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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창비시선 28

김윤이 저 | 창비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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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6423285 / 176쪽 123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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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으로 연주하는 시의 향연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정밀한 묘사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김윤이 시인의 첫시집이 출간되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서정시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관념과 사유의 바다를 유연하게 헤엄친다. 특히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주무르듯 언어를 자유자재로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인다. 활달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언어, 깊이있는 서정과 현실을 읽는 예리한 시선이 한데 어우러진 수작들로 채워진 시집이다.

시인의 시는 묘한 슬픔과 우울의 정서에서 출발한다. 시의 화자들은 혼돈으로 점철된 현실세계에 위태로이 한 발짝씩 내디디는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허약해진 눈동자” “갈라진 혓바닥” “삭제된 한쪽 귀” 등 결핍을 지닌 신체기관들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생은 늘 어떤 슬픔을 야기한다. 특이한 것은 화자의 이러한 슬픔과 우울을 불러일으키는 저 스산한 세계가, 흔히 그렇듯 회색톤의 팍팍함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이다.

파란, 오렌지/둥근 탁자 위에/누가 저며놓았나/즙액이 흐르네//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화병의 물은 한정없이 썩어가고/장미꽃잎 한 점/눈꺼풀처럼 스르르 떨어지네/어항 속의 금붕어는/빨간 아가미로 떠다니고//(…)/작은 물고기 잘바닥잘바닥/밤새 빨간 두 눈으로 앉아 있는 동안//오렌지는 파랗네/슬픔은 여태 익지 않았네(「오렌지는 파랗다」 부분)

아름답지 못한 현실을 오히려 뚜렷하게 각인시키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허약함을 고스란히 고백하는 시인의 당돌함은 이내 부드럽고 여린 듯 보이지만 당당하게 현실과 독대하는 인상적인 화자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상처받고 외로워하면서도 끝내 성장을 멈추지 않는, 외려 그 상처와 외로움을 자기 존재의 한 기원으로까지 생각하는 듯한 시인의 담담한 고백이 시집 곳곳에, 그렇게 자라난 ‘흑발 소녀’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누군가 나를 덮어주었음 하고 바라본 적 있다면 그건 또 하루가 뜨거워지고 있는 증거다 차광막은 없다 각화의 흔적. (…) 그러하니 해안에 주저앉은 가랑이 그 부드러운 진펄 속으로 흑발 소녀 전부(全部)가 넘어진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느끼기 위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숨쉬기 위해!//살아 있다는 느낌이 왔다(「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부분)

시인의 시는 활달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언어감각 또한 돋보인다. 결코 밝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전반적으로 생생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이러한 면모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같은 활달함은 최근의 ‘젊은 시’들과 그 궤를 그대로 같이하지는 않는다. 언어의 가능성을 끝간 데 없이 실험하는 예의 풍조와 달리 시 ‘본연의 서정성’에 한 발을 둔 채 양쪽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어내는 것이다.

한번은 잔구름 등진 드문드문한 솔숲에 앉아/흉강처럼 벌어진 그늘막에서 힁허케 나조차 쓸리는 소리 들었지/소식의 소식으로 밀려가기를 그러는 사이/이월 하늘은 희게 떠가고 길쭉한 나무들은 밤 깨워놓고 겹소리에 휘감겼네 처얼썩 싸아아 사아아/그대로 모래가 되는 줄 알았지 그냥그렇게 거듭 바람을 사람의 입으로 중얼거렸어 싸아아 사아 아? 모래…… 모래 (「나미비아에 당도했을까, 당신」 부분)

그녀의 서정성은 형식상의 문제뿐 아니라 시의 주제 면에서도 아름답게 발현된다. 시집 전반부에서 다소 모호한 관념적 이미지로 제시됐던 현실의 남루함은 이후 더욱 구체화된 삶의 한 단면들로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추위와 씨름하는 대가족(「문씨네 가계 고뿔 걸린 문설주」), ‘달고나’와 어머니의 부름이 있는 어릴 적 골목길(「복사골」), 눅눅한 반지하방(「자귀나무가 있는 방」), 시장통의 노동(「樂원상가」) 등 고단한 삶의 풍경이 가득 담긴 시인의 시는 “기십만개보다 더 많은 줄거리”가 담긴 “꽃밥그릇”(「광화문 어디쯤에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붉은 지느러미 천막이 펄럭이는 리어카에서/노글노글한 반죽 치대는 부부/싱싱한 붕어를 물어올리고 있다/뱃속 가득, 통통하게 팥알 밴 것들/(…)/골목에 한 봉지씩 따듯한 물길이 튼다/가끔씩 손을 비비다가 서로의 손을 맞잡는/붕어빵 부부 손마디마다 입질로 달궈진 손끝이 빨갛다/고른 철망에 받쳐져 몸을 뒤척이는 참붕어,/골목으로 헤엄치기 위해 겨우내 산란중이다(「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부분)

이렇듯 탐미와 서정의 세계를 넘나드는 김윤이의 시집은 두 권의 시집을 동시에 읽는 듯한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각각의 면모는 이질적인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양쪽이 서로 길항과 조화로 하나의 매력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인데, 첫시집을 내놓는 시인이 전통적인 협화음과 현대적인 불협화음을 엮어 자신만의 음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오연경 「해설」). 우리가 그녀의 시를 눈여겨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시인이 또 어떤 놀라운 시의 맛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가 크다.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몇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서늘한 바람 뒤편/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백태처럼 달무리 지네/일순간 소낙비/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오르고/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트레이싱 페이퍼」 부분)

저자 소개

1976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졸업, 명지대학원 재학 중.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트레이싱 페이퍼」가 당선되어 등단.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이 있다.

목차

오렌지는 파랗다
꽃 필 자리
안구건조증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
공의 매혹
햇빛 속의 동공
트레이싱 페이퍼
미련
지상생활자의 수기
책도둑
자, 케이크 나눠드릴게요
어른의 맛
라라,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빨강머리 Anne
언덕 위의 집
개와 늑대의 시간에 빚은 길 끝에
걸음 멈추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
직소퍼즐
세상의 테, 달
아직도 당신에게는 철 지난 양광이거든
막돌 위의 저녁 햇살처럼
여인과 우유 단지
움
소나기밥
바다로, 발다로
나미비아에 당도했을까, 당신
문씨네 가계 고뿔 걸린 문설주
물렁물렁한 심장
치인의 사랑
그러다가, 드나들다
덕트 테이프
전선 위의 물방울들
복사골
성에꽃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울지 말아요 소리없이, 하얀 도화지는 하얀 도화지일 뿐이에요
광화문 어디쯤에서
꽃 필 자리
다시 나는,
꿈꾸는 식물
강박
푸른 방
가을 아욱국
만리동 미용실
토르소
수선되는 시간
깊은 방
고갱의 의자는 어디로 사라졌나
너무 빨리
섀도우복싱
자귀나무가 있는 방
욕 그리고 새는 날아간다
미기록종
외이도의 밤
게임의 법칙
비어(秘語)
아무 곳에도 없는 사람들
화장하는 남자
공(空)의 무게
조개
동티 나는 마을
저녁답
樂원상가
그린 발목
난기류
오후의 사진

해설 | 오연경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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