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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 교역의 중심, 동·남중국해를 둘러싼 패권 전쟁

마이클 타이 저 | 한승동 역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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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062072 / 344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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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된 중국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무대로 중국과
그 주변국들 간에 전개되는 교류와 반목의 역사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인구수를 기록한 중국은 동서양 교역의 거점으로서 아시아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강자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중국은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남쪽으로는 베트남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에 사회문화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물론 중국이 역사 속에서 항상 승자였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이후로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 치여 반反식민지 국가로 추락했고, ‘국공내전’으로 정치적 혼란도 겪었다. 오늘날은 동·남중국해의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주변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저자인 마이클 타이는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를 통해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아시아의 정세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전문적인 역사 지식이 없더라도 아시아 역사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게 가능하다.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는 우리가 몰랐던 중국과 그 주변국들 간의 관계사를 다룬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비롯해,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동·남중국해의 영토 분쟁과 중국의 급부상 등의 현재사現在史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아시아 역사를 다룬다. 저자가 기술하는 중국과 일본, 류큐 왕국,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의 성립 기원과 경제사, 풍속사 관련 내용들은 우리가 교과서나 다른 부수적인 자료로도 배우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시아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관련성을 통해 우리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현안이 되고 있는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나 아시아 국가를 향한 중국의 지배력 행사의 의도를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16세기까지 오키나와에는 독립된 왕국이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시아의 숨겨진 역사들 중국은 아시아 문화권 형성에 있어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기원전 2,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황허문명은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와 더불어 왕조王朝의 존재, 국가 통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사료를 남겼다. 오랜 문명사를 지닌 만큼 중국은 고대부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마이클 타이는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를 통해 고대부터 현재까지 경제사와 문화사의 측면에서 중국과 중국인이 주변 국가들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경제적인 교역을 목표로 주변국들과 교류함으로써 중국인들은 그 지역에 걸맞은 방식으로 적응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즉,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등지로 유입된 중국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과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도 마다하지 않는 등, 적극적으로 그 지역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채택한다. 중국인들의 ‘섞임’의 방식의 접근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력으로 침탈했던 방식과 전혀 다르며, 이러한 방식은 각 지역의 ‘혼혈민족사회’ 구성으로 나타난다. 중국인과 지역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소’들은 사회 엘리트로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거나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맞서는 등, 사회 변화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동안 우리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에 대해, 그 민족에 대해 범박한 ‘앎’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를 통해 우리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아시아 역사의 전체 지형도를 다시 그리면서 이해의 폭을 확장시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 저자 : 마이클 타이
저자 : 마이클 타이 (Michael Tai)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인 마이클 타이는 케임브리지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중국과 영국, 키르기스스탄, 벨라루스 등에서 강의를 해왔다. 지은 책으로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China and Her Neighbours》 《21세기 미중 관계US-China Relations in the Twenty-First Century》가 있다.

역자 : 한승동
195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다녔다. [한겨레] 창간 기자로 합류해 국제부장과 문화부 선임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종전의 설계자들], [들어라 와다쓰미의 소리를], [인간 폭력의 기원],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재일조선인], [나의 서양음악 순례], [속담 인류학], [멜트다운] 등이 있다.

역자 소개

  • 역자 : 한승동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한겨레》 창간 기자로 합류해 국제부장과 문화부 선임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 걷어차기》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사피엔스와 바이러스의 공생》 《국체론》 《완전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종전의 설계자들》 《1937 이쿠미나》 《정신과 물질》 《책임에 대하여》 《인간 폭력의 기원》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등이 있다.

