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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095 / 235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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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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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M. 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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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제2차 세계대전 편집위원회
- 18,000
- 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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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나다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부인을 세 명이나 잃고 끝내 소실을 들여야 했던 권상?일, 재산을 두고 올케 네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아들 영창대군을 버리고 친정 집안을 선택한 인목대비, 족보에서 ‘서(庶)’ 자를 빼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예순 살이 다 된 남편을 질투하느라 속이 타는 이문건 부인, 첩과 서얼과 기생이었던 마이너리티 가족들 그리고 종손의 그 묵직한 책임감. 조선시대...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나다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부인을 세 명이나 잃고 끝내 소실을 들여야 했던 권상일, 재산을 두고 올케 네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아들 영창대군을 버리고 친정 집안을 선택한 인목대비, 족보에서 ‘서(庶)’ 자를 빼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예순 살이 다 된 남편을 질투하느라 속이 타는 이문건 부인, 첩과 서얼과 기생이었던 마이너리티 가족들 그리고 종손의 그 묵직한 책임감. 조선시대 이 사연들은 모두 가족과 연관하여 생겨났다. 조선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국가는 없고 가족만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연은 가족을 매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족의 중심에 여자가 있었다.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에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시행은 결국 실패했다고 간주하며 “조선의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자와 동등한 재산권을 통해 특별한 경제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일”이라 지적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자들이 통장관리를 하는 재산 관리 감각이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에는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여기 사연의 주인공들 중에는 이른바 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영 일이 잘 안 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찾고 또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그것만큼은 잘나가던 사람이든 못나가던 사람이든 서로 다르지 않았다. 사연들은 애틋하다. 그런데 그 사연들은 어쩐지 현재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종의 공감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보다도 감동적이다. - 자네 언제 장가가니?,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조선 사림파의 종장 김종직(1431~1492)은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이 경북 선산이었지만 외가인 밀양에서 나고 자랐다. 혼인 후에는 밀양을 떠나 부인 조씨의 고향인 김산(경북 김천)에서 생활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는 여자 집에서 혼인식을 하고 대개 여자는 친정에 머물고 남자가 자신의 집과 처가를 오가거나 아니면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신사임당(1504~1551)이 혼인 후 20년 가까이 친정인 강릉과 그 주변에 살면서 율곡을 낳고 길렀던 것, 유희춘(1513~1577)의 손자 광선이 혼인 후 처가살이 떠날 때 가족들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울며 아쉬워한 것, 권상일(1679~1759)이 며느리를 혼인한 지 2년 5개월 만에 맞이한 것은 모두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관습은 18세기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가 혼인 후 친정에 머무는 기간만 짧아졌을 뿐이다. 20세기 초까지도 이른바 ‘해묵이’라고 해서 신부가 1, 2년 친정에 있는 것은 예사였다. 지금도 어른들이 총각들에게 ‘언제 장가가냐’고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제도는 조선 가족에 여러 가지 독특한 특성을 부여했다. 아들과 딸의 권리와 의무가 자연스럽게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즉 재산을 상속받는 권리에 있어서 아들과 딸의 구분이 없었으며 제사를 지내는 의무도 아들과 딸이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율곡 집안 남매들 재산 분할 문서의 서문이다. 우선 부모 양쪽의 재산을 나이순으로 차례대로 『경국대전』에 따라 나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자녀 균분 상속을 말한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의 재산만이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재산까지 율곡과 그 남매들에게 똑같이 분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각각의 분재 몫을 보면, 토지는 20~40복(卜)으로 차등이 있으나 노비는 대개 15~16구로 균등하게 분배했다. 토지 상속분에 차이가 있는 것은 땅의 비옥도나 집안 형편 등을 따른 것으로 보일 뿐, 특별히 아들딸에 대한 차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즉, 같은 딸이라도 둘째 딸에게는 많이, 셋째 딸에게는 적게, 또 율곡에게는 많이 막내 위(瑋)에게는 좀 작게 분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녀 균분 상속은 16세기 당시 율곡 집안에서만 행한 일은 아니다. 16세기 대부분의 분재기(分財記)는 이처럼 정확한 균분 상속을 부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속받은 재신을 여자들이 결혼한 뒤에도 자기 것으로 관리할 수 있었을까? 