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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993767 / 591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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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정유각집』 상·중·하 3책은 『북학의』(北學議, 안대회 옮김, 돌베개, 2003)를 제외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정유각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0년대에 이미 원문을 활자화하여 간행했고 이후 전집의 영인도 세 차례나 이루어졌지만, 소규모의 선집 외에 전작 번역은 이제껏 나온 적이 없다. 이번『정유각집』의 완역으로 진작에 이루어진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청장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함께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 『정유각집』 상·중·하 3책은 『북학의』(北學議, 안대회 옮김, 돌베개, 2003)를 제외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전체를 완역한 것이다. 『정유각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0년대에 이미 원문을 활자화하여 간행했고 이후 전집의 영인도 세 차례나 이루어졌지만, 소규모의 선집 외에 전작 번역은 이제껏 나온 적이 없다. 이번『정유각집』의 완역으로 진작에 이루어진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청장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함께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작 번역이 마무리된 셈이다. 북학파의 핵심, 박제가의 시문전집 최초 완역 최근 한국 고전학계의 중요한 화두는 단연 동아시아적 전망의 수립이다.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협소한 시각을 벗고, 중국과 조선과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교유와 그로 인한 세계관의 변화를 감지하려는 움직임이 자못 활발한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 속에서 탁월한 안목과 폭넓은 시야로 국제적 감각을 지녔던 박제가는 늘 화제의 중심에 위치해 왔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규장각 검서관 생활과 네 차례에 걸친 연행 체험을 통해 탁 트인 식견과 국제적 안목을 갖추었다. 특히 연행에서 중국 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나누고 그들의 발달한 문물을 직접 목도하면서, 당시 조선이 북벌의 원수로 지목했던 청나라가 결코 오랑캐가 아닌, 새로운 학문 사조와 서양 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임을 똑똑히 자각하였다.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북벌(北伐)의 강고한 이데올로기가 북학(北學)의 과감한 주장으로 돌아서는 데 있어 그의 저서 『북학의』(北學議)의 영향은 자못 절대적이었다. 박제가는 18세기 후반 조선과 청(淸)의 학술 및 민간 교류의 한 주역이었다. 적극적으로 청의 인물들과 교유하여 직간접으로 만나 사귄 이가 100명이 넘었고, 한족과 만족(滿族), 문인과 무인, 관료와 처사 및 외국인까지 교유의 폭도 광범위했다. 이러한 그의 교유는 선배인 담헌 홍대용의 수준을 훨씬 넘어, 후배인 김정희(金正喜), 이상적(李尙迪), 김석준(金奭準) 등에게로 이어졌다. 한중 지식인 교류사에서 박제가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박제가에게 외국인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였다. 국내에선 서얼이라 천대받았지만, 외국에선 그의 진가를 알아준 것이다. 박제가는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사회의 변화를 추동했던 북학파(北學派)의 핵심 인물이다. 박제가를 포함해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은 이른바 ‘백탑’(白塔) 주위에 모여 살며 동지적 연대 속에 학술·문예·사상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답보에 놓인 조선 지성계에 신선한 호흡을 불어넣었다. 『정유각집』 시집 5책에 실려 전하는 1,721수의 시와, 문집 5책 속의 123편의 산문은 실험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초정 박제가의 시문집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1년에 원문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였고, 이후 1986년 여강출판사에서 『정유각전집』을 상하 2책으로 펴낸 바 있다. 