Vrin, 2003), 《진보 이후Après le progrès》(PUF, 2008)에 이어 내놓은 《논 피니토: 미완의 철학(원제: 철학의 일곱 단계Les sept stades de la philosophie)》(PUF, 2011)에서 철학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욕망을 배양하는 분명한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기능이란 해명하기, 해방하기, 자신을 알기, 전달하기, 탐색하기, 변형하기, 기쁨을 주기 등이다.
현재 브뤼셀의 사회커뮤니케이션고등연구원(IHECS)에서 ‘조형적 형태의 발전과 유럽의 문화적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강의를 진행하는 한편, 벨기에 국립극장의 안무가 미셸 누아레의 예술 자문을 맡는 등 현대무용과 관련된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하얀 방>(2006), <측량사들>(2007), <두 가지 관점>(2007), <내일>(2008), <적절한 몇 분>(2010) 등의 작품 구상에 참여했다.


역자 소개

파리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번역한 책으로는《프란츠의 레퀴엠》,《남겨진 사람들》,《고독의 심리학》,《트레이더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양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퀴르 강의 푸가》,《철학자에게 사랑을 묻다》,《프랑스는 몰락하는가》,《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괜찮아 마음먹기에 달렸어》,《리듬분석》, 《논 피니토: 미완의 철학》 등이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책 속에서

철학의 허약함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당연히 철학자들 자신이다. 그들은 유쾌하게 철학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음모를 꾸며 왔다. 그들은 무엇을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철학’이라는 용어 속에는 과학에 대한 관심, 신비주의적 탐색, 이론의 구축, 신앙의 파괴, 지혜, 예언 외에도 수많은 욕망들이 포함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존재를 연구하고 다른 이들은 무(無)를 연구한다. 진리, 권력, 신, 사랑, 죽음, 섹스 등이 번갈아 가며 철학적 관심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 주제들은 하나의 사상 체계, 하나의 윤리학을 배태한 악시스 문디(세계의 중심), 현자의 돌, 생각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받은 주제들은 어느 순간엔가 모두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등장하자마자 왕좌에서 쫓겨난 이들은 대문자와 특권을 박탈당했다. 각 사상들은 번영과 몰락의 시기를 경험했다. 철학만큼 다원적이고 대립적인 명제들로 가득한 학문 분과는 없다. 철학만큼 이질적이고, 다양하고, 부조화한 분과는 없다. 그럼에도 철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어떤 분야에나 돌팔이는 있는 법이다. 철학은 특히 그렇다. 강한 자성에 이끌리듯, 나방이 램프 불빛에 이끌리듯 사기꾼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철학은 증명을 강요받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일까? 진부한 영혼과 보잘것없는 육체로 삶을 조금 맛본 주제에 애매모호한 논증을 이용해서 그럴듯하게 인생을 논하는 게 철학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일까? 출세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를 탐구하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아서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우선 교육적 차원에서 안타까운 일이며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철학을 팔아먹거나 말거나 철학은 제 갈 길을 묵묵히 갈 뿐이다. 철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 외에도 할 말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상당수의 논자들은 철학이 쇠퇴를 거듭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면서 철학의 죽음과 불가능성을 선언했다. 어떤 학문 분과도 생전에 이처럼 자주 사망자 명부에 오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미 천 번이 넘도록 철학에 추도사를 지어 바쳤다. 그러나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철학은 매번 다시 일어났다. 나는 철학에 등을 돌리기보다, 물론 그 편이 더 현명할 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일을 계속 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다.

