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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4180768 / 237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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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라깡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려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의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 부른다. 주요 내용 종교는 이렇게 우리 삶의 곳곳에 여러 양태로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서,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 그것이 문제가 된 세상이다.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믿느냐 안 믿느냐, 신이 존재하느냐 하... 라깡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려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의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 부른다. 주요 내용 종교는 이렇게 우리 삶의 곳곳에 여러 양태로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서,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 그것이 문제가 된 세상이다.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믿느냐 안 믿느냐, 신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입장 차이는 신이라는 개념 혹은 존재 자체를 설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혹자는 종교적 믿음의 반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불가지론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다는 밑도 끝도 없는 불확실성에 비한다면, ‘확고한’ 믿음과 ‘고집스런’ 불신은 확실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샴쌍둥이다. 이렇게 종교, 또는 신을 두고 양자 간 결단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은 시대에 정신분석은 종교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번 호의 출발점이다. 이 질문에 관해 7개의 장으로 구성된 응답을 갖고 있다. 기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 종교의 존재 혹은 목적을 정해놓고 있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에 관해선 양 편 모두 동의한 듯싶다. 이에 대해 편집자인 앤드류 스콤라는 기왕에 가정된 종교의 목적은 종교를 대상화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영어 단어object는 목적과 대상, 둘 다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object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서문에서 그는 신 혹은 신이라는 개념은 오직 “우리 자신의 불투명성”을 확인해주며 오직 존재의 결여와 덧없음을 위한 공간을 보존해주는 텅 빈 기호라고 선언한다.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려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의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고 부른다. 이번 호의 제목은 라깡에서 빌려 온 것이다.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선언에서처럼 대타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의 기원은 결여이다. 인간은 신의 기원과 욕망을 알고 따르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내리신 계명들의 언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신분석은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특히 근대 주체구성의 과정에 개입해있는 일신교에 천착한다.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실증주의처럼 종교를 허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제대로 된 비판이 될 수 없다.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 종교가 전유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개념이며 철학적 사유에서 피해갈 수 없다. 기왕의 종교비판이나 분석이 혐오와 경외 양극단의 대립을 상정했다면 정신분석은 신이 부재한 자리를 사유한다.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종교의 목적은 정해진 종착역이나 절대적 의미 없이 비판적 사유라는 확실한 믿음만을 무한히 증식시켜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마크 케젤의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일신교의 핵심을 신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서 찾는 케젤은 일신교는 여타 의사종교들의 기복적 신앙과 대립하면서 “오직 신만이 신”이라는 믿음으로 신성과의 투쟁을 통해 은총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신교의 비판적 사유는 궁극적으로 무신론으로 귀결될 것이지만, 현재 추세로는 종교는 위축되기는커녕 점점 더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분석을 위시한 비판이론은 마치 일신교적 비판정신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종교는 승화의 한 형태이다. 