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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개정판] - 세상을 움직이는 책 17번

시리즈 : 세상을 움직이는 책 [30]

정약용 저 | 박일봉 역 | 육문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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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82031175 / 864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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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관대하게 하라!
백성들의 고통과 답답하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지닌 공직자들의 금과옥조의 바이블.


국세청 간부들의 정신교육 필독서로 읽혔던 애민사상과 실사구시의
가르침을 전하는 유네스코 선정 올해의 역사인물로 뽑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의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백성은 토지를 밭으로 여기고 아전들은 백성을 밭으로 여긴다,(民以土爲田吏以民爲田)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그들을 다스리는 자는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가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요,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백성도 없고 나라도 없으면 벼슬아치 역시 없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기르는 것〔牧民〕이다. 그리고 목민(牧民)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가 없어 ‘심서(心書)’라고 했다. 수령은 모름지기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을 배우는데 힘써 수령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치민(治民)하는 것이 곧 목민(牧民)하는 것을 인식하고 수령의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리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실학 정신의 핵심인 민본주의 사상, 애민 정신, 그리고 실사구시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정치가들의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산은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과 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주자학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국세청 간부들의 정신교육 필독서였던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의 지침서로 현대를 살아갈 모든 사람들의 행동지침서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기르는 목자(牧者)인 목민관이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있어 지녀야 할 정신 자세와 실무 면에서 치국안민(治國安民)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책이다. 다산이 말하는 ‘목민관’은 옛날의 제후요, 근세의 수령(守令)이요, 오늘날의 대민(對民) 행정에 임하는 일체의 공무원에 해당한다. 국민의 평안과 복지를 크게 좌우하는 공직자들이 각종 정책을 구상하고 펴 나아감에 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목민(牧民)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과 교양을 가다듬어[修身] 예(禮)를 바탕으로 정사를 펴야 하며 청렴과 공평무사를 늘 잊지 말아야 한다.

≪목민심서≫는 크게 열두 편으로 되어 있는데 수령이 구체적인 실무에 임하기 전에 스스로 갖추고 다짐해야 할 요건들을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등 4개의 편으로 나누어 밝혔으며 다음에는 각 부문별로 경(更)·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실무적인 면들을 다루고 끝부분에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기 위한 정책[賑荒]과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남에 있어 지녀야 할 자세를 적고 있다[解官]. 그리고 이 열두 편(篇)을 각기 여섯 개의 조목으로 분류하여 실천 세목(細目)들을 기록하였다.

≪목민심서≫는 저자(著者)가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1801년~1818년)에 쓰인 작품이다. ≪목민심서≫에 나타나 있는 목민의 도(道)는 실로 성현(聖賢)의 뜻을 이어받은 군자학(君子學)의 절반(切半)에 해당한다 하겠다. 그가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군자가 해야 할 일의 절반은 수신(修身)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인 것이다. 맹자(孟子)가 현인 정치(賢人政治)를 강력히 주장했듯이 다산은 목민지도(牧民之道)를 부르짖었다. 그런데 맹자의 현인 정치나 다산의 목민지도는 모두가 유학(儒學)에 바탕을 두어 예(禮)를 근본으로 하고 있거니와 목민관은 백성을 예로써 제도하는 것이 으뜸의 정책이며, 법(法)으로 다스림은 차선책이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예로써 나라를 세우고 예로써 백성을 제도하였거니와 그 예란 종교적?윤리적 규범들을 정치적?사회적 의식(儀式)과 제도로 합리화한 것을 가리킨다. 이 작품이 외면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형식적인 틀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 근저에는 도덕적인 교화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예(禮)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어긋남이 없이 정치적·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게 하려는 교화주의(敎化主義)가 저자인 다산의 기본 이념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위엄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계율인 것이다. 예로써 백성을 제도하면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진실로 따르지만, 법으로써 다스리면 두려운 마음으로 마지못해 복종할 뿐이다. 공자(孔子)도 예(禮)와 악(樂)으로써 백성을 이끌고 정사(政事)를 펼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주공(周公)의 예에서 관념적인 면만을 취하여 존주사상(尊周思想)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며, 맹자(孟子)는 공자의 예악론(禮樂論)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윤리적 실천 규범으로 발전시키면서 왕도론(王道論)을 내세워 목민(牧民)의 대도(大道)를 밝혔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산의 경국제민(經國濟民)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대도 안에서 이룩된 것이긴 하지만, 그 기본 이념은 역시 공맹(孔孟)의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예악론에서 맹자의 왕도론이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산의 경세 목민 사상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 바로 이 ≪목민심서≫인 것이다.

