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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2486200 / 944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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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이 책은 걸출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가 생애의 절반을 바쳐 써낸 뛰어난 역사서인 『한서(漢書)』의 해설서이다. 그리고 또한 『한서』가 탄생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이다.
동한(東漢) 시기의 저명한 사학자인 반고는 기전체(紀傳體) 단대사(斷代史)인 『한서(漢書)』를 성공적으로 저술했는데, 이는 전통 사학(史學)의 확립을 상징한다. 이 책은 상세하고 충분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더불어 수많은 고증과 분석을 통해, 반고가 처했던 시대적 배경․반고의 생애․반고가 저술한 『한서』의 우여곡절의 과정과 탁월한 역사 인식, 그리고 반고 사학의 장구(長久)한 영향력 등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반고가 ‘옛날을 숭상하고 지금의 것을 부정하는 풍조[崇古非今]’에 반대했던 정치 사상, 개혁을 중시하고 인재와 인심의 향배를 중시했던 치국(治國) 사상, ‘인간사[人事]’를 중요하게 여겼던 ‘천인(天人) 관계’ 사상, ‘실록(實錄 : 사실 그대로를 기록함-역자)’ 정신을 크게 발양하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총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던 사학(史學) 사상 및 학문의 원류를 고찰하고, 학술 체계의 사상을 구축하는 것을 중요시했던 것 등과 같은 여러 방면에서의 공헌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토론했다. 전체 책의 구조가 합리적이고, 논리가 엄밀하며, 논증이 전면적이고, 내용은 대부분이 개척해 낸 것들이다. 또한 새로운 견해들이 많이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문장이 간결하고, 말이 유창하여, 가독성(可讀性)이 매우 뛰어나다.
반고(班固)는 누구인가?
1. 반고의 조상들
반고의 조상은 초(楚)나라의 약오(若敖)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기록에 따르면, 약오는 운(鄖)나라 여자와 결혼하여 투백비(鬬伯比)를 낳았다고 한다. 투백비는 매우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약오가 세상을 떠난 뒤 투백비는 어머니를 따라 운나라로 갔는데, 거기에서 운자(鄖子)의 딸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사통하여, 훗날 영윤(令尹 : 재상)이 된 자문(子文)을 낳았다. 자문은 낳자마자 큰 호숫가에 버려졌다. 그 때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는 그를 잡아먹지 않고 젖을 먹여 길렀다. 어느 날 운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운자의 딸은 그제야 자신이 낳은 아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운자는 그 아이가 큰 인물이 될 운수를 타고났다고 여겨 데려다 키웠으며, 또한 투백비를 사위로 맞이했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곡(穀)’이라 했고, 호랑이를 ‘어석(於檡)’이라 했으므로, 이 아이의 이름을 ‘곡어석(穀於檡)’이라고 지었다. 곡어석은 자라서 자(字)를 갖게 되었을 때, 자문(子文)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영윤의 직위에 올라 초나라의 군사와 정치 방면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충성스러운 정치를 하여 세 번씩이나 영윤의 직위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기용되었다.
자문의 아들은 투반(鬬班)이었는데, 초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또한 ‘반(班)’이라고 했으므로 투반이라 했다고 한다. 투반도 또한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투반은 극황(克黃)을 낳았는데, 벼슬이 잠윤(箴尹)에 이르렀다. 극황이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투백비의 또 다른 아들인 사마(司馬) 자량(子良)이 낳은 아들 투초(鬬椒)(극황과는 사촌 관계)는 부귀를 지나치게 탐하다가 역모를 꾀했는데, 발각되어 초나라 왕에게 처형되었다. 극황은 사신의 임무를 돌아오는 길에 송(宋)나라를 지나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주위 사람이 그에게 초나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했지만, 극황은 개의치 않고 귀국하여 사신으로 갔던 일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극황은 투초의 모반 사건과 관계가 없었기에 계속 잠윤 직위를 유지하였다.
그 후 진시황(秦始皇)이 초나라를 멸망시키자, 자문의 일부 후손들은 북방의 변경인 진(晉)나라와 대(代)나라 근처로 이주했으며, 이 때부터 성을 ‘반(班)’씨로 바꾸었다.
진나라 말기에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반고의 7대조인 반일(班逸)은 혼란을 피해 누번(樓煩)으로 이주했는데, 여기에서 목축업에 종사하여 수천 마리의 소․말․양을 키우는 대목장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부호가 되었으며, 주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반일의 아들 반유(班孺)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반유의 아들 반장(班長)은 반씨 조상들 가운데 처음으로 벼슬을 한 사람인데, 상곡(上谷)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반장의 아들 반회(班回)는 그 군(郡)에서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장자현(長子縣)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반회의 아들 반황(班況)은 반고의 증조부인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었고, 그 후 좌조(左曹)의 월기교위(越騎校尉)까지 승진하였다.