또 199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일본과 미국 등 해외 도서관에 소장된 초정의 시문집을 엮어 『초정전서』 3책을 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집은 지금껏 완역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난해한 고사와 용사가 도처에 숨어 있어, 워낙 해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 박제가는 『북학의』의 저자로 알려졌을 뿐, 정작 그의 작품 세계 전모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번 『정유각집』의 완역을 계기로 북학파로 대변되는 연암그룹 내부의 동향과 당대 생동하는 지성사의 흐름을 더욱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궤적에 따른 인식 변화, 뜻을 같이한 이들 사이에 오간 우정과 교감, 연행이 계기가 된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구체화되는 자아의 각성, 유배지에서 역사와 맞대면하는 뜨거운 격정 등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의 문학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정유각집』을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지식인들의 교류사와 한중일 삼국 내에서의 우리 고전의 위상과 의미를 거시적 안목으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완역이 이루어짐으로써 박제가의 작품 세계 전모가 소개된 만큼, 이를 디딤돌 삼아 그의 학문과 사상 및 문예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새롭게 시작될 것을 기대해 본다. 키 작은 천재 문인, 초정 박제가 ― 북학파의 선구 초정 박제가의 생애와 당대 문인의 평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서얼이었다. 젊은 날의 자서전이라 할 「소전」(小傳)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이러하다.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孤高)한 사람만을 가려 더욱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자를 보면 일부러 더 멀리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과 맞는 경우가 드물어 언제나 가난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고명한 일에만 마음을 두고 세상일에는 무심하였으며, 사물의 명리(名理)를 종합하고 깊고 아득한 세계에 침잠하였다. 백세 이전의 사람들과 흉금을 트고, 그 뜻은 만 리를 넘어 날아다녔다.”(이 책 하권 「小傳」) 한마디로 가난하지만 고고한 선비임을 자처한 것이다. 스스로 묘사한 자신의 외모는 날카로운 성미와 예리한 안목을 지닌 비범함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권세 있는 사람을 멀리하고 고고한 이와 가까이 했다는 언급에서 불우한 처지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굴원의 『초사』(楚辭)를 아껴 호를 초정(楚亭)이라 했으니,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가 교유했던 중국의 문인 우촌(雨村) 이조원(李調元)은 그를 평하여, “그는 조선에서 문장이 매우 뛰어난 자이다. 그의 키는 작달막한데 굳세고 날카롭다. 재주와 정감이 매우 풍부하며, 위로 『이소』와 『문선』을 탐구하고, 곁가지로 백가(百家)의 정수를 모두 모았다. 그의 문장은 찬란한 별빛과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으며 용궁의 물과 같다”라고 했다(이 책 하권 「서문 2」). 한마디로 박제가는 예리한 성품에 글 솜씨가 뛰어난 키 작은 천재라는 평가다. 박제가가 가장 친하게 교유했던 이는 단연 형암(炯菴, 다른 호는 靑莊館) 이덕무(李德懋)였다. 서로 나눈 많은 편지글과 박제가의 문집에 등장하는 30여 수가 넘는 시들이 구구절절 논거를 들지 않아도 이들의 특별한 관계를 잘 말해 준다. 이덕무는 박제가에 대해 “젊은데도 불구하고 어른처럼 점잖습니다. 생각은 건전하고 심지가 굳으며 말은 명료합니다. 질박할 뿐 아니라 슬기가 뛰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수재입니다”라고 평가했다(『국역 청장관전서』, 간본 형암유고 7권, 「與朴在先書」). 박제가의 회인시(懷人詩)에서도 형암 이덕무는 단연 맨 앞이었으며, 서로의 허물을 스스럼없이 말해 줄 만큼 둘은 친밀했다. 이 두 사람의 끈끈함은 일차적으로 둘의 삶의 행적이 비슷한 데서 오는 동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같은 서얼 출신인 데다 서로 아주 가난했으며 또 동시에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이덕무보다 아홉 살 어렸지만, 이덕무를 스승이라 부르겠다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박제가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수제자였으며, 연암 역시 박제가의 재주를 인정하고 그를 매우 아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과정록』(過庭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에 따르면,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는 항상 연암을 따라 노닐며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제자들이 변증(辨證)하면 스승인 연암도
목차
책머리에
일러두기
해제
박제가 연보
찾아보기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원제 찾아보기
정유각집 서문―이덕무
정유각집 서문―반정균
시집 1
봉선사에서
필계의 작은 모임
연못 가
헤어지며
종이 연 노래
탄식 4수
매화 지고 달은 휘영청
산정에서 이유동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접시꽃
시냇가 집의 가을 정경
회포를 적다
세검정에서 헤어지고
어느덧
섣달그믐 밤
종이 연
대보름 다음 날 손님을 보내며
서쪽 교외 이른 걸음
공덕리
남이청의 서실에서 묵다 2수
작은 누각
변소에서
버드나무 노래. 안악으로 가는 자형 임공을 전송하며 3수
비 갠 뒤
뜰에 누워
천우각에서 무관 이덕무와 함께 선(蟬) 자를 운자로 얻다
몽답정
읍청정 5수
충훈부
9일 이덕무와 세심정 아래 배를 띄우다 5수
관재 서상수의 동쪽 집에서 이덕무와 유득공 등 여러 사람과 모였다. 왼쪽 산기슭에 보덕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는데 중이 십여 명이었다. 손님 중에 퉁소 부는 황생이 있었다.
