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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6502904 / 239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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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성서를 통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나 대화를 시작하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나눔과 평화의 이야기들 *****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로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처음 사랑’을 말했던 이덕주 교수가 이번에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을 펴냈다.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는 저자가, 더구나 사회주의자도 아닌 그가 어떠한 연유로 이런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을까? 저자는 세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통일과 통일 이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고, 교계와 신학계에서 무언가 해야... 성서를 통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나 대화를 시작하다! 새로운 역사를 향한 나눔과 평화의 이야기들 *****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여성들》로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처음 사랑’을 말했던 이덕주 교수가 이번에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을 펴냈다.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는 저자가, 더구나 사회주의자도 아닌 그가 어떠한 연유로 이런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을까? 저자는 세 번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통일과 통일 이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고, 교계와 신학계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기 위해 먼저 성서를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 레위기의 안식년·희년 사상,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균등 분배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담겨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오늘날 안팎으로 비판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경쟁과 지배’의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원리임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의 성서 해석과 우리 옛 선조들의 문화를 통해 역설한다. 1. 왜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해야 하는가? - 하나 될 한반도를 위해 낯설지만 꺼내야 하는 이야기 70년 가까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된 이 나라에 교회는 책임이 없을까? 화평케 해야 할 교회가 분단의 현실 앞에, 그리고 분열된 한반도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자의 물음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한반도가 이렇게 분단 상황이 된 것에는 교회의 책임도 있다.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할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 상황에서 편향적인 ‘보수 우익’ 입장을 취하면서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 뼈아픈 반성을 통해 앞으로 교회는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그 해답을 찾는 중 기독교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차치하고 그 용어부터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교회사에서 그동안 기독교 사회주의가 어떤 위치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1920-30년대에 등장한 사회주의에 대해 기독교계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삼거나,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비판하거나,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하거나,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 중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협력을 모색했던 부류는 소수이기에 한국 교회사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역사는 단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미국식 자본주의 신학 교육과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분단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주의는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보수 신학에 맞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으로서 역사적 맥을 이어왔다. 세 차례 평양을 다녀온 저자는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제3의 이념으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게 되었고, 바로 그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남과 북이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2. 성서,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다 - 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기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성서를 기독교 사회주의 관점에서 읽어 본다. 먼저 출애굽기 16장 17-18절의 만나 이야기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 때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의 소득 격차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어떻게 부족함이 없이 모두 균등하게 배분되었을까? 이것은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오멜’이라는 만나 규칙 때문이었다. 즉 더 많이 거둔 사람도 내일 또 하루치의 만나를 내려 주심을 믿고 얻은 물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이라는 균등과 평등이 만나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레위기 25장 8-12절 희년 규례도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안식년(제7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 즉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한다. 희년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땅을 팔고 남의 집에 가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자기 땅을 되찾고 가족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희년 제도는 땅값의 산정 기준이 되어 희년과 가까워질수록 땅값은 싸진다. 땅을 파는 사람도 능력만 있으면 언제든 무를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희년만 되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을 산 사람도 어차피 희년이 되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기에 정도 이상의 땅을 얻고자 욕심 부리지 않는다. 결국 희년의 의미는 “가난한 자에겐 희망을, 부요한 자에겐 나눔을”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잘 보여 주는 비유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다.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이든 해 질 무렵 온 사람이든 포도원 주인은 똑같은 일당을 주었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성과급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저자는 이것을 만나 공동체의 신약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만나 공동체에서 율법으로 이루어진 균등 분배가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이 한 오멜”과 같이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사회주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어 보려 한다. 이런 시도는 그동안 우리가 자본주의적으로만 성서를 대했던 것을 반성하고, 남과 북이 함께 성서를 읽을 통일의 날에 우리의 성서 읽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다. 3. 부자와 가난한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비전 이렇듯 성서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 제시된 구절들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오멜을 갖는 만나 이야기,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희년 이야기, 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천국 이야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식년이라든지 희년 규례가 그대로 구현된 적은 없다.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공동체를 책망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삶 속에서 빈민 구제와 빈곤 문제 해결을 외면했던 종교인들의 위선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멸망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예언자들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회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다스릴 통치자를 염원한 것이다. 이사야는 그 비전을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장면으로 묘사했다(사 11:6-9). 이것은 과연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인가? 권력층과 부유층, 소외계층과 빈곤층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을 실현할 법과 종교가 있었음에도 실패한 이스라엘을 보고도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기독교
러들로우는 빈곤 문제야말로 교회가 해결해야 할 지상 과제이며, 이는 단순히 제도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과 철학의 문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청년 학생층에게 인기가 많았던 런던 킹스칼리지 윤리학 교수 모리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온건파였던 모리스는 처음 러들로우의 ‘사회주의적’ 인식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1848년 2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러들로우는 파리로 가서 민중혁명의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논의가 활기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논의되고 있는 사회주의 이론과 방법론 중에는 기독교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배제하려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왕권신수설을 펼치며 봉건 왕조를 옹호했던 주류 교회는 이런 논의에서 ‘왕따’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후 귀국길에 오른 러들로우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구호가 떠올랐습니다.
