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일종의 인용(引用)이다.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 속에 끌어 쓰듯 X+는 X-를 끌어당긴다. 혹은 X-가 X+를 인용한다. X+의 시간을, 생각과 취향을, 두 팔과 입술을, 온몸을, 마음 전부를 얻고자 한다. 이 필사본 ‘X+’를 흔들어 보이며 X-는 외친다. 나에게 애인이 있어! 한동안 ‘X+’는 X-라는 책의 내용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것 같다. 그 사랑은 인용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 같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X+는 자신이 더 이상 ‘X+’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혹은 X-가 먼저 알아차린다. ‘X+’의 상실을, X+가 그저 한두 줄의 인용구라는 것을, 그 의미를. X+와 X-는 책을 다 읽은 사람들처럼 서로를 덮는다. 그리고 멀어진다. 이후 안부를 묻는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말할 것이다. 애인이 있었어.
X+와 X-는 이쯤 되면 누구에게든 이야기하고 싶다. “자아는 상처 받을 때라야만 말을 한다. 내가 충족되었을 때, 또는 그랬다고 기억될 때 언어는 소심해 보인다. (…) 충족된 연인은 글을 쓸 필요도, 전달하거나 재생할 필요도 없”(88쪽)는 반면 X-는 “나는 찾으며, 시작하며, 시도하며, 더 멀리 나아가며, 달려”갔으나 “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150쪽)했다며 울먹인다. X+는 “내 삶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사랑의 실패는 흡사하다.”(151쪽)라고 읊조린다. 베르테르는 “충족에의 의지”(89쪽)만을 불사르는 편지를 쓴다. 빌헬름, 여보게, 빌헬름, 아니, 로테, 로테, 하면서 죽어간다. 롤랑 바르트는 이 모든 ‘단상’을 한데 엮기로 한다.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글쓰기를 시작한다.
글쓰기에 비해 나는 너무 크며, 또 너무 연약하다. 나는 ‘글쓰기 밖에’ 있다. 글쓰기를 간청하는 어린애 같은 나에게 글쓰기는 항상 촘촘하고 격렬하며 무관심하다. 사랑은 물론 내 언어와 연결되어 있지만(글쓰기를 부양하는), 글쓰기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146쪽)
이 글쓰기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다수를 인용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 “각자 자신의 이야기”(16쪽)다. 사람들은 X+였던 적이 있다. 혹은 X-였다. 서로의 애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 독자들은 《사랑의 단상》에 인용된다. 사랑의 대상을 통칭하는 ‘X…’를 마주한다. 그 앞에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실은 사랑받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워했”(269쪽)음을, “사랑을 받고, 또 버림을 받았다고 믿는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 살아왔”(270쪽)음을 알아차린다. X+ 혹은 X-가 알아차리는 것은 상대의 변심이 아니라, 사랑이 바로 그렇다는 것, 그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펼쳐든다. 인용하기를 거듭 시도하고, 그 분량은 어마어마해지며, ‘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된 일인가? 롤랑 바르트는 “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제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 처음에 긍정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고 다시 긍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번에 내가 긍정하는 것은 긍정 자체이지, 그 우발적인 요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남을 그 다름 속에서 긍정하고, 그것의 반복이 아닌 회귀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과거의, 또는 지금의)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46쪽)라고 쓰고 있다. 애인들은 그렇게 되돌아온다. 사랑이 또한 그렇다는 것, 그것을 믿으면서.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