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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1897500 / 299쪽 13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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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 속에서
[책 머리에]
만 25년간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평론집을 낸다. 공식적으로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본 적이 없는 처지에 평론집이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게 다가온다. 평론가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자의식이 희박한 상태로 평론집을 낸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는 힘주어 말할 수 있겠다. 주어진 텍스트에 대해 독창적인 시각은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성실하게 읽으려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작품에 대해 손쉬운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그 작품이 들려주는 얘기를 열심히 듣는 일부터 수행했다고. 어쩌면 이것이 평론이라는 글쓰기로 시를 읽어 나가고 세계를 읽어 나가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이런 생각에 기대어 글을 썼고 책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고백한다.
여기 실린 글은 모두 2010년대 이후에 작성되었다. 그중 3분의 2가량이 2020년 이후에 작성된 글이다. 작성된 시기만 놓고 보면 우리 시단이 엄청난 격랑의 시기를 통과한 후에 나온 글이 대부분인 셈이다. 격랑의 시기는 폭력과 혐오로 점철된 과거의 문학사에 격렬하게 안녕을 고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시단을 둘러싸고 온갖 추문이 터져 나오던 그 시기를 지나면서 맨 먼저 축출된 것이 매력과 폭력을 한 몸에 장착한 어떤 문학들이었다. 매력적인 스타일이 폭력적인 (줄도 모르고 유전되어 온) 감수성과 한 뿌리를 이루면서 터져 나오는 어떤 시들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비대하여 윤리적인 감수성을 짓누르고 나온 시편들이 추방되고 남은 자리엔 당연히 그와 정반대의 감수성을 강조하는 시편들이 들어찼다. 아름다움만큼이나 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과 좋은 것이었다. 진선미(眞善美) 중에서 미(美)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선(善)에 대한 인식이 중요해진 시기가 2010년대 후반기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선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진다. 책의 제목으로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를 채택하게 된 이유도 시단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고민에서 찾아진다. 그것이 무엇이든 ‘너머’의 것은 손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 너머에 대한 고민은 이 책의 출간과 상관없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함께 밝혀 둔다.
부 단위로 간략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먼저 제1부에서는 2020년대에 접어든 시점에서 지나온 2010년대를 진단하는 글과 다가올 근미래를 예감하는 글로 채웠다. ‘빛’ 혹은 ‘좋은 곳’을 열쇠어로 삼아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를 살펴보는 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비등단 시인들의 시집 발간이 갖는 의의를 짚어 보는 글, SNS 환경과 결합한 시의 양식을 논의하는 글이 우리 시의 지난 면면을 들여다본 사례라면, 포에트리 슬램과 시, 인공지능과 문학을 엮어서 논의한 글은 가까운 시기에 당면할 문제를 앞당겨서 고민해 본 사례에 해당한다.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2010년대 이후로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의 시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2010년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적 성취를 이루어 온 시인들의 시 세계를 다루고 있다.
2010년대 이후에 작성된 원고에서만 추리다 보니 자연히 그전에 쓴 비평 형식의 글은 책에서 모두 빠졌다. 차후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틀에 담아서 묶어 내고 싶은 바람이 있음을 붙이면서, 우선은 이 책으로 그동안 읽어 왔던 시와 시인에 대한 애정을 표하고 싶다. 더 밝은 눈으로 그분들의 시를 읽어 내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시’라는 업을 공유하며 동시대를 건너가고 있는 분들을 향한 애정은 누구 못지않게 진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라는 정체는 곱씹을수록 모르겠는 무엇이지만, 그걸 둘러싼 현장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고 앞으로도 창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첫 평론집을 세상에 내보낸다.
김선오의 시에서 짚었던 ‘색색의 귀환’에 이어 이제재의 시에서는 ‘파편의 아름다움’이 눈에 띈다고 할 때, 어쩐지 시단의 시계를 십수 년 전 미래파 시절로 되돌리는 듯한 저 수사(修辭)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덜기 위해 한마디 덧붙일 것이 있다. 시대에 따라 미학적인 감각과 윤리적인 감각의 양극단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시의 역사라지만, 철 지난 과거의 시가 그저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그대로 되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철 지난 과거가 철 지난 과거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던 지점을 고통스럽게 통과하면서 미래의 시는 온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미래의 시는 언제나 새로운 과거의 시다. 새로운 과거의 시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시가 아니라 뼈 아픈 성찰과 눈 밝은 통찰의 시간을 거듭 통과한 후에야 다시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시일 것이다. (「왜 다시 빛인가? 빛이어야 했는가?-빛의 걸음걸음과 지난 십 년의 시」, p.33.)