“사회주의의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of socialism)”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자는 것입니다. 혁명 시대 유럽에 거세게 몰려오는 사회주의 물결을 피하지만 말고 이를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도 살고, 사회주의도 살리는 제3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_pp. 54-55 (3. 기독교 사회주의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어머님은 도저히 혼자 힘으로 우리를 키울 자신이 없으셨는지 어느 날 아침 우리를 앉혀 놓고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니야.” 우린 모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 예배당에 가서 철야 기도를 하면서 도저히 내 힘으로 너희 셋을 키울 수 없어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이제부터 너희는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길러 주실 것이고 너희가 어떻게 되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
등록금을 못내 학교에서 제적당할 처지가 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당신 아들이 등록금을 못내 학교엘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면 어디서 보냈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돈 봉투가 우리 집에 배달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우리가 아플 때도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좌우간 문제만 터졌다 하면 어머님은 병원이나 약국, 혹은 옆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으로 가서 단판을 짓고 오시곤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삼남매는 누가 준 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만나’를 먹고 자랐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하였던(요일 5:14) 어머님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그처럼 자신을 밝히지 않고 만나를 나눠 주었던 익명의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가난했지만 만나 체질이 되어 여느 부잣집 아이들 부럽지 않게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고 보니 그 시절 먹었던 만나는 다름 아닌 ‘사랑의 빚’이었습니다. 갚지 않으면 불안한 빚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만나를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빚을 갚지요? 갚을 길 없는 빚을 갚는 방법은 따로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주님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라는 말입니다. 수직적인(주님과 나 사이) 사랑을 수평적인(나와 이웃 사이) 사랑으로 바꾸라는 뜻이지요. …… 금전적인 빚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지만 사랑의 빚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조금 여유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만나를 나눠 주는 사회, 그래서 사랑의 빚으로 서로 얽히고설켜 모두가 행복한 사회, 바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그리는 세상입니다.
_pp. 79-81 (4. 만나 공동체, 나눔의 신비)
원수지간에 쌓인 불신과 증오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결과로 얻게 된 “우리의 화평”입니다(엡 2:14). 참으로 희생 없이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희생은 자기 것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을 지닌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기독교 사회주의는 서로 다른 배경과 성향을 지닌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대화와 교류를 통한 조화와 협력을 추구합니다. 특히 민족 분단 상황에서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벽이지만 또한 그곳을 통해 남북 왕래가 이루어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와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는 ‘비무장 신학’으로서 60년 넘게 자본주의만 경험한 남쪽과 사회주의만 경험한 북쪽 사이에서 양쪽 모두와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제3의 영역을 구축하고 평화와 공존의 공간을 넓혀 감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갈등과 분열, 불신과 증오, 죽음과 폭력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화해와 일치, 공존과 협력,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영의 생기’(창 1:2, 겔 37:9)가 되어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호흡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_pp. 237-239 (닫는 글: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목차
여는 글: 낯설고 다른 것과 함께
1. 이제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렵니다
2. 기독교 자본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3. 기독교 사회주의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4. 만나 공동체, 나눔의 신비
5. 까치밥과 안식년 평화 공동체
6. 땅따먹기와 희년 공동체
7. 실패한 역사, 그러나 버릴 수 없는 꿈
8. 땅에 쌍을 것인가, 하늘에 쌓을 것인가?
9. 낙타도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다
10. 나눔과 섬김의 성만찬 공동체
11. 오순절 성령 공동체
12.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며
닫는 글: 선한 사마리안인의 사랑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