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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2490238 / 664쪽 152 x 223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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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자치통감 (삼화) [27]
출판사 리뷰
자치통감이 명저인 이유
첫째, 간략하지만 빠뜨림 없이 과거 역사 서적을 정리하여 새로운 역사서술 방향을 제시했다.
둘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마치 하나의 역서 소설처럼 기술했다.
셋째,‘영원한 인생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이에게 교훈을 전해준다.
“상감께서 경회루에 직접 나가시어 합격자 네 명을 불러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계몽(啓蒙)》과《중용(中庸)》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최자빈(崔自賓)과 이맹현(李孟賢)은 이 두 책을 두루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이《자치통감》을 강론하게 하고서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나라시대에 고조(高祖)와 항우(項羽) 가운데 누가 더 올바르고 위대하였는가? 하니 최자빈은 항우가 정대(正大)하다고 하였고, 이맹현은 한 고조가 더 정대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세종은 이맹현을 으뜸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기록 중에서
\u003d 자치통감은 어떤 책인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쓴 편년체(編年體) 통사(通史)이다.《자치통감》이라는 말을 해석한다면‘정치에 자료가 되는 통시대적(通時代的)으로 거울이 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송(宋)의 영종(英宗)이 붙여주었다. 처음에 사마광이《통지(通志)》라는 이름으로 8권 분량의 역사저술을 지어서 영종에게 바쳤는데, 영종이《자치통감》이라는 서명을 하사(下賜)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위열왕이 즉위하는 해부터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중간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사마광은 송대에 제왕 노릇을 한 일이 없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으로까지 존경되었던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자치통감》은 공자가 써서 경전(經典)이 된《춘추(春秋)》가 끝나는 시기를 이어 받아서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는《춘추》에서 다루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는 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다음 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의《춘추》가 나온 이후 한나라 때의 사마천(司馬遷)이《사기(史記)》를 썼다. 그런데 이《사기》는 공자가 썼던 춘추시대를 다시 썼다. 사마천이 겉으로 공자를 존중한다고 말하였고 일정 범위 안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를 쓰는 방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공자가 쓴 시대도 자신이 다시 썼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자가《춘추》를 편년체, 즉 연도순으로 기록하였던 것에 비하여, 그는 사람 중심의 기전체(紀傳體)로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당시 역사책이란 모름지기《사기》처럼 써야하는 것으로 인식 되게 한다. 그래서 역사책으로 인정받던 공자의《춘추》가 사마천의《사기》가 나타난 이후부터는 한층 더 높은 지위라고 볼 수 있는‘경서(經書)’가 되었는데, 역사책이라는 범주에서 본다면, 이는 사마천이 공자를 역사가의 대열에서 쫓아낸 셈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사기》는 막강하였다. 그 후로는 하나의 왕조가‘올바른 역사책’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한 역사책인 정사(正史)는 반드시《사기》처럼‘기전체’로 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송대(宋代)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마광은 역사책을 쓰면서 사마천 이후 거의 1100년간이나 지속되어온 기전체의 역사책을 쓰지 않고, 공자가 채용한 편년체로 이《자치통감》을 썼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공자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공자가 썼던 부분을 다시 썼던 것처럼, 사마광도 사마천 이후에 많은 역사가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썼던 기전체의 정사(正史)에서 다룬 부분을 이《자치통감》에서 다시 썼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은 공자의《춘추》를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의미를 찾는다면,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그가 살고 있던 당시에 불고 있던 이른 바‘개혁’바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사마광이 살고 있던 시기는 송나라가 서기 960년에 건국된 이후 근 100년쯤 지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북방에 있는 요(遼)나라, 서방에 있던 서하(西夏)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이때 전쟁지역으로부터 떨어져있던 양자강 유역은 점차 개발되었고, 그 경제력에 의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방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안석(王安石)이었고, 그가 이른바‘신법(新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그동안 정권을 잡고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역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마광은 그 개혁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참으로 좋고 시원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는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혼란을 막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기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역사에서 찾아서 대고 싶었다. 결국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이를 웅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마광은 신종이 죽은 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잠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1086년에 죽는다. 이 해에 신법을 주창하였던 왕안석도 죽었지만, 그 후 북송의 정치적 실권은 개혁을 내세우는 신법당(新法黨)에게로 돌아가고, 그들에 의하여 정권은 농락되었다. 개혁적 주장을 하는 신법당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송나라가 부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금(金)나라에게 황하유역을 내주었고, 황제도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리고 강남지방에서 서기 1126년에 겨우 송 왕조를 재건하는 나약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 불과 사마광과 왕안석이 죽은 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은 신법당의 급진적 개혁조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점진적 개선을 주장한 사마광이 쓴 이《자치통감》의 내용은 현실적으로는 많은 귀감(龜鑑)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자《자치통감》을 절록한 보급형의 저서가 나오게 된다.