반황의 딸은 서한(西漢) 성제(成帝) 초기에 입궁하여 첩여(婕妤 : 빈궁들 중 두 번째로 높은 등급)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반씨 집안은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반첩여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예의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고, 황제를 옳은 길로 인도하려고 충언과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태후(太后)로부터 “옛날(초나라)에는 번희(樊姬)가 있었고, 지금은 반첩여가 있구나!”라고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반황은 은퇴할 때 성제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한다.
반황에게는 반백(班伯)․반유(班斿)․반치(班穉) 등 세 아들들이 있었는데, 귀족 자제의 신분이어서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이 때부터 반씨 가족은 유학(儒學) 세가(世家)가 되었다.
반백은 반고의 큰할아버지인데, 성제 때 대유학자인 사단(師丹)으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대신인 정관중(鄭寬中)․장우(張禹)가 아침저녁으로 금화전(金華殿)에서 『상서(尙書)』․『논어(論語)』를 강의할 때, 반백도 황제와 같이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강의를 듣고 난 다음에는 다시 유학자인 허상(許商) 등과 토론을 거듭했다. 또한 반백은 관직에 있으면서 변방 지방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를 잘 수습했으며, 말년에 방탕한 생활에 빠진 성제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아 간신 장방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반고의 둘째 큰할아버지인 반유는 박학다식했는데, 성제에게 대책(對策)을 올려 높이 평가받아 의랑(議郞)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향(劉向)과 함께 비각(秘閣)의 황실 장서들을 교감하였으며, 이 일을 황제에게 상주하는 책임을 맡았다. 성제는 그의 높은 학문을 칭찬하면서, 그의 실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도록 황실 장서의 부본(副本)들을 하사하도록 명령했다. 당시는 황실의 장서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절대 함부로 외부에 내보내지 않던 때였다. 비록 황제의 혈육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소유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일은 대단히 파격적인 배려였다. 이로 인해 반씨 집안이 당시의 귀중한 책들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은, 반표(班彪)․반고 부자가 저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중한 문헌적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재주가 출중했던 반유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반치는 반고의 할아버지인데, 바르고 올곧은 성품을 가졌으며, 일처리가 신중했다. 그는 낭관으로 벼슬에 입문하여 황문랑(黃門郞) 중상시(中常侍)에 임명되어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런데 성제에게 친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를 정할 때, 정도왕(定陶王)을 태자로 삼는 문제에 대해 성제가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다른 신하들은 모두 흔쾌히 찬동했지만, 반치만은 분명한 태도를 표하지 않았다. 성제가 세상을 떠나자 결국 정도왕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애제(哀帝)이다. 반치는 이 일 때문에 애제의 미움을 받아 강등되기도 했다. 애제가 세상을 떠난 후 평제(平帝)가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형식상으로는 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외척인 왕망(王莽)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 왕망의 심복인 견풍(甄豐)에게 모함을 당하여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반치와 공손굉(公孫閎)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후가, 반치가 반첩여의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왕망에게 선처를 요청함에 따라, 공손굉을 목숨을 잃었지만 반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유의 아들 반사(班嗣)는 반고의 당백부인데, 그도 역시 당대에 이름을 떨친 학자였다. 그는 반고의 아버지인 반표(班彪)와는 연배가 비슷했으므로 함께 유교 교육받았는데, 반표는 오로지 유교만을 존숭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유학의 입장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행동했던 데 반하여, 반사는 도가(道家) 사상에도 심취하였으며,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반치의 아들인 반표는 반고의 아버지인데, 그는 집안에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황실 도서의 부본들과 부유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반치의 폭넓은 인맥으로 인해 교유하던 수많은 학자들이 반치의 집에 찾아왔기 때문에, 집안은 학자풍이 농후한 분위기였으며, 이는 또한 반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망의 신(新)나라가 멸망하자, 각지에서는 수많은 할거세력이 출현하였다. 외효가 처음에는 좋은 평판을 얻자 반표도 전란을 피해 농서(隴西) 지역에 할거하던 외효(隗囂)에게 의탁했다. 이 때 그는 유가의 대일통(大一統) 사상에 근거하여, 외효가 지방에서 할거 세력으로 남는 것에 반대하면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추대하도록 권유했다. 천하가 장차 유(劉)씨에 의해 통일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외효는 계속하여 할거세력으로 남을 것을 고집하자, 「왕명론(王命論)」을 지어 외효를 다시 설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외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효가 반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반표는 화를 피하고 또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하서(河西) 지방에 할거하던 대장군 두융(竇融)에게 투항했다. 두융은 반표의 투항을 크게 반기면서 그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반표는 역시 두융에게 형세를 설명하면서 광무제 유수에게 투항하여 그를 추대하도록 권유했다. 결국 두융은 광무제에게 투항했고, 광무제와 힘을 합쳐 혼란한 국면을 평정했다. 이 후 광무제는 두융이 자신에게 투항하는 데 반표가 큰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되어, 그를 서현(徐縣) 현령에 임명했다.