≪목민심서≫는 크게 열두 편으로 되어 있는데 수령이 구체적인 실무에 임하기 전에 스스로 갖추고 다짐해야 할 요건들을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등 4개의 편으로 나누어 밝혔으며 다음에는 각 부문별로 경(更)·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실무적인 면들을 다루고 끝부분에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기 위한 정책[賑荒]과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남에 있어 지녀야 할 자세를 적고 있다[解官]. 그리고 이 열두 편(篇)을 각기 여섯 개의 조목으로 분류하여 실천 세목(細目)들을 기록하였다. 조선 말기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날의 정세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백성들의 고통과 답답하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지닌 공직자들에게는 특히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될 만한 구절들이 많으며, 일반 독자들에게는 당시의 시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다방면에 있어 교양의 폭을 넓히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는 작품이라 믿는다.

저자 서문
옛날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의 뒤를 계승하고는 열두 목(牧)들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목민(牧民)하게 하였으며, 문왕(文王)이 정사를 펼 때도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전국시대의 齊나라의 邑)에 갔을 때 목민(牧民)하는 것을 가축을 기르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한 것은 옛 성현들께서 남기신 뜻인 것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본디 두 가지의 길이 있거니와 사도(司徒)는 모든 백성들을 가르쳐 각자로 하여금 수신(修身)하게 하였으며 대학(大學)에서는 국자(國子)들을 가르쳐 그들 각자로 하여금 수신하여 치민(治民)하게 하였으니 치민이란 것은 곧 목민(牧民)인 것이다. 그러한즉 군자(君子)가 배워야 할 것은 수신(修身)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인 것이다. 성현들이 가신지 이미 오래고 그들의 말씀도 자취를 감추어 그 도(道)가 점점 흐려지니 오늘날의 사목(司牧)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이익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파리하게 야위고 궁핍해지고 병들어 줄줄이 구렁을 메우는데도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에 진수성찬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는 성조(聖朝)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縣監), 한 군의 군수(郡守), 한 부의 부사(府使), 한 주(州)의 목사(牧使)를 지내셨는데 어떤 직책에서나 업적을 이루셨다. 그때마다 불초한 내가 따라다니면서 다소간 보고 들은 바가 있어 배우고 깨달았으며, 또 물러나와 그것들을 시도해 보니 얼마간 효과가 있었으나 이미 유락(流落)한 몸이 되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귀양살이하기 십팔 년 동안에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붙잡고 되풀이 연구하여 수신(修身)의 학문을 익혔으니 이미 배웠다 하나 반(半)만을 배운 셈이다. 