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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박형준 시집

시리즈 : 창비시선 [454]

박형준 저 | 창비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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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6424459 / 156쪽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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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책 속으로 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물마다 숨어 있는 달을 꺼낼 수 있을 텐데 당신과 늪가에 있는 샘을 보러 간 날 샘물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은 울림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雪〕이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달나라의 돌」 부분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비의 향기」 부분 그 땅은 햇빛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곳 고원의 어디쯤이었을까 담벼락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십여 미터쯤 떨어져서 늙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누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듯 푸근한 인사를 나눈다 오늘도 서로에게 아침 안부를 전한다 담벼락 아래에서 모든 일이 잘되어가고 있다 ―「아침 인사」 전문 봄날에는 발밑을 보며 걷습니다 발밑에는 상처들이 많습니다 발밑에 작은 등잔이 있습니다 풀꽃이 있습니다 천명의 아이들이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 (…) 풀빛 강에 마중 나온 천명의 어머니들도 풀빛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밑에서만 싹이 나옵니다 ―「발밑을 보며 걷기」 부분 소년 때는 십오도 각도로 하늘을 보며 걷거나 반대로 십오도 각도로 땅을 보며 걷는다 흠씬 누군가를 두들겨 패거나 흠씬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거나 둘 중 하나뿐 소년 때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소년 때는 하늘도 바닥 땅도 바닥 손도 바닥 하늘바닥 땅바닥 손바닥에 세상에 없는 것들만 올려놓거나 내려놓거나 때로는 움켜쥔다 성년이 되면 하늘은 사라지고 땅바닥 같은 손바닥만 남는다 그리고 바닥은 더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절망한 사람에겐 더 큰 바닥으로 나타난다 바닥은 바다 수천 미터 심연이 있다 ―「바닥 예찬」 부분 시를 업으로 삼으려는 시쟁이가 자신의 언어에 빠지면 시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어 시는 일상어라는 나무를 베어내고 잘라내는 것만 제외하고는 언어를 다듬는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지 그리고 온갖 정성과 심혈이 깃든 마음이 없다면 그 시는 무용지물의 시가 되지…… ―「어느 북 장인과의 인터뷰」 부분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테두리」 부분

저자 소개

  • 저자 : 박형준
저자 : 박형준(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산문집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 평론집 『침묵의 음』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머리말

시인의 말

시집 교정지를 출판사에 보내려고 언덕의 우체국으로 간다. 가는 김에 굽이 닳은 구두를 언덕의 구두 수선집에 맡기려고 함께 들고 간다. 구두를 수선해주듯이 누군가 내 시도 수선해주었으면 좋겠다.

2020년 6월
박형준

책 속에서

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물마다 숨어 있는 달을
꺼낼 수 있을 텐데

당신과 늪가에 있는 샘을 보러 간 날
샘물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은 울림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雪〕이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달나라의 돌」 부분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비의 향기」 부분

그 땅은 햇빛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곳
고원의 어디쯤이었을까
담벼락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아래 십여 미터쯤 떨어져서
늙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누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듯
푸근한 인사를 나눈다
오늘도 서로에게 아침 안부를 전한다
담벼락 아래에서 모든 일이 잘되어가고 있다
―「아침 인사」 전문

봄날에는 발밑을 보며 걷습니다
발밑에는 상처들이 많습니다

발밑에
작은 등잔이 있습니다

풀꽃이 있습니다
천명의 아이들이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

(…)

풀빛 강에 마중 나온
천명의 어머니들도
풀빛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밑에서만
싹이 나옵니다
―「발밑을 보며 걷기」 부분

소년 때는 십오도 각도로 하늘을 보며 걷거나
반대로 십오도 각도로 땅을 보며 걷는다
흠씬 누군가를 두들겨 패거나
흠씬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거나
둘 중 하나뿐
소년 때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소년 때는 하늘도 바닥
땅도 바닥
손도 바닥
하늘바닥 땅바닥 손바닥에
세상에 없는 것들만 올려놓거나 내려놓거나
때로는 움켜쥔다

성년이 되면 하늘은 사라지고
땅바닥 같은
손바닥만 남는다
그리고 바닥은 더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절망한 사람에겐 더 큰 바닥으로 나타난다

바닥은 바다
수천 미터 심연이 있다
―「바닥 예찬」 부분

시를 업으로 삼으려는 시쟁이가
자신의 언어에 빠지면 시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어
시는 일상어라는 나무를 베어내고 잘라내는 것만 제외하고는
언어를 다듬는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지
그리고 온갖 정성과 심혈이 깃든 마음이 없다면
그 시는 무용지물의 시가 되지……
―「어느 북 장인과의 인터뷰」 부분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테두리」 부분

목차

제1부 - 달나라
달나라의 돌
봄비 지나간 뒤
빛이 비스듬히 내리는데
나무 속의 새
아침의 추락
비의 향기
저런 뒷모습
아침 인사
은하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쥐불놀이
부탄 두루미
나비는 밤을 어떻게 지새우나
오후 서너시의 산책 길에서
해바라기
이 봄의 평안함
달
전철의 유리문에 비친 짧은 겨울 황혼
저녁나절
득도

제2부 - 패턴
동네 천변을 매일
불광천
패턴
밤의 선착장
튤립밭
아침이 너무 좋아
토끼의 서성거림에 대하여
발밑을 보며 걷기
그의 창문을 창문으로 보면서
강변의 오솔길
아스팔트에서 강물 소리가 나는 새벽
교각
혼인비행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
죽은 매미의 날개
바닥 예찬
아기 고양이의 마음
빈터
겨울 호수를 걷는다
느리게 걷는 밤산보 길

제3부 - 은하수
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
귀향일기
백년 도마
아기 별자리
나는 달을 믿는다
칠백만원
들녘에서
겨울 서리
겨울 귀향
세숫대야
백일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은빛 창문
은하수
달콤한 눈
가을이 올 때
나무 속 유리창

제4부 - 테두리
외성(外城)
반사광
여행의 꿈
인도 기차 여행
태양 속으로 떠나간 낙엽
발리슛
돛이 어디로 떠나갈지 상상하던 날들
눈빛
실보 고메로
빙하 나이테
어느 북 장인과의 인터뷰
뒤란의 시간
시선
테두리
둑방에서 쓴 일기
눈망울

발문|박연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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