《자치통감》294권을 50권으로 줄여서 만든 강지(江贄)의《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와 59권으로 만든 주희(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이 그것권이다. 이러한 축약본들은 비교적 널리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남송조차도 150년쯤 지난 1279년에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마는데, 이때의 호삼성(胡三省)이 스스로 송(宋)나라의 유민(遺民)을 자처하면서《자치통감》에 자세한 주를 달아 보다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주석서를 서술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사마광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비록 보수파라고 하여 공격을 받았고, 개혁파인 왕안석의 신법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계속되는 중국 민족의 수모의 역사 속에서 살던 선각자들 예컨대 강지와 주희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의 보급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몽골족에게 중국 전체를 내준 원대에는 호삼성이 망해버린 송 왕조를 슬퍼하면서 이 책에 주를 달았을 만큼 이 책은 정말로 가치 있는‘정치교과서’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자치통감》이 갖는 정치교과서적 의미는 잘 인식되었다. 《자치통감》은 중국에서 출간하자 곧 고려로 전해져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이 책을 참고로 하였다. 고려 말에는 《통감》을 직접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하여 읽게 하였다. 다시 세종대에는 《자치통감》을 보다 잘 읽을 수 있도록 훈의(訓義)를 달아서《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라는 책이 저작되었고 또한 국력을 기울여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던 일이 있다.
\u003d 어떻게 번역했나
번역에는 여러 기법이 있겠지만,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하다.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지 못할 용어인 경우에 비슷한 현대어로 바꾼다면 원전의 맛이 살지 않고, 그 용어를 그대로 쓰면 독자들이 생경하게 느끼는 두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가 관건이다.
《자치통감》의 번역에서는 송대 고문부흥운동기의 저작이기 때문에 원전에서 보인 우아한 문장의 멋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좀 낯선 단어는 역사용어의 교육이라는 점에서 살려 두고 대신 각주로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방대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국지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여 이를 현재 지명으로 괄호 속에 처리하여 지도 한 장만 가지고 보면 생동감 있게 사건의 전개와 그 지리적 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 간지로 날짜를 표시하였지만 우리가 익히 쓰는 아라비아 숫자로 괄호 속에 밝혀놓았으며, 때로는 간지로 보아 날짜로 계산하기 불가능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간지의 오자(誤字)가 없는지를 살펴서 필사과정에서 생길 수 있었던 오자, 예컨대 을(乙)과 기(己), 술(戌)과 진(辰), 오(午)와 자(子)를 면밀히 검토하여 고쳐서 날짜를 밝히고 각주로 설명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잘못 읽히고 있는 한자음, 예컨대‘견(甄)’이나‘제(祭)’를 사람의 성인 경우에 호삼성의 음주를 참고로 하여‘진’과‘채’로 읽도록 하였다. 또한 성(城)을 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에도 원문에서는 상황에 따라‘하(下)’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극(克)’,‘입(入)’,‘첩(捷)’,‘함(陷)’,‘도(屠)’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서의 특성상 우리말로 옮길 때 간결한 단어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함의를 길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우리 귀에 익숙한 낱말인‘승리하다’라고만 표현한다면 원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이 책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의 저작이어서 문장은 우아했고, 한 글자 한 글자에 그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니며, 헛되이 쓰인 글자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끝까지 원문의‘맛’을 살려 보려는 욕심을 놓지 않으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짧은 전성기에 이어 도래한 갈등과 분열의 시대
자치통감 완간 대장정에서 이번에는 당시대 8책 중 지난 1월의 당시대Ⅰ에 이어 당Ⅱ, Ⅲ, Ⅳ, Ⅴ가 나왔다. 이들 책은 통일지향적인 중앙정부의 끊임없는 통일지향적인 노력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끊임없이 이에 반발하는 장강과 산동지역의 대결이라는 분열지향적인 측면을 동시에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대단히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당(唐)시대 Ⅱ, Ⅲ, Ⅳ, Ⅴ
이번에 출간 된 《자치통감》 21, 22, 23, 24(당Ⅱ, Ⅲ, Ⅳ, Ⅴ)는 시대적으로는 당 태종 만년에서부터 그 아들인 고종과 측천무후, 그리고 현종과 그 후의 숙종, 대종, 덕종까지를 아우르는, 즉 637년부터 794년까지 157년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당 300년의 역사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현무문의 사건을 거치면서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은, 보통의 동양사에서 왕조의 모범으로 삼으려 한, 소위‘정관의 치(貞觀之治)’라 일컬어지는 부흥기를 연다. 안으로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균전제(均田制), 조용조법(租庸調法), 부병제, 과거제의 실시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또한 부흥되었던 것이다.
