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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매력의 사나이 예수 새로 쓰는 메시아 이야기

박태식 저 | 들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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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5276538 / 408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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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 신神인가, 성인인가, 지도자인가 혹은 교사인가? 예수는 종교적ㆍ사회적 지도층 인사가 아니었다. 재야 종교인이자 유랑 선교사였다. 그러나 예수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넘볼 수 없는 지혜와 막강한 화술로 인간의 가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넘치는 매력의 사나이 예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서술한 예수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 시대에 맞게 새로 쓰는 예수 이야기”일 것이다. 대한성공회 사제로 활동 중인 저자가 삼십 년에 달하는 예...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 신神인가, 성인인가, 지도자인가 혹은 교사인가? 예수는 종교적ㆍ사회적 지도층 인사가 아니었다. 재야 종교인이자 유랑 선교사였다. 그러나 예수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넘볼 수 없는 지혜와 막강한 화술로 인간의 가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넘치는 매력의 사나이 예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서술한 예수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 시대에 맞게 새로 쓰는 예수 이야기”일 것이다. 대한성공회 사제로 활동 중인 저자가 삼십 년에 달하는 예수 공부의 결과를 현대인의 시각에 맞게 정리한 이 책은 예수의 실존 여부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 예수와 교회, 예수와 세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광적으로, 혹은 신화적으로 부풀려지거나 오도된 예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를 역사적으로 탐색하고,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근거 아래 “인간으로서의 예수, 고향 나자렛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았던 시기의 예수, 예수의 (제자)교육방법과 가족에 대한 관념, 유대인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신앙의 관점” 등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교회와 성찬례의 의미’처럼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들도 친절하게 풀이했다. 특히, 영화ㆍ신문기사ㆍ베스트셀러와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신앙의 민감한 주제들인 “용서, 구원, 종교와 평화, 인간과 신의 사랑, 그리스도교와 타 종교와의 관계, 과학윤리” 등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자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의심 없이 예수를 따르고, 무조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색하게 해주는 책이다. 학자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연구한 저자의 고민과 인문학적 향기가 함께 배어나오는 “새로 쓰는 메시아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성서본문을 우리나라 가톨릭과 개신교가 1977년에 합동으로 낸 『공동번역』을 준거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독자의 편의를 위해 본 책에서는 인용된 성서구절을 본문 옆에 함께 실었다). 저자는 서강대와 독일 괴팅겐대학교를 졸업(신학박사)하고,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학자인 동시에 대한성공회 장애인센터인 ‘함께 사는 세상’의 지도신부로 활동 중이다. 월간 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한 교계 유일의 영화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인의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 책은 “예수에 대해 현대인이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을 가능한 한 쉽고 설득력 있게 쓴 책”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혹은 “기도와 응답, 축복”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일반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인간 너머”의 삶을 살다 간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서의 예수를 다룬다. 그러므로 예수의 실존 여부를 고대 문헌에서 확인하는 작업으로 첫머리를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수는 실존 인물이었다. 이 사실은 비(非)그리스도교 문헌인 『바빌론 탈무드』, 요세푸스의 『유대고사』, 수에톤의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의 『연대기』, 『플리니우스 편지』 외에 6세기 말경의 문헌인 『바빌론 탈무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의 도당’, ‘예수라고 하는 마술쟁이’,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수상한 만찬’ 등 일곱 개의 고대 문헌에서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대목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예수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건축기술자인 아버지 아래 태어난 역사 속 인물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독신의 길을 걸었으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내로라하는 랍비들과 학적 토론을 즐겼을 만큼 명민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른바 ‘유랑 선교사’로서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래아 호숫가를 중심으로 약 3년 동안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주류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아니었다. 혁명을 꿈꾼 정치가도 아니었다. 돈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재력가도 아니었고, 뛰어난 외모와 재능으로 대중에게 어필했던 희대의 엔터테이너도 아니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도발적인 멘토 예수 기나긴 압제 아래 꿈과 의식마저 헐벗게 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나를 따르라”며 해방의 깃발을 흔들어줄 메시아여야 했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예수는 소박하고 고독한 방랑자였다. 아무 데서나 먹고 마시고 자고, 거리낌 없이 세리나 이방인의 집을 드나들었다. 예수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제자들마저 예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어디 그뿐인가? 생업마저 팽개치고, 고향과 가족도 버린 채 따를 만큼 매력과 위엄이 넘쳤지만, 정작 군중이 갈구했던 변화는 안겨주지 않았다. 게다가 조상 대대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으쓱대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서슴없이 충격파를 던진다. 계층 간 벽을 허물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던 구원의 범위를 넓히고, 무엇보다 대중 개개인의 도그마를 깨트린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해 처단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방인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주었고, 재산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여기서 그치면 다행이다. 예수는 입에 담기 껄끄러운 과격하고 날선 언어들을 사용해서 가르침을 전파하기 일쑤였다. 아마 사회 지도층에게 세뇌 당했던 일반 군중에게 충격 요법을 줄 요량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사람들 몰래 “선생님, 말씀 좀 곱게 해주세요” 하고 간청해도 들은 척 만 척할 뿐이었다. 예수의 그 모든 언행은 한 길로 향한다. 하나의 목적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즉 “네 자신을 깨트리라”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깨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추구하는 그 가치가 인간 너머의 삶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궁극적인 가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다 예수가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도그마를 깨고), 하느님의 품성을 나누어 받는 존재(완전무결한 사랑의 존재)로서 스스로의 놀라운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더 나아가 “타인의 눈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즉,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의 역할과 책무를 깨우치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라”는 사랑의 가르침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예수가 역설한 가르침은 곧 윤리적인 실천 요구를 넘어서는 실존적 깨우침이기도 하다.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그 뜻을 가장 충실하게 전파한 제자 바울로에 따르면 사랑은 “종말론적 가치”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추구해야할 가치, 절체절명(絶體絶命)아 가치라는 뜻이다. 바울로는 완전함, 즉 하느님의 종말이 오면 현재의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앎만 전해주는 은사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 눈의 비늘이 떨어져나가는 경험’ 없이는 결코 그 숭고한 가치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돈이든, 건강이든, 미모든, 학식이든 우리는 저마다 우상을 몇 개쯤 지니고 살아간다. 알게 모르게 교만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인

