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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0522757 / 480쪽 14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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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이 책의 저자는 춘천 외곽 동내면 학곡리에 있는 성암감리교회 목사이다. 시골교회 목사인 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청담동에서 의류 디자인을 하는 첨단 감각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 만남에서 서로의 갈급함을 금방 눈치 채고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약조한다. 그 대화들은 ‘청담동월요예배’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 옮겨진 글들은 그 젊은이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들을 ‘혼돈’ 속에 몰아넣어 옷을 짓는 대신 ‘사랑을 짓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들이다. 이 글들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려면, 당신의 영혼 속에 혼돈chaos을 지녀야 한다.”는 니체 언어의 증빙이라고 그는 말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려면, 당신의 영혼 속에 혼돈chaos을 지녀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소위 영혼을 다룬다는 몇몇의 직능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이승의 영혼들을 ‘춤추는 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춤추는 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제도화된 이성이 ‘혼돈混沌’을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지성은 관성의 물物에 빠져 눈을 감아 버렸으며, 영성은 뼈대만 남아 불감증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혼돈’을 배우고 익히는 공부를 게을리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요, 그 연유로 인해 누구도 스승이 아니며, 누구도 별로 태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서문에서
그가 한 역할은 요즘 흔한 멘토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세속의 방식대로 맨티들을 이끌지 않는다. 그저 혼돈 속에 몰아넣는 짓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의 글들은 기존의 가치를 모조리 파괴한다. 목사이면서도 기독교의 고정관념까지도 깨버린다. “예수를 만나려면 예수를 죽이라”고 말하고 성서를 읽는 까닭은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 다시 마음을 세울 바탕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다. 그곳에서 ‘예수의 도道’가 읽는이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그의 글은 ‘관점의 전환’과 ‘시야의 확장’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야, 눈 떠!”라는 일갈이다. 갈매기들아, 부둣가에서 생선 창자나 쪼아 먹지 말고 하늘 높이 날아 세상을 좀 내려다보아라.
매주 월요일 오후 1시에서 1시 30분까지의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충분히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 되어가는 지금 하나 둘 영혼 속의 혼돈을 통과하며 별들로 태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을 ‘사랑을 짓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옮겨지는 글들은, 그들을 창조의 혼돈으로 몰아넣은 재료들이 어떤 것인지, 무엇으로 그들이 사랑을 짓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별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니체 언어의 증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서문에서
각 장의 제목에서 내용을 헤아려볼 수 있다.
제1장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려는 글들이다. 여러 문학 작품들을 등장시켜 그 행간을 통해 세상의 이면이 드러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읽어볼 만한 오래된 문학 작품들이 등장한다. 가치 파괴적인 저서들이 소개된다.
제2장은 과학적 원리를 통해 신앙의 시야를 넓혀주려는 글들이다. 물리적인 과학과 정신적인 신앙의 세계가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져 사고의 지평이 우주 너머까지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물리학과 천문학이 신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라는 설명이 종교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제3장은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성서적 사건들을 냉철히 해석하면서 성서를 보는 시야를 종교의 울타리 너머까지 확장시켜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파괴한다.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드러나면서 들리지 않던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대 방향에 설치된 카메라 화면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해석은 파격적이고 주장은 새롭고 결론은 늘 신선하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방향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그의 조언은 이 시대에 유효하다.
북칼럼니스트 김지홍은 이렇게 말한다.
“동일한 시간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살며 유사한 경험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 경험의 강도와 깊이는 천차만별이다. 또한, 동일한 사안에 관해서도 사람마다 시각이 제각각인 것처럼,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사고의 깊이 역시 천차만별이다. 허태수 목사의 글을 읽다 새삼 깨달은 사실이다.”
그대 목소리 안의 목소리 우리의 도시는 죽어버린 말들의 스모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언어 오염은 곧 진실의 오염이라는 의미에 닿아 있습니다. 이 세상을 타락시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는 진실을 오염시키는 말에 있는 것입니다. 말이 무의미한 소음 덩어리로 전락하여 도시의 허공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이 현상의 상당한 책임은 말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말을 잘못 사용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그 '무엇' 우리는 제대로 ‘정가표’가 붙은 시대에 살기를 꿈꿔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자유를 자유라 하고 폭력을 폭력이라 하는, 탐욕을 탐욕이라 하고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 정당하게 말하고 인정하는, 그런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들이 제 있을 자리를 찾아 바르고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그 조화와 균형과 '정상'의 상태를 우리는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내 안의 가룟 유다 성서 기록자는 나쁜 놈 ‘유다’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살아남기 위해 숨어 있는 추잡한 협력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성서가 전하는 흥미로운 장면은 유다의 배반이 아니라 제자들의 동요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를 예수의 배반자로 기술하기 시작한 복음서 기자는 ‘유다의 배신’을 통해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가 나를 팔리라” 했을 때 모두들 “제가요?” 합니다. 강한 부정의 뉘앙스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