후에 반표는 다시 중앙으로 부름을 받아 사도연(司徒掾)에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매우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흉노(匈奴)․선비(鮮卑)․오환(烏桓) 등 서역 이민족들과의 관계를 처리할 때, 그들과 화친을 맺어 적극적으로 왕래하면서 관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업적을 남겼으므로 망도장(望都長)에 천거되었으나,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반표는 재주가 뛰어나고 글짓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뒤이어 『사기후전(史記後傳)』을 저술했다. 이는 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반고가 『한서』를 저술하게 되는 서곡이 되었다. 『사기후전』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기』가 황제(黃帝)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태시(太始) 2년(기원전 95년)까지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시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뒤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사마천의 역사 서술 방식에 일부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기후전』을 저술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단지 65편만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반고는 역사 연구에 몰두했는데, 아버지의 사상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켜 『한서』라는 걸출한 역사서를 완성하게 된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한서』의 「원제기(元帝紀)」․「성제기(成帝紀)」는 바로 반표의 원작(原作)이며, 「위현전(韋賢傳)」․「적방진전(翟方進傳)」․「원후전(元后傳)」의 찬어(讚語)에는 또한 모두 “사도연 반표가 말하기를[司徒掾班彪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 반고의 생애
반고는 동한(東漢)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에 부풍군(扶風郡) 안릉(安陵 : 지금의 섬서성 함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 세가(世家)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천성적으로 총명하여 9세에 이미 문장을 짓고, 시(詩)와 부(賦)를 능숙하게 암송했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사기후전』을 저술하기 위해 많은 양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반고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한나라 시대의 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6세가 되었을 때에는 집안에서의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여 수도 낙양의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최인(崔駰)․이육(李育)․부의(傅毅) 등과 함께 공부하면서 유가(儒家)는 물론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대해 두루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던 중 그가 23세일 때 아버지 반표가 『사기후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반고는 태학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감하고 어머니와 가족들이 있는 부풍으로 돌아왔다. 의지할 곳 없는 그는 자신이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해 걱정하면서 입신출세할 길이 막막함에 대해 초조함을 드러내면서도, 또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이 무렵에 그가 지은 「유통부(幽通賦)」에 잘 드러나 있다.
이즈음 영평(永平) 원년(서기 58년)에 명제(明帝)가 그의 친동생인 동평왕 유창(劉蒼)을 표기장군에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자, 한 편의 주기(奏記)를 지어 바친다. 그 내용은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자신을 추천하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이 때 반고가 추천 이유를 상세히 기록하여 동평왕에게 추천한 인물들은, 환량(桓梁)․진풍(晉馮)․이육(李育)․곽기(郭基)․왕옹(王雍)․사은숙(史殷肅) 등 여섯 명이었다. 이 건의를 통해 비록 자신은 발탁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추천한 인재들은 동평왕에게 발탁되어 권세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이육 같은 사람은 낙양에서 유명해졌기 때문에, 귀척(貴戚)들이 다투어 그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였다.
평민의 지위에 머물게 된 반고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인 반표가 완성하지 못한 『사기후전』이 부족한 점이 많아 계속 보충해야 하고, 또한 완성하지 못한 부분은 자신이 완성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는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풍부한 장서들을 바탕으로 『한서』를 저술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하여 저술에 몰두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반고가 역사를 저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사람이 당국에 이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당시에는 사관(史官)이 아닌 민간인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처벌은 엄중했다. 역사를 저술하는 일은 물론이고 역사책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같은 군에 사는 소랑(蘇朗)이라는 사람이 도참(圖讖)을 위조했다고 고발당하여 사형에 처해진 일까지 있었기에 반고의 가족들은 반고가 결국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심초사하였다. 그리하여 반고의 동생인 반초(班超)는 형을 구하려고 말을 몰아 수도 낙양으로 달려가, 명제에게 형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행히 명제는 이 사실을 중시하여 직접 반초를 불러 정황을 들어보기로 했다. 반초는 명제에게 아버지 반표와 반고가 2대에 걸쳐 역사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다른 목적이 아니고 한나라의 덕(德)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자 명제는 압수한 원고를 직접 읽어 보고는, 그 원고가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는 즉시 반고를 석방하여 위로하고, 황가의 교서부(校書部)에 직책을 부여하면서, 난대영사(蘭臺令史)에 임명했다.
이후 반고는 곧바로 진종(陳宗)․윤민(尹敏) 등과 더불어 광무제 유수의 사적을 기록한 「세조본기(世祖本紀)」를 편찬하는 일을 맡아 완성했다. 반고는 비록 직급은 낮았지만 황제인 명제와 만날 기회가 점점 잦아졌다. 이후 그가 감옥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20여 년에 걸친 장구한 역사, 즉 『한서』 저술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반고는 어명을 받아 역사를 저술했기 때문에 그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역사를 저술하는 일은 힘들고 고독한 작업이었다. 특히 자신과 함께 관직에 등용되었거나 심지어 늦게 관직에 입문한 사람들조차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번영하는 한나라 조정에서 높은 직위에 올라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낭관(郎官)이라는 낮은 관직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고독감은 더욱 심했다.
