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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문제적 인간 12

2018년 1월 29일 오늘의 책

레닌 - 문제적 인간 12

로버트 서비스 | 교양인 | 2017.12

분류 : 시/에세이/기행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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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류의 지도자’인가, ‘냉혹한 독재자’인가? 신격화와 악마화의 틀을 걷어낸 인간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이었다. 헌신적인 장학관으로서 세습 귀족 지위에 오른 아버지와 자식들의 교육에 열성적인 어머니가 이룬 가정은 계몽주의 가족의 모범이었다. 라틴어, 그리스어 같은 고전 교육이 중심이었던 김나지야에서 레닌은 과정 내내 모든 과목에서 언제나 만점을 받는 탁월한 학생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다니던 형이 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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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픔을 한 몸으로 오롯이 떠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관련 학자들의 연구와 소회를 집약하여 펴낸 논문집에 대한 리뷰를 제가 지난달에 쓴 적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 중 두 번째 단계인 "10월 혁명"으로 인해 우리가 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가 확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정한 혁명"을 이끈 지도자는 우리가 다 아는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습니다.

혁명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날까요? 세상의 주인이어야 할 이들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을 때입니다. 국민, 민중, 백성이 "아플 때"입니다. 통(統)치자의 폭압이 국민과 소통(通)을 거부하고, 민초에게 고통(痛)을 안길 때 도저히 아래에서 그 억압을 감당할 수 없어 발생합니다. 반대로, 성공하는 혁명가는 무심한 통치자와는 달리 이 순간 다수의 고통을 온몸으로 공감합니다. 지도자는 한 사람(혹은 소수)이지만, 그들은 수천만 수억의 고통을 자신들의 한 몸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들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감은 실로 무거우며, 그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는 말 그대로 수천만 수억의 아픔을 대변하는 엄청난 두께와 울림과 권위와 명분과 절박함을 지닙니다. 그들은 고통 받는 백성들의 무등 위에 실려 거대한 정의의 파도 등성이에 올라 썩은 체제의 고름과 잔해를 걷어치우며 장엄한 행진을 벌입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보면 무능한 귀족 출신 장교가 썩은 물 가득 고인 통(桶)에 빠진 채 사병들에게 무참한 조롱을 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체제가 제 기능을 못할 때 민초가 내리는 심판의 준엄함과 위력은 무릇 이와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러시아 혁명사와 공산체제 연구에 있어 발군의 역량을 지닌 베테랑 학자입니다. 그가 쓴 스탈린에 대한 평전이 이미 십여 년 전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몇 년 전 트로츠키 평전에 이어 드디어 레닌의 일생을 분석, 평가한 저작이 국내에도 이렇게 소개되네요. 일각에서 비판도 듣습니다만 여튼 서비스 교수의 책만큼 "문제적 인물"을 종합적이고 다양한 각도로 파헤치면서 일관성 있는 시각, 재미난 톤으로 설명해 주는 저서도 찾기 힘듭니다.

