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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본기 표 서[개정판]

시리즈 : 세상을 움직이는 책 [30]

사마천 저 | 박일봉 역 | 육문사 | 201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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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82031137 / 768쪽 155 x 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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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사기(史記)≫에 대하여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의 찬저(撰著)로서, 청(淸)의 건륭(乾隆) 연간(年間)에 중국의 정사(正史)로 정해진 ‘이십사사(二十四史)’의 머리에 위치하는 역사서(歷史?書)다. 처음에는 사마천(司馬遷)이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지만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사기(史記)≫라 일컬었다. 그 구성은 ‘본기(本紀)’ 십이 권(卷), ‘표(表)’ 십 권, ‘서(書)’ 8권, ‘세가(世家)’ 삼십 권, ‘열전(列傳)’ 칠십 권으로 도합(都合) 일백삼십 권이다. ‘본기(本紀)’는 황제(黃... ≪사기(史記)≫에 대하여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의 찬저(撰著)로서, 청(淸)의 건륭(乾隆) 연간(年間)에 중국의 정사(正史)로 정해진 ‘이십사사(二十四史)’의 머리에 위치하는 역사서(歷史書)다. 처음에는 사마천(司馬遷)이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지만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사기(史記)≫라 일컬었다. 그 구성은 ‘본기(本紀)’ 십이 권(卷), ‘표(表)’ 십 권, ‘서(書)’ 8권, ‘세가(世家)’ 삼십 권, ‘열전(列傳)’ 칠십 권으로 도합(都合) 일백삼십 권이다. ‘본기(本紀)’는 황제(黃帝)로부터 한(漢) 무제(武帝)까지 역대 왕조의 제왕(帝王), 즉 고대 중국 통솔자들의 편년사(編年史)이고 ‘세가(世家)’는 제왕을 떠받드는 제후국(諸侯國)의 열국사(列國史)이며, ‘열전(列傳)’이란 ‘본기(本紀)’에 이어지기도 하고 혹은 ‘세가(世家)’에 이어져 역사를 채색하는 개인(個人)의 기록(記錄)으로서 전기집(傳記集)인 동시에 각양각색의 인간상(人間像)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표(表)’는 연표(年表)고 ‘서(書)’는 제도사(制度史)다. ‘본기(本紀)’에서 ‘열전(列傳)’까지는 모두 다른 성격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전체를 하나로 정리하면 종합사(綜合史)가 된다. 이와 같은 역사서(歷史書)의 기록 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 하는데 그 형식은 반고(班固)에게 이어져 ≪한서(漢書)≫가 작성되고 다시 그 뒤의 모든 정사(正史)로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역사서 기록 형식에는 ‘편년체(編年體)’라 하는 또 하나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완성한 형식으로 기전체(紀傳體)는 편년체(編年體)와 함께 역사서 기록의 기본 형식이 되어 왔다. ≪사기≫는 사마천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간(竹簡)이며 그것을 가죽끈으로 철(綴)한 것이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 에 의하면 그것은 정(正)·부(副) 두 본(本)으로 되어 있는데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망실(亡失)에 대비하였고 부본(副本)은 경사(京師)에 보관하여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후세를 초들 것까지도 없이 한대(漢代)에도 ≪사기≫를 면학(勉學)하고 초사(抄寫)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차 이동함에 따라 가죽끈이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죽간 자체가 더렵혀지기도 하고 분실되기도 해서 차츰 탈간(脫簡)이나 착간(錯簡)이 있었을 것이다. 전(全) 일백삼십 권 가운데 일찍이 한대(漢代)에는 제11, 제12, 제1, 제2, 제3, 제10, 제30, 제38, 제67, 제68 등 열 권은 그 전권(全卷)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少孫)이 그것을 보충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註釋書)는 남조(南朝) 송(宋) 때 사람인 배인(裵?)의 찬저(撰著)인 ≪사기집해(史記集解)≫ 일백삼십 권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시대부터 약 육백 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초본(抄本)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註釋書)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隋)·당(唐)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書寫)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나 당대(唐代)에는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삼십 권을 짓고 또 를 보충하여 이에 주석을 붙였다. 그 후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일백삼십 권을 지었다. 이것은 고실(故實)을 널리 인용하여 음의(音義)도 타당하다고 알려졌다. 이 ≪색은(索隱)≫과 ≪정의(正義)≫의 출현이 대체적으로 지금의 ≪사기≫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에 대하여 ≪사기≫의 찬저자(撰著者)인 사마천은 자(字)를 자장(子長) 또는 태사공(太史公)이라고 하였다. 사마씨(司馬氏)는 원래 기록관(記錄官)의 가문이었으며 천(遷)은 한(漢)의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년(生年)은 일설에 의하면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기원전 145년)이고 다른 일설에 의하면 무제(武帝) 건원(建元) 6년(기원전 135년)인데 여기서는 전자(前者)를 따르기로 한다. 천(遷)은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전적(典籍)을 가까이했으며, 이십 세가 되던 무제(武帝) 원삭(元朔) 3년(기원전 126년)에는 남방(南方)의 강회(江淮) 땅에서 시작하여 한(漢)나라의 거의 전역을 주유(周遊)하면서 민정(民情)을 자세히 살피고 사적(史蹟)을 견학했다. 사마천은 자라면서 이렇듯 역사가로서 소양을 쌓아갔다. 그런데 무제(武帝) 원봉(元封) 원년(元年, 기원전 110년)에 아버지 담(談)이 죽었다. 그해에 무제(武帝)는 한실(漢室) 최초의 봉선(封禪)의 예(禮)를 태산(泰山)에서 행했는데, 기록을 맡은 태사령(太史令)인 담(談)에게 봉선(封禪)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분사(憤死)한 것이다. 담(談)은 죽기 직전, 태사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기록을 행하지 못하고 죽는 원통함을 아들 천(遷)에게 호소하며 상고(上古) 이래의 역사를 쓰라고 유언했다. 그때 천(遷)의 나이 삼십육 세였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소자(小子) 불민(不敏)하오나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의 경위와 구문(舊聞)을 남김없이 논술(論述)하여 조금도 결여된 부분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했다. 그 후 3년 뒤인 원봉(元封) 3년, 천(遷)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되어 그 직무인 역(曆)의 개정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상대부(上大夫) 호수(壺遂) 등과 함께 태초(太初) 원년(元年, 기원전 104년)에 태초력(太初曆)을 정하고 드디어 ≪사기≫ 저술에 착수했다. 그런데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에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릉(李陵)이 흉노의 포로가 되어 한(漢)의 위광(威光)을 손상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릉은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불과 오천의 보병부대(步兵部隊)로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기마부대(騎馬部隊)를 주력으로 하는 팔만의 흉노에게 포위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진 이릉은 부하들을 독려하여 용전분투(勇戰奮鬪)해서 적병 만여 명을 살상하였지만 칼은 부러지고 화살은 바닥나 결국 부하들은 전멸하고 자신은 화살에 맞아 실신 중 흉노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을 처벌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을 때 천(遷)은 무제(武帝)의 뜻을 살피지 않고 이릉을 변호했다. 그 때문에 무제(武帝)의 격노를 사서 이듬해인 천한(天漢) 3년에 하옥되고 궁형(宮形)에 처해졌다. 천(遷)의 억울함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천(遷)은 그 억울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사기≫의 저술에 더욱 몰두하여 8년 뒤, 무제(武帝)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에 드디어 완성했다. 그때 천(遷)의 나이 오십오 세였다. 천(遷)은 그 후 수년이 지나 육십 세를 전후해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연도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사마천의 약전(略傳)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먼저 아버지의 죽음이 ≪사기≫의 저작(著作) 동기가 되고 이릉 때문에 빚어진 화(禍)로 인하여 천(遷) 자신의 내심(內心)에서 넘쳐나는 열정이 더해져 완성된 역사서이기는 하지만 탁월한 소양과 극한의 시련으로 단련(鍛練)된 한 인간의 삶 자체가