이에 이십삼 사(史)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와 옛 성현들의 모든 저서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역대의 사목(司牧)들이 목민한 자취에서 추려 상하(上下)로 그 근원을 추적하여 분류해서 차례로 맞추어 편(編)을 만들었다. 또 남쪽 지방의 외진 곳에서 전답에 대한 부세(賦稅)를 거둠에 있어 이서(吏胥)들이 교활하게 농간질을 하여 여러 가지 병폐가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이미 비천한 신세에 있던 나는 그에 얽힌 사실들을 상세히 들었다. 그것들 또한 조목별로 분류하여 기록하면서 나의 얕은 견해를 덧붙였다. 그리하여 모두 열두 편(篇)으로 하였는데 첫 번째가 부임(赴任)이요, 두 번째가 율기(律己)요, 세 번째가 봉공(奉公)이요, 네 번째가 애민(愛民)이며, 그러고 나서 육전(六典)을 넣었고, 열한 번째가 진황(賑荒)이며, 열두 번째가 해관(解官)이다. 그리고 이 열두 개의 편은 각각 여섯 개의 조목으로 분류하여 기록하였으므로 모두 칠십이 개의 조목으로 되어 있다. 몇 개의 조목을 합하여 한 권(卷)으로 삼기도 하였고(≪牧民心書≫는 저자가 분류한 권수로는 총 사십팔 권으로 되어 있음), 한 조(條)를 나누어 몇 권으로 한 것도 있으니 통틀어 사십팔 권으로 한 부(部)를 삼았다. 시대에 맞추고 풍속에 따르다 보니 위로 선왕들의 헌장에 부합시킬 수는 없었으나 목민을 하는 일에 필요한 조례들은 다 갖추었다. 고려 말에 비로소 5사(五事:田野闢·戶口增·賦役均·詞訟簡·盜賦息)로써 수령들의 공적을 고과(考課)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로?넘어와서도 그것을 따르다가 후에 두 가지를 늘려 7사(七事:守令 七事로서 본문에 자세히 설명)로 하였으나 그것도 수령의 책무 중 큰 것만을 일렀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 해야 할 직분에는 떳떳치 않은 것이 없어야 하므로 모든 조목을 일일이 열거하여 제시해 주어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수령이 스스로 생각해 내어 스스로 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맨 앞과 맨 끝의 두 편 외의 나머지 열 편에 수록된 조목만 해도 육십 조나 되니 진실로 올바른 수령이 있어 자기의 직분을 다하고자 생각한다면 아마 이것만으로도 혼미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날에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저작하였고, 유이(劉彛)는 ≪법범(法範)≫을 썼으며, 왕소(王素)는 ≪독단(獨斷)≫을 썼고, 장영(張詠)은 ≪계민집(戒民集)≫을 썼고,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썼고, 호대초(胡大初)는 ≪서언(緖言)≫을 썼으며, 정한봉(鄭漢奉)은≪환택편(宦澤篇)≫을 저작하였으니 이것들은 모두가 소위 목민(牧民)을 하는 것에 대한 지침서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책들은 대부분 전수되지 않고, 오로지 음란한 글과 기괴한 구절들만이 세상에 판치니 내가 쓰는 이 책이 어찌 전수되길 바라겠는가마는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선인(先人)들의 훌륭한 말씀과 귀감이 되는 행적을 많이 익혀 자기의 덕을 쌓는다.’고 하였거니와, 이것은 진실로 나 자신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반드시 목민을 하는 일에 국한시키겠는가. 이 책을 ‘심서(心書)’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면서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명칭을 붙인 것이다.

