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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993774 / 683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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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 성혜령, 임솔아, 장희원, 정기현, 황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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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정유각집』 상·중·하 3책은 『북학의』(北學議, 안대회 옮김, 돌베개, 2003)를 제외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정유각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0년대에 이미 원문을 활자화하여 간행했고 이후 전집의 영인도 세 차례나 이루어졌지만, 소규모의 선집 외에 전작 번역은 이제껏 나온 적이 없다. 이번『정유각집』의 완역으로 진작에 이루어진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청장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함께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 『정유각집』 상·중·하 3책은 『북학의』(北學議, 안대회 옮김, 돌베개, 2003)를 제외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정유각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0년대에 이미 원문을 활자화하여 간행했고 이후 전집의 영인도 세 차례나 이루어졌지만, 소규모의 선집 외에 전작 번역은 이제껏 나온 적이 없다. 이번『정유각집』의 완역으로 진작에 이루어진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청장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함께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작 번역이 마무리된 셈이다. 북학파의 핵심, 박제가의 시문전집 최초 완역 최근 한국 고전학계의 중요한 화두는 단연 동아시아적 전망의 수립이다.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협소한 시각을 벗고, 중국과 조선과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교유와 그로 인한 세계관의 변화를 감지하려는 움직임이 자못 활발한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 속에서 탁월한 안목과 폭넓은 시야로 국제적 감각을 지녔던 박제가는 늘 화제의 중심에 위치해 왔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규장각 검서관 생활과 네 차례에 걸친 연행 체험을 통해 탁 트인 식견과 국제적 안목을 갖추었다. 특히 연행에서 중국 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나누고 그들의 발달한 문물을 직접 목도하면서, 당시 조선이 북벌의 원수로 지목했던 청나라가 결코 오랑캐가 아닌, 새로운 학문 사조와 서양 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임을 똑똑히 자각하였다.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북벌(北伐)의 강고한 이데올로기가 북학(北學)의 과감한 주장으로 돌아서는 데 있어 그의 저서 『북학의』(北學議)의 영향은 자못 절대적이었다. 박제가는 18세기 후반 조선과 청(淸)의 학술 및 민간 교류의 한 주역이었다. 적극적으로 청의 인물들과 교유하여 직간접으로 만나 사귄 이가 100명이 넘었고, 한족과 만족(滿族), 문인과 무인, 관료와 처사 및 외국인까지 교유의 폭도 광범위했다. 이러한 그의 교유는 선배인 담헌 홍대용의 수준을 훨씬 넘어, 후배인 김정희(金正喜), 이상적(李尙迪), 김석준(金奭準) 등에게로 이어졌다. 한중 지식인 교류사에서 박제가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박제가에게 외국인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였다. 국내에선 서얼이라 천대받았지만, 외국에선 그의 진가를 알아준 것이다. 박제가는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사회의 변화를 추동했던 북학파(北學派)의 핵심 인물이다. 