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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2464252 / 344쪽 176 x 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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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임진왜란에 대한 뼈저린 반성의 기록, 백성의 아픔에 처절하게 공감한 지도자
『난중일기 - 종군기자의 시각으로 쓴 이순신의 7년 전쟁』에 이은 징비록 르포
2020년, 대한민국은 창궐한 코로나로 일상이 멈추는 집단적 공포를 겪었다. 그러나 임진년에 터진 왜란은 무려 7년 동안 백성의 삶을 뿌리까지 파괴했다. 그 공포와 고통은 상상조차 두렵다. 영의정의 자리에서 밀려오는 왜적에 맞서 전란을 진두지휘한 유성룡은, 지도자의 나태와 무능이 백성에게 미치는 생생한 고통을 목격하고 후세를 경계하는 징비록을 남겼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백성의 아픔에 처절하게 공감한 몇 안 되는 지도자였다. 이것이 백성의 역량을 결집해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성룡 사후,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거행된 조선조 최초의 ‘백성장’이 이를 잘 증명한다.
출판사 리뷰
당파를 초월한 현실적 합리주의자, 재상 유성룡의 7년 전쟁
종군 기자의 시각에서, 징비록과 선조실록에 담긴 임진왜란을 르포 기사로 재조명
유성룡의 징비록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과 일부 사료를 참고, 임진란의 전황과 유성룡의 삶을 기사형식으로 재구성한 책 『징비록(懲毖錄) - 종군 기자의 시각으로 회고한 유성룡의 7년 전쟁』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골격으로 삼았고, 선조실록을 비롯한 다른 사료는 보완자료로 활용했다. 징비록이 전란 이후의 기록인 만큼 유성룡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재상이 분명하지만 부분적인 착오는 불가피하다고 보아, 전란을 기록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참고해 일부 수치와 일자를 조정했다. 단 정치적인 이유로 후세에 짜깁기된 선조수정실록의 날짜는 참고하지 않았다.
- 르포와 스트레이트 기사를 병행
기사는 대부분 르포 형태로 전개, 전쟁의 양상과 백성의 고통을 사료에 기반해 전개하는데 주력했고,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병행했다. 임진년(1592년)과 같이 짧은 기간, 전황이 숨 돌릴 새 없이 진행되면 독자들이 이를 한눈에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간결하게 서두에 건조체 형식으로 제시했다. 르포 기사는 관찰자 시점으로 작성했고, 궁궐 및 전장의 출입 기자를 전제로 사료에 기반했다. 아주 제한적으로 나름의 직관과 상상을 동원했다. 사료에 있는 인물 코멘트는 본래 한자로 번역, 기록되는 과정에서 한 차례 변형을 겪은 만큼 그 본뜻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급적 일상어로 복원했다. 기사 전개과정에서 일부 논평이 개입하고 감정이 이입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설픈 문학적 상상력을 끼워넣지 않았다.
유성룡의 막역한 지기(知己)이자, 전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해전은, 졸저(拙著) 난중일기 - 종군기자의 시각으로 쓴 이순신의 7년 전쟁 - 와 일치해, 대부분 스트레이트 기사로 짧게 처리했다. 다만 명량과 노량해전은 징비록에서도 깊게 다루고 있어 압축, 인용했다. 조선 수군이 최초로 패배한 칠천량 해전은 선조실록의 기록을 충실히 따랐다.
- 전란의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선조실록을 보완자료로 활용
기사는 유성룡이 사망한 1607년(정미년)에 프롤로그 형식으로 출발, 손죽도 왜변이 일어난 1587년(정해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후부터는 시간에 따라 전개된다. 유성룡이 정계에서 은퇴한 1598년(무술년)에 사실상 마무리된다. 따라서 부분적인 회고체식 서술이 동원되었다. 조선 조정의 당파 논쟁과, 전란의 종합적인 전개 과정 및 전장의 참상 등 징비록에 없는 장면을 실록에 기초해 다소 포함시켰다. 전란에 대한 기초적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 명나라군대와 협상 과정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주력
기사는 불필요한 민족주의적 감정에 빠져, 전란에 기여한 명나라 군대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이들의 횡포만을 부각해서 폄하하지 않고, 선조실록에 기초해 이들의 공과를 가감 없이 담으려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조선군의 활약과 무능, 전시 중 시행된 일본군의 조선 점령 정책도 여과 없이 담았다.