당저(當?:현재 임금, 즉 純祖) 21년 신사(辛巳)년 늦봄에 열수(冽水) 정용(丁鏞) 서(序)

저자 소개

1762∼1836.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사상가로서,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다방면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다.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500여권의 책을 썼으며, 평생에 걸쳐 탁월한 시와 산문 작품을 남겼다.

머리말

저자 서문
옛날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의 뒤를 계승하고는 열두 목(牧)들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목민(牧民)하게 하였으며, 문왕(文王)이 정사를 펼 때도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전국시대의 齊나라의 邑)에 갔을 때 목민(牧民)하는 것을 가축을 기르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한 것은 옛 성현들께서 남기신 뜻인 것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본디 두 가지의 길이 있거니와 사도(司徒)는 모든 백성들을 가르쳐 각자로 하여금 수신(修身)하게 하였으며 대학(大學)에서는 국자(國子)들을 가르쳐 그들 각자로 하여금 수신하여 치민(治民)하게 하였으니 치민이란 것은 곧 목민(牧民)인 것이다. 그러한즉 군자(君子)가 배워야 할 것은 수신(修身)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인 것이다. 성현들이 가신지 이미 오래고 그들의 말씀도 자취를 감추어 그 도(道)가 점점 흐려지니 오늘날의 사목(司牧)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이익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파리하게 야위고 궁핍해지고 병들어 줄줄이 구렁을 메우는데도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에 진수성찬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는 성조(聖朝)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縣監), 한 군의 군수(郡守), 한 부의 부사(府使), 한 주(州)의 목사(牧使)를 지내셨는데 어떤 직책에서나 업적을 이루셨다. 그때마다 불초한 내가 따라다니면서 다소간 보고 들은 바가 있어 배우고 깨달았으며, 또 물러나와 그것들을 시도해 보니 얼마간 효과가 있었으나 이미 유락(流落)한 몸이 되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귀양살이하기 십팔 년 동안에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붙잡고 되풀이 연구하여 수신(修身)의 학문을 익혔으니 이미 배웠다 하나 반(半)만을 배운 셈이다. 이에 이십삼 사(史)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와 옛 성현들의 모든 저서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역대의 사목(司牧)들이 목민한 자취에서 추려 상하(上下)로 그 근원을 추적하여 분류해서 차례로 맞추어 편(編)을 만들었다. 또 남쪽 지방의 외진 곳에서 전답에 대한 부세(賦稅)를 거둠에 있어 이서(吏胥)들이 교활하게 농간질을 하여 여러 가지 병폐가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이미 비천한 신세에 있던 나는 그에 얽힌 사실들을 상세히 들었다. 그것들 또한 조목별로 분류하여 기록하면서 나의 얕은 견해를 덧붙였다. 그리하여 모두 열두 편(篇)으로 하였는데 첫 번째가 부임(赴任)이요, 두 번째가 율기(律己)요, 세 번째가 봉공(奉公)이요, 네 번째가 애민(愛民)이며, 그러고 나서 육전(六典)을 넣었고, 열한 번째가 진황(賑荒)이며, 열두 번째가 해관(解官)이다. 그리고 이 열두 개의 편은 각각 여섯 개의 조목으로 분류하여 기록하였으므로 모두 칠십이 개의 조목으로 되어 있다. 몇 개의 조목을 합하여 한 권(卷)으로 삼기도 하였고(≪牧民心書≫는 저자가 분류한 권수로는 총 사십팔 권으로 되어 있음), 한 조(條)를 나누어 몇 권으로 한 것도 있으니 통틀어 사십팔 권으로 한 부(部)를 삼았다. 시대에 맞추고 풍속에 따르다 보니 위로 선왕들의 헌장에 부합시킬 수는 없었으나 목민을 하는 일에 필요한 조례들은 다 갖추었다. 고려 말에 비로소 5사(五事:田野闢·戶口增·賦役均·詞訟簡·盜賦息)로써 수령들의 공적을 고과(考課)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로 넘어와서도 그것을 따르다가 후에 두 가지를 늘려 7사(七事:守令 七事로서 본문에 자세히 설명)로 하였으나 그것도 수령의 책무 중 큰 것만을 일렀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 해야 할 직분에는 떳떳치 않은 것이 없어야 하므로 모든 조목을 일일이 열거하여 제시해 주어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수령이 스스로 생각해 내어 스스로 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맨 앞과 맨 끝의 두 편 외의 나머지 열 편에 수록된 조목만 해도 육십 조나 되니 진실로 올바른 수령이 있어 자기의 직분을 다하고자 생각한다면 아마 이것만으로도 혼미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날에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저작하였고, 유이(劉彛)는 ≪법범(法範)≫을 썼으며, 왕소(王素)는 ≪독단(獨斷)≫을 썼고, 장영(張詠)은 ≪계민집(戒民集)≫을 썼고,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썼고, 호대초(胡大初)는 ≪서언(緖言)≫을 썼으며, 정한봉(鄭漢奉)은≪환택편(宦澤篇)≫을 저작하였으니 이것들은 모두가 소위 목민(牧民)을 하는 것에 대한 지침서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책들은 대부분 전수되지 않고, 오로지 음란한 글과 기괴한 구절들만이 세상에 판치니 내가 쓰는 이 책이 어찌 전수되길 바라겠는가마는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선인(先人)들의 훌륭한 말씀과 귀감이 되는 행적을 많이 익혀 자기의 덕을 쌓는다.’고 하였거니와, 이것은 진실로 나 자신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반드시 목민을 하는 일에 국한시키겠는가. 이 책을 ‘심서(心書)’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면서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명칭을 붙인 것이다.

