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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표현된 불행 황현산 평론집

황현산 저 | 난다 | 201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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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8862498 / 932쪽 / 1,305g / 130 x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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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 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책 속에서 마오리족 처녀가 물을 건너오는 제 연인의 피리소리를 들을 때도, 제 몸에 표주박을 달고 파도를 건널 때도, 바다는 사랑이라는 무한히 높고 무한히 넓은, 따라서 비어 있는, 말의 내용이 된다. 바다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되고, 사랑의 용기가 되고, 순결한 처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랑의 위험이 된다. 바다는 이렇게 그 깊이와 넓이로, 그 험난한 파도로 사랑이라는 말을 번역한다. 사랑이 이렇게 아득해진 적이 없으며, 사랑이라는 말이 이렇게 날카로워진 적이 없다. _30쪽 어느 시인이 ‘하얀 새가 산을 벤다’고 말하더라도 산을 베는 새가 없으며, 베어지는 산이 없다. 거기에는 오직 허공을 비껴 가르는 힘 하나가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재빠르게 비껴 그어질 금 하나를 제 안에 품고 있을 것처럼 그렇게 팽팽하고 투명한 푸름이 있다. _32쪽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자유로워야 한다. 무엇에 대한 진실은 무엇에 대한 자유이다. 문학은 자율성으로 그 자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한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_55쪽 봄은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아니었던 것을 청산하면서 온다. _67쪽 시를 비평하는 말 가운데 ‘진정성’이란 말만큼 의심해야 할 말은 없다. 적어도 우리의 비평언어에서는 그렇다. 그것은 이론의 여지없는 실재성과 정확성에, 또는 거기에 이르는 통찰력에 붙이는 말이 아니라 벌써 습관이 되었기에 편안하고 편안하기에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나태한 감정의 너울을 서로 용서해주기 위해 사용되는 말일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_72쪽 우리의 젊은 시인들이 현실을 창조적 실천의 자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발 디딘 자리가 삶의 중심이며 문화의 중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현대시사가 말해준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_76쪽 “모르겠다. 길을 찾느라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대답은 대답의 회피가 아니라, 대답이다. 나는 이 대답 속에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어느 길이건 그 길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뜻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길은 두 갈래로만 뻗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 대답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_79쪽 부정의 언어, 곧 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 있다. 시는 꿈과 현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작은 나와 큰 나가, 비루한 사물과 너그러운 말이, 불모의 현실과 생산하는 현실이 갈등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의 길이 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_85쪽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_98쪽 이때, 우리의 언어 감각에 충격을 주기도 할 이 외국어적 개입은 저 유행가적 리듬의 억압적 영향 아래 ‘사랑을 잃음’과 ‘글쓰기’라는 두 사실 사이에서 단 하나의 맥락만을 보고 있던 우리의 이해력을 해방시켜 새롭고 다양한 맥락의 설정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_118쪽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대면할 때 그 말의 결을 깨뜨리는 균열을 경험하게 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만나게 된다. (…) 모국어로부터 외국어성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말이 제시하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맥락을 다양하고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 성격과 능력이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고, 번역에 시적 성격을 부여한다. _119쪽 타자는 어떤 성찰과 사랑의 힘으로 저 자신을 전복하는 주체이다. 어떤 둔중한 말도 전복되는 주체에게는 날카로운 구체성을 지닌다. 말의 운명은, 곧 시의 운명은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걸려 있다. 시의 말은 그것이 민족어이건 외국어이건 미래의 말이다. 그것은 현재의 말속에 잠복해 있는 미래적 쓰임의 가능성이며, 미래를 촉발시켜 걸어 당기는 말이며, 미래에 그 진실성이 밝혀질 말이다. 그래서 시의 말이 타자의 말이라는 것은 미래의 주체가 하게 될 말이라는 것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_140-141쪽 시의 모든 전위에는 주체가 타자를, 타자가 주체를 아우르는 특별한 현재가 있으며, 아직은 형태도 색깔도 없는 미래, 어떤 주체의 망상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미래, 곧 타자의 미래가 있다. 타자를 영접하는 주체만이 오직 그 미래에 들어간다. 타자가 되는 주체만이 미래로 쏟아지는 특별한 현재를 경험한다. 형태 없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에 끝나지 않는 이 현재를 우리는 시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_153쪽 석굴암에 들어서면, 온화한 자태와 사려 깊은 얼굴로 의연하게 앉아 있는 대불을 먼저 볼 수 있지만, 그 좌대에는 사지를 비틀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존재들이 새겨져 있다. 세상의 지혜 하나를 들어올리는 일이 그렇게 처절하다는 말일까. 고통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고요하게 앉아 있는 부처가 마치 조각배처럼 보인다. _157쪽 시인이 쓰는 시는 그가 얼핏 보았던 저 빛에 대한 한차례의 기념일 뿐이다. 그는 매듭을 만들면서 매듭을 파괴한다. 그는 매듭을 딛고 매듭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능한 것은 또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시는, 좋은 시일수록, 실패담의 형식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_159쪽 아름다운 것이건, 슬픈 것이건, 놀라운 것이건, 경이로운 것이건, 어떤 것 앞에서 누군가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말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가 성실한 사람일 때, 그는 그 희생된 것들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 ‘이루 형언할 수 없음’을 문제로 발견하고, 계약의 파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을 재조정하여 인간을 헛된 계약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는 시인이거나 소설가일 것이다. 문학의 미학도 윤리도 형언할 수 없는 것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_169쪽