기사는 이와 함께, 명나라 유격 심유경과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도한 오랜 강화협상의 실체를 제시하는 데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들이 글을 모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이고, 이른바 단순하게 사기극을 벌였다는 기존의 ‘드라마적 해석’을 버리고, 조선과 명, 그리고 일본 간 3국의 외교적 지위와 현실적인 동북아 국제 관계를 반영해, 베일에 가린 협상의 내막을 파헤치려고 시도했다. 특히 변방의 오랑캐국가에서 중국 중심의 외교 질서에 편입되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던 당시 일본의 상황을 토대로, 치열한 외교전의 실체를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 유성룡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맡겨, 국난을 이기는 지혜
징비록은 임란전체에 대한 종군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실제 유성룡 자신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유성룡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담은 서술은 사실상 선조실록을 비롯, 다른 보완자료를 광범위하게 참고했다. 특히 유성룡이 전시 중 설치한 훈련도감이나, 각종 군제, 세제의 개혁정책은 유성룡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다른 사료를 인용 첨가했다. 전란 이후 유성룡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징비록은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 유성룡이 그를 추모하는 글, 이른바 ‘졸기(卒記)’로 마무리된다. 유성룡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시각에서 재조명했다는 사실을 참고해야한다. 저자는 유성룡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평가는 독자에게 맡긴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유성룡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기축옥사의 전개, 그의 탄핵 과정, 퇴임 후 행적 등 징비록에 없는 부분이 다소 포함되었다.국가의 존망이 걸린, 참혹한 전쟁이 7년 동안 이어졌다. 재상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현실성에 기초한 합리성을 부단히 추구했고, 각종 전시 개혁 정책을 쏟아냈다. 전란 이전부터 방비를 외쳤고, 정치적 사활을 걸고, 통제사 이순신을 지원했으며, 통제사가 전사한 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후세를 경계하는 글, 징비록을 남겼다. 코로나로 일상이 멈춘 2020년 대한민국, 그런데 임진왜란의 공포와 고통은 그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재상 유성룡에게서 국난을 이기는 지혜와 인내를 배울 수 있다고 저자는 밝혔다.
- 유성룡의 생애와 징비록에 대한 기자 시각의 해석에 부쳐
유성룡은 기자들에게도 많은 글쓰기 교훈을 준다. 철저히 두괄식이고, 사실을 덧붙이며, 이순신에 대한 일부 평가를 제외하면 교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을 내세우며, 이후 사실을 짜깁기하는 다른 신료들의 상소문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징비록도 정치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선조에 대한 정면 비판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조실록에 따르면, 유성룡은 군왕에게 ‘필부(匹夫)’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선비였다. 그래서 행간을 거듭 곱씹으며 감정을 이입해 보았으며, 하필이면 왜 그 사실을 기록했는지도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둘러싼 주변 이야기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역사서에는 권위가 고드름처럼 피어난다. 이러한 고드름이 엉키면서 자구(字句)에 대한 지엽적인 해석이 지붕을 덮어버린다. 문헌과 고증에 대한 잘잘못을 내세우며 권위를 내세우면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에 대한 이해는 일정한 틀에 갇히고 만다. 기록과 텍스트만으로 채워진, 역사박물관이 과거를 통해 현실을 되새기려는 갈증을 채울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고드름을 제거하고 역사속 삶을 우선 조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기자시절, 출입처가 바뀌면 오래지 않아 용기를 내 기사를 쓰고는 했다. 기자는 행정 관료의 전문성을 갖추지 않아도, 그들의 일이 독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결과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징비록을 보완하는 산더미 같은 사료 앞에서 때로 좌절했지만 사료를 출입처로 삼아 기자의 논리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개별 사료의 가치를 과감하게 판단하고, 상식적인 직관을 동원해 기사로 풀어보았다. 어쩌면 궁궐 출입 기자를 해보고 싶은 인문학적 상상력이 이 책을 쓰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2020년, 타국에서 창궐한 코로나로 대한민국은 감염의 공포와 일상이 멈추는 집단적 시련을 겪었고, 슬기롭게 고비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이 체험은 임진년에 터진 전란과는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선조들이 견디어 낸 전란의 고통과 공포, 매일매일 생사를 오가던 참혹한 삶은 상상조차 두렵다.

3월 들어 무르익은 봄볕이 따사롭다. 이 봄기운이 전란중의 백성들에게 잔인한 보릿고개의 서막을 알린다. 전란 없는 평화시절에도, 지난해 추수한 곡식이 떨어지면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 초근목피와 구걸한 음식으로 연명했다. 파종조차 못하고 버려진 논밭에는 잡초만 군데군데 머리를 내민다.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공출과 부역은 그칠 새 없어 굶주림과 죽음이 일상을 지배한다. 산 자의 낯빛과 죽은 자의 그것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오늘 붙은 숨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미지의 공포에 불과하다. 누더기 같은 상복 차림의 피란민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유성룡이 사령부를 꾸린 동파역 인근에 모여든다. 퀭한 눈빛으로 혹시 모를 한 줌 곡식을 애처롭게 구걸한다. 부총병 사대수가 파주 역마 길가에서 말을 멈추고, 갓난아이를 가슴에 품어 군영에 들어온다.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었다. 요행히 연민의 눈을 가진 사대수에게 띄면서 전란의 처절한 고통에서 한 아이가 살아남았다. 군중에 맡겨 미음을 먹이라고 지시한다. 명나라 진중에서 조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이유였다. 유성룡이 고개를 숙인다. 담대하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한양성에 도사린 왜적은 날을 세우며 백성들을 도륙한다. 삶과 죽음의 거리가 좁혀질 대로 좁혀져 ‘백지 한 장’에 불과했다.
- 계사년 기사 중에서
의병은 부모와 자식들이 뿌린 피를 자양분 삼아, 맹독을 품은 독버섯처럼 조선 산야에 번져갔다. 전시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들꽃 향기를 품고 살아갔을 것이다.