명제가 세상을 떠나고 장제(章帝)가 즉위했을 때, 그는 「답빈희(答賓戱)」라는 한 편의 글을 지었다. 그 글은 문답 형식을 빌려, 자신의 고민과 감개를 토로하면서,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되는 생각과 번민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자신의 포부를 굳건히 지키면서 정해 놓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뛰어난 글은 세상에 널리 전해져 폭넓게 읽혔는데, 마침내 장제도 그 글을 읽게 되었으며, 반고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반고가 계속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그를 한 단계 높은 관직인 현무사마(玄武司馬)에 발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건초(建初) 7년(서기 83년)에 기본적으로 『한서』 저술을 마무리하였으니, 개인적으로 『한서』를 저술하기 시작한 때부터 장장 25년, 어명을 받고 『한서』를 저술하기 시작한 때부터 20여 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1차로 완성하기는 했지만 심신이 지친 반고는 오랫동안 탈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한서』가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반고는 여전히 자신이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부족하고 공로도 적은 사람들조차 순식간에 높은 관직에 올라 단번에 고관대작이 되는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자신도 때를 기다리면 큰 공을 세워 보려고 하였다. 당시에는 군공(軍功)을 세우는 것이 가장 출세하기 쉬운 길이었고, 또한 자신과 조상들은 변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군대에서 공을 세우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서기 89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물러나 집에서 상중(喪中)의 예를 다하고 있었는데, 마침 두헌(竇憲)이 장군에 임명되어 흉노 정벌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두헌은 ‘운대이십팔장(雲臺二十八將)’의 한 사람인 두융의 후손으로서 세력가인데다, 두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동향(同鄕)이어서 옛날부터 집안 간에 교류가 있었으므로, 반고는 두헌의 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두(竇)황후의 배경을 믿고 두씨 가문은 전횡이 심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위협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반고는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특히 장제가 세상을 떠나고 화제가 즉위했을 때 황제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두씨 형제들은 조정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서 막무가내로 권력을 남용했다.
더구나 두헌이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된 것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연인즉, 장제가 세상을 떠나자 제(齊)나라 상왕(殤王)의 아들인 유창(劉暢)이 조문을 왔는데, 이 때 두태후의 눈에 들어 궁궐에서 직위를 얻게 되었다. 유창이 태후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본 두헌은,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했으며, 이 일이 발각되어 두헌은 감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두헌은 꾀를 내어 자신이 흉노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겠으니 죄를 면제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마침 한나라 조정과 화친 관계에 있던 남흉노가 한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북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한나라의 지원을 요청해 오자, 조정에서는 두헌을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여 북흉노를 정벌하도록 했다. 반고는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두헌의 밑에 들어가 흉노 정벌에 출정했다. 그리고 두헌이 이끄는 군대가 승리를 거두자 연연산(燕然山)에서는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지어 돌에 새겼고,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헌의 흉노 정벌을 찬양했다.
흉노 정벌에서 돌아온 두헌은 죄를 사면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력이 더욱 강대해져 전횡은 갈수록 심해졌다. 따라서 그에 대한 원성은 날이 갈수록 커 갔다. 두헌은 권력이 그렇게 막강했음에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화제를 살해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린 화제는 그 모의 참여한 두헌의 심복들을 처단하고, 두헌에게 봉지(封地)를 하사하여 지방으로 떠나게 한 다음 자살을 강요했다.
반고는 이 모반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두헌과의 관계가 밀접했으므로 면직되었으며, 또한 반고에게 사적인 원한을 갖고 있던 종긍(種兢)이라는 사람에게 체포되어 수감된 뒤,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저 뛰어난 역사가는 옥중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1세 때이다. 비록 후에 반고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화제는 조서를 내려 종긍을 꾸짖었고, 반고를 죽인 옥리도 사형에 처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3. 반고의 사상
반고의 사상은 그의 대표작인 『한서』 속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탁월한 역사적 식견 : 그는 속유(俗儒)들의 복고(復古) 주장을 반박하면서, 역사는 발전한다는 시각에서 한나라의 업적을 선양했다.
또한 역사 서술에서 실록(實錄)의 정신을 발양하여, 종실과 외척 및 권신들의 잘잘못을 사실대로 나열함으로써,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을 표창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꾸짖었다.
-천인(天人) 관계에 대한 사상 : 고대 사회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天]에 의해 결정되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주요 대사를 결정할 때도 도참(圖讖)과 음양오행(陰陽五行)설 등에 따랐으며, 하늘과 귀신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고는 도참을 부정하고 미신을 반박하면서, 인간사[人事]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경제 사상 : 반고의 경제 사상은 한마디로 “식량이 풍족하고 재화가 유통된 다음에야, 나라가 건실해지고 백성들이 부유해진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고대 농경 사회에서는 농사를 본업으로 여기고 공업이나 사업은 말업(末業)이라 하여 천시했는데, 반고는 ‘식화이본(食貨二本)’ 즉 “식량과 재화의 두 가지가 근본이다.”라고 주장하여 공업과 상업도 똑같이 중요시했다.