당저(當宁:현재 임금, 즉 純祖) 21년 신사(辛巳)년 늦봄에 열수(冽水) 정용(丁鏞) 서(序)

책 속에서

다산(茶山) 연보(年譜)

茶山 丁若鏞 年譜 (月•日은 모두 음력)
1762년 壬午年(영조 38年, 1세)
6월 16일 사시(巳時)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와부면(瓦阜面) 능내리(陵內里)에서 진주 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과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李朝 中期의 화가)의 딸 윤씨부인의 四남으로 태어났다.(맏형 若鉉은 南氏夫人 소생이며, 同腹 兄으로는 若銓과 若鍾이 있음.) 본관은 나주(羅州)의 속현인 압해(押海)로, 나주 정씨라고도 한다. 관명(冠名)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鏞)ㆍ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ㆍ다산(茶山)이다. 그 해 윤 5월, 영조(英祖)대왕이 왕세자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하여 庶人으로 하였다가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벼슬을 잃고 廣州의 農家로 돌아갔는데, 마침 이 해에 若鏞이 태어났으므로, 그의 兒名을 歸農이라 하였다.
1763년 癸未年(영조 39年, 2세)
若鏞이 완두창(豌豆瘡)을 앓음.
1765년 乙酉年(영조 41年, 4세)
若鏞이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
1767년 丁亥年(영조 43年, 6세)
부친인 丁載遠이 임지(任地)인 연천(漣川)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가 글공부를 시작한다.
․ 2월, 祭酒의 사용을 허용함.
․ 3월, 還穀分留法을 엄수케 함.
1768년 戊子年(영조 44年, 7세)
‘山’이라는 오언시와 《삼미자집》이라는 저작물을 만듬.
1770년 庚寅年(영조 46年, 9세)
11월 9일, 모친 淑人 尹氏 사망.
1771년 辛卯年(영조 47年, 10세)
부친에게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움.
1774년 甲午年(영조 50年, 13세)
杜詩(杜甫의 시)를 읽고 시를 지음.
1776년 丙申年(영조 52年, 15세)
2월 22일, 武承旨 홍화보(洪和輔)의 딸 豊山 洪氏와 결혼함.
부친이 戶曹佐郞으로 보직 발령되어, 함께 서울 남촌으로 이사함.
1777년 丁酉年(정조 元年, 16세)
처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遺稿를 봄. 이 때부터 스스로 星湖 李瀷의 학문을 私淑함. 가을, 부친의 任地인 和順으로 따라감.
1778년 戊戌年(정조2年, 17세)
和順 北方에 있는 東林寺에서 둘째형 若銓과 함께 공부함.
光州 無等山에 올라 瑞石山記를 씀. 그 해 朴齊家,《北學議》편찬.
1779년 己亥年(정조3年, 18세)
부친의 명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과거시험 공부를 함. 그 해 成均館에서 시행하는 陞補試에 선발됨.
1780년 庚子年(정조4年, 19세)
부친이 예천군수를 사임하자 本鄕인 廣州로 함께 돌아와 글을 배움.
1781년 辛丑年(정조5年, 20세)
서울에서 과거시험에 응시. 7월, 딸을 낳았으나 닷새 만에 죽음.
1782년 壬寅年(정조6年, 21세)
창동(倉洞) 지금의 南大門에 살림집을 마련함.
1783년 癸卯年(정조7年, 22세)
2월, 世子 冊封을 경축하는 增廣監試에 응시하여 經義初試에 入格함. 宣政殿에 들어가 正祖大王을 처음으로 알현하였는데,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음. 그 해 9월 12일에 長男 學淵 태어남.
1784년 甲辰年(정조8年, 23세)
여름, 《中庸講義》를 집필하여 正祖大王께 바침.
9월 28일, 庭試 初試에 入格. 맏형 若鉉의 처남인 李蘗에게서 천주교에 관해 듣고, 책 한 권을 봄.
1785년 乙巳年(정조9年, 24세)
2월 25, 27일, 洋製에 뽑힘. 11월 1일, 柑製初試에 入格. 12월 1일, 正祖大王으로부터《大典通編》한 질을 하사받음.