저자 소개

자(字)는 자장(子長)으로, 전한시대의 역사가다. 열 살 때 [좌전(左傳)] [국어(國語)] [상서(尙書)] 등 역사서를 달달 외워가며 역사와 문학 두 분야에서 기초를 쌓았다. 책 읽는 것을 즐겼던 사마천은 스무 살이 되자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책 속에 기록되거나 전설 속에서 이름이 거론됐던 곳은 모두 직접 찾아가 내용을 확인하고 묻혀 있던 사실을 최대한 발굴하였다. 이런 광범위한 역사 여행과 조사를 통해 사마천의 안목은 더욱 넓어졌고, 백성들의 질고를 이해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 모든 경험은 이후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사마천이 살았던 전한(前漢)은 통일 국가였다. 국력이 강성했던 그 시절, 각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들이 이루어졌다. 태사령으로서 고대 [춘추(春秋)]와 같은 위대한 역사서를 쓰고 싶어 했던 아버지 사마담은 병을 앓던 중 아들에게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임종하고 만다. 사마천이 36세 때였다. 2년 후, 한무제에게 태사령으로 임명받은 사마천은 나라에서 보존하고 있던 각종 진귀한 도서와 문서, 역사 자료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수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가 넘는 길을 다니고서야 붓을 들고 편찬을 시작했다. 이렇게 사마천은 평생의 재능과 지혜, 피와 땀을 쏟아 부으며 온 마음을 다해 [사기]를 저술해 갔다. 기원전 99년, 명장군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간 전투에서 흉노에 투항해 버렸다. 한무제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마천에게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사마천은 이를 자신들의 당략에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대신들이 괘씸하여 이릉을 두둔했다. 혹 그가 진짜 적군에게 투항했더라도 이전의 노고는 높이 살 만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화가 난 한 무제는 사마천을 궁형(宮刑)에 처하니,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담은 공자의 『춘추』를 계승한 책이다. 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한 지 13년이 흐른 뒤였다. 

목차

목차
서문/4
본기(本紀)/15
삼황본기(三皇本紀)/16
제1 오제본기(五帝本紀)/23
제2 하본기(夏本紀)/52
제3 은본기(殷本紀)/76
제4 주본기(周本紀)/95
제5 진본기(秦本紀)146
제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192
제7 항우본기(項羽本紀)265
제8 고조본기(高祖本紀)/314
제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375
제10 효문본기(孝文本紀)/403
제11 효경본기(孝景本紀)/436
제12 효무본기(孝武本紀)/444
표(表) 서(序)
제1 삼대세표(三代世表)/486
제2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493
제3 육국연표(六國年表)/497
제4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501
제5 한흥이래제후왕연표(漢興以來諸侯王年表)/503
제6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507
제7 혜경간후자연표(惠景閒侯者年表)/510
제8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512
제9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建元以來王子侯者年表)/515
제10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516
서(書)
제1 예서(禮書)/518
제2 악서(樂書)/534
제3 율서(律書)/579
제4 역서(曆書)/594
제5 천관서(天官書)/610
제6 봉선서(封禪書)/662
제7 하거서(河渠書)/728
제8 평준서(平準書)/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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