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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576 / 1272쪽 152 x 223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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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지암일기』의 시대_ “죽도가 있어 세상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 윤이후가『지암일기』를 쓴 17세기말은 사회적으로는 혹독한 재난이 끊임없이 닥친 대기근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정점으로 격화한 환국의 시대였다. 1699년 5월 9일에는 “5, 6년의 흉년과 작년, 올해의 독한 전염병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라고 썼다. 1696년 4월 조부 윤선도와 생부 윤의미의 제사 참석을 위한 상경 길에 그는 “길을 떠난 후 나주 위로는 보이는 참상이 더욱 심하다. 논 값이 1섬 혹은 30말(2섬)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사람 값은 1섬에도 못 미친다. 죽은 사람도 이루 셀 수가 없다. 광호촌만 해도 죽은 사람이 70여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라 썼다. 길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명화적과 노상강도가 들끓었던 을병대기근(1695~96)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일기는 여과 없이 보여준다. 심지어 윤이후의 집까지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딸린 식객이 많은 데다가 오랜 흉년에 의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윤이후의 죽도 별서에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도 발생했다. 걸인이 자주 문을 두드리고 도망갔던 노비가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주인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른바 ‘17세기 후반의 재난’에 관한 설이 있지만, 그 어지러운 실상을 『지암일기』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기사환국(1689)으로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진출했지만 갑술환국(1694)으로 폐비 민씨가 복위되고 남인들이 모조리 쫓겨났다. 권대운, 권규, 목내선, 민암, 김덕원, 정유학, 류명천, 류명현, 이의징, 이운징, 이현기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된 정황은 윤이후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4월 일기 곳곳에 이들이 파직, 유배되거나 죽음에 이른 긴박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이들은 해남 부근의 강진, 진도, 고금도, 신지도, 우이도 등지에 유배되어 왔다.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물러나 있었지만 윤이후는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인의 선봉에서 서인에 강하게 맞섰던 윤선도의 손자이기도 하고, 한때 그들과 동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거나 자주 편지를 보내 위로하는 한편, 식량과 생필품을 보내며 보살폈다. 일기에는 이들과의 교류 내용이 1694년 5월 10일자에서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기록되어 있다. 3년 후 그의 셋째 아들 종서가 ‘세자 저주 무고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반대당의 끈질긴 공격으로 죽게 되는데, 이처럼 유배객과 교류하고 그들을 보살핀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이후는 종서를 죽음으로 몬 사람들의 이름을 일기에 밝히며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했다. 윤이후는 벼슬을 내던지고 죽도를 경영하며 강호의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선의 사대부가 늘 강호를 꿈꾸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는가를『지암일기』가 잘 보여 준다. 