저자 소개

대한성공회 사제.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신학석사,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에세이>로 등단했고,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다(한국영화평론가 협회 회원). 성공회대학교,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출강했다. 현재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인 ‘함께 사는 세상’ 지도신부로 있다. 쓴 책으로 『예수와 교회』, 『나자렛 예수』, 『왜 예수이어야 하는가?』, 『데미트리우스』, 『일세기 교회』, 『복음서와 시간』, 『타르수스의 바오로』, 『여정 첫걸음』, 『예수의 논쟁사화』(2009년 문화관광부 교양추천도서 선정), 『마르코복음』, 『영화는 세상의 암호』, 『영화는 세상의 암호 II』, 『영화는 세상의 암호 III』,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공저), 『종교의 세계』(공저), 『우리 집 마당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공저), 『재미있는 종교이야기』(공저), 『장애 너머 계시는 하나님』(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사도신경』, 『종교사입문』, 『바오로의 편지』, 『놀라운 변화』, 『네 복음서와 예수전승』, 『촛불이 길을 밝혀 줄 거야』, 『가장 귀한 선물』, 『바티칸에 간 피아』, 『우리 인간의 종교들』(공역)이 있다. 


 

책 속에서

기원후 112년경 로마의 속주 비티니아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 플리니우스 2세(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기원후 61-112)는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98-117)에게 편지를 보냈다. 비티니아에서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자들을 처리하는 데 지침을 내려달라는 편지였다. 그는 문제를 유발시키는 자들을 거론하면서 한 가지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나는 그들에게서 괴팍스럽고 극단적인 미신밖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사를 연기하고 당신의 조언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충직한 총독으로서 최선을 다해 사안을 조사했으니 그 마지막 결정도 황제가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노련미 넘치는 관리의 모습이다. 그 편지 중에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관해 위와 같은 묘사가 나온다. 틀림없이 플리니우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예배에 정보원을 잠입시켰을 테고 그 정보에 의거 결론을 내렸다. ‘죄 없는 완전히 평범한 식사cibum, promiscuum tamen et innoxium!’ 이는 분명 성찬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죄 없음과 평범함을 강조했을까? _“역사적 존재 예수” 중에서

 

가족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보도한 마르코복음 3장(20-21절, 31-35절)과 마태복음 10장(35-36절), 그리고 루가복음 9장(60절)을 보면 하나같
이 기존의 가족 관계를 거부하는 말씀들이 나온다. 집안 식구끼리 맞서게 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제자를 만류하기까지 한다. 가족이라는 인연을 그처럼 가볍게 여긴 예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가족 관계, 곧 종말론적인 가족 관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한 뒤에 예수는 주변에 둘러앉은 군중을 둘러보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4-35)고 말씀한다. 비록 피와 살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로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 가치가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_“나자렛 출신 예수” 중에서

 