그리고 국가가 주요 재화를 비축했다가, 민간에 부족한 재화는 방출함으로써 가격의 폭등을 예방하고, 반대로 생산량이 너무 많은 재화는 국가가 매수하여 가격의 폭락을 방지해야 한다는 국가 개입주의 정책인 ‘경중론(輕重論)’을 주장했다.
-형법 사상 : 반고는 대표적인 덕치주의 주창자였다. 따라서 그는 “덕(德)을 주(主)로 삼고, 형벌은 보조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월형(刖刑 : 발목을 자르는 형벌)․묵형(墨刑 : 이마에 죄인을 상징하는 글자를 새기는 형벌)․의형(劓刑 : 코를 자르는 형벌) 등 잔혹한 육형(肉刑)은 폐지하고, 법률 집행은 공정히 하며, 복잡한 법률 조문은 간략히 할 것을 주장했다.
-민족 사상 : 반고가 살았던 시대를 비롯하여 고대에 중국에서는, 한족(漢族)인 화하(華夏) 문명은 우월하고 여타 이민족들 즉 사이(四夷)는 미개하다고 여겼는데, 반고는 그러한 논리의 불합리성을 반박하는 주장을 펼쳤다. 반고는 천하가 해내(海內 : 즉 한족이 거주하는 중원)와 사해(四海 : 중원을 제외한 변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둘은 한 몸[一體]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한 몸에 속하기는 하지만 주종 관계로 나뉜다고 주장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주변 이민족들을 대할 때에는 위협으로 제압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며, 은혜를 베풀 때는 베풀고 위협을 가할 때는 가하면서, 관계를 단절하지 말고 유지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고도 당시 봉건 체제에서 살아가는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또한 봉건적 사상에 침잠한 부분도 있었지만, 위와 같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한서(漢書)』는 어떤 책인가?
반고가 저술한 불후의 대작인 『한서(漢書)』는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부터, 서한(西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시기까지 대략 230년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본기(本紀) 12편, 표(表) 8편, 지(志) 10편, 열전(列傳) 70편을 포함하여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본기와 열전이 주요 구성 부분이기 때문에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라고 한다. 또한 한(漢)나라라는 한 조대(朝代)의 역사만을 떼어 내어 기록했기 때문에 단대사(斷代史)라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역사서들이, 역사가 시작된 처음부터 역사를 기록한 시점까지 모두를 기록한 통사(通史)인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반고가 처음으로 창립한 역사 서술 체제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대표로 하는 통사는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훤히 안다[通古今]’라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였는데, 『한서』는 고조 유방부터 왕망 시기까지의 한나라 역사만을 떼어 내어 역사를 서술했으면서도 완정한 체제를 갖춤으로써, 역사 서술 체제에서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역사학으로 하여금 사마천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기(本紀)는 책 전체의 강령으로서, 제왕(帝王)이 재위한 기간 동안에 있었던 정치․경제․군사․민족과 관련된 모든 일들과 함께, 학술과 문화에 관련된 중대한 사건들까지도 연대순에 따라 배열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줄거리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여기에는 제왕의 성격 특징도 기록했고, 그가 실행했던 정책의 좋고 나빴던 점들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표(表)는 이성제후왕표(異姓諸侯王表)․제후왕표(諸侯王表)․왕자후표(王子侯表)․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고금인표(古今人表)로 나뉘며, 괘선으로 표 형식을 이용하여 인물․작위․세계(世系)와 역사적 사건 등을 간결하게 기록했다.
지(志)는 율력지(律曆志)․예악지(禮樂志)․형법지(刑法志)․식화지(食貨志)․교사지(郊祀志)․천문지(天文志)․오행지(五行志)․지리지(地理志)․구혁지(溝洫志)․예문지(藝文志)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종 전장(典章 : 나라의 제도와 문물) 제도 및 그 연혁에 대해서 서술했다.
열전(列傳)은 곧 전기(傳記) 형식으로서, 사회 각 방면에서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사적(事迹)을 기재하였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각종 중대한 활동들을 어찌하여 그 사람들이 하게 되었으며, 사람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알려 주고, 또 인물의 사적에 대한 기록을 빌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그런 활동을 했으며, 진행 과정에서는 또한 어떠한 변화가 있었고, 마지막에 어떠한 결과를 얻었으며, 그 사이에 어떤 경험과 교훈을 얻었는지 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한서』는 전체적으로 보면, ‘본기’와 ‘열전’을 주(主)로 하고, ‘지’와 ‘표’로 보완하였는데, 이들 네 가지 체제를 배합함으로써, 사회 발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여 주면서도 또한 사건의 활동 주체들을 서술하여, 서한 시대 전체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사회 변화의 기본적인 모습을 분명하게 반영해 내고 있다.
