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고예상일 안내
주문하신 상품이 한국에서 현지 배송을 위한 출고단계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입니다. 상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출고예상일에 다소 오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 상품(예약상품포함)을 함께 주문하신 경우 출고예상일이 가장 늦은 날짜에 맞춰 함께 배송됩니다.

ISBN : 9788994963808 / 548쪽 147 x 195 (㎜)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
스즈키 유이
-
조남주
-
정한아
-
박솔뫼, 성혜령, 임솔아, 장희원, 정기현, 황시운
- 15,300
- 16,200
- 11,700
- 15,300
- [시리즈] 알마 징비록 시리즈 [4]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전쟁의 책임을 사무치게 느낀 한 나라의 재상이 진심으로 아로새긴 뼈아픈 기록, 일본도 중국도 탐낸 임진왜란의 진실을 말한다! 샘깊은오늘고전은 2006년《주몽의 나라》를 첫 권으로 시작해 이규보?, 이옥, 허난설헌, 박지원, 조위한, 신류, 김시습, 최부, 정약용, 김려, 나만갑, 허균을 비롯한 무명씨의 문학 작품과 역사 기록을 오늘의 한국어로 새로이 다듬어 펴내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원전 비평, 문체, 구성, 편집, 미술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의 호평을 거울삼아, 앞으로 총서의 목록을 더욱 알차게 채워 나가겠습니다. ... 전쟁의 책임을 사무치게 느낀 한 나라의 재상이 진심으로 아로새긴 뼈아픈 기록, 일본도 중국도 탐낸 임진왜란의 진실을 말한다! 샘깊은오늘고전은 2006년《주몽의 나라》를 첫 권으로 시작해 이규보, 이옥, 허난설헌, 박지원, 조위한, 신류, 김시습, 최부, 정약용, 김려, 나만갑, 허균을 비롯한 무명씨의 문학 작품과 역사 기록을 오늘의 한국어로 새로이 다듬어 펴내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원전 비평, 문체, 구성, 편집, 미술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의 호평을 거울삼아, 앞으로 총서의 목록을 더욱 알차게 채워 나가겠습니다. 지난 2012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7주갑, 그러니까 60갑자가 돌아온 지 7주기가 된 때였다. 서양에서는 100주년을 기념의 중요한 계기로 삼지만,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한 갑자, 60년을 한 주기로 삼아 기념과 반추와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 《징비록》에 대하여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군무의 으뜸 벼슬인 도체찰사 및 정무의 으뜸 벼슬인 영의정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의 기록이다.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다. 책 이름에서 “징비”라는 말은 《시경》 에 나오는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유성룡이 쓴 서문 가운데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라는 문장과 맥이 닿는다. 유성룡은 책임 있는 벼슬아치로서 전쟁을 막지 못한 부끄러움에 사무쳐 있었다. 또한 전쟁의 고통은 백성들이 죄다 겪는다는 사실도 똑똑히 목도했다. 나라의 운명이 상국이자 대국인 명나라에 맡겨진 사이에 나라의 체모가 어떻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도 절절히 체험했다. 백성은 침략자에게 학살당하고 있는데, 작전과 휴전과 평화 협상의 주체는 오로지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그리고 침략자 일본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군사작전권마저 명나라에 사실상 넘긴 상황에서 침략자를 마음 놓고 응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한강을 기점으로 조선을 분할 통치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구원병을 보낸 또다른 전쟁 당사자인 명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조선을 완전히 식민 통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백성은 “차마 제 자식을 잡아먹지 못해,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굶주리고 시달리고 고통을 받았다. 일본군에 붙잡혀 끌려가고, 일본에서 다시 세계 각지로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의 수는 셀 수가 없다.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절감한 유성룡은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크게 절망했다. 더구나 정유재란 이후 다시 격화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대 붕당의 탄핵을 받아 사직도 아닌 관직을 삭탈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전쟁 전 조정 대신과 중신들의 아귀다툼은 전쟁 통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정유재란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지난 일을 있는 그대로 써 역사의 거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유성룡은 전쟁과 관련한 공식 기록들을 풍부하게 접했고, 일선에서 정치외교를 널리 경험했고, 의미 있는 비공식 기록을 선택하고 정리할 수 있는 안목을 실제로 가지고 있었다. 유성룡은 삭탈당한 뒤에 오로지 고향인 경상도 의성에 들어앉은 채 지난 7년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정리해 생생하게 되살린다. 정직한 태도로 조선 조정의 분란과 무능을 기록했고,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싸운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에 온당한 존경을 보냈다. 또한 굴욕적인 외교의 실상을 고백하고, 백성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다. 임진년에 시작돼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실상은 이렇게 유성룡의 손을 통해 다큐멘터리 겸 르포르타주 《징비록》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책의 이름 또한 고전 속의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징懲_지난 일을 뉘우치고, 비毖_후세를 위해 앞으로의 교훈을 찾는, 록錄_뼈아픈 역사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더하게 되었다. 