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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시리즈 : 걷는사람 시인선 [15]

윤석정 저 | 걷는사람 |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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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1262186 / 136쪽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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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페라 미용실』을 냈으며 2016년 내일의 한국작가상을 수상했다.

머리말

지난 십 년 나는 나를 걸쳐 입고 나의 바깥을 맴돌았다. 간간이 시를 썼고 누구에게도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제 바깥의 반대편을 모르겠다. 반대편 입구는 아예 없어졌거나 어딘가로 숨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이대로 살아야 할 것만 같았고 막연히 견뎌야 할 것만 같았다. 시 쓰는 일을 그만두면 바깥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십 년 동안의 시를 한데 엮으며 알았다. 시가, 그리고 무궁한 당신들이 나의 바깥이었다는 것.

2021년 1월
윤석정

책 속에서


작품 속으로

길보다 긴 퇴근길의 멱살을 잡아 막고깃집 구석 자리에 앉혔다 돼지고기 탄내가 어둠에 뒤섞이면서 한 번뿐인 이번 생은 망했다고 어둠이 소화가 덜 된 어둔 살을 게워냈다 오갈 데 없는 고양이가 길 잃은 살들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취한 생들이 앵앵거렸다
배고픈 짐승에게 양심 있는 사냥이 있을까 양심보다 불룩한 배 속에 구운 살코기를 쑤셔 넣었다 발톱을 감춘 고양이의 눈초리가 살짝 흔들렸고 흐느적거리는 생의 살들을 맛보듯 혀를 날름거렸다 어둠이 어둔 살을 다 게워내도록 사냥터에서 나갈 길을 지우고 있는 단 한 번뿐인 생들 살길을 따라 고양이보다 살살 사냥터를 거닐었다 막막하게 막고깃집 건너편 막고깃집 옆 막고깃집 건너편 막고깃집 옆 막고깃집 건너편을 헤매듯이
막고깃집 구석 자리에 엎드린 돼지가 안 돼지, 망할, 돼지, 살면, 돼지, 살자, 돼지 취한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살자, 돼지」 전문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시집들
사이에
꽃 한 다발을 마냥 올려놨다
며칠이 지났는데
꽃이 시들지 않았다
화병에 꽃을 가지런히 꽂았다
꽃은 줄기가 잘려도
뿌리를 잊지 않았을까
꽃잎에 생기가 돌았다
식탁에 앉은 아내가
웬 꽃, 물었다
꽃이 죽은 줄 알고
버리려다가 살아 있어서,
나는 얼버무렸다
아내는 시적이라고 했다
요사이
아무렇게나 살았던 나는
낯이 화끈거려서
잠자코 밥알만 씹었다
─「시적인 실업」 전문

내 손이 닿지 않는 거기쯤 당신이 고요히 앉아 있다 나무는 새가 새는 바람이 바람은 구름이 구름은 비가 비는 꽃이 꽃은 물이 그리울 때마다 등이 가려웠고 등에서 등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그날 당신은 등을 두드렸고 등을 돌렸고 등을 떠밀었다 뒤돌아보게 하는, 뒤돌아봐도 볼 수 없는 당신은 아련한 등이었다
─「등」 부분

느닷없이 배달된 상자를 풀어 보니
텃밭에서 자란 봄이 옹기종기
내게 반질반질한 연둣빛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 한 움큼 들어 올리니
상자에 동봉된 어머니 얼굴이 나왔다

텃밭에 무더기로 봄이 왔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한 글자의 퇴고도 없이
반나절 이렇게 편지만 썼을 것이다

통화 몇 초로 전할 수 없던 봄
내가 인연에게 밤새 편지를 쓴다 한들
내 언어로는 완연한 봄을 쓸 수 없다

지금쯤 어머니는 텃밭에 글자들을 심어 두고
여름 편지를 쓸 준비에 바쁠 것이다
그렇게 봄날은 간다고 주근깨 같은 글자들이
봄볕에 그을린 어머니 얼굴에 박혀 있을 것이다
─「봄 편지」 전문