박제가를 포함해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은 이른바 ‘백탑’(白塔) 주위에 모여 살며 동지적 연대 속에 학술·문예·사상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답보에 놓인 조선 지성계에 신선한 호흡을 불어넣었다. 『정유각집』 시집 5책에 실려 전하는 1,721수의 시와, 문집 5책 속의 123편의 산문은 실험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초정 박제가의 시문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1년에 원문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였고, 이후 1986년 여강출판사에서 『정유각전집』을 상하 2책으로 펴낸 바 있다. 또 199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일본과 미국 등 해외 도서관에 소장된 초정의 시문집을 엮어 『초정전서』 3책을 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집은 지금껏 완역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난해한 고사와 용사가 도처에 숨어 있어, 워낙 해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 박제가는 『북학의』의 저자로 알려졌을 뿐, 정작 그의 작품 세계 전모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번 『정유각집』의 완역을 계기로 북학파로 대변되는 연암그룹 내부의 동향과 당대 생동하는 지성사의 흐름을 더욱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궤적에 따른 인식 변화, 뜻을 같이한 이들 사이에 오간 우정과 교감, 연행이 계기가 된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구체화되는 자아의 각성, 유배지에서 역사와 맞대면하는 뜨거운 격정 등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의 문학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정유각집』을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지식인들의 교류사와 한중일 삼국 내에서의 우리 고전의 위상과 의미를 거시적 안목으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완역이 이루어짐으로써 박제가의 작품 세계 전모가 소개된 만큼, 이를 디딤돌 삼아 그의 학문과 사상 및 문예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새롭게 시작될 것을 기대해 본다. 키 작은 천재 문인, 초정 박제가 ― 북학파의 선구 초정 박제가의 생애와 당대 문인의 평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서얼이었다. 젊은 날의 자서전이라 할 「소전」(小傳)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이러하다.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孤高)한 사람만을 가려 더욱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자를 보면 일부러 더 멀리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과 맞는 경우가 드물어 언제나 가난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고명한 일에만 마음을 두고 세상일에는 무심하였으며, 사물의 명리(名理)를 종합하고 깊고 아득한 세계에 침잠하였다. 백세 이전의 사람들과 흉금을 트고, 그 뜻은 만 리를 넘어 날아다녔다.”(이 책 하권 「小傳」) 한마디로 가난하지만 고고한 선비임을 자처한 것이다. 스스로 묘사한 자신의 외모는 날카로운 성미와 예리한 안목을 지닌 비범함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권세 있는 사람을 멀리하고 고고한 이와 가까이 했다는 언급에서 불우한 처지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굴원의 『초사』(楚辭)를 아껴 호를 초정(楚亭)이라 했으니,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가 교유했던 중국의 문인 우촌(雨村) 이조원(李調元)은 그를 평하여, “그는 조선에서 문장이 매우 뛰어난 자이다. 그의 키는 작달막한데 굳세고 날카롭다. 재주와 정감이 매우 풍부하며, 위로 『이소』와 『문선』을 탐구하고, 곁가지로 백가(百家)의 정수를 모두 모았다. 그의 문장은 찬란한 별빛과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으며 용궁의 물과 같다”라고 했다(이 책 하권 「서문 2」). 