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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밖에서 안으로

박훈하 저 | 비온후 | 2014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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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0969842 / 300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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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부산에서 태어났고 전공은 한국 현대문학이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을 통해 현장비평을 하던 중 점차 전문화되어 가는 문학 비평으로는 대중과의 적극적인 소통은 물론 심화되는 탈근대사회의 모순에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지금은 도시의 공간 변화와 영화.만화.TV 드라마 같은 대중적 서사들이 대중들을 주체화하는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성대학교에서 문학과 문화비평을 담당해 왔으며, 현재는 일본 후쿠오카의 세이난 대학의 객원교수로서 부산과 후쿠오카의 공간정치학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담론과 주체형식>, <근대문학 담론의 확산과 변형>, <2000, 문화가 선 자리>(편저), <문화의 풍경, 이론의 자리>(공저) 등이 있다. 

머리말

일 년이라는 공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두말없이 선택한 곳이 일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속악해져만 가는 한국 현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오랫동안 두 나라는 증오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지우려 애써 왔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존재에 대한 또 다른 확인일 터, 이 부정과 증오의 메커니즘을 긴 시간을 두고 통찰해 보면, 모범답안은 아닐지언정 반면교사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사였다. 과연, 일본이라는 땅은, 내가 보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오래 전 선친이 가꾸던 화단이 거기에 있었고, 불량식품이라고 죄다 추방해버린 어린 시절의 과자들이 버젓이 슈퍼에 진열되어 있었고, 이미 한국에선 사라진 하나미(花見) 풍습이 여전했다. 시간이, 아주 더디게,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외지인의 눈과 피부로 전해져 오는 것이어서 대체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뭐든 이전의 것들과 단절하고 부정하는 데 익숙해 있던 몸과 마음이 촉수를 뻗어 주위의 사물들과 삽시간에 교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아마도 그럴 것이다. 홀로 고군분투하던 도시생활을 잠시 접고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 안방에 누운 듯한 이 느낌은, 분명히 신기루이다. 거리와 가로수, 학문과 사유체계, 사회제도와 관습, 그 어느 것도 그 뿌리에서 우리 것과 맞닿아 있지 않은 게 없으니, 본류를 찾았다는 점에선 어머니의 땅이지만, 이 땅의 풍요로움이 지난 시절 우리의 식민지 수탈로부터 얻어진 것이니, 어머니의 탈을 쓴 여우라면 모를까, 정녕 어머니는 아니다. 게다가 편안함을 느끼기엔 한국은 이미 지나치게 장성해버렸고, 제 길을 홀로 가야 할 때가 되었고.그럼에도 일본은 여전히 우리의 좋은 거울이다. 예쁜 내 모습을 비춰보기 위해서도 요긴하지만, 보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못생긴 부분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주기 때문에라도 정직한 참조틀이다. 그건 이 두 상반된 모습이 샴쌍둥이처럼 머리만 따로일 뿐 몸뚱이는 공유하고 있고, 싫다고 부정해 버리고 싶은 상대의 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기와 경로는 다소 다르지만 한일 두 나라의 근대화 과정은 매우 닮았다. 메이지기 일본의 급속한 근대는 1960년대 한국 군사정권과 유신이라는 속도전을 공유하고, 일본이 주변국들의 식민화를 통해 부강해졌듯 한국 역시 주변국들을 후기 식민화하면서 경제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게다가 미국의 안보조약이라는 우산까지 함께 쓰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런 공통점으로 인해 두 나라는 상호 참조하기보다 증오와 무시로 적대해 왔지만, 근대 10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보면, 공유하고 참조할 많은 것들이 미래를 향해 여전히 열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 책은 두 나라 사이의 오랜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길항과 그것이 시간 속에 드리운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1년 여 후쿠오카에 머물면서, 내가 마주쳤던 미시적인 것들을, 마치 길에서 주운 숫나사 하나를 들고 기계 몸통을 찾듯,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온 생의 무늬들을 가늠하려 노력했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렇듯, 삶의 모든 양식들은 지나온 생의 얼룩들이다. 