당대(唐代)의 역사 평론가인 유지기(劉知幾)는 『한서』가 단대사를 창조해 낸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역사학 발전의 객관적인 요구였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사통(史通)』에서 『사기』의 통사 체제와 『한서』의 단대사 체제를 비교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즉 『사기』의 통사 체제는, 그것이 다루는 맨 처음과 마지막이 시간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수많은 내용이 기(紀)와 전(傳) 등에 분산되어 있고, 다시 서(書)와 표(表)가 더해지므로 난잡하면서 일목요연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서』의 단대사 체제는 한나라의 처음과 끝(반고가 역사를 기록하던 시점)을 모두 구명하여, 유씨(劉氏) 왕조의 흥망성쇠를 모두 포괄하여 한 권의 완전한 역사서로 묶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매우 세련되어 있고, 내용이 치밀하게 갖추어져 있어, 학자들이 내용을 찾아보는 데에 수고를 덜어 주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읽기에 편리하고 이해가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의 명칭도 ‘한서(漢書)’라고 하여 ‘書’자를 붙인 것은, 공자(孔子)의 『상서(尙書)』를 비롯하여 옛날 일들을 상고하는 책들의 명칭을 ‘서’라고 한 것을 본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서』 이후에 나온 역사서들을 보면, 예컨대 『동관한기(東觀漢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위서(魏書)』, 『양서(梁書)』, 『진서(晉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이 모두 단대사 역사서들인데,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책 이름을 ‘書’로 했으며, 역사 서술 체제도 모두 대동소이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반고 이후 지금[즉 당대(唐代)]까지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은 이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대사 체제는 중국의 고대 사회가 주기적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던 특성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2천여 년 동안 이 방식이 계속 사용되어 올 수 있었던 점도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점이다.
또한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거나 잘못 기술한 내용들을 많이 바로잡고 보완했으며, 편목(篇目)을 늘려 자세히 기술했다. 그리하여 『사기』에는 없는 전기(傳記)를 많이 추가했고, 『사기』의 8서(書)에 기초하여 10지(志)로 늘렸다. 뿐만 아니라 총체적이 구조를 조정하고, 일부 내용을 옮겨 다른 편장들 속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기』에서는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켜 「고조본기」의 앞에 두었는데, 『한서』에서는 고조 유방을 기록한 「고제기(高帝記)」를 맨 앞에 두고, 항우에 관련된 내용은 열전(列傳)에 포함시킴으로써 격을 낮추었다. 하지만 「왕망전」은 열전의 성격과 본기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한 합전(合傳)을 많이 두어 행적이 유사하거나 공통된 특징을 갖는 인물들을 하나의 전기에 묶어서 서술함으로써, 중복되는 서술을 피하고, 독자들이 검색하기에 편리하도록 배려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특성과 장점들을 비롯한 탁월한 식견과 사상을 담고 있지만, 『한서』가 2천여 년 동안 불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실록(實錄)’의 정신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사실을 왜곡하여 미화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반고가 『한서』를 저술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유업을 계승하여 한나라의 덕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서한 시대의 역사적 경험을 총괄하여 정리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치국(治國)을 위한 자료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바르고 올곧은 사람들의 행적을 전기에 수록하여 표창하고, 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도록 했다. 반대로 사악한 무리들의 행적도 상세히 기록하여 꾸짖음으로써, 그 악명을 또한 후세에 남기도록 했다.
『한서』는 한 부의 걸출한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 편의 뛰어난 산문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실제로 『한서』 이외에도 여러 편의 사부(辭賦) 작품들을 남겼는데,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어, 중국 고대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대 학자들은 곧잘 그의 『한서』를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하여 평가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글은 직설적이어서 역사적 사실들이 숨김없이 드러나며, 반고의 글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들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이백의 시(詩)는 신선과 검객의 말이며, 두보(杜甫)의 시는 전아(典雅)한 선비와 문사(文士)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문장에 비유하자면, 이백은 곧 『사기』이며, 두보는 곧 『한서』이다.” [송대(宋代)의 문학가 양만리(楊萬里)]
“역사가들이 『춘추(春秋)』를 계승하여 역사서를 저술했으나, 사마천과 반고에 비길 만한 이는 없다. 사마천은 원만하고 신묘한 것에 가까우며, 반고는 반듯하고 지혜로운 것에 가깝다.” [청대(淸代)의 저명한 역사 평론가 장학성(章學誠)]
“반고와 사마천 두 사람은 고금(古今)의 뛰어난 명필[絶筆]들이다. 명장(名將)에 비유하자면, 사마천의 재주는 호탕하고 얽매임이 없으니, 이광(李廣)의 기마사수(騎馬射手)와 같고, 반고의 재주가 풍부하고 체계가 있으니, 정불식(程不識)이 이끄는 보병의 대오(隊伍)와 같다.” [명나라의 문학가 능약언(凌約言)]
<중국사상가평전총서(中國思想家評傳叢書)> 서문(序文) / 쾅야밍(匡亞明)
내용 소개
일러두기
제1장 시대 상황
1. 동한 초기의 강성한 국력
(1) 황조(皇朝)의 통일과 정치 개혁
(2) 사회 경제의 회복과 발전
(3) 흉노(匈奴)를 평정하고 서역에 사절로 나가다.
2. 유학(儒學)의 정통화(正統化)와 미신의 성행
(1) 유학의 정통화
(2) “천하에 도참을 선포하다.[宣布圖讖於天下.]”
(3) 소박한 ‘이성(理性) 정신’을 발양하다.