특정 부분 서술과 관점에는 독자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어도, 일단 거대한 인물의 생애 전체를 객관적이고도 일목요연하게 정립하려는 시도 자체가 힘듭니다. 판이 제대로 깔려 있어야 그 바탕 위에서 건설적인 논쟁(혹은 어떤 형태의 소통이라도)이 가능할 텐데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논쟁의 소지이든 혹은 군말 없는 동의이든 담론의 출발점을 제공할 만한 공력을 지닌 그의 저술은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책이 두껍다고 독자가 고통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읽다 보면 오히려 그간의 무지에서 해방된다는 쾌감이,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수고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의 생애는 서술의 관점만 살짝 바꾼 러시아 혁명사 그 자체입니다. 레닌이 없었다면 과연 그 거대한 혁명의 물결이 제 역량을 발휘하여 제 물꼬를 찾아갔을지 의문이죠. 반대로 레닌 역시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의 대변혁 속에서라야 그 인물됨과 포부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의 총아였을 뿐, 어느 역사의 국면에서도 광채를 뽐낼 법한 만능형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혁명의 온상(이는 곧 국민과 시대의 고통이라는 게...)이 마련된 후에야 혁명가 레닌이 그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습니다. 혁명가의 진정한 후원자는 잔인하고 무능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이 예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주인공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입니다. 물론 이 역시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레닌의 본명입니다만, 저자가 생애 초기의 그를 일일이, 구태여 이 본명으로 지칭하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 으레 사후에 덧입히는 광채(게다가, 공산 체제가 인민들과 바깥 세상을 향해 내세운 획일적인, 거짓된 정치 선전의 부작용도 어느 정도 있을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보통 이런 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미숙한 시행 착오 없이 완성된 채로 성장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대한 레닌은 그의 생애와 혁명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었고, (혁명가들의 잦은 습관대로) 가명을 취한 후 일종의 페르소나 속에 안착한 레닌과 변태 이전 "번데기" 상태의 울리야노프는 확실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뭔가 미숙하면서도 완성, 환골탈태를 위해 몸부림치는 울리야노프, 완성된 거인으로 우뚝 선 레닌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화해, 이것이 이 두꺼운 책을 읽는, 기나긴 드라마를 시청하는 보람이자 관람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레닌, 아니 울리야노프는 아픔 많은 아이였습니다. 그럭저럭 위신도 내세우고 경제적 윤택도 누릴 만한 집안에서 자라 최상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그의 형처럼 그는 개인적 자아실현을 도모하거나 집안을 잘 꾸려나가야 할 주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이웃의 고통에 유별날 만큼 주의를 기울이며 "해결 방법"을 찾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개인적 선의나 자선으로 이 문제, 즉 빈곤과 불평등과 인간 존엄의 부정을 "치유"할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하다는 걸, 그는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접근,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이미 체제 차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민주주의로 이행하거나, 과감한 사회 보장 체제를 도입하여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허나 조국 러시아의 황실, 귀족들은, 그저 덮고(미봉, 은폐) 짓누르는(억압) 선택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이 모든 어설픈 기만극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한다는 아픔이, 그에게는 그 어떤 충동이나 욕구보다 내면을 지배하는 으뜸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은 반역죄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면서도 한 줌의 굽힘도 없이 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하여 황제조차도 감탄하게 만든 형의 "순교"였습니다. 레닌은 풍채가 당당하거나 압도적 카리스마를 내뿜는 유형의 지도자는 아니었는데, 다만 그의 내면에 가득 채워진 의지와 동기는 전적으로 도덕적 각성에서 유래한 터라 그의 연설, 발언은 듣는 이를 압도하는 어떤 힘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책에는 여러 흥미로운 서술이 있는데, 그는 같은 말을 해도 동시에 여러 다양한 톤으로 발성하는 특이한 능력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정치인은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 메시지 내용보다는 어떤 톤으로 말하여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느냐가 의외로 웅변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라고 합니다. 이는 물론 혁명가 등에만 해당하는 사정이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이 교섭 상대를 설득하고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의 갈림길에도 넉넉히 영향을 끼치는, 알게모르게 중요한 소통의 기법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런 재주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지니게 된 건 타고난 자질의 산물일 수도 있고, 반대로 간절하고 진정성 깃든 소명의식을 갖고 살다보니 어느새 체질화된 후천적 테크닉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만은 못했고, 당연하지만 혁명과정에서 당국에 쫓기거나 망명생활을 하며 더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내내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육신의 고통이 정신을 엄습하고 압도하는 순간 적폐에 대한 적개심과 민중에 대한 공감 농도를 몇 배는 더 높였는지야 후대인들인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과거의 위인 한 명의 말과 글이 여전히 주목을 끌며 정치, 사회 아젠다 설정의 유력한 동인을 부여한다면, 그런 말과 글을 남긴 이의 공감 능력,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어깨를 겯어 그들의 처지에 동참하려는 그 위인의 의지가 참으로 탁월했다는 점만큼은 누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아픔이 있고 껍질이 깨지는 통과 의례를 치러 가며 극복해야 할 미숙함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지도자란, 위인이란, 혁명가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그것처럼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오롯이 받아들이고 짐을 나눠 지려는 각오와 사랑을 품은 사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오늘이라도 감격스러운 변신이 가능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펜벗 인터뷰