케젤은 라깡이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에 대해 한 발언을 통해 정신분석이 종교처럼 승화가 될 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떤 형태의 승화가 될 것인지를 묻는다. 일신교의 신성과의 투쟁은 사도 바울과 야곱이 벌인 천사와의 싸움으로 예시된다. 이 싸움에서 상처를 입은 것은 바울이지만 신성 역시 제한을 받게 된다. 신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었지만 바울이 온전한 신성을 획득했다는 것은 일신교가 비판, 맥널티의 글에서는상처를 통해서 참 종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라인하드는 유대교의 예외주의를 보편주의 한 양태로 제시한다. 라깡의 “전부아님” 개념을 사용해서 그 내부에 결여와 죽음이라는 텅 빈 공간을 포함하는 보편주의 개념을 설정한다. 서지 앙드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분석가가 성자의 길을 가야할 소명을 갖는다면 정신분석가에겐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지를 모색한다. 환자에 대해 정신분석가는 향유의 대상, 즉 라투즈의 자리에 놓이지만, 그것을 대체하거나 만족시키지 않는다. 주체가 대상의 자리에 놓임으로써 사랑이란 근본적 불일치라는 인식을 획득하고 그를 통해 주체의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는 호운즈의 뒤라스 읽기는 대상의 개념에 또 다른 사유를 제공한다. 키에자와 토스카노의 병렬적 토론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라깡주의의 핵심적 ‘원인’론을 분석한다. 각각 무의 창조가 제시하는 윤리적 차원과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내 무의 개념적 변전을 추적한다. 현재 기독교와 무신론 사이의 대립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양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이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원과 원인에 관한 정신분석의 사색이 갖는 다양한 함의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베의 글은 이슬람에서의 신의 현현에 대한 고차원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신성을 접하는 것은 오직 현현, 즉 순간적 발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의 현현은 존재내부의 낯섬과 귀양을 제시한다. 베일로 감싸인 신성이 반짝 드러나는 계시는 신성한 통일성의 징후이면서 주체의 소외를 증명하는 것이다. 베일 뒤에 숨은 신이 주체의 욕망이 투영된 부재와 결여로서의 대타자라는 것은 주체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하기 보다는 존재내부의 낯선 소외를 극복하려는 사유의 여정을 계속하도록 이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가 서양의 일신교 세 형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만 국한된다는 점은 아쉽다. 정신분석이론의 틀 안에서 사유하기 때문에 일신교가 중심일 수 밖에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일신교에 집중하다보니 종교라는 좀더 넓고 큰 문화적 형태를 놓친 듯하다. 불교와 힌두교 및 여타 문화권의 종교에서 주체와 믿음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는지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을 기다려본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오른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보편적 유죄가능성이므로 이를 통한 공동체의식과 연민이 중요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를 세속적인 시각에서 풀어보면 너와 내가 여리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다. 정신분석에선 존재의 결여와 욕망의 불가피성이 바로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말이다. 19세기 미국소설가 나사니엘 호손의 한 단편에 나오는 젊은 굿맨 브라운처럼 믿음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말년을 침울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면 이 보편적 유죄성의 의미를, 기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곰곰이 따져봐야 할지 모른다. 신의 유무나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을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이다. 프랑스 철학자 이브 파칼레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는 오로지 우리가 이미 내린 결정, 내리고 있는 결정, 앞으로 내릴 결정에 달린 문제다.” 정신분석과 종교는 우리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이제 물어야 할 차례이다.
편집자 서문 : 종교의 목적
-앤드류 스콤라