죽도, 속금도, 두모동 등 섬과 해안을 개간하여 농지를 넓히다 윤이후가『지암일기』가 조선후기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은 보고라 할 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농지의 개간과 농업 경영이다. 윤이후는 은퇴 후 해남 일대 해안과 섬에 제언을 쌓고 그 안을 간척하여 농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언전(제언 내부의 농지)을 조성하는 것은 해남윤씨 집안이 대대로 재산을 증식하는 한 방식이었다. 윤이후는 죽도, 속금도, 두모동의 제언 공사를 계획 단계에서부터 실행, 사후처리(작인과 마름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공사의 대부분은 물막이 작업으로 인근 면민과 사찰의 중이 동원되었고 흥미롭게도 관의 허가를 받았다. 죽도 제언 공사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인 속금도 제언 공사에 동원된 역군이 1,587명으로, 이들이 평균 2일씩 일하여 연인원으로 3,187명이 동원되었다. 1694년 3월 5일 일기에 “벼 7섬, 쌀 1섬, 누룩 3동, 담배 1동을 실어 보냈다.”라 썼는데 이는 작업 인부의 술과 담배 대접 때문이었다. 은퇴 후 윤이후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이 죽도였다. 벼슬을 버리고 오자마자 시작된 공사는 순조롭지만은 않아서, 봄철 농한기에 다 끝내지 못하고 가을철 농한기(10월)에 이어서 진행하여 석물로 수문을 만들어 다는 마지막 작업은 12월에야 완료했다. 죽도는 밀물 때는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이 되고 썰물 때는 흘러가는 강물을 발 아래로 굽어보아, ‘호남에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그는 거기에 아담한 초당을 짓고 제방을 쌓아 경지를 만들어, 풍치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윤이후의 집짓기도 빼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함평현감을 사직하고 영암(현재의 해남)으로 내려온 윤이후는 팔마(현재 팔산)에 집을 지었다. 첫해는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둘째 해는 마굿간과 행랑채를 짓고, 마지막은 사당을 지었다. 목재 운반, 터 다지기, 기둥 세우기, 구들 놓기, 도배하기, 기와 만들기와 얹기 등 몇 해에 걸쳐 집 짓는 과정을 윤이후는 소상하게 기록했다. 1692년 4월 22일자 일기에 “터 잡은 사람은 누구인가, 주인 지암(윤이후)이 직접 했다. 집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 집 노 천일로 올해 67살이다.”라 썼다. 이밖에도 『윤이후의 지암일기』에는 집터를 두고 일어난 문장(문중의 장) 윤선오와의 갈등(94년 2월), 흉년에 논을 사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전답을 매입한 이야기(96년 2월),『농사직설』이 맞는지 각종 종자를 시험한 기록(94년 12월) 등 농사 기록이 차고 넘친다. 윤이후는 일기 첫머리에 하루도 빠짐 없이 날씨를 자세히 기록했는데, 특히 태양의 이상 현상을 그림까지 그리며 설명한 까닭은 두말할 것 없이 농사의 풍흉 때문이었다. 『지암일기』의 사람들_ 윤이후의 집은 늘 연락부절이었다 윤이후의『지암일기』는 가족과 친족, 이웃과 노비, 관리와 지역민 등 17세기 해남이란 시공간을 무대로 한 생활 및 친교의 기록이며, 인간관계의 기록이다. 자신의 동정과 부인 및 자식들에 관한 기록은 물론이고, 자기 집에 내왕한 인물과 외출하여 만난 사람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기록했다. 편지의 수발과 그 인편도 기록했는데 특히 세 아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편지를 통하여 알게 된 서울 소식과 특기할 만한 소문도 담겨 있다. 여타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수장이, 점쟁이, 의원, 침의, 장인, 재인, 악사, 가수, 걸인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대거 등장한다. 간혹 기인을 만나면 자세히 묘사했다. 예를 들어 김경룡이라는 장사를 만나고는 “이 사람은 장사로 유명하다. 체구는 작지만 용맹이 남다르고 총을 잘 쏘아 지금까지 잡은 호랑이가 20여 마리다. 올해 나이가 여든인데, 근력과 정신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눈동자가 빛나고 시력이 좋다. ‘젊었을 때 호랑이 여섯 마리의 눈 12개를 먹었습니다. 