고통만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시간을 견뎌 이겨내야 비로소 생성되고 남아 굳은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딱딱해진 살갗 너머로 내가 잠시 떠나왔던 땅을 천천히 반추했다. 국가라는 대중교통에 몸을 싣곤 어딘가로 매우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차에 탄 사람들은 하나 같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느라 대화는커녕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자주 잊어버리는 현해탄 너머의 땅을, 그들의 욕망을,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 내가 내릴 정류장이 어디일까를 가늠하려 애썼다.결국 내 시선이 가닿았던 곳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내가 발붙이고 있는 땅의 자치 능력과 공동체라는 영역이었고, 또 하나는 시간이라는 영역이었다. 식민지라는 뼈아픈 경험 이후 잠시 사라졌던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에 우린 너무 거대한 국가를 만들고 말았다. 잔소리 심한 부모가 으레 그렇듯, 하나에서 열까지 지시하고 나무라고 꿈까지 대신 꿔 주는 탓에, 우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거의 잃어 버렸다. 이웃의 배고픔도 국가를 통해 해결하려 하고, 옆집의 불량 청소년들도 경찰의 치안력에 맡겨졌다. 그 사이 우리들은 현관문을 굳게 닫고 내 가족의 안위만을 걱정하면 그만인 세상을 맞이했지만, 품안의 가족도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버렸고, 또 한편으론 국가의 작고 큰 오류를 수정하고 비판할 대안세력 역시 증발해 버렸다.동네와 지역의 자치력은 개인의 무모한 이기심을 최대한 억제할 뿐 아니라 연대의 가능성을 확장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좀 더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일본의 신사(神社)와 마츠리 등을 통해 망실된 우리의 공동체를 아프게 체감했다. 우리에게 없어서 아프기도 했지만, 없는 대가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커서 아팠다. 그리고 이 아픔을 통해 우리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치력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의 공동체들의 한계도 함께 보았다. 당장은 너그럽지만, 이 너그러움이 과거 제국주의가 안겨준 선물인 것은 분명하며, 그리하여 이 선물의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날, 너나 할 것 없이 국가의 사육장 안에서 투견처럼 싸워야 하는 생지옥을 모면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그러므로 생의 시간을 국가의 시계 안에 내맡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의 초읽기를 버리고 더 멀리 바라보고 긴 시간 안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말하자면 큐슈라는 이 땅을 밟고 지나갔던 무수한 사람들, 백제 사람들과 아스카 사람들과 고려 사람들과 헤이안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과 에도 사람들과, 그리고 지금의 일본 사람들의 족적을 모두 하나씩 헤아려야 하고, 이 무수한 족적 위에서만 역사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본을 마냥 선망하지도 비판하려 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을 거울로 우리의 현실을 호도할 의지를 갖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 두 대극점을 통해 미래를 꿈꿀 제3의 지점을 모색하려 했다. 꿈일 뿐이어서 모색의 길이 다소 모호하고 희미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읽는 이가 채우면서 함께 같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보잘것없는 책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 많은 분들이 애를 써주셨다. 우선 일본의 세이난가쿠인(西南學院)대학과 타무라(田村) 교수, 체류기간 내내 작은 일까지 신경을 써준 김도균 군, 함께 글을 읽어주고 자료수집과 교정까지 보아준 김옥선 선생과 이선영 선생, 남미영 교수와 김선애 교수, 김영준 선생, 그리고 이 책을 쓸 계기를 제공해 준 <국제신문>과 조봉권 차장께 감사드린다. 뿐만 아니라 사진작업을 위해 몇 차례나 큐슈까지 동행해준 이인미 선생과 출판을 허락해 준 도서출판 <비온후> 김철진 대표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황령산 자락의 연구실에서 2014년 2월

