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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6551583 / 120쪽 128 x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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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타자를 자신 안으로 모셔오기 시집에 실린 여러 작품에서 타자를 모시는 모습은 희미하게 존재한다. 시인 자신도 모르는 이 본능적 태도에 대한 예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거기에는 일종의 ‘주저’가 있는데, 이 주저는 정직에서 나오고, 주저는 작고 낮은 목소리를 발한다. 한참을 돌아서 걷는 사이 스쳐가는 사내의 젖은 얼굴을 보았다 마른 나무처럼 흔들거리는 몸 트럭이 떠난 뒤에도 엔진 소리는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_「엔진 소리」 부분 이 시는 화자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목격한 어느 택배 노동자의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인데,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하는 아이와 통화하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약간의 큰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데, 시에서 화자는 아빠와 아이가 함께 아픈 것을 예민하게 붙잡아낸다. 하지만 감정을 과잉되게 얹지 않고 떠난 트럭이 남긴 “엔진 소리”만 모셔온다. “오래도록”이라는 한 단어에 그것이 응축되어 있다.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길 손목의 가는 실금을 따라 분홍물이 들었네 예감은 낯설지도 않아서 붉은 꽃처럼 울었네 _「꽃 보러 갔다가」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단지 ‘꽃구경’을 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꽃”을 자신 안에 모셔온 경우이다. 그런데 타자를 모셔오는 것에는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일이 수반되기도 한다. 오로지 작고 낮은 목소리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는 고통을 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예감은 낯설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는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일을 예감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타자를 모셔오는 일 자체에 어떤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에 조금 더 가깝다. 이 시의 마지막이 “붉은/ 봄”인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삶의 고통을 말할 때도 박영선 시인은 작고 낮게 말한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 이 미덕도 시인 스스로 자기 삶에 정직하기에 가능한 경지다. 발문을 쓴 황규관 시인이 시의 정직과 삶의 정직을 말한 것은 이런 작고 낮은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다들 목소리들이 커진 현대 세계에서 작고 낮은 목소리는 희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고 낮은 목소리가 크고 높은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릴 때가 있다. 작고 낮은 목소리에는 청자의 귀를 여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영선 시인의 첫 시집 『분홍달이 떠오릅니다』는 그런 시들로 빼곡하다. 시인의 말 1990년대 『샘터』를 인연으로 시작된 동행이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으로 오래 기다렸던 나의 시(詩)에게 따듯한 햇빛을 보여주게 된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사는 동안 시는 힘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천천히 해찰하며 걸어갈 작정이다. 나의 가족, ‘시락’ 동인, 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책 속에서 정오 무렵의 해는 높이 오르고 햇빛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아파트 유리창마다 햇살에 찔린 자국들 길다란 화분들이 조금씩 야위어 갔다 마른 풀 위로 사과가 떨어지고 허기진 개미들이 몰려들었다 비명도 없이 쓰러져 가는 날것들 누가 마른 잎 한 장 덮어주랴 소리가 없는 것들은 적막한 혀를 가지고 있을 거야 노래를 불러줄까 쓸쓸한 나의 노래는 늘 낮은음자리 중얼거리는 손가락들이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렸다 반성도 후회도 희미해져 가는 이마 위로 날이 저문다 발자국 소리가 없다 ---「10월」중에서 바람길이었을까 얼기설기 엮은 철망 사이로 사라져간 그대의 손, 손 번쩍이는 불빛 몇 점 보았을 뿐인데 흔들리는 노래 잠깐 들었을 뿐인데 바람은 아무 말 없이 너의 등을 밀었지 텅 빈 시멘트 바닥을 울리던 아 아 죽음은 지천으로 널리고 새롭지도 않아서 쉽게 잊혀져 가고 낡은 비상구만 즐비한 이곳에서 붉은 새가 된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붉은 새」중에서 사각형 수조 어린 구피들이 사라져갔다 어떤 이는 어미 구피가 배가 고파 잡아먹었을 거라 했고 어떤 이는 크고 강한 입을 가진 늙은 금붕어의 소행일 것이라 했다 나는 청소부 비파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온종일 돌 위에 찰싹 붙어 있던 비파는 가끔씩 유리 뒤에 달라붙어 나를 살피곤 했다 어린 구피는 찾을 수 없고 소리 없이 흔들리는 수초 사이를 유유히 헤엄쳐가는 금붕어의 비늘이 반짝거릴 뿐 비파와 나는 오늘도 눈이 마주쳤다 ---「소문」중에서 바람 불고 배롱나무꽃들 가려움에 부풀어집니다 몽글몽글 진분홍 꽃을 보아요 그녀의 립스틱처럼 도발하네요 태풍이 몰려와요 휘청거리는 나뭇가지를 붙잡아 줘요 펄펄 흩날리는 꽃 사랑 따위는 잊어버려요 당신의 머리 위에 화관처럼 빛나고 싶어요 꽃이 지는 저녁 앞서 걸어가는 사람 뒤로 배롱나무 한그루 마른 손을 흔들며 따라갑니다 휘청거리며 멀어집니다 가장 낮은 땅 위로 분홍달이 떠오릅니다 ---「분홍달」중에서
시인의 말·4
1부
10월·12
거짓말·14
기억의 봄·15
길 위에서·16
당신의 안부는·17
마른 잎 지는 저녁에·18
붉은 새·20
시(詩)·21
안구 건조증·22
어떤 죽음에 관하여·23
예수와 나·24
조문·26
먼지의 시간·28
팔월·30
2부
다림질·34
젖은 책·35
엔진 소리·36
폭설을 꿈꾸는 밤·38
즐거운 나의 집·40
집·42
빗소리·44
소문·46
소리쳐·47
식탁에서 밥을 먹는 법·48
코끼리를 보았다·50
하안동을 기억한다면·52
쏘세지 부치는 저녁·54
3부
자화상·56
사월, 그리고·57
가을밤·58
꽃·59
겨울바다에·60
꽃 보러 갔다가·62
분홍달·63
다시, 봄 기형도에게·64
사월, 독산역·66
산수유나무 아래·67
여름의 끝·68
이사·69
이팝꽃 필 적에·70
검은 잎사귀들·71
4부
목련이 질 때·74
감기·76
그림자 도시·78
도시의 눈·79
너에게·80
일요일·81
갇힌 사람·82
기린 탐구 보고서·84
눈 화장하는 여인·86
심부름·88
엘리베이터-19·90
티비가 자란다·92
흰 눈을 가진 아이들·94
가방을 사세요·96
발문
시의 정직과 삶의 정직(황규관)·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