지금껏 시력이 쇠하지 않은 것이 혹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1697년 4월 6일자) 또 이 일기에는 노비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다채롭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반영한다. 「유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란 글을 일기에 남기며 “유모의 손자 대까지는 신공을 징수하지 말고 또 잡아다 부리지 마라. 그 후소생은 여러 대가 지나도 절대로 외손에게 상속하지 마라.”라는 주를 달았다. 1697년 10월 20일 일기에는 덕립이라는 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노 덕립이 새벽닭이 울 때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이 노의 나이가 올해 여든인데, 부부가 지금껏 해로하고 자손이 60여 명이나 된다. 실로 세상에 드문 복이다.”라 썼다. 때로는 병문안을 온 비에게 시를 써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층민에게서 행복, 재주, 매력을 발견하고 편견 없이 기록하는 것을 보면, 그가 신분을 뛰어넘어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기의 재미를 더 하는 이런 기록은 하층민의 생생한 기록이 드문 한국사에서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부록 인물 소사전 180여 명 중 노비가 20여 명에 달한다. 『지암일기』의 여행기_ 열흘에 이삼일은 집을 떠났다 『윤이후의 지암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여행이다. 전통시대 여행에 관한 기록은 주로 ‘유람기’나 사신으로 외국 출장길 여정을 담은 ‘사행록’ 등의 형태로 전해지는 반면,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경험한 여행을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지암일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윤이후는 대략 열흘에 이삼일은 집을 떠나 있었다. 1698년 10월 친족들과 함께 한 만덕사 뱃놀이와 강진 여행처럼 놀러 다닌 경우도 더러 나오지만 상장례와 개간 및 농사 관련한 외유가 많았다. 윤이후는 양모, 종형, 외숙 등 많은 장례를 치루는데 일기에는 표석과 상석을 마련하고 묏자리를 파서 회격을 치는 일과 장례 기간 동안 받은 부의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히 썼다. 1692년 4월에는 적량원 양부 산소 석물 조성을 하는데, 석물을 조달하고 다듬은 과정, 석공에게 지불한 품삯 등이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묘비석 건립 과정의 일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한편 98년 9월에는 아내와 자식 손자들을 거느리고 속금도를 방문했는데 자신이 쌓은 제언과 그로 인해 생긴 언전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또한 1694년 4월 갑술환국 이후에는 매년 유배인들을 찾았다. 유배지가 신지도, 고금도, 진도 등 만만치 않은 거리여서 며칠씩 걸렸다. 방문 목적이 그들을 챙기고 교유하는데 있었지만 더러는 간척과 개간에 쓸 만한 땅(진황지)을 살펴보는 것을 겸하기도 했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자면 부동산 투자를 위한 방문이었던 것이다. 교통수단으로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1692년 11월 김차암과의 적부로(말) 거래를 일기에 썼는데 김차암이 한 달 사이에 판다고 했다가 안 판다고 했다가 다시 판다고 하는 변덕스러운 태도에 윤이후가 쫓아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일기에는 두어 달 이상 걸린 장거리 여행이 세 번 나온다. 서울행이 두 번이다. 한 번은 1693년 현감으로 재직했던 함평현의 대동미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9월말 의금부로 압송되는 고초를 겪은 것이다. 윤이후는 같은 해 11월 초에 일단 풀려나지만 대동미 유용 의혹은 정국이 바뀔 때마다 되살아나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다음은 1696년 환갑이 맞은 윤이후가 조부 윤선도와 생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4월 말 해남을 떠나 6월말 다시 돌아오기까지였다. 윤이후는 여행 중에 대기근에 수해까지 겹친 참상을 보고 들은 대로 일기에 썼다. 그리고 짧은 서울 체류기간 중에 상당히 많은 인물들을 만나는데, 이를 통해 윤이후의 인적 연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697년 2월 윤이후는 셋째 아들 윤종서의 유배지인 거제 둔덕리를 방문한다. 