제2장 학문의 연원(淵源)
1. 사마천이 역사를 저술한 우수한 전통
2. 반씨(班氏) 가문
(1) 반씨의 조상들
(2) 변경(邊境)의 부호(富豪)
(3) “지조와 절개가 굳건한[志節慷慨]” 유사(儒士)
(4) 명을 받아 황가(皇家)의 장서(藏書)를 교열하다.
(5) ‘바르고 곧으며 완고한’ 성품
(6)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사상 경향을 함께 수용해 나가다.
3. 반표(班彪)의 학술 사상 및 그것이 반고에 미친 영향
(1) “오직 성인(聖人)의 도(道)인 다음에야 마음을 다하다.”
(2) 외효(??)에게 할거(割據)를 포기하도록 권유하다.
(3) 「왕명론(王命論)」을 저술하여, 천하가 장차 유씨에게 통일될 것이라는 생각을 천명하다.
(4) 두융(竇融)에게 광무제 유수를 추대하도록 권하다.
(5) 끊임없이 왕래하고 관리(管理)를 강화하는 민족 대책을 제시하다.
(6) 『사기후전(史記後傳)』을 저술하다.
제3장 역사 저술에 바친 생애
1. 개인적으로 『한서』를 저술하던 것에서 어명을 받고 역사를 편찬하기까지
(1)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낙양(洛陽)에서 학문을 탐구하다.
(2) 적극적으로 인재를 천거하다.
(3) 개인적인 『한서』 저술
(4) 어명을 받고 역사를 편찬하다.
(5) 진(秦)나라의 멸망에 관한 정확한 인식
2. 포부를 굳게 지켜, 『한서』를 완성하다.
(1) 포부를 굳게 지키다.
(2) 『백호통의(白虎通義)』의 편찬
(3) 마침내 『한서』를 완성하다.
3. 흉노(匈奴) 정벌에의 출정과 반소(班昭)의 계속된 역사 저술
(1) 두헌을 따라 흉노 북벌에 출정하다.
(2)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다.
(3) 반소(班昭)가 계속하여 역사를 저술하다.
제4장 서한(西漢) 시대의 흥망성쇠에 대한 고찰
1. 한(漢)나라의 건국
(1) 한나라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2) 혼란 상태를 수습하여 바로잡다.
(3) 소하(蕭何)가 계획하고 조참(曹參)이 따르다.
2.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
(1) 문제와 경제의 치세
(2) 통일과 분열
3. 무제(武帝) 시기의 태평성세
(1) 대일통(大一統)
(2)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을 지닌 한나라 무제
4. 소제(昭帝)와 선제(宣帝) 시기의 중흥
(1) 곽광(?光)이 정치를 보좌하다.
(2) 선제의 치국(治國)
5. 제국의 쇠락
(1) 권신(權臣)들의 정치 권력 독점과 전횡
(2) “바르고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다.[正直之路壅塞.]”
(3) 사회 모순의 격화
제5장 새로운 역사 서술 체계의 확립-반고의 역사 편찬 사상
1. 새로운 역사 저술 체제의 창립
(1) 『사기』의 속작(續作)
(2) 새로운 역사 저술 체제의 창립
2. 내용의 증보(增補)
(1) 뛰어난 보충
(2) 편목(篇目)의 증설(增設)
(3) 사마천에 비해 한 걸음 더 향상시키다.
3. 엄밀하고 합리적인 체제
(1) 총체적인 구조를 조정(調整)하다.
(2) 내용을 옮겨 배치하다.
(3) 합전(合傳)을 많이 두다.
(4) “한 조대를 잘라 내어 역사로 삼은 것[斷代爲史]”과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아는 것[通古今]”
(5) ‘지(志)’와 ‘표(表)’를 함께 갖춘 절묘한 운용
(6) ‘기(紀)’와 ‘전(傳)’의 체제를 겸비한 「왕망전(王莽傳)」
4. 전통 역사학 확립의 상징
제6장 탁월한 역사 식견
1. 복고(復古)에 반대하고, 한나라의 업적을 선양(宣揚)하다.
(1) 속유(俗儒)들이 옛것을 숭상하면서 지금의 것을 비하한 경향
(2) 왕충(王充)의 기대
(3) 복고(復古)에 반대하다.
(4) 한대(漢代)의 업적을 선양하다.
2. ‘실록(實錄)’의 정신을 발양(發揚)하다.
(1) 『사기(史記)』에 대한 평가를 통해 뜻을 기탁하다.
(2) 종실과 외척의 잔혹함과 부패를 사실대로 기록하다.
(3) 폐정(弊政)을 폭로하다.
3. 정직함을 표창(表彰)하고, 사악함을 분노하여 꾸짖다.
(1) 바르고 곧은 사람들의 이름이 청사에 길이 남도록 하다.
(2) 사악한 무리들의 악명을 천추에 남게 하다.
4. 탁월한 인재(人才) 사상
(1) 시대의 형세가 영웅을 만든다.
(2) 인재와 지리 환경
(3) 인재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다.