한마디로 박제가는 예리한 성품에 글 솜씨가 뛰어난 키 작은 천재라는 평가다. 박제가가 가장 친하게 교유했던 이는 단연 형암(炯菴, 다른 호는 靑莊館) 이덕무(李德懋)였다. 서로 나눈 많은 편지글과 박제가의 문집에 등장하는 30여 수가 넘는 시들이 구구절절 논거를 들지 않아도 이들의 특별한 관계를 잘 말해 준다. 이덕무는 박제가에 대해 “젊은데도 불구하고 어른처럼 점잖습니다. 생각은 건전하고 심지가 굳으며 말은 명료합니다. 질박할 뿐 아니라 슬기가 뛰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수재입니다”라고 평가했다(『국역 청장관전서』, 간본 형암유고 7권, 「與朴在先書」). 박제가의 회인시(懷人詩)에서도 형암 이덕무는 단연 맨 앞이었으며, 서로의 허물을 스스럼없이 말해 줄 만큼 둘은 친밀했다. 이 두 사람의 끈끈함은 일차적으로 둘의 삶의 행적이 비슷한 데서 오는 동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같은 서얼 출신인 데다 서로 아주 가난했으며 또 동시에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이덕무보다 아홉 살 어렸지만, 이덕무를 스승이라 부르겠다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박제가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수제자였으며, 연암 역시 박제가의 재주를 인정하고 그를 매우 아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과정록』(過庭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에 따르면,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는 항상 연암을 따라 노닐며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제자들이 변증(辨證)하면 스승인 연암도
목차
일러두기
찾아보기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원제 찾아보기
시집 3
다시 규장각에 들어가 쓰다
뒤늦게 태호의 약속 장소에 달려가다
흰 수염을 뽑다가
거듭 운자를 써서 관심재 윤객에게 보이다
장평산의? 〈신장용마도〉에 부친 노래
하태상의 〈묵죽도〉에 부친 노래
〈노주설안도〉의 노래〔짧은 서문과 함께〕
『차원부설원기』를 읽고 4수
소안당에서 관심재와 함께 2수
대흥으로 가는 주계 나열을 전송하며 두보의 「송공소부」 운을 써서 3수
석양루에서 옛 생각에 젖어 감회를 적다. 이때 큰형님은 교외 서쪽 별장에 계셨는데, 앞 시의 운을 써서 삼가 지어 부치다
〈춘원미인도〉에 쓰다
〈송지발합도〉에 쓰다
차운하여 산으로 돌아가는 현천 원중거를 전송하다
차운하다. 춘방 송전과 초계문신 이현도, 송화 남인로의 방문을 받고
윤5월 10일에 대보단에서 어가를 모시고 짓다
북영에서 이호의 시에 차운하다 2수
지각에서 더위를 피하며
그림에 부치다
어린아이를 노래하다
명을 받들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며 배오개 외영에서 자면서 짓다
이영에서 밤에 짓다
최휘조의 은거를 찾아
현천자 원중거가 숙직 중 지은 시에 차운하다
용만에서 비에 막혀, 학산부사의 시에 차운하다
7월 6일, 세하를 건너 관묘참에 묵다
조양사에서
조양에서 슬퍼하며
밤에 영감사에서 유득공·이희경과 함께 앉아서
열하에서 시랑 철보가 보내온 시에 차운하다
안남국 이부상서 호택후 반휘익·공부상서 무휘진에게 주다 2수
반휘익 등에게 차운해 부사 서호수를 대신하여 짓다
피서산장에서 황제가 베푼 연회에 참여하다. 앞 시의 운을 써서
고북구 가는 길에
저물녘에 밀운에 닿다
한림관에서 선산 장문도·한림서길사 개자 웅방수·수찬 탁암 석온옥·단림 장상지와 게를 먹고 함께 짓다
양봉 나빙이 매화를 그린 부채에 시를 써서 가정으로 돌아가는 수재 전동벽에게 주다
백암 오조가 그린 〈석호과경도〉 두루마리에 쓰다
나빙의 묵죽과 묵란에 쓰다
나빙의 아내 방씨 완의의 『반격시집』에 쓰다
선산 길사와 이별하며
단림서상을 위하여 그 대인의 설동시에 차운하였다. 설동은 호북에 있는데 임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천하에서 이에 화답한 자가 천 명이 넘는다.
선산이 글씨를 써서 보내 준 부채에 적다
초휴 왕학호가 보내 준 그림 부채에 적다
예부상서 효람 기윤이 보내 준 부채의 시에 차운하다
〔부〕 원운
한림 균곡 신종익의 시에 차운하여 준 한 수
양봉 나빙의 〈귀취도〉 두루마리에 쓰다
한림 웅방수·효렴 방훈 형제와 헤어지며 주다 2수
사천으로 돌아가는 장선산에게 주다
이별 후에 양봉 나빙에게 부치다
평계 왕수재에게 보내다. 평계는 일면식이 없는 나를 위해 내 이름과 자를 새긴 작은 도장 두 개를 보내 주고, 내 글씨를 쓴 부채를 요구하였다. 뒤에 나양봉의 화실에서 교분을 맺었다.
계문의 안개에 잠긴 나무를 노래하다
계주에서
중양절에 사하역에서
9월 10일 청묘에서 성인을 알현하다
청풍대에서 학산부사 서호수의 시에 차운하다
우북평에서
징해루에서 학산부사의 시에 차운하여