- 임진년 기사중에서
무너진 진주성은 평지처럼 변했다. 촉석루는 불에 타 앙상하게 기둥만 남았고, 성 안에 쌓인 시체가 무너진 성벽의 높이를 채웠다. 촉석루에서 남강 북쪽 강기슭까지 시체가 겹겹이 쌓여 강물의 흐름을 가로 막는다. 남강이 조심스레 시신을 감싸며 하나둘 이들에 대한 장례를 치른다. 남강 일대의 옥봉리, 천오리까지 떠밀려 온 시신들은 이제 비로소 진주성을 벗어난다. 한 달이 넘는 계사년 장맛비가 시신들의 진주성 탈출을 도왔다. 유난히 긴 장마철이었다. -계사년 기사중에서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눈물을 흘리던 이완이 미친 듯이 전고로 나가 다시 북채를 거머쥔다.
‘둥, 둥, 둥, 둥’
붉은 통곡이 ‘전투를 이어가라’고 노량 바다 곳곳을 물들인다. 무술년 11월 19일 새벽 여명무렵,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했다. 향년 54세.
-무술년 기사중에서
통제사가 전사한 11월 19일,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한다. 궁궐을 나서는 유성룡의 표정이 분명 홀가분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노쇠한 황소의 모습이었다. 비로소 한 숨을 돌린다. 그는 전란 기간, 황소처럼 뚜벅 뚜벅 제 길을 걸어왔다. 이제 자신의 고기를 내어줄 차례이다.
- 무술년 기사중에서
1604년 여름, 징비록 저술을 마친 유성룡은 하회마을의 옥연정사를 떠나 10여 km 쯤 서북쪽으로 움푹 들어간 산간 오지 마을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를 지었다. 관작이 회복된 뒤 연일 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만나기도 부담스러워했다. ‘웃음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거처’ 농환재는 유성룡이 여생을 마무리할 장소였다. 이 무렵이 유성룡에게는 가장 마음 편한 시기로 보였다. ‘둥근 환(丸)’을 통해 ‘각진 삶’을 초연히 돌아본다. 인간은 세상사를 자신만의 틀에 담아서 볼 수밖에 없다. 죽음을 앞두고, 이를 초월하려는 달관(達觀)의 자세가 엿보인다. 치열한 전란 속에서, 날선 ‘대립 각’을 수없이 세울 수밖에 없었던 노 재상이 마지막 순간에 추구한 가치였다.
- 결, 징비록을 남기고 기사중에서
머리말
서(序) - 서애 유성룡의 부음
- 한양 묵사동에 울리는 백성들의 통곡 소리
1부. 전란의 먹구름
1. 1587년(정해년) 손죽도 왜변, 두 장수의 상반된 죽음
- 오만한 일본 사신 다치바나
2. 1589년(기축년) 압송되는 조선 어민, 사을배동
- 정여립 역모 사건, 유성룡의 승부수
3. 1590년(경인년) 일본으로 가는 조선 통신사
- 도요토미의 선전 포고
4. 1591년(신묘년) 정사와 부사의 엇갈린 판단, 국방 개혁의 좌초
- 서인 정철의 실각, 남북으로 갈리는 동인
5. 1592년(임진년 초봄), 허술한 국방, 안이한 장수들 - 폭풍 전야, 쓰시마의 침묵
2부.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조선
1. 1592년(임진년 봄) 잔인한 봄, 전란이 터지다.
- 한양을 버린 선조
2. (임진년 여름) 벼랑 끝 조정
- 전라좌수사 이순신, 해로(海路)를 틀어막다.
3. (임진년 가을) 백성의 피로 물든 낙엽
- 진주성이 살려낸 조선의 기맥(氣脈)
3부. 3국 전쟁, 한양성 수복
1. 1592년(임진년 겨울) ∼ 1993년(계사년 초) 평양성 수복
- 일진일퇴의 공방전
2. 1593년(계사년 봄), 폐허가 된 한양성
- 명나라 군대의 양면성,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산하
3. (계사년 여름), 진주 남강의 장례식
- 남녘땅을 동여맨 뱀의 똬리
4부. 교착상태, 이중 협상과 외로운 명의(名醫) 유성룡
1. 1593년(계사년) ∼ 1595년(을미년), 조선을 살리는 제도의 정비
- 군역과 세제의 개혁
2. 1596년(병신년) 강화 협상의 결렬과 도요토미의 복심
- 조선, 명, 일본의 동상이몽(同床異夢)
5부. 전란의 재발, 7년 재앙의 막바지
1. 1597년(정유년 봄∼여름) 이순신과 원균, 선조의 자충수(自充手)
- 조선 수군의 궤멸
2. (정유년 가을∼겨울) 남원성 시신을 비추는 한가위 보름달
- 기적처럼 부활한 조선 수군
3. 1598년(무술년) 이순신의 전사와 파직된 유성룡
- 유성룡 낙향하다.
결(結) - 징비록을 남기고
- 후세를 경계하는 선비의 마지막 책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