그런 태종은 만년인 645년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입조하는 것을 막고 있으므로 도와달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고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자치통감》에서는 천개소문으로 기록)을 벌한다는 구실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이 1차 고구려원정은 안시성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지 못한데다가 마침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실패한다. 이후 태종은 계속하여 고구려 원정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실행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쉰한 살의 나이로 죽음으로써 고구려 원정은 중지된다.
이후 당나라는 황태자 이치(李治)가 고종으로 즉위하였으나 궁녀 출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황후가 되면서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다 측천무후는 690년에 예순일곱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 무주혁명(武周革命)을 일으킨다.
이어 나당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 수 양제와 당 태종이 가졌던 한반도로의 진출을 꾀하게 되는데, 결국 이 원정을 통해 국력 소모가 심해져서 결국 당은 고구려 침입 이후 경제난과 혼란이 빠지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구 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등 강력한 통치를 일삼던 측천무후의 반세기에 걸친 통치도 측천무후의 노령에 따른 병으로 인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재상인 장간지(張柬之)의 쿠데타로 측천무후는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고 측천무후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던 중종이 복위한다. 그러나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던 위황후는 측근들을 시켜 독이 든 만두를 먹여 중종을 시해한다.
이후 위황후 일족들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륭기(李隆基)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씨 일파를 토벌하고 즉위한다. 이륭기가 바로‘정관의 치’를 이어 당의 정치와 문화를 훌륭하게 꽃피운‘개원의 치(開元之治)’를 이룬‘현종’이다.
그러나 현종의 정치도 재위기간이 길어지고 재정이 풍부해지자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며느리(열여덟 번째 아들인 壽王 李瑁의 부인)인 양귀비(楊貴妃)에 빠진다. 정치는 이림보(李林甫)에 맡겨 뒷전으로 미뤄놓고 현종은 양귀비와의 유흥에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로 인해 당 왕조는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 가운데 양귀비의 육촌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권력을 얻어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였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안록산(安祿山)이 755년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안록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史思明)이 758년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763년에 모두 평정되지만 국력은 결정적으로 쇠퇴해 갔다. 이후 정치 상황은 결국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황제가 자주 몽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이때는 당의 짧은 전성기를 거쳐서 끊임없이 갈등과 분열을 하는 역사가 전개되는 모습이 보이는 시기이고, 동시에 동아시아의 재편이 꿈틀대는 시기여서 동북으로는 발해의 등장과 돌궐세력과 토번세력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거시적으로 동아시아사의 변화를 보여주며, 종전에 당(唐)이 근 300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하였다는 막연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왕조가 290년간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지배력의 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무수한 세력이 부침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막연히 당 중심의 동아시아사라는 동아시아사관을 재고해 볼 수 있는 생생한 자료라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태종이 등장한 이후 고종대까지를 당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그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야 100년 정도이며, 그 나머지는 각 지역별로 군사세력이 존재하여 명목상으로는 당 왕조의 지배하에 놓여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중앙권력이나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분열의 시기로 들어갔으며, 이와 아울러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옛 터전에는 발해가 등장하는 등 당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사가 종전에는 끊임없이 통일 지향적이라는 생각을 가져 왔지만 오히려 끊임 없이 분열 지향적이라는 말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거대한 왕조가 선다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분열 지향적으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만리장성 밖의 북방민족을 제외하고도 만리장성 이남에서도 산동과 산서, 강북과 강남의 분열이 눈에 띤다. 이를 통하여 이번에 출간된 당시대 편은 동아시아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