_‘현존하는 학문 분과에 대한 추도사’ 중에서


철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철학자로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로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명제를 고안한 테오필 고티에를 따라 철학을 위한 철학을 주창한다면 용기 있는 소견일 수는 있을지언정 철학이 나아갈 방향 혹은 옹호해야 할 입장을 제시해주지는 못 할 것이다. 삶, 그리고 삶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의무와 부당함을 망각한 사상가만이 그런 명제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철학은 삶과 사유의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사 멘탈레(cosa menatle),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일 뿐이다.
자신의 공모자를 찾기로 결심한 사람은 단순한 지식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과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사유가 삶에 복무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그는 단지 철학만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살고자 한다. 살기 위해 철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철학적 우정이 개입하는 지점이다.
철학에 대한 급진적인 자유를 확보해야만 공모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뿌듯함을 경험한다. 판테온에 사는 불멸의 거장들, 서구 지성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드높은 정신의 소유자들을 수시로 만나면서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들과 공모 관계를 맺고자 원하는 건 대단한 배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의 철학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상상적인 철학적 공동체가 그것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는 협약이 있다. 우리 모두가 실존(existence)이라는 한 배를 타고 존재(être)와 무(néant) 사이를 항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실존에 대해 조금 더 알고자 한다. 이른바 철학적 협약이며, 철학적 공모 관계의 본질이다.

_‘이해하고, 사로잡히고, 공모하기’ 중에서



이 작업은 이를테면 모든 것을 해체하는 연금술의 제1단계에 해당하며, 플라톤이 동굴을 빠져나오고, 베이컨이 우상들을 해체하고,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전개하고, 후설이 세계를 괄호 치면서 하고자 한 작업이었다.
모든 해방은 일종의 정화(淨化)이다. 해방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작업이다. 해방의 과정에서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보다 무엇을 거부하는가가 더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비판만 할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왜? 왜 철학자들은 공격을 하기 위해 대안적인 계획을 제시해야만 하는가? 그들은 정치인이 아니다. 그 무엇도 그들에게 건설적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왕이 벌거벗었다고 폭로하는 것은 왕에게 다시 옷을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부당한 권력을 조롱하는 것은 자신들이라면 더 정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해방의 단계에서는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독립성을 증명한다. (……)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한 후에 동일한 세계를 다시 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구도 그런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해방은 부정적인 행위, 파괴의 충동이다. 그러나 재건의 욕망이 이것들을 은밀하게 추동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는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렸다. 그는 삶과 사유의 관계를 밝히고 불필요한 사유로부터 삶을 해방시켰다. 그는 존재한다. 그리고 호흡한다. 이것으로 이제 족하지 않은가?

_‘해방하다’ 중에서

철학자들은 탐색의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의 관계가 그랬고 니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치즘이 그의 철학을 이용한 것은 가증스럽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니체의 사유 속에 포함된 전쟁 예찬과 인간 유형학 때문이다. 이 주제들은 본래의 맥락을 벗어나면 그릇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런 경험들은 철학자들의 탐색에의 욕망을 진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20세기의 사상들은 이 점과 관련해 이전 시대의 철학보다 더 신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이제는 어떤 섬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과도 같다. 여기서 섬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니다. 서구 사상 탐색의 작업 속에서 섬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그 유명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섬,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新)아틀란티스, 홉스의 섬,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섬, 들뢰즈가 언급한 미셸 투르니에의 섬, 올더스 헉슬리의 섬은 모두 사유가 순수 상태와 조우하는 세계이다. 이 섬들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여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상징한다. 섬은 상상력의 빈 페이지로서 발명을 위한 이상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아직 인공위성에 의해 세계 전체의 지도가 작성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픽션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엔가 상상 속의 섬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지도가 작성되고 모든 섬들의 위치가 파악되고 심지어 판매되기까지 하는 오늘날, 그곳에서 새로운 픽션이 탄생할 것 같지는 않다. 섬들은 이제 호텔이 되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지구 밖 행성들인지도 모른다.

_‘탐색하다’ 중에서

목차

목차
1부: 내가 철학에서 찾는 것
1. 이것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2. 현존하는 학문 분과에 대한 추도사
3. 이해하고, 사로잡히고, 공모하기
4. 욕망하는 철학
2부: 일곱 단계
1. 해명하다
2. 해방하다
3. 자신을 알다
4. 전달하다
5. 탐색하다
6. 변형하다
7. 기쁨을 주다
3부: 지나치게 현대적인 철학이란 없다
1. 진보의 두 가지 방식
2. 비전들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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