“나는 좋은 곳을 믿는다”라는(황인찬, 「순례」) 문장이 집약적으로 보여 주듯이, ‘좋음’에 대한 순정한 믿음은 윤리적인 감각이 강조되던 2010년대 시의 중요한 축(어쩌면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룬다. “좋은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좋은 곳을 상상하지 못했다”처럼(송승언, 「담장을 넘지 못하고」) 회의적인 시선도 없지는 않으나, ‘좋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가와 상관없이 ‘좋음’이 이 시기 시의 주요한 화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좋음’의 의미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빛’의 이미지가 2010년대 시에서는 이상하게 많이 보인다. 일일이 거론하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많은 시에서 지배종처럼 등장했던 시어가 ‘빛’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좋음’이 2010년대 시의 든든한 토양을 이룬다면, ‘빛’은 이 시기 시의 눈부신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나는 왜 ‘좋은 곳’을 믿을 수 없었나?」, p.40.)
돌이켜 보면 시단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 시는, 나아가 시단의 판도를 흔드는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곳에서 익히 아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우보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모양새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 왔던 등단 절차를 뛰어넘어서 갑작스러운 시집의 형태로 등장하는 시인들 역시 그 자체 예기치 않은 사례에 해당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예기치 않은 화법으로 예기치 않은 얘기를 들려주면서 뜻밖의 시 세계를 보여 줄 수도 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미래의 시를 앞당기면서 현재의 시단을 바닥까지 뒤흔드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지 못하리라는 장담 역시 할 수 없는 곳에서 미래의 시인들은 계속 태어난다. 새로운 시인도 계속 태어난다. 새로운 시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시적 정의를 새삼 문제 삼으며 등장한다면, 이 시대의 새로운 시인은 ‘시인이란 무엇인가?’ 혹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장한 채 등장하는 시인이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는 언제 시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내장한 시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 시인이 되는 것일까?-비등단 시인들의 시집 출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pp.51-52.)
인간의 창의적인 영역까지 잠식하면서 날로 발전해 가는 인공지능 기술을 감안할 때, 기성의 시에 준하는 혹은 기성의 시를 뛰어넘는 시 창작을 하는 인공지능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날고 기는 창작 기술을 장착한 인공지능이 나오더라도 거기서 유일하게 빠져 있는 것이 바로 몸이다. 시인의 몸이자 독자의 몸이며, 낭독자의 몸이자 청중의 몸이다. 이러한 몸과 몸이 만나 소리와 제스처와 땀과 웃음과 눈물로 공유되는 현장성은 아직까지 인간의 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낭독이든 슬램이든 일단은 들려야 한다」, p.64.)
지금까지의 창작자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할지라도 모두 인간이었다. 문학의 정의가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마지막까지 변치 않는 조건으로 남았던 것이 ‘창작자\u003d인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창작자≠인간’ 혹은 ‘창작자\u003d인간+인공지능’으로의 조건 변화는 그 자체 엄청난 파장을 예고한다. 문학장 안팎에 걸쳐 중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는 창작자 개념의 변화는, 기존의 창작자와 독자를 전혀 다른 문학, 어쩌면 문학이 아닐 수도 있는 문학을 각오해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 수 있다.
문학이 아닐지도 모를 새로운 창작 장르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현재로선 마땅한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막연히 올 것으로만 짐작되는,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만 온다면 의외로 가까운 미래에 들이닥칠 수도 있는 전인미답의 문학 환경은, 그동안 문학이라는 ‘오래된 집’에 거주해 온 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 pp.77-78.)