책 속에서

● 일본에 관한 좀 더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기원후 57년, 왜倭 사절단이 한나라 궁정에 도착해 앞서 얘기한 금인을 받았던 시기에야 나온다. 왜인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중국 기록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조선Korea의 남동쪽에 있는 산이 많은 섬(아마도 규슈를 말하는 듯)에 살았고, 100개가 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사절단과 문서를 통해 한나라 궁정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왜인들은 맨발로 다녔고, 대나무나 나무 그릇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집어 먹었으며, 수백 살까지 살았다. 그곳은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구분이 없는’ 평등사회였다. 중국인들이 일본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약 200년 뒤인 기원후 240년 위魏(220~265)나라 사절이 갔을 때였다. 그 뒤 풍성한 역사를 지닌 다채로운 일본을 보여주는 정보를 남긴 당唐(618~907) 왕조가 몰락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사절단을 교환했다. ……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발끝으로 걸어 다니고, 치아를 검게 칠했으며, 중국의 거북 등껍질 점괘와 비슷한 점占을 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고,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다.
―<1장_중국과 일본>, 21쪽.

● 류큐 왕국은 1609년 일본 무사들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독립 왕국으로 번영했다. 류큐는 일본 남부의 섬 규슈에서 타이완섬에 이르는 사슬 모양 섬들의 일부를 구성한다. 류큐인들은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혈통이 다르다. 평화롭고 온화한 류큐인들은 말레이와 몽골, 그리고 아이누의 혼합 혈통으로 보인다. 짙은 안색과 둥근 눈, 곱슬머리를 지녔다. 일본인들은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생선을 먹는 반면 류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이런 음식물 선호는 일본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 …… 왕국의 수도는 중계무역에 아주 적합한 곳에 자리 잡았으며 거의 2세기 동안 중국, 일본, 조선, 베트남, 자바, 루손, 샴, 파타니Pattani(타이 남부 지역-옮긴이), 말라카, 팔렘방, 그리고 수마트라와의 해양교역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교역품은 일본제 은과 칼, 칠기와 병풍, 중국제 약초와 동전, 유약 바른 도자기, 양단(비단)과 직물, 동남아시아에서 온 소방목蘇方木, 코뿔소 뿔, 주석, 설탕, 철, 그리고 인도의 상아와 아라비아에서 온 유향 등이었다.
―〈2장_류큐 왕국〉, 49~50쪽.

● 베트남 민속에 따르면, 베트남의 최초 왕인 데 민Đế Minh(帝明)은 중국의 신성한 통치자의 자손(중국 신화에 나오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3대 후손-옮긴이)이다. 데 민의 손자 락롱꾸언Lạc Long Quan은 불사不死의 중국인 어우꺼Au Cơ와 결혼했고, 어우꺼는 10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부부는 나중에 갈라서는데, 어우꺼가 아들 50명을 데리고 고산지대에 정착했고, 락롱꾸언은 나머지 아이들과 골짜기에 남았다. 락롱꾸언의 맏아들 훙브엉Hung Vương(雄王)이 베트남 첫 왕조 홍방Hồ ng Bang(鴻龐)을 세웠는데, 기원전 2879년에서 기원전 258년 사이에 통치했다고 한다. 이 주목할 만한 전설은 이들 초기 베트남 왕들의 어머니가 중국인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언어 연구 결과는 베트남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온 말레이 폴리네시아 계통 사람들임을 시사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락Lạc(雒)족이라고 했고 그들의 왕은 반랑Vă Lang(文朗, ‘문신을 한 사람들의 땅’)이라 불렀다.
―〈3장_베트남〉, 67쪽.

● 1964년 존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 베트남 파병 미군은 3,500명에서 1968년까지 54만 3천 명으로 급증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1914~2005, 1964~1968년에 베트남전쟁을 지휘했으며 1968~1972년에는 미 합참의장을 지냈다-옮긴이) 장군은 단순한 주요 시설 보호 차원을 넘어 남부지방 전역에서 무자비한 ‘수색과 파괴’ 임무를 수행할 군대를 보냈다.29 적은 베트콩Vietcong(越共, Viet Nam Cong 또는Vietnamese Communists의 약칭-옮긴이)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었는데,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다. 이는 민족해방이라는 같은이데올로기와 목표를 공유했지만, 북베트남과는 다른 남베트남의 운동조직이었다. 베트남전쟁은 극도의 흉포함과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었다. 다시 정권을 잡은 뒤 존슨은 북부 베트남에 대한 공중 폭격을 명했는데, ‘롤링 썬더Rolling Thunder’라는 암호명 아래 지속적으로 작전을 벌여 미 공군기들이 64만 3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지역에 투하된 50만 3천 톤을 능가했다.
―〈3장_베트남〉, 92쪽.