“지금까지 우리가 목도해 온 역사 비판은 심오하게 무언가를 감추어 왔다. …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눈 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는 행위는 베일 밑에 모종의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얼굴을 돌려 이 현상을 과감히 응시할 수 있는 자에게 — (…) 희생 그 자체가 갖는 매혹에 이끌리지 않을 사람들은 분명 거의 없으리라 — 희생이란 욕망하는 대상 속에서 내가 검은 신이라고 부르는 대타자의 욕망이 존재한 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의미한다.” 자크 라깡1 정신분석적 사유의 장場 안에서 우리는 종교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 이런 종류의 질문은 종교와 같은 불명료한 문제에 대해 애써 발언하기를 회피하려 할 때 취하는 궁여지책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종교 근본주의가 우리를 무장해제시킨 채 부활함에 따라 종교라는 이 음산한 기표의 귀환 때문에 받는 고통을 호소하는 굴욕당한 세속주의자들의 곡성이 커져간다. 이 시대에 정신분석은 종교 라는 관념이 어떤 강렬한 “결정체”結晶體라고 주장한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치명적인 적들을 결속시키는 것은 그들이 종교를 마치 어떤 대상인 듯 간주한다는 점이다. 종교의 불투명성을 치밀히 검토하려 들면서 그들이 취하는 각자의 시각만이 다를 뿐이다. 종교적 현상을 둘러싼 존경과 혐오의 양극단에서 최근 정신 분석 사유가 주저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아마도 무엇을 해야 하고 혹은 “그것”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알아 야 한다는 광범한 요구 때문이리라. 분석적 담론은 종교의 목적이 선한지 악한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의 문제에 대해 가치평가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분석의 입장에서 그러한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청원이야말로 문제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 종교문제를 탐색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롭지 않다. 프로이트는 “종교란 인간의 보편적 강박신 경증”이라고 했지만,2 사회적으로 축적된 것으로서의 믿음이라는 차원에 대해 철저한 적대감이나 무신론적 거부로만 맞서지는 않는다. 대신 종교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프로이트가 대면하는 순 간들은 매우 교육적이다. 『토템과 터부』에서 시작해서 『모세와 일신교』라는 정점에 달하는 순간, “펜이 프 로이트의 손에서 툭 떨어질 때”3까지 이어지는 이 길고 구불구불한 선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프로이트와 신 성神聖문화들의 만남은 근대적 조건의 중요한 휴지기로 하강하는 운동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런 노고가 정신분석의 기획을 구성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비록 일체의 종교적 신성화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출현하긴 했어도 프로이트는 종교의 광신적 억압들 이면에 놓여 있던 일말의 진실을 남겨두었다. 프로이트는 종교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담론의 창조와 구조, 즉 근대주체의 탄생, 집단성의 토대, 그리고 바로 그 역사의 가능성 자체와 돌이킬 수 없이 결부되어 있는 역사의 창조를 따로 구별해냈다. 종교의 문화적 윤곽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심이 다소 경박스럽게 일신교에 매달린 바 없지 않다 해도, 그가 이룬 업적은 과학이 (규정 가능한 한계들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발전을 단지 열거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프로이트가 발굴해낸 진정한 계시는 우리 존재가 놓인 과 거와 현재의 조건들이 갖고 있는 여백들을 의무적으로 재규정하는 것이며, 이는 당신이 야만스러운 반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없는 이성적 존재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라깡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도 종교는 다름 아닌 이 세상, 즉 현세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현세는 근 대 과학과 근대 과학이 낳은 주체가 설립된 이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만 적절성을 갖는다. 그러나 종교 문제가 분석담론에서 제기될 때 이 문제는 합리적 실증주의의 과학적 형상들을 통해서 검토되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의 과학들은 적어도 표면상 종교의 “의고주의”를 외면해 버린다. 실증주의 과학들은 의심받지 않 는 증거라는 모델을 진리추구의 기반으로 삼아 일체의 첫 번째 혹은 최종적인 원인조차 부재한 정보의 축 적을 가속화하며, 또 자유롭게 그것을 즐기려고 한다. 만일 이 실증주의 과학에서 단 한번이라도 종교가 관 심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건 그저 표면상 인간성의 진보를 향한 불가사의한 매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쯤으로 간주할 때뿐이다. 이와 관련되어 라깡이 전략적으로 종교적 사상을 동원하는 대목에서 그의 지혜로움이 드 러난다. 라깡의 전략은 과학적 사유의 구성적 가설을 제공한 냉정한 교리들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분노로 가득한 라깡의 위트가 선사된 수혜자는 인과성 문제에 대한 과학의 젠체한 무관심이다. 라깡은 맡은 바 소 임을 다하듯 데이터를 만들어내어 전유하는 용기容器로서의 세상에서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경험이 납작하 게 눌려버려 미리 결정된 조합들 이상으로는 아무런 객관적 영역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적신호를 보 낸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모순들과 몽상들이 뒤따르고, 아무 희망 없이 생산품들을 도입함으로써 잠시나마 원인 없는 이 노력들을 유지시켜 보려 애쓰는 기술-허섭스레기들의 문화라는 형태로 보상받게 된 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자잘한 쾌락들의 일회적 소모성은 과학적 의제들이 당면하게 될 결과들을 가리킨 다. 