시인 김기택의 작업 “일본을 탓하기는 쉬워도 그 침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꼼꼼하게 되돌아보고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제 부끄러움을 빨리 잊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실수나 못난 모습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고 곱씹어 보고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자기의 잘못을 통해서 큰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잊는 것은 편안하지만, 망각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징비록》은 그 고통을 기억하고 다시 체험하고 그래서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큰 용기입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중견 시인 김기택은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를 위해 《징비록》을 새로이 다듬어 쓰면서 위와 같이 밝혔다. 실제로 외동딸을 키우고 있는 아빠인 시인 김기택은 어린이를 위한 문학에도 열심이다. 이미 동시집 《방귀》와 그림동화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펴냈고 영어권 동화들을 한국어로 옮겼다. 샘깊은오늘고전을 통해서는 한국의 고전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김기택의 첫 한국 고전 작업 또한 역사 기록인 《홍경래》(알마)였다. 이때도 김기택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역사의 교훈을 새로운 관점에서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그럴듯하게 잘된 일, 모두들 성공했다고 여기는 일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홍경래처럼 자신의 삶을 희생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힘 있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진 사람처럼 억울하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건강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정도로라도 살 수 있는 것은, 홍경래 같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훌륭한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과 태도는 《징비록》을 새로이 다듬어 쓰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침략자를 욕하고, 우리 편 안에서 억지 영웅을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진정한 반성을 통해 정말 소중한 역사의 교훈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김기택은 실패의 기록 안에서도 거기에 깃든 역사의 교훈을 새로이 조명했듯이, 《징비록》 안에 깃든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원작자의 마음을 오롯이 되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작의 어려운 말과 까다로운 표현은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독자라면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편안한 문체로 다듬었다. 여기에 원작을 더욱 깊이 파고든 “다듬어 쓴 이의 말”을 곁들여 임진왜란의 실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풀어 전달한다. 시인다운 상상력과 감수성이 발휘된 본문과 “다듬어 쓴 이의 말”은 못난 역사, 슬픈 역사, 상처 깊은 역사의 의미를 다시 살려 드러낸다. 그리하여 역사 앞에서 정직한 기록의 참 의미를 어린이 및 청소년 독자 앞에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본문과 긴밀한 해설,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미술 일평생 전쟁사 연구에 몸을 바친 임홍빈 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선임연구원의 해설도 본문과 긴밀히 맞물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해설은 전쟁의 중요한 일지와 연대기 그리고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전력과 무장의 실제를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통해 풀어냈다. 일본




1권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_임진왜란 발발 직전의 어수선한 조일 외교와 조정 안의 혼란, 전쟁의 시작, 탄금대 전투의 패배를 담고 있다.
명나라를 치겠으니 일본을 도우라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 왕의 답장에는 이렇게 분명하게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어떻게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논하지 않고, 이 일을 명나라에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시끄럽게 말싸움을 했다.
나는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이산해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명나라에서 우리가 통신사를 보내 일본과 연락했다고 잘못을 따질까 봐 걱정됩니다. 그러니 알리지 말고 숨겨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이웃나라와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숨기고 명나라에 알리지 않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명나라가 일본이 쳐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들어 알게 된다면, 명나라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서로 짜고 이 사실을 숨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은 나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김응남을 명나라에 보내 이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그 때 일본에 잡혀간 명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몰래 명나라에 알렸다. 일본 남쪽 지방의 섬나라인 유구국 왕자도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일본이 자기 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어울려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다녀간 적이 있는 명나라 재상 허국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명나라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은 정성을 다하여 우리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일본과 일을 꾸며 우리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좀 더 기다려 봅시다.”