예수는 파격적인 표현을 즐겨하신 분이다. 이를테면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마태 5:29-30), “누가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마태 5:40),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도 죄짓게 하거든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 속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마태 18:6),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6),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마태 23:13), ‘회칠한 무덤’(마태 23:28),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가 10:16), ‘독사의 새끼’(루가 3:8 세례자 요한의 말),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23) 등등이 있는데, 이를 글자 그대로 알아듣고 실행하는 이는 아마 예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다. 무슨 죽을 짓을 했다고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자살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 치고 몇 명이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파격적인 예수의 말씀에서 정작 중요한 점은 말씀이 주어진 상황이다. 예수는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와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의 바로 전에 갈구하는 눈으로 여자를 쳐다본 경우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마태 5:28).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가 ‘에피튜메오’인데 그 뜻은 그저 관심을 갖고 쳐다보는 정도를 뜻한다. 말하자면 지나가는 여자를 은근하게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육체적인 간음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과연 한 번의 눈길로 불륜이 성립될 수 있을까? 예수의 말씀을 처음 들었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_“사람을 바꾸다; 탁월한 교사 예수” 중에서

 

예수는 자연에서 하느님의 창조섭리를 깨달아 우리에게 알려주는 식의 독특한 가르침을 펼친 분이다. 예수의 자연 이해를 상기해보면 하느님의 창조가 비단 세상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주어진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창조 안에 이미 스러짐, 곧 종말의 논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명할 때 한결같이 자연에서 도출된 비유를 사용한다. 비유에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하루하루 쉬지 않고 자라난다. 그리고 이런 현재는 또 다른 현재로 이어져 뿌려진 씨에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낱알을 맺는다(마르 4:26-29). 그런가 하면, 하느님 나라란 마치 밀가루 반죽에 넣어놓은 누룩처럼 꾸준히 반죽을 부풀게 하고, 겨자씨 한 알처럼 작기는 하나 매 순간 땅 속에서 꾸준히 자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란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장차 닥쳐올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그날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밭의 주인은 추수 때가 된 줄 알고 곧 낫을 댈 것이며, 겨자씨는 어느덧 큰 가지를 뻗을 만큼 자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쯤에는 누룩을 섞어 밤새 아랫목에 넣어두었던 밀가루 반죽도 알맞게 부풀어 올라 끓는 물에 들어갈 준비가 끝난다. 비유에 따르면 이 같은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현재가 이어지고 이어져 그 축적된 힘으로 실현되는 미래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바로 종말-묵시 사상과의 접점이 발견된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당연히 인간의 시간관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시간대, 즉 인간 역사의 끝에 다다른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로 역시 그 점을 잘 인식하고 있어,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 나아갑니다”(1고린 8:6)라고 한 바 있다._“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 나타남과 스러짐 ” 중에서

 

예수가 이끌었던 공동체는 이리저리 유랑하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공동체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소유공동체를 지향했다. 이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 했던 예루살렘 모교회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복음서의 보도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부인네들은 모두들 재산을 헌납하여 예수의 공동체를 도왔다고 하며(루가 8:3), 세리장 자캐오는 예수와 뜻을 같이 하여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고(루가 19:8), 어느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구하자 예수는 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마르 10:21).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33)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 어떤 종도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이치처럼 제자들 역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으며(루가 16:13) 재물 욕심을 정 버릴 수 없다면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해두라고까지 충고한다(루가 12:33-34). 이 외에도 예수는 재물에 대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씀을 했다. 하나같이 소유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예수의 이상은 교회로 전수되었고,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게 권장할 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자리 잡게 된다._“넘치는 매력의 사나이; 지도자 예수” 중에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찬례 중에 예수가 현존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나 그 효력에 있어서는 이견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성찬례를 제정한 예수의 말씀(24절) 이후에도 ‘빵’을 여전히 ‘빵’으로 부른다는 사실(26절)에 주목했다. 따라서 성찬 ‘안에서’, 성찬과 ‘더불어’, 그 모습 ‘아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신앙인에게 주어진다는 설명이 주어졌고(루터의 저작 『Solida Declaratio VII』에 나오는 내용임) 이를 ‘실체공존consubstantiatio’이라 불렀다. 성찬례성사 제정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제정과 더불어 빵과 포도주가 지속적으로 예수의 현존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반면 루터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성체(빵과 포도주)를 받는 순간만 현존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같은 종교개혁자라 하더라도 츠빙글리 등 또 다른 이들은 성찬례성사에서 예수의 현존이 사실로 주어진 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기억의 형태로 예수의 현존이 개개인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예수는 빵을 떼고 잔을 드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고 했으니(24, 25절) 일리가 없는 주장도 아니다. 하지만 이쯤 되면 가톨릭의 가르침과 상당한 거리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트렌트 공의회(1551)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을 단죄하고 말았으며, 지금까지도 그 싸움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실체변화’ 가르침을 두고 집단적 ‘우상숭배’로 비난하고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입장을 개인적 ‘신심과시’로 치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긍정적 변화가 한두 가지 있었다._“이것은 나의 살과 피; 예수의 최후만찬과 성찬례” 중에서

