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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2020년 10월 14일 오늘의 책

천 개의 파랑

천선란 | 허블 | 2020.08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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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진영, 영화감독 민규동, 배우 손수현 추천! 우리 SF를 물들일 가장 따뜻한 색, 파랑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천선란 『천 개의 파랑』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 속에서, 있는 힘껏, 여린 풀잎 하나 놓치지 않는 올곧고 믿음직한 시선 SF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예견하는 장르라면, 『천 개의 파랑』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희미해지는 존재들을 올곧게 응시하는 소설이다. 발달한 기술이 배제하고 지나쳐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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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장편 부문 대상을 차지했던 작품인 『천 개의 파랑』이 2020년 8월에 드디어 출간되었다. 한국과학문학상은 SF 소설 분야의 대표적인 신인문학상으로, 지난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초엽 작가가 제2회 한국문학상에서 단편 부분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수상하며 데뷔하기도 했었다. 천선란 작가 역시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하고 『천 개의 파랑』을 출간하면서 SF 작가로의 입지를 굳히지 않았나 싶다.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밖에 없으리라. (344쪽)

 

다 떠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래 기다렸던 만큼 그득하게 쌓였던 기대를 말끔하게 충족해 주는 책이었다. 요즘 소설을 읽으면서도 소설이 읽고 싶은 묘한 갈증을 겪고 있었는데, 그 갈증까지 해소해 주었다.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하게 흐르지 않는다. 관절이 망가져 안락사를 앞두고 있는 경주마와 스스로 낙마해 하반신을 잃은 로봇 기수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씩 펼쳐진다.

 

하늘은 매일, 매 시간마다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21쪽)

 

인간은 오래도록 ‘빠른 것’에 대한 동경을 가져왔다. 동경인 동시에 재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마경기에서 경주마가 달리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경마경기의 약점은 기수가 인간이라는 점에 있었고, 이는 말이 최고 속도를 내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인 중 하나”(69쪽)였으므로 “인간보다 작고 가벼우며, 떨어진다 한들 생명과 연관되지 않는 새로운 기수가 필요”(69쪽)했던 인간은 결국 탄소섬유로 만들어져 인간보다 가벼운 기수 휴머노이드를 탄생시킨다. “파손이 심할 경우 폐기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기수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말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53쪽)으며, “경주 실력이 우수한 말끼리만 교배해 점점 더 빠른 말을 탄생”(58쪽) 시켜 급기야 시속 100km로 달리는 경주마에 열광한다.

 

콜리는 경마경기를 위해 만들어진 기수 휴머노이드다. 콜리가 다른 기수 휴머노이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작 과정에서 소프트웨어 칩이 잘못 삽입된, 그래서 인간의 실수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와 호흡을 맞추는데, 콜리의 몸은 “공기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무언가를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는”(27쪽) 호흡의 과정을 겪을 수 없음에도 자신이 투데이의 등에 앉아 달릴 때만큼은 호흡했고, 살아 있다고 느꼈다. 투데이가 달리면서 내는 진동과 행복이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생명을 느끼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유별난 휴머노이드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질문이 뭐였더라.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였나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였나. 아무튼 그런 비슷한 거였는데 대답을 못 했어.”
“왜?”
“같이 면접 봤던 애들이 전부 다 유학파였거든. 걔네 입에서 나온 기술은 내가 사는 세상이랑 차원이 다르더라. 그러니까 정말 미래를 보는 눈이었어. 몰라,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어서 기억도 안 나네.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입도 안 열었어. 비웃을 것 같아서.” (46~47쪽)

 

콜리가 낙마해 하반신을 잃은 뒤 만나는 것은 연재다. 연재는 로봇을 좋아하고 소프트 로봇 연구원이 되는 것을 꿈꾸었던 학생이지만, 동시에 로봇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기도 하고 유학을 다녀온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이 좋아한다고 믿던 것이 초라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꿈을 접어놓은 학생이기도 하다. 몸이 불편한 언니 은혜와 그런 언니에게 온 신경을 쓰느라 자신에게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엄마 보경를 원망하는 대신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고, 서로를 배려하기 위했던 선택이 깊은 갈등으로 번져가는 것을 덤덤하게 바라만 본다.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220~221쪽)

 

연재와 은혜, 그리고 보경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한집에서 살아가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326쪽)하면서 서투르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 사람에게 콜리는 자꾸만 질문을 던진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240쪽)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295쪽) 이런 콜리의 ‘유별남’은 어디서부터 비틀어졌는지 모른 채 삐걱삐걱 굴러가던 세 사람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재미있는 것은 세 사람이 자신들을 돌아보는 사이 독자 역시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방사선을 차단하는 거대 천장 대신 파란 하늘이, 대단한 지능을 가진 외계 생물 대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기수 휴머노이드와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가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천 개의 파랑』이 보여주는 세계에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희망’ 때문이다. 각자의 상처, 상처를 딛고 만들어가는 우정, 그리고 텍스트를 넘어 독자에게까지 전해져오는 위로가 따뜻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콜리는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는 도리어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대화였다. 콜리는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개체였지만 공감하는 척 움직이게 만들어졌다. 어차피 사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공감이었다. 보경은 콜리는 앉혀놓고 몇 번 대화를 한 후에야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보경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던 사람이 오래도록 비워둔 자리를 뜻하지 않은 것이 채웠다. (271쪽)

 

나는 과학을 좋아하고, 기술을 좋아하고, 과학 기술이 만들어준 편리하고 빠른 삶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나아가는 과학 기술에 인간미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는데, 『천 개의 파랑』은 인간으로 가득한 이 지구에서 없어져 가는 것은 인간미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아갈 다른 존재들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동안 어떤 것들은 그와 같은 속도로 지구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환기한다. 동시에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다정한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인간이 배제하는 것은 다른 종족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만을 위하는 동시에 인간을 배제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이대로 우리의 편의만을 바라보며 지구가 인간의 행성이 되어가는 것을 방관해도 되는 걸까? 정말 나 하나만 잘 살다가 가면 되는 걸까?

 

콜리가 ‘그리움’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 부탁했을 때, 보경은 “기억을 하나씩 포기”(204쪽)하고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204쪽)하는 것이 그리움이라 답하면서도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205쪽)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맞물려 있을까?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의 행복, 나만의 편의가 아닌 함께의 미래를 꿈꾸는, 모두를 끌어안음으로 위로하는 다정한 소설을 만났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2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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