당연한 얘기지만, 시는 앞으로 변해 갈 것을 전제로 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변해 가는 것을 전제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틀어쥐고 있는 시가 앞으로 또 무엇을 쥐고서 움직여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자기 기질과 정서에 충실한 시를 써 대는 시인들이 있을 뿐이다. 어떤 기질은 운 좋게 미래의 시로 이어질 것이고 어떤 정서는 안타깝게도 과거의 시로 묻힐 것이다. 장차 어떤 운명을 맞이하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한 가지다. 자기 기질과 정서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어떤 ‘쓰기’를 수행하는 것. 그렇다면 하상욱의 짧은 글쓰기는 자신의 기질과 정서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일면 시의 자격을 갖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서 또 하나의 장르로서의 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한다. 극단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은 반드시 무언가 희생을 치르면서 온다. 그것이 무얼까? 대중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 (「서울 시 감상기」, p.85.)
직전 세대 미래파의 시가 의식 박약의 상상력을 선보이면서도 단 한 가지 포기할 수 없었던 지점이 시적 자의식이었다면, 김승일과 박성준을 포함한 2010년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자의식마저 휘발된 공간에서 시를 쓴다. 아니 시를 논다. 미래파에겐 제도권 시단에 안착하기 이전에 소외의 역사가 존재했고, 따라서 시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의식적인 투쟁의 과정이 어쩔 수 없이 존재했다면, 201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등단하자마자 제도권 시단으로부터 승인된 공간을 물려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시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불필요해졌다. 덕분에 미래파의 시가 의식 박약의 상상력 가운데서도 시를 ‘살아 내기’ 위한 고투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면, 미래파 이후의 시는 그러한 고투의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시적 공간을 잘 ‘놀아 내는’ 데 치중한다. 또한 미래파의 시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의 시는 이미 확보된 자기 세대의 시적 영역을 놀이터처럼 사용하는 데 열중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시의 전선을 넓힌 데서 미래파 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이후의 시는 그러한 전쟁터를 놀이터로 탈바꿈시켰다는 데서 직전 세대와 변별되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전쟁터에서 놀이터로 이행하는 시의 아이들-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박성준 시집 [몰아 쓴 일기]」, pp.90-91.)
[오늘 아침 단어]는 시적 대상을 둘러싸고 명멸해 가는 수많은 단어들의 기록이자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성큼성큼 활달한 보폭을 보여 주지 않는 과정을 답답해할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대상과 언어 사이의 거리를 차근차근 더듬고 두드리고 회의하면서 시로 다져 가는 그 방식에 신뢰를 보내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후자 편이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과 언어를 포함하여 세계는 그렇게 단숨에 읽히는 것이 아니므로. 섣부른 선언이나 잠언으로 나아가기 전에 세계를 손끝과 혀끝으로 섬세하게 더듬는 방식으로 세계의 “신비 혹은 공포”를(시집 뒤표지 글) 한 겹씩 한 겹씩 들추고 쓰다듬는 과정의 시. 그것이 유희경 시의 현재 지점이며 다음 시를 담보하는 밑천이며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시와 ‘아직’의 시간-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p.100.)
자칫 폭력의 현장이 될 수도 있는 문장의 규모를 최소화하는 방식의 말하기는 이 세계의 폭력을 고발하는 지점에서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인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을 분명하게 대립시켜 놓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로, 아니 한 발 더 다가선 채로 시선을 풀어놓는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세계를 이루는 폭력은 ‘나’를 이루는 폭력이기도 하다. 폭력의 현장을 짚어 내는 ‘나’는 관찰자나 증언자로만 그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의 내부를 이루는 일원일 수도 있다는 시선이 임솔아 시의 곳곳에 숨어 있다. 가령 「아홉 살」, 「티브이」, 「살의를 느꼈나요?」 등의 시에서 확인되는 세계의 폭력은 그대로 ‘나’의 폭력이 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폭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언제든 피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일 수 있으며 증언자인 동시에 방관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나’의 말은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는 곳에 임솔아의 시가 있다.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p.106.)
읽는 이에 따라 설령 오독이 되더라도 단번에 직관적으로 읽히는 문장은 그전에 먼저 쓰는 입장에서 직관적으로 튀어나온 문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시인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겠지만, 어떤 시인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계산이 자연스러운 직관이 될 때까지 문장 실험에 투신하는 시간을 한정 없이 늘려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시집 한 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실험의 시간이 당연히 더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정황을 구현하는 사례가 이번 시집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시편들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면, 그게 ‘과연’ 욕심일까? 욕심이더라도 그 ‘과연’을 껴안고서, ‘과연’에게로 끝까지 가는 극단의 여정을 응원하는 것은 여전할 것 같다. (「부자연이 자연이 될 때까지-한인준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p.111.)
