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6일 오늘의 책
신형철 | 한겨레출판 | 2018.09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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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세상의 사이를 잇는, 어느 평론가의 이토록 성실하고 아름다운 가교(架橋)!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으로 독자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았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4년 만에 새로운 산문집을 출간한다. 이번 산문집은 《한겨레21》에 연재됐던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을 비롯,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 등에 연재했던 글과 미발표 원고를 모아 엮은 것이다. 시와 소설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노래, 사진 등 다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평론가가 한겨레21, 한국일보, 경향신문, 광주일보 등에 8년간 발표한 글을 엮은 산문집이다. 2011년 발간한 『느낌의 공동체』에 이은 두 번째 산문집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지난 7, 8년 동안의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라고 밝힌다. 세월호 사건과 아내의 수술이라는 커다란 슬픔을 겪고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느낌의 공동체』에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전작이 문학작품을 치열하게 읽으며 받은 느낌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 시도였다면, 이번 작품은 밖에서 바라본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책은 ‘슬픔에 대한 공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85편의 산문을 타고 흐른다. 슬픔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삶의 행로에서 수시로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쓰나미처럼 덮쳐오기도 한다. 슬픔이 인간에게 필연적인 운명이라 해도 그것은 쉽사리 수용되거나 용해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으로 전이되거나 더욱 깊이 파고들어 마침내 숙주를 무력하게 만드는 악성 바이러스를 닮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70쪽) 신형철은 이 고통스러운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은 터널 출구를 향해 앞장선 헤드라이트와도 같다.
저자는 사회와 문화, 문학과 영화 등 인간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나 있는 슬픔의 내면을 공부한다. 그가 공부하는 방식은 슬픔을 조장하는 요인이나 이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선별해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강연을 하다가 마주치는 슬픔의 진앙지와 파동을 면밀히 살펴보는 식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살아가며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보편적 슬픔의 현장이다. 여기서 그는 슬픔의 보편성이 개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순을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53쪽) 고통은 그 무게를 수치화하여 정량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아픔에 사용하는 저울의 중심에는 숫자가 아닌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자리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처럼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는 데 필요한 것은 슬픔을 느끼는 감수성일 것이다.
폭력, 고통, 슬픔으로 이어지는 비극은 슬픔의 치유가 없다면 다시 폭력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당신은 나의 슬픔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는가? 심지어 어느 지점에 이르면 동정심이 거꾸로 적대감으로 바뀌는가? 그렇다면 동일한 상실을 경험함으로써 그 슬픔을 배워보라.”(26쪽)와 같은 ‘아가멤논의 딜레마’가 작용하게 된다. 저자는 폭력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는 정의를 시도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문학과 예술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 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201쪽) 인간 이해의 심연에 내려간 작품들의 소개도 빼놓지 않는데, 그 자체로 작품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평론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간이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라 말한다. 국민과 함께 슬퍼할 줄 몰랐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에게 투표하리라는 각오를 했었다고도 밝힌다. 권력의 상층부가 이러한 한심한 한계를 가질 때 고통의 진폭은 보다 확장된다. 그는 배제 혹은 절멸에의 욕망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자의 권력 장악이 가져오는 위험을 경고한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214쪽)라는 메릴 스트립의 연설이 용기로 비칠 만큼 권력은 대항하기 어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고통의 확산을 저지하는 일은 이처럼 용기있는 누군가로부터 시작된다. 그 용기 또한 공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혐오에 대해서나 농단에 대해서나 내가 이야기의 끝에 자꾸 나를 주어로 삼은 문장을 써보는 것은 의례적인 반성적 제스처를 집어넣어서 스스로 면죄부를 발송·수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기 않기 위해서다.”(223쪽)라는 독백은 슬픔을 공부하는 자의 단호한 의지이다.
저자는 슬픔을 공부하라고 직접 외치지 않는다. 잔잔히 흐르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연기처럼 조용히 피어오르는 슬픔을 관찰한다. 그리고 슬픔의 심연으로 내려가 그 본질에 다다르고자 한다. 슬픔의 옷을 입고 슬픔 그 자체가 되어보고자 한다. 그런데도 너의 슬픔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함에 아파한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쪽) 그는 가장 어려운 배움을 위해 기꺼이 ‘8년 동안의 생명 중 일부로 주고 바꾼’ 글들을 400여 페이지의 지면에 내주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다’라는 저자의 고백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인식을 생산해낼 것,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글 짓기의 공정 준칙’을 첫 페이지에 소개할 만큼 책의 구성은 균형미가 있다. 내용에서 ‘슬픔(1부), 소설(2부), 사회(3부), 시(4부), 문화(5부)’로 나누어 슬픔의 본질부터 외피까지, 발생부터 치유의 노력까지 세심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했다.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리는 시각적 균형은 곧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 각 부에 실린 글을 17편으로 통일한 치밀함도 보인다. 책은 아름다운 균형을 찾기 위한 수학적 계산으로 완성된 그리스의 신전을 떠올리게 한다. 한 권의 책 안에 들어있는 85편의 글들은 고통과 슬픔을 함께 공부하자는 묵직한 울림으로 신전을 공명한다. 그곳을 방문한 독자들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가능성은 줄고 대신 성숙한 인간이 가진 감수성의 지수는 높아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가장 먼저 집어 들기를 권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oolemily'님은?
책과 사람을 사랑합니다. 숭례문학당에서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