 

죄란 무엇인가?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인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지하철 역 계단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 한 푼 안 던져 준 것도 죄에 해당하는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죄는 우선 인간의 의지와 직접 관계된다. 하지만 이는 약점이 많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오늘 하루, 전적인 나의 의지로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내에게 험한 말도 하지 않고 자식에게 손찌검도 하지 않았으며 고생하는 직장 부하들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었고, 심지어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은 죄가 용서되는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사도 바울로는 죄란 ‘구조적인 문제’라고 가르쳤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세일하는 악어가죽 핸드백을 1/3 가격에 사서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고 쳐보자. 그 남자는 죄를 지었을까? 대단히 죄송하지만 말씀이지만 그는 죄를 지었다. 우선 멀쩡히 살아 있는 악어의 숨을 끊었을 테고, 누군가 악어가죽을 가공하기 위해 작은 망치로 가죽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모루 질을 했을 것이다. 이 작업에는 아프리카 등지의 어린이가 동원되었을 테고, 오랫동안 모루 질을 한 탓에 관절염에 걸려 팔을 절단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죽을 가공하느라 독한 화학약품에 장시간 담가두었을 것이다. 악어가죽 핸드백 하나를 사면서 생태 파괴, 어린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맘먹고 큰 돈 모아 선물을 산 천사 같은 남편이었는데도! _“구원 받았나요 영화 <밀양>의 이해” 중에서

 