1786년 丙午年(정조10年, 25세)
2월 4일, 別試 初試의 入格. 7월 29일, 次男 學游 태어남. 8월 6일, 到記 初試에 入格.
1787년 丁未年(정조11年, 26세)
國朝寶鑑 한 질과 白綿紙 1백 장을 하사받음.
1788년 戊申年(정조12年, 27세)
1월 7일, 3월 7일, 반제에 入格.
1789년 己酉年(정조13年, 28세)
12월에 三男 懼牂 태어남.
1790년 庚戌年(정조14年, 29세)
2월 29, 翰林召試에 入格. 藝文館 檢閱이 됨. 3월 8일, 海美縣(지금의 瑞山郡)에 유배되었다가 3월 19일에 사면됨.
1791년 辛亥年(정조15年, 30세)
5월 23일, 司諫院 正言을 제수 받음. 겨울《詩經義》8백여 條를 임금께 바침.
1792년 壬子年(정조16年, 31세)
3월 29일, 弘文館 修撰을 제수 받음. 4월 9일, 부친 晋州公 逝去함. 《起重架圖說》완성.
1793년 癸丑年(정조17年, 32세)
4월, 小祥을 지내고 喪服을 벗음.
1794년 甲寅年(정조18年, 33세)
10월 29일, 경기도 暗行御史에 임명됨. 12월 弘文館 副校理.
1795년 乙卯年(정조19年, 34세)
1월, 司諫院 司諫에 제수. 同副承旨에 제수. 2월, 兵曹 參議에 제수. 그 해 여름, 작은 형인 若銓이 周文謨의 천도교 활동에 연루되어, 7월 26일에 茶山은 金井道의 察訪으로 좌천됨. 이 때에 《西巖江學記》《陶山私淑錄》을 작성하고 星湖遺稿를 정리함.
1796년 丙辰年(정조20年. 35세)
12월 1일, 兵曹參知를 제수 받음. 12월 4일, 左副承旨를 제수 받음.
1797년 丁巳年(정조21年, 36세)
윤 6월 2일, 谷山府使로 나아가 큰 治績을 올림. 6월, 丁若鏞, 자신이 洋學에 감염되었음을 깨닫고 承旨 사퇴를 상소함. 겨울,《麻科會通》12권을 완성함. 이 책은 紅疫을 다스리는 여러 가지 약방문을 기록한 것으로, 茶山은 일찍이 紅疫으로 여러 아들을 잃었음.
1798년 戊午年(정조22年, 37세)
4월,《史記纂註》를 지어 임금께 바침.
1799년 己未年(정조23年, 38세)
2월, 정월에 淸의 고종황제가 붕어했는데, 그로 해서 淸에서 칙사가 왔으므로, 茶山은 戶曹參判의 假函을 가지고 칙사 일행을 맞음. 4월 24일, 兵曹參知를 제수 받음. 5월 4일, 同副承旨를 제수 받음. 6월, 반대파의 무고에 대해《自明疏》를 임금께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함. 12월, 四男 農牂이 태어남.
1800년 庚申年(정조24年, 39세)
봄, 가족을 이끌고 배를 타고 苕川의 별장으로 내려갔으나, 곧 임금의 소명을 받고 상경함. 6월 28일, 正祖大王 승하함.
1801년 辛酉年(순조 元年, 40세)
2월 9일 새벽, 政院의 論啓로 하옥됨. 3월, 長鬐로 유배됨. 둘째형 若銓은 지금의 完島인 薪知島로 귀양가고, 셋째형 若鍾은 옥사함. 이것이 천주교 박해로 인해 발생한 辛酉邪獄임. 여름,《百諺詩》를 완성함. 11월, 黃嗣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康津으로 유배됨. 유배 후《牧民心書》執筆 시작.
1802년 壬戌年(순조2年, 41세)
겨울, 四男 農牂 사망.
1803년 癸亥年(순조3年, 42세)
봄,《檀弓箴誤》를 씀. 여름, 《弔奠考》를 씀. 겨울, 《禮箋喪儀匡》을 씀.
1804년 甲子年(순조4年, 43세)
봄,《兒學編訓義》를 씀.
1805년 乙丑年(순조5年, 44세)
여름에 〈정체전중변〉(일명 〈기해방례변〉) 3권이 이루어졌다. 겨울에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다. 이에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나가 밤낮으로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혹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그가 질문한 것을 답변하여 기록해 놓았는데, 모두 52칙이었다. 이를 이름하여 〈승암문답(僧菴問答)〉이라고 하였다.
1807년(순조7,丁卯 46세) 5월에 장손(長孫) 대림(大林)이 태어났다. 7월에 형의 아들 학초(學樵)의 부음을 받고 묘갈명을 썼다.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이 완성되었다. 겨울에 〈예전상구정(禮箋喪具訂)〉 6권이 이루어졌다.