가는 데 아흐레, 오는 데 열흘 걸렸고 유배지에서 함께 아흐레를 묵었다. 모두가 멀고 고단한 여행이었다. 윤이후는 2월 30일 견내량에서 윤종서와 이별하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윤이후가 아들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종서는 한 달 뒤 다시 의금부에 압송되어 12차례 형문을 받고 4월 5일 밤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조선시대 가장 생생한 생활일기 윤이후는 삶을 즐겼다. 각종 나무와 화초 심기를 스스로 벽이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또 음악을 수시로 즐겼다. 약사와 가사를 초빙하여 며칠씩 머물며 재능이 있는 악비들을 가르치게 했다. 간혹 산사나 명승에 모여 연회를 열 때면, 금비(琴婢), 야비(倻婢), 가비(歌婢) 등을 데리고 다녔다. 1692년 9월 29일 일기에 “윤천임이 금아(琴兒) 한 명을 불렀다. 윤세미 씨가 데려온 이형징은 평소 거문고와 노래로 이름난 사람이다. 나와 함께 간 송창좌와 서로 어울려 연주했다.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오늘 모임은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썼다. 병치레 관련한 기록도 많다. 조부 윤선도 제사 참석차 서울을 다녀온 후 1696년 8월부터 약 석달 간 다리에 부스럼이 나고 왼쪽 팔의 혈병이 심해지는 병증을 하소연하는데 팔에 창질이 생기는 등 합병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아들 종서의 옥사로 마음고생이 심한 가운데 병세는 더 깊어갔다. 인근 지인들의 위문편지와 식품과 약재를 보내고 있다. 전복, 햇밤, 배 30개, 담근감 53개, 말린 새우 2되, 석류 4개, 쌀 1석, 생닭 2마지, 생낙지 3첩, 말린 민어 3마리, 밀가루 2말, 누룩 2동, 깨 2되, 귀상어 2마리 등 다양한 계절 음식의 명칭을 살펴볼 수 있다. 윤이후는 일기에 치료를 위해 다양한 처방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후의 변화도 함께 상세히 썼다. 교류와 소통의 과정에서 선물 주고받기는 연망 사회의 특징이었다. 그 중에 부채가 필수였다. 1693년 8월 9일 일기에 “곡성현감 김주익이 부채 여섯 자루를 보냈다. 들으니 그가 부채를 쌀 때 아우를 시켜 문안 편지를 쓰게 했는데, 아우가 편지 봉투에 ‘윤 지평 댁’이라고 쓰자 형이 말하기를 “지평이라고 하면 부채 꾸러미가 적어도 15자루는 되어야 하는데, 지금 부채가 떨어져 많이 보낼 수 없으니 ‘함평’이라고 쓰라.”라고 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라고 썼다.
이 『지암일기』 번역은 공동 작업의 소산이다. 우리는 2013년 11월 23일부터 격주로 토요일에 만나 ‘지암일기 번역세미나’를 가졌다. 만 6년이 지나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긴 시간이지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암일기』에 몰두했다. 각자가 작업해서 발표한 『지암일기』의 번역문을 놓고 진지한 토론을 하며, 우리는 그야말로 학문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여과 없이 서술한 다양하고 생생한 생활 현장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격의 없는 토론을 즐겼던 것이다. 『지암일기』 번역본이라는 작업의 결실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노력의 과정 또한 결실 못지않게 값지다고 자부한다.
또 우리는 일기의 무대인 해남 일원을 네 차례 답사했다. 윤이후의 생활 무대인 팔마와 죽도, 그의 외가가 있던 백치, 종가의 터전이 있던 백포 및 연동, 유람 다녔던 대흥사와 합장암 등지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현장감을 익혔다. 특히 일기의 중심무대인 죽도의 위치가 잘못 알려진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지점을 찾은 것은 답사가 아니면 기대할 수 없는 중요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1693년 1월 16일 경신 〙오후에 비가 오다가 저녁 무렵에 그침
새집 뜰 앞에 유자, 모과, 괴산대리자槐山大梨子를 심었고 옛집의 남쪽 창밖에는 사철동백, 으름덩굴을 심었다. 또 죽도에는 유자, 괴리자槐梨子 사철동백, 으름덩굴을 심었다. ◯ 지난겨울 동짓달 20일 전에 진달래를 화분에 심어 방안에 뒀었다. 섣달 20일 후에 꽃을 피웠는데, 지금은 활짝 피어 탐스럽고 고운 모습이 볼만하다. 하루는 아내가 와서 완상하다가 글자를 모아 시구를 지었다.