밤에 필계에 앉아 임홍상 의지의 시에 차운하다
삼소헌의 눈 오는 밤
저물녘 형암을 찾아가다
밤에 유연옥을 찾아가다 6수〔짧은 서문과 함께〕
〔부〕 착암의 시 4수
청장관의 벽에 쓰다
서상수를 위해 지은 입춘시 2수
영변의 못가 정자에 쓰다
약산에서 저물녘 돌아오다
묘향산 보현사
무릉폭포
밤에 연광정에 오르다
백련봉에서 이른 아침 눈을 구경하다
관재가 새로 이사하여
태상시의 서쪽 정원
육각봉에서 이덕무의 상화시에 차운하다
길가의 초당에서 거문고 소리를 듣고
북쪽 병영
일식〔짧은 서문과 함께〕
비 때문에 소헌에 머물다
형암에게 부치다
가을 생각
장인 이관상 공을 슬퍼하며 5수
평양에 가는 이덕무를 전송하며
봄날 심원에 모여 6수
경회루의 옛 연못
동교에서
무더위
좌소산인을 방문하다
가을 서재에서 빗소리를 듣다
동래 수영으로 떠나는 백동수와 헤어지며 주다
세검정 물가에서 석파가 그림 그리던 곳에 걸터앉아
북한산에서
문수문을 넘어
부왕사에서 밤에 이유동을 만나 두보 시에 차운하다
백운대 꼭대기에 오르며 3수
석파도인과 남한산성의 개원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엄고개의 선친 묘소에 들렀다가 저물녘에 도착했다
남한산성에서 석파와 함께
동림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법화암
9월 9일
달여울 잡절 4수
화개동에서 혜풍의 시에 차운하다 3수
갓 개어. 감재의 시에 차운하다
이희경의 십삼재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홍대용의 모정에서 원운에 차운하다 2수
자형 임은수가 이인역승이 되어 떠나며 시를 청하다
이희경을 방문하다
진재 김윤겸의 북방 유람을 전송하며 4수
홍대용·박지원·이덕무 등과 함께 승가사에 올랐다. 이덕무가 먼저 돌아가기에 가는 길에 보통정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북한산을 거쳐 조계에서 놀다가 다시 서상수와 이덕무를 만나 묵으며 기행시를 지었다.
저물녘 이덕무가 왔는데 마침 비바람이 쳐서 머물게 하고 함께 자며 지었다 3수
청수옥에서 밤중에 앉아 짓다 6수
다시 차운하여 청수옥에 부치다 6수
새벽에 동작 나루를 건너다
진위에서
소사에서 2수
여관 벽에 쓰다
온양에서 돌아오며 2수
진수정을 넘어가며
저물녘에야 유천의 숙소에 이르다
갈산 여관의 새벽 비
아침에 내린 눈
집에서 지은 절구 3수
금강산에 들려고 금수정에 올랐는데 동행이 오지 않아 기다리며
팔담에서
동해에 임하여
이덕무가 밀랍을 녹여 매화를 만들고는 윤회화라 이름 붙였다
상복을 벗은 뒤 이소 어른을 찾아뵈었다. 굳이 시로 나를 권면하시며 “그대가 글 짓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오래다”라 하시고, 그 아들 이희경과 함께 자게 하셨다 4수
이희경에게 차운하다
밤에 서유년의 셋집을 찾아가 글을 읽는데, 이덕무와 유득공이 차례로 왔다 2수
인지의 서재에서
관재에서 밤에 술을 마시며
이희경의 서루에서
이유동의 시에 차운하여
밤에 앉아 회포를 적어 관헌에게 부쳐 보이다
빗속에
율원장에서 이유일을 만나다
저물녘
소석산방에 부치다 5수
화중 이광섭의 광주 거처에 쓰다
처사 이광석의 심계초당에서 이틀을 묵다 9수
광흥창 아래 배에서 자고 이경에 조수를 타고 운양나루에 이르다
배를 타고 가며 8수
저녁에 농가를 찾아
중양절에 두보 시에 차운하다
두시에 차운하여 이의암에게 보이다 6수
추수를 보며
황정평을 벗어나며