5. 광범위한 사회생활의 모습들을 반영하다.
(1)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에 관심을 갖다.
(2) 변방을 안정시키고 민족 우호를 주장하다.
(3) 학문의 변화 발전과 그 풍조(風潮)
(4) 사회 풍속
6. 정통(正統) 사상의 흔적
제7장 신학(神學)의 탁류(濁流)에 대항하다.-반고의 ‘천인(天人) 관계’ 사상
1. ‘인간사[人事]’를 중시하는 ‘천인 관계’ 사상
2. 귀신에게 비는 것을 비웃고 풍자하다.
3. 음사(淫祀)를 비판하다.
4.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도참(圖讖)의 미신을 반박하다.
제8장 “식량이 풍족하고 재화가 유통된 다음에야, 나라가 건실해지고 백성들이 부유해진다.[食足貨通, 然後國實民富.]”-반고의 경제 사상
1. “식량[食]과 재화[貨]의 두 가지가 근본이다[食貨二本]”라는 새로운 사고
2. “식량이 풍족한 다음에야 재화가 유통될 수 있다.[惟食足而後貨可通.]”
3. 화폐 제도 개혁 및 ‘재화 유통[貨通]’의 작용
4. 개입주의적 경중론(輕重論)
5. 경제 정책과 국가의 흥망성쇠
(1) 한나라 초기의 궁핍 상태에서 풍족한 국면의 출현까지
(2) 한나라 무제 시기의 재정 위기와 그 완화
(3) 경수창(耿壽昌)이 실시한 경제 조치들
(4) 왕망(王莽) 시기 경제 정책의 실패
6. 수리(水利) 공사와 국가 ‘이해(利害)’의 관계
(1) 수리와 ‘식화(食貨)’의 관계
(2) 황하의 치수를 중시하다.
제9장 덕(德)이 주가 되고 형벌은 보조 수단이며, 각각 그 쓰임이 있다.-반고의 형법(刑法) 사상
1. “무거운 형벌에는 무장한 군대[甲兵]를 쓴다.[大刑用甲兵.]”
2. 형벌의 경중(輕重)은 적절하도록 힘써야 한다.
3. 법률 조문의 복잡함과 간결함은 적절하도록 힘써야 한다.
4. 법률 집행은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률이 정한 것 이외의 형벌 사용을 반대하다.
5. 예(禮)와 법(法)을 함께 사용하되, 예를 주(主)로 삼다.
제10장 민족일통(民族一統)을 찬양하다.-반고의 민족 사상
1. 민족일통
2. 오랑캐와 한족(漢族)은 다르다.[夷夏有別]
3. 은혜와 위엄을 함께 사용하다.[恩威竝用]
제11장 천문 역법과 자연 현상을 논하다.
1. 천문 현상을 논하다.
2. 음률(音律).도량형(度量衡) 및 역법(曆法)을 논하다.
3. 일식(日食).태양의 흑점(黑點).핼리 혜성에 관하여
4. 「오행지(五行志)」의 과학 관련 기록과 미신의 결합
(1) 「오행지」의 성격
(2) 「오행지」의 문헌적 가치
(3) 외국 학자들의 「오행지」에 대한 높은 평가
(4) 유지기(劉知幾)의 「오행지」 비판에 관해
5. 반고의 자연 재이(災異)에 대한 관점
제12장 지리 연혁(沿革)과 학술의 원류를 논하다.
1. 지리 환경과 역사 발전을 논하다.
(1) 지리 연혁과 역사 유적
(2) 지리 환경과 경제 발전의 관계
(3) 지리 환경과 풍속 문화의 관계
(4) 지리 환경과 군사의 관계
2. 학술의 원류를 논하다.
(1) 국가 문헌(文獻)을 크게 통합하여 총정리하다.
(2) 중국 고대 학술 분류의 기본 체계를 확립하다.
(3) 「예문지(藝文志)」와 『칠략(七略)』의 관계
(4) 학문을 이치에 맞게 분별하고, 그 원류를 탐구하다.
(5) 심오한 학술 체계 사상
제13장 문학에서의 성취
1. 역사학계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2. 위대한 문장과 탁월한 이론으로, 후세에 도움을 주다.
3. 인물을 형상화하는 뛰어난 기법
(1) 사건과 장면 속에서의 인물 묘사
(2) 인물의 묘사를 통해 시대의 특징을 반영해 내다.
4. 뛰어난 한부(漢賦) 작품들
제14장 반고의 역사학이 후세에 끼친 거대한 영향
1. 반드시 읽어야 할 책
2. ‘한서학(漢書學)’의 흥성
3. “『한서』를 읽지 않으면 곧 범속한 사람이다.[不讀『漢書』則俗.]”
4. “후세에 영원하다.[後世不?之宗.]”
5. 『한서』 연구의 침체기를 벗어나다.
후기(後記)
<부록 1> 반고의 생애 및 주요 연표
<부록 2> 주요참고 문헌
<부록 3> 찾아보기 1(인명)
<부록 4> 찾아보기 2(용어)
<부록 5> 찾아보기 3(문헌 및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