강녀묘에서 학산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명나라 사람 왕치중의 시비에 차운하여
산해관을 나서며 느낌을 적다
유관에서 고향을 그리며
소흑산에서 9월 22일에
조씨 집안의 패루
북진묘에서 의무려산을 바라보며 3수
첨수참 2수
심양잡절 7수
요양
봉성에 돌아와서 내각의 여러 동료에게 부치다
책문에 머물며
탕참에서 묵다
우촌 이조원에게 부치다
시랑 옹방강에게 부치다
추사 강덕량에게 부치다
지산 송보순에게 부치다
헤어지며 주다〔짧은 서문이 있다〕
패수 물가에서 지은 절구
산수를 지나다가 약산 동대를 올려다보며 강산 이서구에게 부치다
가산의 시 쓰는 기생 육아가 시를 청하므로 붓을 내달리다
〔부〕 정유 선생께 화답하다: 채염림
용만관에서 대아 김기무와 헤어지며 주다
용만에 머물면서 육아가 보내온 시에 차운하다
용만관에서 밤에 짓다
구련성에서 자며
책문에서 동지를 맞아
통원보
참봉 자범 이기원의 도중 시에 차운하다
연산관
동지 시에 다시 차운하다
두 고개의 노래
낭자산에서 새벽에 출발하며
이도정에서
동지 시에 세 번째 차운하여
동지 시에 네 번째 차운하여
영원주에서 동지 시에 다섯 번째 차운하여
여양역에서 새벽에 떠나며 동지 시에 여섯 번째 차운하여
동관역 가는 길 근방에 일출을 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중전소에서
유관에서
영평부에서
위제서의 일을 읊다
사류하에서 회포를 적다
진자점에서
자범 이기원의 고수점 시에 차운하여
조림장
통주
방균점에서 벽 위에 쓰인 시에 차운하다
자범 이기원의 「요야」 시에 화운하다
담계 옹방강의 『낙엽시첩』 시에 차운하다
빈곡 증욱의 『서계어은권』에 적다
선산 장문도의 〈설중광음도〉에 적다
최경이의 『죽루도권』에 적다
정월 초이레 양봉 나빙의 생일에
경술년(1790) 제야에
양화원 집에서
운미 팽원서에게 드리다
옥하관 절구
사하역에서 새벽에 출발하다
창려현
영수사 온천에서
송산
요서잡기
자범 이기원이 내가 뒤에 이른 것을 놀림에 답하다
북진묘에서 북경의 여러 사람에게 부치다
이제묘
도화동을 방문하려다가 큰 바람을 만나 가지 못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짓다
옥전에서
여양역에서 새벽에 출발하다
행장이 부채에 쓴 시에 화답하여
회인시, 심여 장사전을 흉내 내다
각리 김의현이 옥류의 승경을 얘기하기에, 그의 시에 차운하였다
그림 부채에 쓰다
신해년 7월에 이덕무·유득공과 함께 『국조병사』를 찬집하라는 명을 받들어 비성에 서국을 열었다. 이때 성대중이 마침 숙직 중이었는데, 홍원섭·박지원·옥류 등 여러 분이 우연히 모였다
청성 성대중과 함께 비각에 모이다 4수
두 손님이 찾아와 소나무 아래에서 백화를 집어 들고
다음 날 객이 어애송 시를 보내왔기에, 다시 앞의 시에 차운하여
북영에서
연암 선생께서 율시 지으심을 축하하여
현천 원중거 만사
영평 선산으로 가는 경산 이한진을 전송하며壟
김석손이 매화 시를 구하다
청성 시에 차운하다
안의현감으로 가는 연암을 전송하며
장씨삼세정려비의 판각 뒤에 적다
호서 지역으로 돌아가는 담수를 전송하며
김화순의 시권에 제하다
동자 서묘술의 시화권에 적다
어가를 모시고 세심대에 가서 삼가 어제시에 화운하다
눈이 어두워져 관직을 사임하며 동료들에게 보이다
성시전도, 임금의 령에 응하여
금강산 일만이천 봉, 두 번째 시험에서 임금의 령에 응하여
유하정 노래, 세 번째 시험에서 임금의 령에 응하여
양지 이홍상 만시
초가을 병중의 생각
입춘에 부여 관사에서
늦봄에 창고의 다락에서
비로 인해 조창에 묵으며 홍산부사에게 보이다
자온대의 창사에서
관아 숙소에서 무송기인에게 삼가 보이다
거듭 앞 시의 운을 써서 무송자에게 보이다
제목 잃은 시
이덕무의 무덤을 지나며
몽뢰정 10수
시집 4
속회인시 18수
무림수죽재 만시 3수
관재 서상수의 제삿날 3수
가운 서유년 만시
밤에 찾아온 서수부와 정자청을 머물게 하고 술을 마시다
이욱수가 새 검서관으로 들어왔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 숙직하다 2수
화성에서 진찬하는 날, 임금 시에 받들어 차운하다
임금의 장대 시에 받들어 차운하다
어가를 모시고 북산 세심대에서 임금께서 지으신 시에 삼가 차운하다
꽃구경하고 낚시하며, 임금께서 지으신 시에 삼가 차운하다
제목 잃은 시
북둔의 복사꽃 아래에서 운자를 정하고, 영재 유득공 등과 함께 짓다
별군직 이석구가 시를 구함에 장난으로 응하다
혜경궁의 회갑 탄신에 화답하여 짓다
전하께서는 말을 펴면 문장을 이루셨다. 지난번에는 시인 신광하를 강화통판에 보임하시고는 불러 책지 4언 12구를 받아 적게 하셨는데 자연스레 운에 맞았다. 여러 신하에게 화답하여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초계문신 여섯 사람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나부터 차례대로 고시를 지었는데, 그 운자를 차운하였다
나귀 탄 손님에게 주다
화성어제에 삼가 차운하다 5수
임금님께서 중화척을 나누어 주며 지으신 시에 삼가 차운하다
유본예가 취성당의 운으로 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