이 시집의 소실점은 한 점으로 소실(消失)되는 지점이면서, 이제까지의 내면 공간을 모조리 태워 버리는(燒失) 지점을 함께 내포한다. 시집의 끄트머리에서 미친 듯이 반복되는 “숲이 타오르고 있어./숲이 타오르고 있어./숲이 타오르고 있어./숲이 타오르고 있어”는(「다른 여름의 날들」), 그리하여 등장인물 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니라 그의 입을 빌린 시인의 결연한 의지로 읽힌다. 모두 태우고 난 다음에 남는 것, 한 줌의 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을 각오하는 마음이 또 시인의 마음일 테니까. 불탄 숲은 그 자체 죽음이면서 재생을 상징한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환멸의 페이크와 소실점의 마음-장현 시집 [22: Chae Mi Hee], 양안다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 p.122.)
분류는 분류일 뿐 그 자체 ‘나’의 특성이나 고유성을 대변해 주지는 못한다. 특정한 분류 체계를 넘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류 체계를 동원하더라도 ‘나’라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특정하는 결과물은 얻지 못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 모든 분류 체계의 합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무엇이라면,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은 그 무엇에 근접하는 언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언어가 어떤 것이라고 얘기하기 전에, 적어도 그것이 기존의 분류 체계에서 나오는 언어와는 상당 부분 결별하는 언어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기존의 언어와 결별하는 지점에서 탄생하는 언어. 어쩌면 그것이 ‘나’의 정체성과 연동하는 언어이면서 한편으로 저마다의 기질과 성격에 충실한 시의 언어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슬픔에서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으로-정현우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p.127.)
사실상 그림자 말고는 더 보여 줄 것이 없는, 그것이 허공이든 허방이든 구멍이든 상관없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타자로 집약되는 그림자의 세계에서, 지금보다 더 뻗어 나간 최호일‘
005 책머리에
제1부
013 왜 다시 빛인가? 빛이어야 했는가?―빛의 걸음걸음과 지난 십 년의 시
035 나는 왜 ‘좋은 곳’을 믿을 수 없었나?
044 우리는 언제 시인이 되는 것일까?―비등단 시인들의 시집 출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055 낭독이든 슬램이든 일단은 들려야 한다
066 ‘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
079 서울 시 감상기
제2부
089 전쟁터에서 놀이터로 이행하는 시의 아이들―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박성준 시집 [몰아 쓴 일기]
098 ‘한 사람’의 시와 ‘아직’의 시간―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103 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108 부자연이 자연이 될 때까지―한인준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112 환멸의 페이크와 소실점의 마음―장현 시집 [22: Chae Mi Hee], 양안다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
123 말할 수 없는 슬픔에서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으로―정현우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137 하지 않은 상태로 하는 말의 심연―최호일 시집 [바나나의 웃음]
156 ‘기린 없는 그림’은 어떻게 ‘기린 그린 그림’이 되었나?―송기영 시집 [.zip]
174 융기하는 뿔과 함몰하는 구멍의 언어―신성희 시집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
제3부
193 당나귀로서의 문학, 소리로서의 시―심보선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198 끝의 언어에서 속의 언어로―최규승 시집 [속]
208 너 혼자가 아니야, 단어야―오은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234 비참하게,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박판식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250 생의 반환점과 시의 전환점에서 다시 불러내는 말―김현 시집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257 행진하라, 기억이여―신해욱의 근작 시
266 최소의 이미지와 심연의 리듬―이원의 근작 시
280 끝없는 흐름과 멈춤의 양가감정―안태운의 근작 시
285 내가 모르는 내 얼굴이 짓는 표정―이현승의 근작 시
290 삶의 온갖 엇갈림을 풀어내는 시―정재학의 근작 시
294 이 세계가 조금 흔들리는 소리―유계영의 근작 시
298 발표 지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