1808년(순조8,戊辰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주역》의 어려운 부분을 들추어 〈다산문답〉 1권을 썼다. 봄에 둘째 아들 학유가 방문했다. 여름에 가계(家誡)를 썼다. 겨울에 〈제례고정(祭禮考定)〉이 이루어졌다. 또 《주역심전(周易心箋)》이 이루어졌다. 〈독역요지(讀易要旨)〉 18칙을 지었고 〈역례비석(易例比釋)〉을 지었다. 〈춘추관점(春秋官占)〉에 보주(補注)를 냈다. 〈대상전(大象傳)〉을 주해했다. 〈시괘전(蓍卦傳)〉을 주해하였다. 〈설괘전(說卦傳)〉을 정정하였다. 《주역서언(周易緖言)》 12권이 이루어졌다.
1809년(순조9,己巳 48세) 봄에 〈예전상복상(禮箋喪服商)〉이 이루어졌다. 《상례외편(喪禮外篇)》 12권이 완성되었다. 가을에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산록(刪錄)했다. 내용은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을 첫머리에 놓고, 따로 《시경강의보유》 3권을 지었다.
1810년(순조10,庚午 49세) 봄에 《관례작의(冠禮酌儀)》ㆍ《가례작의(嘉禮酌儀)》가 이루어졌다. 봄, 여름, 가을에 3차례 가계(家誡)를 썼다. 9월에 큰아들 학연이 바라를 두드려 억울함을 상소했기 때문에 특별히 은총이 있었으나, 홍명주의 상소와 이기경의 대계(臺啓)가 있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했다. 겨울에 《소학주관(小學珠串)》이 이루어졌다.
1811년(순조11,辛未 50세) 봄에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겨울에 〈예전상기별(禮箋喪期別)〉이 이루어졌다.
1812년(순조12,壬申 51세) 봄에 《민보의(民堡議)》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이 완성되었다. 〈아암탑문(兒菴塔文)〉을 지었다.
1813년(순조13,癸酉 52세) 겨울에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이해 겨울에 완성했는데 40권이다. 이강회(李綱會), 윤동(尹峒)이 도왔다. 《논어》에 대해서는 이의(異義)가 워낙 많아서 〈원의총괄(原義總括)〉 표를 만들어 〈학이(學而)〉 편에서부터 〈요왈(堯曰)〉 편까지의 원의를 총괄한 것이 175조가 된다. 춘추삼전(春秋三傳)이나 《국어》에 실린 공자의 말을 모아 한 편을 만들어 책 끝에 붙였는데, 〈춘추성언수(春秋聖言蒐)〉 63장이 그것이다.
1814년(순조14,甲戌 53세) 4월에 장령(掌令) 조장한(趙章漢)이 사헌부에 나아가 특별히 대계(臺啓)를 정지시켜, 죄인명부에서 그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때 의금부에서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석방시키려 했는데 강준흠(姜浚欽)의 상소로 막혀서 발송하지 못했다. 여름에 《맹자요의(孟子要義)》가 이루어졌다. 가을에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이 이루어졌다.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이 이루어졌다. 《중용강의보》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대동수경(大東水經)》이 이루어졌다. 또 이여홍(李汝弘 : 汝弘은 李載毅의 字)의 편지에 답하여 학문과 사변의 공(功)을 논했다.
1815년(순조15,乙亥 54세) 봄에 〈심경밀험(心經密驗)〉과 〈소학지언(小學枝言)〉이 이루어졌다.
1816년(순조16,丙子 55세) 봄에 《악서고존(樂書孤存)》이 이루어졌다. 6월, 손암(巽菴)의 부음을 들었다. 손암의 묘지명을 썼다.
1817년(순조17,丁丑 56세) 가을에 《상의절요(喪儀節要)》가 이루어졌다. 《방례초본(邦禮艸本)》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했다. 뒤에 《경세유표》로 개명했다.