책 속에서

일본어 중에 ‘스미마셍’이란 말은 활용의 폭이 참으로 넓다. 미안함이나 양해를 구하는 표현뿐만 아니라 고마움을 표할 때조차도 이들은 모두 ‘스미마셍’을 쓴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식당에 앉아 종업원을 부를 때도 이 말을 쓴다. 우리 같으면, ‘저기요’라고 하거나 ‘언니’라고 부를 때, 이들은 ‘스미마셍’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요즘 우리는 남자 종업원에게도 ‘언니’라고들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인들은 미국에 가서 종업원을 부르면서도, ‘I am sorry’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심리구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인 것 같지는 않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거의 모든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따지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슈퍼에서 배추 한 포기를 사면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인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농사짓는 이의 고생 따위를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 농부만 고생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배추를 사먹는 소비자들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이니 서로의 고생 이야기는 서로 상쇄하고 오직 시장의 가격 결정에 따라 마음이 아니라 화폐를 지불하면 그만이라는 게 우리들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이 결정한 금액만 지불한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게 언제든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이 편한 세상,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런 논리는 세월이 더 많이 흐를수록 더 강화될 것이라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의 세상살이가 전적으로 이 논리에 지배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식당에 들어가 종업원을 향해, ‘스미마셍’이라거나 ‘언니’라고 부르는 게 이를 반증한다. 제 돈을 내고 먹는 음식이고 서비스이니, 당연히 ‘종업원’이라고, 보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명칭과 어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그들을 인격체로 대하려 하지 그들을 하나의 사물화된 상품으로 대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종업원을 향해 ‘스미마셍’이라고 하는 건 인간간의 접촉이 시장 논리로는 결정될 수 없다는 문화적 표현이고, 이는 종업원을 ‘언니’라고 부르는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스미마셍’과 ‘언니’라고 표현할 때, 이 두 표현 사이에 적지 않은 문화 심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오로지 시장 논리만이 전횡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대중들의 저항 심리가 어째서 두 나라에서 각각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왔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의 ‘스미마셍’은 상대를 인격체로 대하고 있음에도 나와 너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전제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언니’나 ‘이모’는 이 심리적 거리를 말끔히 지우고 그 자리에 가족 호칭을 가져다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는 ‘이모’, ‘언니’ ‘오빠’가 너무 많다. 사랑이 없는 사회일수록 사랑이 강조되고, 돈 없는 사람일수록 돈타령을 일삼는 법. 그럼 우리에겐 언니, 오빠, 이모가 없다는 뜻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시장 논리로부터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언니, 오빠, 부모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실재하고는 있지만 없기보다 못한 그들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자주 강조되고 그리워지는 게 또한 그들, 혹은 그들에 대한 환상 아닌가. 이런 호칭이 시장 논리에 대한 대중의 저항으로부터 온 건 사실이지만, 이런 호칭이 다시 시장 논리를 강화한다는 건 참으로 씁쓸한 역설이다.

목차

두 얼굴의 후쿠오카
작은 것들, 그러나 견고한
일본어 교실과 오미야게
마초의 몰락, 가족의 재구성
하나미
뒷동산 단상
아소산과 한라산
이마리 도자기 공방 마을, 오카와치야마
남자 몸의 권력
온천 풍경
료칸 시이바산장
스탠드 얼론 콤플렉스
산토리 뮤지엄 1
산토리 뮤지엄 2
일본의 뜨거운 한가위
이웃집 기요미즈 씨
우리에게 국가의 품은 존재하는가 ?
공사장 풍경
다카하시 교수의 소박한 점심
연금생활자들
얼룩 고양이 지지
드라마의 힘
타인의 시선
회복해야 할 시민공동체
마츠리
휴대전화의 진화
스미마셍
일기예보와 지역의 삶
<해운대>와 <일본침몰>의 차이
자이니치, 그 곤혹스러움
이질적인 것들의 귀환
한국에도 자동차가 있어요 ?
한국에도 자동차가 있다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희망은 오로지 절망으로부터
오렌지와 아우라
낮은 담장의 풍요로움
전통은 옛것이 아냐
나가사키, 기록과 기억 사이
너무 사소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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