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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1952188 / 482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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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만 17세에 해방을 맞이해 공산주의를 체험하고 60여 년을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어느 늙은이의 넋두리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20세기의 격동기를 한 마리 늑대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이다. 아직도 내 마음의 눈물 줄기에는 희망의 꽃망울이 살아 있다.
- 머리말 중에서
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선생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며 수필가, 방송인,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위진록 선생이 80여 년의 인생행로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그간 수필집과 클래식 음악 에세이를 집필, 출간한 위진록 선생은 20세기 한국의 현대사와 맞물린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고백적 기록’이라는 부제 그대로, 위진록 선생은 자신의 삶을 과장되게 윤색하거나 미화하는 법 없이 사실 그대로 드러내면서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서 겪어야 했던 삶의 희노애락을 되돌아보고 있다.
위진록 선생은 오로지 몇 자루의 연필에 의지해 200자 원고지 2300여 매에 달하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일제의 조선말살정책이 한창 진행되던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대부분을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보내고 경성역(서울역)에서 역부로 근무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고 이어 만 19세의 나이로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아나운서로 합격한 이후 위진록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창기의 현장 일선에서 활약했다. 이승만 대통령 지방 순시 수행 기자,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6·25전쟁 남침 제1보 방송, 9·28 서울수복 제1보 방송 등 역사적인 순간에는 늘 위진록 선생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울려 퍼졌다.
또한 라벨의 ‘볼레로’ 초연 중계, 라디오 성우, 영화 내레이터, 라디오 드라마 집필 등 다양한 문화 방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 남아 여러 번의 절체절명 순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위진록 선생은 1950년 11월 한 달 예정으로 당시 도쿄에 자리한 UN총사령부방송의 아나운서로 일본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64년을 조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서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과 10대 시절을 보낸 기록, 둘째, KBS 아나운서로 전방위에서 활약하다가 6·25전쟁을 맞이하여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시절의 기록, 셋째,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UN총사령부방송에 근무하며 다시 격동의 시기를 겪게 되는 1960년대 한국과의 인연, 넷째 1972년 청춘을 모두 바친 UN총사령부방송을 떠나 불혹이 넘은 나이에 미국 이민길에 올라 LA의 해변에 자리를 잡고 햄버거 장사를 하며 고군분투 살아온 삶의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위진록 선생의 <고향이 어디십니까?>에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낯선 땅을 떠돌며 평생을 살아야 했던 이방인의 고독한 숨결이 진하게 배어 있다.
[언론 소개]
문화일보 2013-09-30
북한 인민군의 6·25 남침 1보와 국군의 9·28 서울 수복 소식을 맨 먼저 방송했던 재미교포 위진록(85) 전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아나운서는 남북한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부평초 삶을 산 현대사 산 증인이다. 65주년 국군의 날인 10일 1일에 맞춰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출간한다. 그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토대로 군 발전을 위해 충정어린 고언(苦言)을 했다.
위 씨는 1950년 6월 24일 토요 숙직을 서면서 현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간다. 다음날 새벽 5시 10분 스튜디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권총을 찬 박모 대위가 전쟁 발발을 알리는 메모를 꺼내며 바로 읽을 것을 명령하지만, 그는 첫 방송이 오전 6시로 방송 규정에 따라 방송국장 대리 민재호 씨에게 연락하고, 당시 휴전선 충돌이 잦았던 때라 상부 확인 작업을 거쳐 오전 7시쯤 ‘북한군 전면 공격’ 임시뉴스를 내보낸다.
1955년 한 일간지 6·25 좌담회에 참석한 군 장성들은 전쟁 직전 국군의 경비 태세 문제는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은 대신 “방송을 늦게 해 국군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전세가 확 달라졌을 것”이라며 말단 아나운서 위 씨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전사(戰史)에는 1950년 6월 24일 저녁, 육군 장교클럽 낙성기념 파티에 참석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 등 군 수뇌부는 명동 술집에서 2차 회식까지 하고 새벽 2시에 귀가하며, 새벽에 북한군 침공 보고를 받은 채 총장은 “또 그런 충돌이겠지”하며 몽롱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고 기록돼 있다. 새벽 5시40분에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육군본부에 출근했는데 오전 6시가 되도록 육군본부에는 간부 장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위 씨는 “전쟁 발발 1년 전부터 남침 소문이 파다했지만 군과 국민의 총체적 안보 불감증이 북의 오판을 불렀다”며 유비무환을 강조했다.
위 씨는 “2012년 북한 탈출병 ‘노크 사건’등 국군의 불명예스러운 일이 보도될 때마다 책임을 전가하던 그 옛날 장군들의 무책임한 전통이 살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된다”고 꼬집었다.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10년 만에 최대 규모로 치러진다. 하지만 제아무리 비싼 첨단 무기도 정신력이 해이해지면 무용지물이다.
북한군 침략을 막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군 전체를 폄훼하자는 건 아니다. 남침 위기를 제때 감지하지 못하고 결정적 경계 실패 등 군기(軍紀) 해이를 남 탓으로 돌린 군수뇌부의 무책임함이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정충신/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