1818년(순조18,戊寅 57세) 봄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졌다. 여름에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 2권이 이루어졌다. 8월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관문(關文)을 발하여 다산을 떠나 14일 비로소 열수의 본집으로 돌아왔다.
1819년(순조19,己卯 58세) 여름에 《흠흠신서(欽欽新書)》가 이루어졌다. 이 책의 처음 이름은 《명청록(明淸錄)》이었는데 후에 우서(虞書)의 “흠재흠재(欽哉欽哉)” 즉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을 써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겨울에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이 이루어졌다.
1820년(순조20,庚辰 59세) 겨울에 옹산(翁山) 윤정언(尹正言)의 묘지명을 지었다.
1821년(순조21,辛巳 60세) 봄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남고(南皐) 윤참의 지범(尹參議持範)의 묘지명을 썼다.
1822년(순조22,壬午 61세) 이해는 다산의 회갑년이다.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윤지평 지눌(尹持平持訥)의 묘지명을 썼다. 이장령 유수(李掌令儒修)의 묘지명을 썼다. 신작(申綽)의 편지에 답하면서 육향의 제도를 논했다.
1823년(순조23,癸未 62세) 9월 28일, 승지(承旨) 후보로 낙점되었으나 얼마 후 취소되었다.
1827년(순조27,丁亥 66세)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동뢰구언(冬雷求言)’으로 상소하여 다산을 참혹하게 무고하였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830년(순조30,庚寅 69세) 5월 5일에 약원(藥院)에서 탕제(湯劑)의 일로 아뢰어 부호군(副護軍)에 단부(單付)되었다. 그때 익종(翼宗 : 순조 아들)이 위독하여 약원(藥院)에서 약을 논의할 것을 청했다. 약을 달여 올리기로 했는데, 채 올리기도 전 6일 세상을 떠났다.
1834년(순조34,甲午 73세) 봄에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改修)하고 합하여 모두 21권으로 만들었다. 가을에 다산에 있을 때 《상서》를 읽으면서 매색(梅賾)의 잘못된 이론을 잡아서 논술했던 《매씨서평(梅氏書平)》을 개정했다. 순조의 환후가 급해 명을 받들고 12일에 출발했는데 홍화문(弘化門)에서 초상이 있음을 듣고 이튿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36년(헌종2,丙申 75세) 2월 22일 진시(辰時)에 열상(洌上)의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쳤다. 이 날은 다산의 회혼일(回婚日)이어서 족친(族親)이 모두 왔고 문생(門生)들이 다 모였다. 장례 절차는 모두 유명(遺命) 및 〈상의절요(喪儀節要)〉를 따랐다. 이에 앞서 임오년(1822) 회갑 때 공이 조그마한 첩(帖)을 잘라 유명을 적어 두었으니 장례 절차였다. 4월 1일에 유명대로 여유당(與猶堂) 뒤편 광주(廣州)초부방(草阜坊) 마현리(馬峴里)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910년 7월 18일에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내렸다.

다산 문집의 판본은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여유당집(與猶堂集)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열수전서(洌水全書)》, 활자본으로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있다. 영인본으로 1985년 여강출판사가 간행한 《여유당전서》(전20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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