早發一盆花 꽃 한 화분이 일찍 피자
春色滿房中 봄기운이 방안에 가득하네
老人少如花 노인은 꽃처럼 젊어지고
靑春長不盡 청춘은 길이 끝나지 않기를
아내는 글을 모르며 다만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 곁에서 듣고 기억하여 잊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책을 읽어 배운 사람과 자못 비슷하니 비록 부녀자이지만 물려받은 문장이 있는 것인가. 지금 여기에 지은 마지막 구는 나의 늙음을 가련하게 여겨서 다시 젊어지길 축원한다는 뜻을 말한 것인데, 압운押韻을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된 시구는 못 되었지만 기상이 꽤나 좋고 넉넉한 맛이 있어 볼만하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점차 위태로운 고질이 되었지만 (…) 이를 통해 볼 때 장수도 기대할 만하다.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을 기록하는 것이 매우 우습지만, 죽을 뻔했다가 약간 소생한 후에 볼만한 기상이 있어 이렇게 적어 둔다._본문 132쪽
〘1694년 6월 27일 계해 〙맑음. 소나기가 간간이 내림
내가 함평에서 귀향한 후 세상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만을 일삼아 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자못 이를 근심하여 매번 서울로 돌아가기를 곁에서 간절히 권했다. 서울에 있는 동료들도 편지로 시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기도 하고, 혹 한단학보邯鄲學步라는 말로 나를 조롱한 이도 있었으나, 나는 번번이 웃으며 응하지 않았다. 친상親喪을 당하자, 집안사람들의 뜻은 모두 장례가 끝나면 상경하여 거상居喪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나는 더욱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국이 뒤집어지고 나서야 전에 이러쿵저러쿵했던 자들이 비로소 내 뜻에 감복했다. 하물며 나를 조롱한 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니, 생각건대 필시 나를 부러워해 마지않을 것이다. 아! 나는 진실로 어리석으므로 오늘날의 일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감개한 바가 있어서 구차하게 용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날 요직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 중 남쪽 지방으로 귀양 온 이들이 모두 내가 화망禍網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본래 용렬한 제가 어찌 감히 환란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말을 전해 듣고 내가 말을 야박하게 한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죽도를 점유하려고 계획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종서는 서울에 있었으므로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비로소 나를 따라왔다. 그러고는 올라가서 한번 둘러보기도 전에 마음으로 기뻐하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아하니, 이 아이의 소견이 그리 범상하고 누추하지는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시사時事를 이야기하며, 출사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내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죽도가 있어 더욱 세상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한다. 아이의 이 말이 참으로 내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탄복하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_본문 344~345쪽
〘1696년 7월 22일 병자 〙맑음