안식일 다음날, 부활한 예수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난 못 자국으로,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처가 아물었을 리 만무다. 그는 ‘샬롬’이라고 평화를 비는 인사를 건넨 후에 숨을 내쉬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내어준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녀간 후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동료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동료들을 비웃듯이 자신의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자기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여드레 뒤에 이번에는 토마까지 있을 때에 예수가 다시 한 번 나타나 마치 토마가 한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고 말씀하신다. 토마는 예수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하여 자신의 의심을 떨쳐버린다. 발현 사화의 전개를 따라가보면, 반전反轉을 염두에 둔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발현 사화 덕분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토마는 ‘의심 많은 토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토마의 태도가 합리적이었던 점만은 분명하다.
‘의심 많은 토마’는 예수부활에 대한 그 많고 많은 발현 사화들 중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바로 토마라는 매개 인물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 예수는 토마가 없을 때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이 육으로 부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침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이를 믿지 않았기에, 예수 입장에서 보면 수고스럽게도 한 번 더 나타나 손가락을 사용해 몸이 부활하였음을 확인시키려 한다. 이를테면 두 번에 걸쳐 확인했으니, ‘이 정도면 육의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리가 포함되는 것이다._“예수의 부활, 믿을 수 있는가?” 중에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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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_ 새로 쓰는 메시아 이야기 5
성서 약어표와 일러두기 10
신약시대 이스라엘 지도 11
1장 예수 사건의 시작
역사적 존재 예수 15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었을까? 15 │ 『바빌론 탈무드』 베라콧? 28b 17 │ 요세푸스, 『유대고사』, 18권 3 장 17 │ 수에톤, 『클라우디우스』, 25 19 │ 타키투스, 『연대기』 15장 44절 19 │ 『플리니우스 편지』 2장 7항 21 │ 요세푸스,『유대고사』, 20권 200장 22 │ 6세기 말경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편 43a 23
나자렛 출신 예수 25
예수라는 이름 25 │ 예수의 탄생지와 탄생일 28 │ 예수의 가족 관계 32 │ 예수의 직업과 교육 정 도 36
세상의 인물 예수 39
예수의 공생활 시작과 요한 세례자 39 │ 예수의 공생활 기간 43 │ 예수의 활동 지역 45 │ 예수에게 붙여진 이름 49
2장 예수 그리스도
사람을 바꾸다_탁월한 교사 예수 55
파격적인 언어 56 │ 속 시원한 언어 58 │ 요점을 밝히는 언어 61 │ 사람을 바꾸다 64
그대, 포기할 수 있는가부자청년의 슬픈 뒤꼭지 70
영생의 비법 72 │ 자기를 돌아보시오 75 │ 조고각하照顧脚下 77
가족을 포기하라_예수의 가족 82
예수의 출가 84 │ 네 부모를 공경하라 88 │ 새로운 가족 90
깨어 있으시오_몸과 마음은 하나 95
예수, 잠 깨우기의 명수 96 │ 잠과 기도 100 │ 게쎄마니의 기도 104 │ 히브리 사고방식 105
차고 넘치는 은혜_마귀는 이미 떠나갔다 109
시로페니키아의 여인 110 │ 자녀와 개 112 │ 불굴의 용기 114 │ 이야기 해석의 역사 116 │ 교 환-증여 119
인본주의 창조관의 종말_나타남과 스러짐 125
종말, 그리고 물 127 │ 시작과 끝, 나타남과 스러짐 130 │ 인간을 위한 창조? 133 │ 인본주의 창 조관의 해체 137
하느님, 시간의 주인_예수의 시간 이해 141
예수의 시간 계산 142 │ 산 이들의 하느님 145 │ 영원한 현재 149 │ 시간의 주인 151
사랑, 하느님의 느낌_첫째가는 계명 156
사랑의 이중계명 157 │ 실존적 깨달음 161 │ 그중 최고는 사랑이다 163 │ 사람이 하느님 168
넘치는 매력의 사나이_지도자 예수 173
소유공동체 174 │ 사유재산권의 포기 178 │ 예수의 리더십 182
3장 예수와 교회
주교와 교황_교회의 지도자 193
주교의 등장 195 │ 주교-사제-부제 197 │ 교황의 등장 199 │ 바티칸 시국 원수 201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_그리스도교 교파들 207
교파마다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이 다른가요? 208 │ 그리스도교 교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208 │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요! 209 │ 각 교파의 교리에 나타나는 공 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210 │ 교계제도는 어떻게 다른가요? 214 │ 개신교 내의 분파의 종류와 이름, 교리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215 │ 동방정교회의 지역별 이름과 분포 지역이 궁금합니다! 217 │ 그리스도교 교파가 성물을 대하는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요? 218 │ 각 교파를 대표하는 영성가들의 삶을 알 고 싶어요! 219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_먹을거리에 대한 가르침 223
자연법칙에 따라 224 │ 감사함으로 227 │ 더럽혀진 음식, 더렵혀진 몸 230
이것은 나의 살과 피_예수의 최후만찬과 성찬례 234
실체변화 논쟁 235 │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 237 │ 예수의 최후만찬 239 │ 성찬례문의 배경 241
수도회, 대안공동체_과 248
위대한 침묵 250 │ 침묵과 대화 252 │ 신과 인간 255 │ 트라피스트 수도원 256
예수 영성, 우리 영성_우리에게 필요한 영성 264
나는 누구인가? 265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266 │ 다윗의 그리스도 267 │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269
4장 예수와 세상
예수 끌어내리기_유다복음과 다 빈치 코드 277
메가 베스트셀러 278 │ 마리아 막달레나 281 │ 유다복음 284 │ 이단의 책 유다복음 288
슈퍼인간은 출현할 것인가생명과학과 생명윤리 294
그리스도교 윤리의 한계 296 │ 상대화의 길 298 │ 생명의 목적 301
구원 받았나요영화 의 이해 305
비밀스런 빛 306 │ 죄는 숙명이다 308 │ 밀양과 광주 310
종교와 평화_영화 314
그을린 사랑 315 │ 복수의 포기 317 │ 이슬람의 거인巨人정신 319 │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어라 321
사람을 살리는 종교_성서의 타 종교관 326
은전을 잃은 여인 327 │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329 │ 그리스도교와 타 종교 333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_와 338
라이프 오브 파이 339 │ 클라우드 아틀라스 341 │ 동서양의 융합 343 │ 안수정등과 의심하는 토마 346
하느님이 원하신다!_성서의 노년 351
아브라함의 제사 353 │ 필레몬에게 356 │ 아름다운 노년 360
5장 예수사건의 끝
예수의 수난과 처형 365
예수의 수난 365 │ 십자가 처형 370
예수의 부활, 믿을 수 있는가? 375
빈무덤 사화 375 │ 발현 사화 378 │ 의심 많은 토마 380 │ 부활 예수가 준 사명 381 │ 믿을 수 있는가? 383
예수 사건의 끝은 어디인가? 389
부활에서 삼위일체까지 389 │ 끝은 언제일까? 392
꼬리글_ 나는 그 희망에 산다 396
참고문헌과 주석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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