● 400년에 가까운 스페인 통치 기간은 잔인함과 무능력, 인종차별주의로 점철됐다. 광산업과 농업은 낙후돼 있었지만, 수천 명의 스페인인은 부정부패와 징세로 부자가 됐다. 엔코미엔다 체제encomienda 아래서 원주민들은 스페인인들에게 할당돼 노예 취급을 당했다. 스페인인들이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할지라도 엔코미엔다는 부정부패와 인종차별주의를 키우고 가톨릭교회를 위한 개종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에 그런 이익은 부수적일 뿐이었다. 전도하러 온 도미니크회 수사들,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 그리고 프란체스코회 수사들Franciscans은 곧 북부 섬들에서 거의 50만 에이커에 달하는 상등급 땅들과 마닐라 중심부의 가장 비싼 부동산을 지배하게 된다. 그들은 그 땅을 원주민들에게 소작지로 빌려주고 주민들을 도로와 교회, 수도원 건설 노무자로 강제동원했다.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이 오기 이전의 필리핀 문화를 하찮게 여겼고, 원주민들을 ‘걷고, 먹고, 잠자면서 존재하는 기계’로, ‘어떤 단일한 특정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감정의 혼란, 본능, 욕망, 에너지, 격정, 색깔 등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불완전한 전체’로 간주했다.
―〈4장_필리핀〉, 116~117쪽.

●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지 몇시간 뒤 타이완을 출발해 루손섬 해안에 상륙했다. 침략군은 신속하게 진군해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장악했다. 필리핀 주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장군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으로 1942년 3월 12일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가 일본군에게 체포당하는 것을 피했다. 미군의 패배는 그해 4월 바탄반도Bataan Peninsula(루손섬의 마닐라만을 에워싸고 있는 왼쪽 반도 지역-옮긴이), 그리고 5월에 코레히도르Corregidor(마닐라만 입구에 떠 있는 작은 섬-옮긴이)에서 미국-필리핀군이 항복함으로써 마무리됐다. 마닐라를 점령한 다음 날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1888~1946) 장군은 “미국의 압제로부터 필리핀인들을 해방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제 필리핀인들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圏 안에서 자유롭게 “필리핀인들을 위한 필리핀”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고 선언했다.
―〈4장_필리핀〉 135~136쪽.

● 말라카는 말라카강 어귀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주민은 고기잡이와 해적질로 살아가던 원시마을을 건설한 원말레이 인종Proto-Malay race인, 바다 유목민 생활을 하는 오랑라우트Orang Laut의 소수 부족 집단이었다. 1400년 무렵 시암인들이 투마시크Tumasik(오늘날의 싱가포르)를 파괴하자 거기서 탈출한 말레이 족장들이 밀려들었다. 그들 중에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1344~1414)라는 말레이 족장이 있었는데, 그는 그 마을을 북적거리는 수출입 화물 집산지로 만들었다. 중국 기록에는 말라카의 초기 무역 발흥기에 대한 내용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마환馬歡과 비신費信이 남긴 기록, 그리고 명나라의 정사正史다. 이는 15세기 중국-말라카의 관계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말라카 해협의 가장 좁은 길목에 자리 잡은 전략적 위치 덕에 말라카항은 동서 교역으로 번성했다. 인도와 중국에서 오는 배들이 말라카로 물품을 실어 왔고, 부려진 물품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배들에 실려 다음 기착지로 운반됐다. 이런 식으로 말라카는 서방과 인도에서 온 상품과 또 중국, 동인도와 인도차이나에서 온 상품들이 교환되는 거점이 됐다.
―〈5장_말레이시아〉 149쪽.