과학적 의제는 애착의 필요와 동시에 그 애착을 추구할 때 노정된 한계를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원천들을 몽땅 낭비해 버리게 된다. 과학적 인간의 유아론幼兒論을 가속화시킨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야기될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결과들을 라깡이 대항하는 과정에 서 종교성의 영역이 출현하게 된다. 정신분석은 지식 그 자체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질 부 산물들을 경솔하게 향유하는 일은 순수한 종교 그 자체보다는 존재 자체와 우리가 맺는 관계의 부재를 통 해서 구성하는 종교적 기능의 불가침성에 대한 선험적 무지 혹은 증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형식적·존재론적 환원을 통해서 분석은 종교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회복 불가능한 소외를 경험할 필요 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과학을 향한 의심이 영구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정신분석은 종교적 광분의 원 인을 캐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분석은 신의 이름으로 발언하여 자신의 욕망을 안다고 주장하는 저 소수 의 공명정대한 이들을 물리치려고 헌신할 때 더 적합하다. 앎의 위치에서 발언하는 경건함이란 고작해야 자신의 신도들을 순응시키고 경계를 순찰하려 드는 간악한 시도에 불과할 뿐이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되려고 할 뿐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종교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이 지점, 즉 대타자에 대한 질문—어떻게 완전히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이론적 노력을 기울 인다. 분석은 종교적 형상들과 비유를 환기시키면서도 이 입 벌리고 있는 텅 빈 구멍을 채울 방도를 결코찾으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종교적 형상들과 비유들을 욕망에 봉사하고 욕망을 탐색하는 일에 사용한 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담론적 전유를 피해나가는 모호한 요소에 대한 우리의 모색을 부정하거나 몰아가 기 위해 사용한다. 신은 우리 자신의 불투명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만, 부재를 위한 공간을 보존해 주는 동 시에 우리가 그것을 손에 쥘 가능성을 봉쇄해 버리는 기표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분석에서 의미를 갖는다. 종교는 우리의 쥬이상스가 갖는 바로 그 불투명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성적 한계와 조건들 안에 위치해 있다. 바로 이렇게 유리한 고지에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주체는 자신의 창조주와 동등하게 마주 할 능력이 있는 척하지 않는다. 그처럼 균형 잡힌 행위들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분석은 도덕적 도그마의 망각 저 너머에 서 있다. 도덕적 도그마들은 오직 불안하고 과잉된 금지들 외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경색시킬 뿐인 화해에 대한 신념을 통해서만 지속될 뿐이다.
그러니 종교에 관해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려 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분석적 사고가 맡은 사 명은 불가능성, 즉 “사이”의 장소를 점유하는 것이고, 이곳에서 종교성의 숨겨진 진실들을 변형시키거나 폐 기하려고 선택하게 될 일체의 위치를 소멸시키고 도모한다. 원인과 동맹을 맺으려면 종교의 객관적 지위를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이 재사유는 어둡고 모방적인 욕망에 헌신해 온 종교의 전통에 굴복하지 않은 상태 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과제는 내재적이고 불순한 일자에 충실하는 일이다. 창조의 문제, 일자의 존재론적 지위, 예외, 희생, 신성성과 사랑 — 이러한 일체의 공통되는 형상들을 종교가 갖는 거대한 역사로부터 모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개념들에 부여된 의미는 주체 와 신성 사이의 부조화를 해결하려는 어떤 입장에서부터 엄정하게 떨어져 나왔다. 한편, 우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대타자를 내재적으로 분리시켜버리는 하품하듯 입을 벌리고 있는 틈새를 망각하려는 어떠한 논리에 서도 공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고 절대적인 차이에 대한 증언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무한소의 사유의 행위들만을 증식해내는 바로 그 믿음과 확신들 말이다.
목차
역자 서문ㆍ7
편집자 서문 : 종교의 목적ㆍ13
_앤드류 스콤라
비판으로서의 종교, 종교로서의 비판ㆍ20
_마크 드 케젤
천사와의 씨름 한판ㆍ59
_트레이시 맥널티
보편주의와 유대적 예외 : 라깡, 바디우?, 로젠바이그ㆍ84
_케네스 라인하드
성자되기ㆍ141
_서지 앙드레
사랑이 법일 때 : 『롤 스타인의 황홀경』에 관하여ㆍ156
_도미니크 호운즈
윤리와 자본, 무에서부터ㆍ182
_로렌죠 키에자와 알버르토 토스카노
이방인과 신의 현현ㆍ209
_크리스찬 장베
저자 소개ㆍ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