절박한 말들이 절망할 테니 쉽게 말 못 할 말이거든 말을 말자

그는 탄가루와 땀내가 뒤섞인 작업복을 입었다가 벗는다고
문장의 모서리를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비탈진 언덕을 다급히 기어오르는 눈발을 보았다고
문장의 끝을 만지면 이루지 못한 사랑처럼 아팠다고
밤새 마음에 불 지피려 했던 그는 어리석었다고
눈 그치자 이력서를 들이밀듯 뜨는 별들을 보았다고
밤하늘에 구멍을 뚫고 나온 막장의 말이었다고
그때는 난로 옆에서 코 벌렁거리는 연탄을 보면서
그도 발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이른 아침 버스는 고래 등허리 같은 산山을 지났고
그의 주머니에서는 쉽게 쓰지 못한 문장들이 오물거렸다고
난로 옆에 앉은 그는 어쩔 수 없이 미혼이었다고
떠난 사랑이 남긴 잿더미를 쇠수레에 담다가
오래 퇴적해 응어리진 행간을 파헤치고 파냈다고
읍내 장터를 떠돌던 눈발처럼 그는 낮아졌다고
인력 사무실 갈탄난로에 불을 댕겨도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고
행간이 깊어진 절박한 말들을 구겨 난로 안에 던지려 했다고

나는 십여 년 만에 그의 문장들이 매장된 휴지통을 비웠다
─「말 못 할 말—백수광부白手鑛夫」 전문

돌아보니 저녁이었다
집에서 빈둥빈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직장에서 업무에 몰두해도
저녁은 오겠지만
저녁이 점심을 당기는 동안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가
갓 태어난 시간들을 뭉치면서 놀았을까
나는 점심을 잊은 것을
저녁이 되어서야 알았다
하루를 뭉치면 일주일이 뭉쳐졌고
일주일을 뭉치면 한 달이 뭉쳐졌다
눈덩이를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 듯
아이는 아내의 배 속에서 열 달 동안
둥글게 시간들을 뭉치면서 자랐다
돌아보니 아침이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면서
시간을 펼치려고 자주 시계를 봤지만
매일 잠의 눈꺼풀이 두툼해진 아침이었다
우주가 한 덩이 뭉쳐 놓은
지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침이 아침을 보내기 바빴다
어느 날 간판을 바꾼 식당
옛 간판과 주인의 얼굴을 떠올려도
직장을 떠난 동료의 이름을 떠올려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게 두루뭉술하게 뭉쳐졌고 까마득했다
나는 시간을 뭉치면서 자라는 게 아니라
지구에서는 제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어김없이 녹아내릴 눈사람이었다
돌아보니 아이는 지금까지
내가 뭉쳐 놓은 시간들을 펼치고 있었다
─「뭉치는 시간」 전문

두통

머리가 아프다 날마다 잠이 부족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머리가 깨지면 죽을 수 있다 추워서 더워서 죽겠다 좋아서 미워서 배불러서 배고파서 우리는 죽겠다 도돌이표 그렇게 죽으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우리는 죽는다 죽을 것 같다 도돌이표 살아야 한다는 변주곡을 듣는다 풍진 세상의 아픈 도돌이표

안부

날이 풀리자 꽃이 핀다 날이 꽃을 시샘하자 꽃이 견디다 진다 애인이 생기자 세상이 핀다 애인이 떠나자 세상이 견디다 진다 세상이 어두워지자 리듬을 잃어버린 우리는 울부짖는다 우리의 리듬은 야생음표 우리 속에서 날마다 울울창창하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생음표는 피고 견디다 진다

잠

돌고 돌던 시간을 잠재우다 잠시 잠든 사이 싸운 우리가 피곤한 우리가 취한 우리가 사랑한 우리가 숨 고르며 고랑을 일구던 시간을 잠이라 한다 어제는 잠 속에서 유서를 써 놓았는데 잠을 통과하니 오늘은 봄이다 아팠던 우리가 졸음에 겨운 우리가 순한 우리가 숨 고르던 우리가 잠을 음악이라 한다
─「우리의 음악」 전문

목차

1부 어둠이 어둔 살을 다 게워내도록
스물
마흔
커서의 하루
미지의 나날
어깨들
살자, 돼지
잃어버린 도장
오늘의 정류장
거미집
코끼리들
지금의 근원
절필
물고기가 헤엄친다
엉덩이

2부 시간을 뭉치면서 자라는
시적인 실업
등
아스라한 국경
얼굴의 노래
봄 편지
곡우
고백의 형식
최초의 말
봄봄
박꽃
뭉치는 시간

3부 비의 심장을 두드리는 새
말 못 할 말
밤의 병원
빨래
누가 낙타를 죽였을까
자라는 돌
우리의 음악
비의 발성법
우거진 봄
아픈 말
강의 간섭
복어는 복어다
종이 인형
로봇 0호
달 스위치

4부 아무도 모르게 찬연하다가
앉은잠
꽃의 시말서
불쌍한 인간
말 못 할 말 2
21그램
노래 아닌 노래
불춤
당연한 일
집 나간 옆집 개
항하사
당신은 누구인가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우는 냉장고
아빠 생각

해설
야생의 음표
- 노지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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