성덕항이 왔다. ◯ 팔마로 돌아왔다. 이대휴를 역방했다. 길에서 양득중梁得中을 만났다. ◯ 가지개加知介가 13일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내 유모 소생인데, 작년에 와서 만난 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굶주린 나머지 사산하고 자신도 역시 일어나지 못했으니, 매우 비참하다. 커서는 용모가 그 어머니와 흡사하여 내가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작년에 와서 만났다가 황원黃原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 슬퍼해 마지않기에, 나도 눈물을 삼키며 잘 타일러 보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 어찌 알았겠는가. 너무도 애통하다._본문 693~694쪽
머리말 강호의 꿈
1692년 벼슬을 던지고 돌아와 解符歸來
1월 그 속마음을 어찌 알랴
2월 돌아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을일지니
3월 죽도 별업으로 나와 제방을 보수하다
4월 기둥을 세우고 방향을 정하다
5월 두 친구의 애쓰는 정성이 진실로 고마워
6월 두통으로 괴로운 나날들
7월 구들을 놓은 뒤 벽을 바르고 콩댐을 하니
8월 아버지 묘에 석물을 세우다
9월 조상 제사의 유사가 되어
10월 소리산에 배를 보낸 이유
11월 낙무당을 보수하다
12월 가야금과 거문고를 만들고
1693년 운명인 듯 받아들여 安之若命
1월 집사람은 글을 모름에도
2월 인천 누님의 별세
3월 어머니 상을 당해
4월 장례를 지내고 사흘 만에 큰비가 오니
5월 아내의 눈병
6월 동네 사람들을 진휼하다
7월 학질의 괴로움
8월 파산 석물에 대한 의논
9월 서울로 나포되다
10월 의금부에 하옥되다
11월 석방되어 돌아오다
12월 송사 청탁을 물리치고
1694년 근본에 충실하여 농사에 힘쓰니 務本力穡
1월 겨울과 봄에 눈도 오지 않으니
2월 서로 목숨 의지하는 사이였건만
3월 속금도에 제언을 쌓다
4월 자던 새가 둥지에서 놀라 깬 것 같아
5월 충헌, 두 글자의 뒷이야기
윤5월 류 대감의 위문편지에 답하다
6월 죽도가 있기에 세상을 잊을 수 있어
7월 외로운 신하의 눈물 황천에 사무치네
8월 유모와 나
9월 죽은 아들의 궤연이 돌아오다
10월 팔마장에 사당을 짓다
11월 묏자리 잡기가 어려워
12월 인천 자형도 세상을 버리시고
1695년 산과 물에도 이치가 있거늘 山水有理
1월 기대하지 않은 일 세 가지
2월 집안에 초상이 줄을 이어
3월 사대부의 수치가 되는 일일지니
4월 은 채굴지를 방문하다
5월 황원을 둘러보다
6월 비 인향과 수춘의 추쇄
7월 지사 서육과 풍수를 논하다
8월 논정 땅을 둘러싼 다툼
9월 진도를 방문하다
10월 죽도에 초당을 짓다
11월 도둑맞고도 다행한 일 세 가지
12월 한 해가 내달리는 수레바퀴 같아
1696년 기댈 구석 없는 고아로 태어나 零丁孤苦
1월 시를 주고받은 날들
2월 죽도의 노래
3월 암행어사가 하는 짓
4월 절도의 유배객을 찾아가다
5월 서울로 가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다
6월 집으로 돌아오는 길
7월 유모의 딸 가지개의 죽음
8월 이 일을 어찌 할까
9월 요사이 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어
10월 그래도 친척이 남보다 낫네
1월 밤에 운 수탉
12월 종아의 유배 소식
1697년 나는 떠나고 너는 남아 我去爾留
1월 손자 희원의 탄생
2월 종아를 찾아가다
3월 떠나는 길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윤3월 두모동 제언을 보수하다
4월 아들의 죽음
5월 마음 달랠 길을 찾아
6월 유모의 제사를 지내다
7월 도적을 막는 몽둥이
8월 육촌형 윤이형의 죽음
9월 노 선백의 집을 수리하다
10월 더부살이와 같은 삶
11월 종아의 가솔을 데려오다
12월 고요 속에 흥이 넉넉함을 알겠으니
1698년 마음 가는 대로 한가로이 任意容與
1월 대둔사를 방문하다
2월 천연두로 손자를 잃다
3월 강진 백운동을 구경하다
4월 변례 중의 변례
5월 백치 외숙의 별세
6월 일민가逸民歌
7월 회록이여, 어이해 초당을 태웠는가
8월 고금도와 강진 일대를 여행하다
9월 고창현감의 조사보고서
10월 친족들과 함께한 가을 나들이
11월 전염병을 물리치는 별신굿
12월 지사 손필웅과 풍수를 논하다
1699년 흰머리에 파리하게 여위어 白頭疲?
1월 눈보라 속에서
2월 인심의 타락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3월 널찍한 바위에 올라 화전을 부치다
4월 새 급제자 축하연에 가다
5월 가뭄과 병충해
6월 질화로에 부친 시
7월 쌀 닷 섬의 수모
윤7월 합장암 유람
8월 애도의 글을 지으려니 눈물이 떨어지네
9월 손자들을 위해 서실을 짓다
부록
『지암일기』 인물 소사전
윤이후 가계 및 친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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