그런데 마침 사신으로 간 김응남이 이 사실을 알리는 글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니, 허국은 크게 기뻐하였고 명나라의 의심도 풀리게 되었다.
다듬어 쓴 이의 말
“나라가 멀고 산과 강이 가로막혀 있다 하더라도 한 번 뛰어넘어 명나라로 가서 우리나라 풍속으로 중국 400여 주를 바꾸어 놓고 황제의 조정에서 억만 년이나 정치를 행할 것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 임금이 먼저 달려와 우리나라로 들어온다면, 먼 앞날에 큰 희망이 생겨 가까운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도요토미가 조선 임금에게 보낸 글의 일부입니다. 내용은 터무니없고 말하는 태도는 몹시 거만하니, 이 글을 본 선조 임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조선 임금이 일본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일본에 항복하고 일본을 친구가 아니라 어른의 나라로 섬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일본을 도우라는 말은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의 힘을 이용해서 명나라를 치겠다는 뜻이니, 힘을 덜 들이면서 빨리 명나라를 치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요토미는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보낼 때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하도록 타일러 보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시대에 일본에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프로이스에 따르면, 도요토미는 우리나라 통신사를 만나기 전에 벌써 명나라로 쳐들어갈 전쟁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본에서 하나밖에 없는 왕이며, 명나라를 빼앗는 일 말고 내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다. 만일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계획을 그만두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 역사에서 어느 왕도 해내지 못한 최고의 명예와 이름을 다음 세대에 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명나라를 다 빼앗지 못하고 중간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며, 이 영광스러운 명예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_54~59쪽
2권 달아난 임금 남겨진 백성
_전쟁 시작 20일 만의 서울 함락되고, 백성을 속인 조정의 도주와 명나라를 향한 구걸 외교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그래도 맞서 싸운 의병의 활동과 때마침 남해 바다에서 울려 퍼진 이순신 수군의 승전보가 반갑기 그지없다.
평양성에서도 쫓겨 가는 임금님
6월 11일에 임금이 평안북도 영변으로 떠났다.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남았고, 나도 명나라 장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남아 있었다. 성 안에는 군사와 백성들을 합하여 3,000~4,000명이 있었다.
대동강을 바라보니 적이 많지는 않았다. 붉고 흰 깃발을 들고 한 줄로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이 말 탄 군사 10명을 강으로 보냈다.
물이 말의 배에 찼는데, 그들은 말고삐를 잡고 강을 건너오려 하였다. 또 강 가에서 둘씩 또는 서너 명씩 왔다 갔다 하는 군사들은 큰 칼을 메었는데, 칼날에 햇빛이 비쳐서 번개처럼 번쩍였다.
또 예닐곱 명의 일본군이 강 가에서 평양성을 향해 조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굉장히 컸고, 총알은 강을 지나서 성 안까지 들어왔다.
어떤 총알은 기와 위에 떨어졌으며, 거의 1,000발짝이나 날아와 기둥에 깊이 박혔다. 한 일본군은 연광정에 앉아 있는 대신들을 장수들인 줄 알고 조총을 들고 모래벌판까지 나와 쏘았는데, 정자 위에 있던 두 사람을 맞히기는 했으나 거리가 멀어서 부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
박천에서 나와 가산군 대정강에 이르니 해는 서산으로 기우는데, 멀리 들판에 흩어진 군사들이 오는 게 보였다. 혹시 평양성이 적에게 무너진 게 아닌가 걱정되어 군관을 시켜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더니, 열아홉 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평안북도 의주와 용천에서 온 군사들인데, 대동강에서 물이 얕은 상류 쪽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어제 일본군이 강이 얕은 왕성탄을 건너와서 강을 지키던 군사들이 다 무너지고 이윤덕은 도망갔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급히 글을 써서 군관에게 시켜 임금께 알리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중전이 평안도 박천으로 갔다. 중전은 함경북도로 가려다가 이미 적군이 들어와 있다는 말을 듣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다듬어 쓴 이의 말
선조 임금은 함경도 함흥으로 피난하려 했으나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이 이미 함경도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평안북도 의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선조 임금은 의주로 갔다가 명나라로 들어가 귀화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선조는 이러한 뜻을 명나라에 전하였는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임금 일행을 100명으로 한정하여 받아들이기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일이 급해 명나라로 들어갈 것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면 나라에 임금이 없게 된다.”