저물녘 사천에 이르러 3수
그림에 부치다
밤에 사천의 집에 들어가 이덕무와 함께 밤새도록 술 마시고 놀았다. 새벽에 큰 눈이 내렸다 2수
달빛 밟고 소위정을 방문하다 2수
밤중에 허명애·이존암과 모여
효효재 김용겸의 잡영에 대한 화답 8수
사재 김문목공의 연시시 운으로
장선을 곡하며
율교에서
중유 남덕린을 애도하며 2수
설옹 유후의 시에 차운하다
초여름
이여강이 청산현으로 근친 가면서 시를 구하기에
술회 4수
기하 유공께서 연경에서 돌아오셨기에 그 협실에 쓰다
원옹의 서루에서 비에 막혀
임하상이 두보의 봉선사 시에 차운한 것에 화답하여
기하실에 앉아
하교의 처가에서 빗속에 짓다
이경지에게 주다
기하실이 소장한 운룡산인의 작은 초상화에 쓰다
홍대용이 소장한 반정균의 묵적에 쓰다
병중에 우촌 선생을 그리며
6월 13일 낙목암에 모여
백문에서 박지원을 만나다
송석운룡도가. 연암을 위해 장난삼아 짓다
유안재 이보천 공의 만사 3수
풍정원의 뜻을 본뜨다 3수
저물어 사천 이희경을 방문하다
관운장의 사당
못가에서
정현목 군을 애도하며 3수
곽담원이 도산에 들어갔단 말을 듣고 7수
단좌헌에 제하다
연암 선생께
중양일에 심계처사가 성에 들었고, 다음 날은 형암이 자기 아버님을 모시고 그와 함께 나왔다. 내가 이를 기쁜 마음으로 부러워하여 광주 걸음을 하게 되었다 8수
심계초당에 쓰다 6언 4수
통진 가는 길에 2수
사립문
농가에서 홀로 앉아
벼 베기 풍경
거미줄
저물녘 이수당에 이르다
가을 들
감회 2수
벗을 그리며 2수
이수당의 저녁 생각 2수
배 타고 돌아오며
행주에 정박하다
영변의 명생에게 3수
현천 원중거가 장원서에서 숙직하다가 효효재 김용겸 공과 이덕무를 만나 운자를 나누어 장 자를 얻었다
정월 초이레 입춘에 이서구와 함께 시를 짓다
밤에 이서구의 집에서 자며 10수
이덕무의 철각도를 노래하다, 이서구의 시에 차운하여
〔부〕 이서구의 원운
〔부〕 이덕무의 차운
〔부〕 유득공의 차운
비 때문에 청장관에 머물면서 유득공과 이서구에게 보이다
봄추위
다시 앞 시의 운으로 지어서 이덕무에게 부치다 3수
새벽의 작별
난타선생의 「원석」에 차운하여 중목에게 화답하다
정월 보름밤 관재에 모여 원시에 차운하다 2수
호동에 묵으며 사간 김복휴에게 드리다
순도의 집을 찾아 책을 읽다가 매화시를 보다
『옥사집』의 시에 차운하다
차운하여 소헌의 영남시권에 쓰다
미루에서 소헌 등 여러 사람과 밤중에 모여서 짓다 2수
장난삼아 왕어양의 세모회인시 60수를 본떠 짓다〔짧은 서문과 함께〕
홍제원에서 말 타고 전송하는 사람 서른 명에게 시를 주어 헤어지다
말에 오르면서 운자를 정해 말에서 내릴 때 시를 짓되 어기는 사람은 벌을 받기로 서장관과 약속하고, 상사와 이덕무에게도 알려 파주에서 시작하였다
개성에 이르다
청석동
총수산
서흥
평양
밤중에 아영에 이르다
기녀에게
보통문을 나서며 지은 도사의 시에 차운하다
백상루에 올라
가산에서
용천의 양책관에서 짓다 절구 5수
의주에서 화중에게 주다
서장관께 드림
노숙하며
총수에서
마천령. 속명은 회령이다
요양주에서 짓다
김과예의 시에 차운하다
담 자 운을 써서 김과예에게 주다
상사의 시를 차운하여 신민둔의 약방 주인에게 주다
태자하
대황기보에서 큰바람을 만나다
실제
북진묘 2수
송산보. 여기는 유정이 싸우던 곳이다. 이곳부터는 경관이 많다.
동노하에서 포자경에게 주다
시집 2
가을의 느낌. 아내에게
시골집에서 번민을 풀다
연경으로 가는 부사 윤방을 전송하며 5수
새벽에 앉아 회포를 쓰다 7수
은수 형이 심양에서 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