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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수첩

필리프 자코테 저 | 류재화 역 | 난다 | 202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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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4171614 / 232쪽 / 302g / 125 x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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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초록 수첩’이라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자코테는 ‘시집’이라는 용어보다 그 대안으로 ‘수첩’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여기에 파편적인 시와 산문들을 수록했다. 글에는 벚나무, 모과나무, 작약, 접시꽃, 비를 흠뻑 맞은 나무와 풀들이 나오는가 하면, 천공을 뚫을 듯 비상하는 종달새와 말벌도 나온다. 세계의 온갖 사물과 현상들 앞에서 자코테는 확정적인 언어를 경계한다. 그것들에 빗대어 자신의 서정을 간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냥 거기 있는” 자연을 그린다. 그저 그 자체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자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고요히 응축”한 채 머무는 자연을 그린다. ‘시’이기보단 차라리 ‘수첩’에 적힌 메모로 남으려는 그의 글을 통해 신비로움을 머금은 자연이 드러난다.

 

 

출판사 리뷰

책 속에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선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싶어서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이 기쁨이,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별처럼 폭발해 그 별가루들을 우리 안에 퍼트렸을 것만 같다. 시선 속에서 빛나는 약간의 별가루들, 우릴 뒤흔들어놓고, 홀리고, 기어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섬광을, 이 파편화된 반사광을 자연 속에서 불시에 포착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 반사광들이 내겐 결코 빈약하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몽상들의 기원이니까.
_11쪽

이 열매들은 어두운 초록 속에 붉은 것이 흐르는, 붉고 기다란 송이 같았다. 요람 속, 아니면 이파리들로 짠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열매들. 초록 속의 붉음, 만물이 서로 미끄러져들어가는 시간, 느리고도 조용한 변모의 시간. 거의, 전혀 다른 세계가 현현하는 시간. 어떤 것이 문돌쩌귀 위에서 돌아가는 시간.
_15쪽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권한이 이젠 우리에게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단어는 닳고 닳았다. 물론, 나로서야 아름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안다. 그렇긴 해도, 생각을 해보면 나무들에 대한 이런 판단은 이상하다. 나로선, 그러니까 정말이지 세상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는 나로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면, 그게 바로 세계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기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전언을 가장 충실히 번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_31~32쪽

그 모든 색 중에서 녹색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깊은 곳에 낮과 밤이 조화롭게 있어서일까? 초록이라면, 곧 식물인가. 모든 풀과 모든 이파리. 우리에겐 녹음綠陰, 서늘함, 잠깐의 안식처.
_41쪽

다가가도, 3월 어느 날의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단지 몽상에서조차 그녀들은 당신보다 앞서 와 있다. 잎사귀 문을 밀어내면서, 거의 보이지 않는 방벽도 함께 밀어낸다. 초록 아치 밑에서 그녀들을 따라가다 몸을 돌리면, 어쩌면 자신이 더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는 걸, 흙바닥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_121쪽


이곳, 빛은 바위들처럼 단단하고, 딱딱하고, 눈부시다. 그러나 이들 위에 이 벨벳, 이 닳고 닳은 포목, 이 까끌까끌 보풀 난 모직. 산 전체가 가축 무리로, 목장으로 변해 있다. 다 이어져 있어, 스스로 버티고, 다 함께 버틴다, 태초의 그날처럼. 이 거대한 공간에 와 있으면 우리를 가두지 않고 환대하는 집에 있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_125쪽

4월, 브라마렐이라 불리는 여울목, 레즈강의 물이다. 집에 돌아가기 전 잠시 그것을 바라본다. 짧지만, 영원한 듯한. 서쪽으로 몸을 돌리면 강물은 넓게 벌어지고 하늘 크기만큼 커진다. 그 빛이 눈부시다.
_134쪽

접시꽃은 어떻게 피나? 여름이 지나감에 따라 키 큰 꽃대의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한편 발치에서는 그 넓은 잎사귀들이 녹슬고, 찢어지고, 때론 누더기처럼 떨어진다). 6월의 어느 날, 점점 높이 피신하는 방식의 이런 개화에 나는 깜짝 놀랐고, 나무들 꼭대기에서 황금빛으로, 산 정상에서 분홍빛으로 물들며 역시나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며 피어나는 저녁 태양이 떠올랐다.
_147쪽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날 따라와. 내가 너에게 여기 숨겨진 문을 열어줄게. 그런데 나 자신은 거길 지날 수 없다. 그래서 그게 어디로 통하지는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그곳에서 네 팔이 그 그을린 색을 더이상 잃지 않아도 되길. 일종의 빛 속의 유배지, 빛 속에 억류된 곳이길.
_187쪽

격류, 불타는 것. 마치 가장 신선한 것이 찰나의 순간 두 세계 사이의 불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나이 든 여행자가, 고개를 넘으면서, 까마득한 저 어린 시절을 향해 잠깐 고개를 돌리는 순간일까. 계곡 저 바닥에 몇몇 안개 조각들이 겨우 생길까 말까 한 1초의 공간. 그를 아직도 기다려주고 있는 것만 같은 것과 합류하는 듯한 착각, 환각.
_208쪽

저자 소개

  • 저자 : 필리프 자코테
시인이자 번역가. 1925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1950년 프랑스로 귀화했다.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화가인 아내와 함께 프랑스 남동부 드롬 지방의 그리냥에 정착했다. 그의 시에는 이 지방의 풍경이 많이 담겨 있다. 횔덜린, 릴케, 만델스탐, 노발리스, 토마스 만, 웅가레티 등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프랑시스 퐁주, 장 폴랑, 이브 본푸아, 자크 뒤팽 등 여러 작가들과 교유했다. 1953년 첫 시집 『올빼미L'Effraie』를 발표한 이후, 다수의 시와 산문, 평론을 집필했다. 생전에 그의 작품 선집이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 총서로 기획, 출간되었다. 2021년 그리냥 자택에서 95세의 나이에 작고했다.

역자 소개

  • 역자 : 류재화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누벨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 대학원, 철학아카데미,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프랑스 문학 및 프랑스 역사와 문화, 번역학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필리프 자코테의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성적인 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달의 이면』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보다 듣다 읽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 『기자 생리학』, 모리스 블랑쇼의 『우정』 등이 있다.

목차

벚나무 ─ 9

초록 수첩
장밋빛, 추운 계절에 ─ 25
녹색과 흰색 문장 紋章 ─ 29
비가 잎사귀 위로 돌아왔다 ─ 45
상승하는 단계들에 관하여 ─ 47
여름 아침, 역광이 비치는 산들 ─ 55
8월의 섬광 ─ 57
산들이 보라색을 띠는 이 미지근한 ─ 63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들 ─ 67
겨울 저녁의 색들, 마치 ─ 78
꽃들의 출현 ─ 83
얼핏 보인 가는 조각달 ─ 96

수많은 세월이 흘러
호수 전망 ─ 101
작약들 ─ 111
소브강 물, 레즈강 물 ─ 123
밤의 노트 ─ 135
화관 ─ 145
촌락 ─ 159
박물관 ─ 171
빈 발코니 ─ 179
두 초안 ─ 189
라르슈 고개에서 ─ 193
수많은 세월이 흘러 ─ 209

옮긴이의 말 ─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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