1.‘지도자란, 위인이란, 혁명가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그것처럼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오롯이 받아들이고 짐을 나눠 지려는 각오와 사랑을 품은 사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오늘이라도 감격스러운 변신이 가능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평 중에서)
지도자 ‘레닌’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대개의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은 이 책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열심히, 감동적으로 읽었던 저 역시도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중 한 명입니다. 제 서평 중 발췌해 주신 저 문장에 이미 (저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만, 대개의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오히려 레닌의 저 소박한 자세, "위대함"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일상에 성실하게 살려는 자세, 평범한 이웃들과 부대끼는 과정에서 연대감, 공감을 마련하려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개 평범한 삶을 살며 그것을 비루하다고 여깁니다. 위대한 삶은 따로 있다고 착각합니다. 레닌은 얼마든지 특권층의 삶을 이기적으로 누릴 수 있었습니다만 평범한 민중의 삶에서 거꾸로 위대함을 찾았습니다. 이 책을 정말 읽어야 할 분들은, 스스로를 백성 위에 군림한다고 비뚤어진 우월감을 느끼며 사는, 그래서 반드시 지도자관이 교정되어야만 하는 정치인들입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하루하루에 성의를 다하며 사는 우리들이 바로 "참된 지도자들"입니다.

2. ‘책이 두껍다고 독자가 고통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읽다 보면 오히려 그간의 무지에서 해방된다는 쾌감이,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수고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서평 중에서)
책에 대해 독자가 느끼는 ‘통’이 나타난 위의 문장이 참 재밌었어요. 컬러리니드 님께 ‘통’을 안겨주는 책이 있다면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주 평범한 뜻을 설명하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 왔음"을 독자가 분명히 깨닫게 하는, 진정성 어린 실천가의 책입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고, 눈물이 핑 돌아서 민망해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난 이 정도로 진실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아픔"이 절로 느껴집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의 이태석 신부님,
이런 성자와도 같은 삶을 산 특별한 분이 아니라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인데 나눔과 봉사를 통해 참된 자아상을 발견한 저자의 책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제가 지금 저자와 책 제목이 기억 안 나네요.

다른 하나는 일 때문에 물리학이나 수학 서적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때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무슨 식(방정식)인지 이해를 못할 때, 이게 나의 한계구나 하고 큰 고통을 느낍니다. 이건 구태여 제목을 소개할 필요가 업을 듯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전혀 관심 없을 책에 대해 혼자 신나서 말하는 것도 일종의 “통”을 안겨다 드리는 무배려이자 무신경일 듯해서요.

3. 이번 큐레이션의 주제는 아플 ‘통(痛)’입니다. 컬러리니드 님께서는 혹시 누군가에게 ‘통’을 안겨준 적이 있나요?
예, 많죠. 일단, 어렸을 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한테 그 집에 찾아가 물리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전 지금도 그게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체격 조건은 비슷해서 그 친구가 저한테 일방적으로 맞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아무 저항을 안 하더군요. 더군다나 친구의 어린 동생이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형을 동생 앞에서 때리다니. 솔직히 "그 원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긴 합니다만,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습니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실은 불과 며칠 전에도 납품 물건 때문에 (저보다 한참 연상인) 상대방에게 마구 따지다가 "말씀을 꼭 그런 투로 하셔야겠어요?"라고 분노 어린 반응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상대가 나에게 "통(痛)"을 먼저 안겼기에 방어 차원이라고 합리화는 합니다만, 어찌 그 안에 불순한 화풀이나 공격 심리가 안 끼어들었겠습니까.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어떤 때는 그걸 의식조차 못하고,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도 나 자신을 떳떳이 여김으로써 조금씩 타락해 가는 과정이 알고보면 다 내면을 좀먹는 진짜 고통들입니다. 살다 보면 무조건 피해자 시늉만 하는, 인성의 근본에 반성 기제가 결여된 악질들이 있습니다. 이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 격하게 대응도 하지만, 거기 대고 똑같이 갚아주면 그런 사람과 제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비슷한 인성이니까 비슷하게 반응하는 거고, 그걸 실감할 때마다 많이 슬퍼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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