선조는 이렇게 말하고 왕권의 일부를 세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도 둘로 나누어 선조와 세자를 각각 따르도록 했습니다.
세자 광해군과 이를 따르는 신하들을 분조分朝라고 합니다. 많은 신하들은 명나라에 귀화하는 선조를 따라가 나중에 남의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나라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분조를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선조 임금은 의주로 향하고 세자인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는 강계로 향했습니다. 선조와 광해군이 길을 갈라설 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일본군이 물러나고 나라를 되찾았기 때문에 선조는 명나라로 가지 않았으며, 정유재란1597~1598이 끝나고도 10년이나 임금의 자리를 지켰습니다._62~71쪽
3권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임진왜란
_조선, 명나라, 일본이 서로 승패를 주고받으며 잠시 전쟁이 수그러든다. 이때 조선이 참여하지 못한 외교적 협상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쫓겨난 조선 수군이 1597년 일본 수군에게 참패하자 전쟁은 다시 불이 붙는다. 이윽고 1598년 모든 비극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일본은 철수를 결정한다. 그리고 울돌목에서 조선과 일본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다.
12척의 배로 300여 척을 이기다
이순신이 진도에 와서 남아 있는 배를 다 모았으나 12척밖에 되지 않았다. 바닷가에는 배를 타고 피난하려는 백성들로 북적거렸는데,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이 여러 길로 나누어 백성들을 불러 모으자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가릴 것 없이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백성들을 군사들의 뒤에 두고 싸움을 하였다.
일본군 장수 마다시는 바다에서 싸움을 잘한다고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배 300여 척을 이끌고 서해로 쳐들어가려고 하다가 이순신의 부대와 벽파정에서 만났다. 이 때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배는 12척뿐이었다. 이순신은 이 배에 대포를 싣고 바닷물의 흐름을 잘 이용하여 적을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일본군 장수 마다시는 잡아죽였다. 이에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이순신의 군대에는 군사 8,000명이 있어서 고금도전라남도 완도군에 있는 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식량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닷길을 지나갈 수 있는 통행증을 만든 다음, 명령을 하였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바닷가를 지나다니는 배는 통행증이 없으면 간첩의 배로 알고 지나다닐 수 없게 하겠다.”
그래서 전쟁을 피해 배를 타는 사람들은 다 통행증을 받았다. 이순신은 통행증을 받을 때 쌀을 바치게 했는데, 큰 배는 세 가마, 중간 배는 두 가마, 작은 배는 한 가마를 내게 하였다. 피난 가는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싣고 바다로 드나들었으므로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다만 바다로 드나드는 걸 막는 일이 없어서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얻은 식량이 1만 가마가 되었다.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나 쇠를 모아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사방에서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다 이순신에게 와서 집을 짓고, 막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살아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성 안에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
이순신은 진린이 곧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에게 사냥을 시키고 물고기를 잡게 하였더니, 잡아 온 사슴과 멧돼지와 온갖 물고기들이 아주 많았다. 이순신은 잔치를 베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가, 진린의 배가 들어오자 예법에 맞게 몸가짐을 갖추고 군사들을 늘어서게 한 다음, 멀리까지 나가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진린의 군사들을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이 다 만족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서로 이야기하기를“과연 이순신은 훌륭한 장수다”라고 하였는데, 진린도 마음 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며칠 후에 일본군의 배가 가까운 성으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보내 이를 다 쳐부수고, 적군의 머리 40개를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고, 이 승리를 진린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 다음부터 진린은 무슨 일이든지 이순신과 꼭 의논했으며, 밖으로 나갈 때는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고 감히 먼저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드디어 진린과 약속하여 명나라 군이건 우리 군사이건 백성들의 물건을 조그만 것 하나라도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다가 매를 치게 하였다. 그랬더니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서 섬 안은 조용했다.
진린은 선조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만한 뛰어난 재주(經天緯地之才경천위지지재)와 무너진 하늘을 메울 만한 공(補天浴日之功보천욕일지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토록 이순신을 크게 칭찬한 것은 그만큼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탄하고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듬어 쓴 이의 말
12척으로 적선 300여 척을 물리친 이 싸움을‘명량대첩’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은 인계받은 12척을 가지고 진도군 벽파진에 진을 쳤습니다. 진도와 육지 사이에는 명량이라는 좁은 해협이 있습니다.