● 전쟁 시기 일본군의 최대 성취 가운데 하나는 말라야와 싱가포르 점령이었다. 하와이 진주만 공격 70분 전인 1941년 12월 8일 자정 직후부터 침공이 시작됐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최초의 주요 전투였다.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1885~1946) 육군 대장 휘하의 제25군 부대는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동북 연안에 상륙했다. …… 그다음 날 영국이 자국 최대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 두 척을 태평양으로 보냈다. 두 척은 시암만에서 일본군의 해상 침투를 저지하려 했으나 바로 그다음 날 일본군의 공습으로 침몰해 그 지역에서 영국 해군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코타바루 비행장은 일본군에게 제공권을 안겨주었다. 한물간 연합군 항공기들은 일본의 최신예기 제로Zero 전투기에 어떻게 해볼 여지도 없이 압도당했다. 7만 명의 일본군이 14만 명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방어군과 겨룬 전투였음에도 말이다. …… 영국군은 1월 30일 밤에 서둘러 싱가포르까지 후퇴했으나 섬으로 진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삽시간에 방어군을 압도해버려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Arthur Percival(1887~1966) 장군은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했다. 그 전투는 고작 70일 만에 끝났다.
―〈5장_말레이시아〉 178~179쪽.

● 또 하나의 잠재적 화약고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동중국해East China Sea다. 댜오위다오(조어도釣魚島) 또는 센카쿠열도尖閣列島는 타이완 북동쪽으로 190킬로미터, 중국 대륙에서 동쪽으로 4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9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열도다. 이 섬들은 동중국해에서 총 6.3제곱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지만 1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지닌 섬은 단 2개뿐이다. 가장 큰 것이 4.3제곱킬로미터이며, 5개는 바위투성이의 황량한 섬이고 모두 무인도다. 중국도 일본도, 1968년에 그 섬들 주변 해역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국제연합(유엔) 보고가 나올 때까지는 별로 거론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국외자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 동안에는 친중국적 입장이었으나, 냉전이 진행 중일 때는 외교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지금은 친일본 태도를 취하고 있다.
―〈6장_영토 분쟁〉 209~210쪽

2004년 3월 24일 미 국무부는 “센카쿠(댜오위)섬들의 영구적인 주권 문제에 대해 미국은 (특정)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오래 견지해온 관점이다”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미국 의회의 미-중 경제 및 안보재검토위원회는 2006년의 연례 보고서에서 중국이 “무력 사용 위협을 가하거나 실제로 무력을 사용해서 영토 주장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풀어가기 위해 더공 세적인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경제력 증대는 워싱턴 일각에 우려를 불러일으켰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는 약화한 데 반해 중국의 입지는 강화되어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2010년에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고, 이젠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은 이들 섬의 영토 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를 버리고, 그들 섬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일본을 지원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6장_영토 분쟁〉 218쪽

● 은의 고갈과 함께 중국인 아편 중독자가1 838년에 400만에서 최대 1,200만 명까지 급증해 엄청난 경제・사회적인 피폐를 초래했다.…… 임칙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격한 내용의 편지로 끔찍한 아편 무역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여왕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빅토리아 여왕 조정은 자국 식민지 인도에서 원정대를 파병했고, 그들은 일련의 전쟁을 통해 중국 해안지대를 황폐화했다. 열세에 놓인 중국은 1842년에 화평을 청했고, 영국에 치외법권을 허용한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은 항구 5곳을 개항하고 홍콩섬을 할양했다. 그리고 아편을 파기한 대가로 600만 달러(오늘날의 1억 7천만 달러 상당)의 보상금을 영국 정부에 지불한 데다, 전쟁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오늘날의 3억 4천만 달러 상당)를 추가로 지불했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하는 금액은 해마다 급증해 1854년에 중국으로 수출하는 금액의 9배에 달했다. 중국은 영국 제품을 구입할 필요가 거의 없었으므로, 영국은 아편 무역을 통해서만 그 적자를 메워 무역 수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7장_중국과 세계질서〉 230~231쪽.

목차

서문
- 과연 세계는 중국을 믿을 수 있을까?

1장_중국과 일본
2장_류큐 왕국
3장_베트남
4장_필리핀
5장_말레이시아
6장_영토 분쟁
7장_중국과 세계질서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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