남편이나 시가의 재산과 섞여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본문 64~65쪽 지금의 통념과는 달리 왜 이렇게 딸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을까? 남자는 혼인하면 여자 집을 왔다 갔다 하거나 아예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여자 집의 영향력이 컸다. 이런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딸들에게 재산을 줄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제사 또한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조선중기까지 전문용어로 윤회봉사, 분할봉사니 해서 딸이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령 아버지 제사를 올해는 큰아들이 지내고 내년에는 작은아들이 지내는 것은 윤회이고, 아버지 제사는 아들이 어머니 제사는 딸이 맡으면 그건 분할이다. 물론 남귀여가혼의 영향이다. 혼인해서 남자가 여자 집에 오래 거주하는 형태였기에, 딸과 사위가 제사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시대 여자들의 제사에 대한 느낌은 오늘날 여성들의 그것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친정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요즘처럼 직장여성의 육아 대부분을 친정이 감당하는 데 비해, 제사는 여전히 남자 집안 중심이란 점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우리의 외가 친연성이 특별할 뿐만 아니라 그 연원의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저자 이순구 박사는 “현재 여자들이 명절 제사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몸이 고단하기 때문만은 아니라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며 제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후기 이전처럼 여자 집 제사도 지내든지 아니면 돌아가면서 하든지 아니면 없어지든지... - 조선후기 여성들, 친정의 딸에서 시집의 며느리로 정체성의 변화 조선후기가 되면 이러한 시스템에 변화가 온다. 한쪽 집안, 즉 부계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즉, 여자들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나 재산 상속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남자 위주, 적장자 중심이 된다.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는 가문의 핵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여성들은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다. 즉 딸에서 며느리로 주된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부계성의 강화에 따라 여성들은 ‘시잡살이’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을 친정의 딸보다는 시집의 며느리로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딸로서의 권리를 잃어갔지만, 반면 며느리나 적처로서의 권리와 위치는 더 강하게 보장받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칠거지악의 악조건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가령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양자제도가 그 대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양자 들이기가 중국보다 심했던 이유에 대
1788년 갑산에 진장으로 간 노상추는 이 지역의 풍습을 보고 놀란다. 이곳이 조선 땅이긴 한데, 예법이 씻은 듯이 없다는 것이다. 조상 제사를 지낼 때 고조부 기일에 아버지, 조부, 증조부 제사를 한꺼번에 몰아서 지내자, 노상추는 ‘이게 제사야? 종친회야?’라는 생각을 한다. 노상추는 이것이 모두 귀신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행위라며 참으로 한심하다고 말한다. 모든 조상 제사를 따로따로 지내는 남쪽의 상황과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혼례 풍습은 양반이나 일반인이나 ‘친영’을 하는 듯했다. 이 지역에서는 혼인날 신부 집에 가서 일단 혼례를 치른 다음, 곧바로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갔다. 혹 신랑 집이 멀면 중간에 여관에서 자기도 했다. 중국의 친영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었다. 신부 집에서 혼례를 마치고 며칠 후 신랑 혼자 본가로 돌아가는 남쪽의 풍습과 확실히 달랐다.
- 본문 154쪽
목차
머리말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
장가들기,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김종직은 왜 밀양에서 태어났을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인가?
왜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더 많이 키우는가?
처가 또는 외가의 위력
인목대비는 왜 아들보다 친정 집안을 선택했을까?
왕실의 외가, 단지 외척인가 정치적 파트너인가?
‘칠거지악’으로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처, 적자들의 배타적 권리
조선에서는 사위도 연좌제에 걸릴까?
한때의 전통이 다른 시절엔 금기가 되다
집안의 중심, 여자
딸들은 상속받은 재산을 결혼 후에도 소유했을까?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다
맏며느리의 저력
투기도 부덕도 여자의 생존 전략
중국의 전족, 조선에는 왜 없었을까?
신여성 인수대비
정부인 안동 장씨에 대한 오해
큰물에서 놀았던 소현세자빈 강씨
강정일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특별꼭지 조선의 혼인이 가족에 미친 영향
가족들의 생활상
세 번 결혼한 양반은 진정 행복했을까?
종손이라는 것
사랑은 조선시대에도 불가해였을까?
사랑과 우정 사이
안 예쁜 여자는 없다
청과 조선의 경계, 그 땅의 풍속
우리는 시험을 좋아한다
고려와 조선이 타협한 장례 문화
왕실 제사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다
조선 가족의 마이너리티
그 많은 홍길동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자 노수, 족보에서 ‘서’ 자를 빼다
과부는 재가할 수 없다
양반과 기생,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기생 석벽, 양반의 첩이 되다
기생 ‘머리 올려주기’의 진실
조선의 여성들, 불교의 명맥을 잇다
우리가 도덕성에 열광하는 이유
어우동의 죽음, 도덕 사회로 가는 발판이 되다
어느 열녀의 퍼포먼스
화순옹주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언제까지 도덕성 경쟁을 해야 하는가?
강정일당의 도덕성 열망
18세기 말에 쏟아진 간통 사건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