이순신은 적선 55척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명량 서쪽에 있는 녹진으로 진을 옮겨 명량으로 들어오는 적의 배를 기다렸습니다. 피난민들을 먼저 안전한 육지로 대피시키고, 고깃배 100여 척에는 요란한 깃발을 꽂아 싸우는 배로 위장하여 옆으로 배치해 두었습니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적선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고 나가 보니 적선이 바다를 새카맣게 덮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배를 몰아 명량의 물목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적선은 물살이 빠르고 좁은 명량을 빠져 나오느라 서로 부딪치면서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순신은 일본 배를 향해 대포를 쏘고, 일본군 장수가 탄 배를 갈고리로 붙잡아 끌어 낸 뒤 사로잡아 몸을 토막 내에 바다로 던졌습니다. 이것을 본 일본군은 크게 동요했습니다. 이틈을 타서 적선 31척을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일본군은 가라앉는 배를 그대로 둔 채 도망갔습니다.
명량대첩은 명량과 우수영 앞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으로 적선 300여 척을 무찌른 값진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다시 바다로 나오지 못했으며, 전라도 앞바다는 우리 수군이 다시 장악하게 되었습니다._121~129쪽
목차
징비록-1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글을 열며 우리의 부끄러운 곳을 비춰 주는 거울
유성룡의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
일본에 조선의 통신사를 보내시오
마지못해 통신사를 보내다
통신사들의? 엇갈린 생각
명나라를 치겠으니 일본을 도우라
나라를 지키는 일이 급하건만
이순신을 수군 장수로 뽑다
일본이 쳐들어와도 걱정할 것 없소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군사들은 도망가고 성은 빼앗기고
뒤늦게 올라온 급한 보고
김성일의 죄를 물을 것인가
이일이 상주 싸움에서 지다
서울을 지킬 것인가 피난할 것인가
신립이 충주싸움에서 크게 패하다
1권 해설
'역사'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임홍빈ㆍ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위원
그림해설
이야기너머, 사상의 이미지들- 김종길ㆍ미술평론가
그림 목록
징비록2- 달아난 임금 남겨진 백성
거듭되는 패배와 피난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는 임금
일본군은 서울로 임금은 평양으로
용인 싸움에서 지다
일본군에게 처음으로 이겼으나
임긴강도 지키지 못하다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차지하다
비단옷에 짚신을 신은 장수
명나라의 구원병
평양도 위험한데 명나라 구원병은 오지 않고
평양성에서도 쫓겨 가는 임금님
평야성도 빼앗기다
임금은 떠돌고 민심은 어지럽고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다
드디어 명나라 구원병이 오다
명나라 군도 일본군에 지다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다
붓 대신 칼과 활을 든 선비들
관군도 용감하게 싸우다
영천과 경주를 되찾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 일본군을 무찌르다
50일 동안 전쟁을 쉬자
간첩을 잡아 죽이다
2권 해설
관군, 육지에서는 연속 패퇴, 바다에서는 연전연승- 임홍빈ㆍ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위원
그림 목록
징비록-3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임진왜란
강화 협상의 결렬
평양성을 되찾다
명나라 군이 벽제 싸움에서 지고 후퇴하다
권율이 행주에서 크게 이기다
굶주려 쓰러지는 백성들
명나라와 ?존이 강화를 서두르다
1년 만에 서울을 되찾았으나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잔인하게 복수한 일본군
명나라 군은 돌아가고 일본군은 남고
일본의 두 번째 침략
일본군의 꾀에 속아 이순신을 가두다
다시 온 명나라 구원병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전멸하다
황석산성을 잃다
다시 온 이순신
명나라 군이 남원성에서 크게 지다
12척의 배로 300여 척을 이기다
7년 만에 끝난 전쟁
다시 피난 갈 방도를 찾다
명나라 군이 울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다
내가 죽은 것을 말하지 말라
재누는 있었으나 운이 없었던 사람
귀신과 같은 장군
3권 해설
제 목숨을 남더러 지켜 달라고 떠맡기는 서글픔- 임홍빈ㆍ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위원
그림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