저자 소개

194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기욤 아폴리네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폴리네르를 중심으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프랑스 현대시를 연구하고,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며‘시적인 것’ ‘예술적인 것’의 역사와 성질을 이해하는 일에 오래 천착해왔다. 저서로『얼굴 없는 희망』『아폴리네르 - ‘알코올’의 시 세계』『말과 시간의 깊이』『해인사를 거닐다』(공저) 『말라르메의 ‘시집’에 대한 주석적 연구』『이상과 귀향, 한국문학의 새 영토』(공저)『잘 표현된 불행』『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 생텍쥐페리의『어린왕자』 파스칼 피아의『아뽈리네르』 『도미니끄 랭세의『프랑스 19세기 시』(공역)『프랑스 19세기 문학』(공역) 드니 디드로의『라모의 조카』 스테판 말라르메의『시집』 기욤 아폴리네르의『알코올』『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외』(공역) 앙드레 브르통의『초현실주의 선언』등이 있다.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등을 수상하였다. 번역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이와 관련하여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으며,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다.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같은 학교 명예교수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 8월 8일 별세했다. 
 

머리말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 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책 속에서

마오리족 처녀가 물을 건너오는 제 연인의 피리소리를 들을 때도, 제 몸에 표주박을 달고 파도를 건널 때도, 바다는 사랑이라는 무한히 높고 무한히 넓은, 따라서 비어 있는, 말의 내용이 된다. 바다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되고, 사랑의 용기가 되고, 순결한 처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랑의 위험이 된다. 바다는 이렇게 그 깊이와 넓이로, 그 험난한 파도로 사랑이라는 말을 번역한다. 사랑이 이렇게 아득해진 적이 없으며, 사랑이라는 말이 이렇게 날카로워진 적이 없다. _30쪽


어느 시인이 ‘하얀 새가 산을 벤다’고 말하더라도 산을 베는 새가 없으며, 베어지는 산이 없다. 거기에는 오직 허공을 비껴 가르는 힘 하나가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재빠르게 비껴 그어질 금 하나를 제 안에 품고 있을 것처럼 그렇게 팽팽하고 투명한 푸름이 있다. _32쪽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자유로워야 한다. 무엇에 대한 진실은 무엇에 대한 자유이다. 문학은 자율성으로 그 자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한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_55쪽


봄은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아니었던 것을 청산하면서 온다. _67쪽


시를 비평하는 말 가운데 ‘진정성’이란 말만큼 의심해야 할 말은 없다. 적어도 우리의 비평언어에서는 그렇다. 그것은 이론의 여지없는 실재성과 정확성에, 또는 거기에 이르는 통찰력에 붙이는 말이 아니라 벌써 습관이 되었기에 편안하고 편안하기에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나태한 감정의 너울을 서로 용서해주기 위해 사용되는 말일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_72쪽


우리의 젊은 시인들이 현실을 창조적 실천의 자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발 디딘 자리가 삶의 중심이며 문화의 중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현대시사가 말해준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_76쪽


“모르겠다. 길을 찾느라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대답은 대답의 회피가 아니라, 대답이다. 나는 이 대답 속에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어느 길이건 그 길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뜻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길은 두 갈래로만 뻗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 대답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_79쪽


부정의 언어, 곧 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 있다. 시는 꿈과 현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작은 나와 큰 나가, 비루한 사물과 너그러운 말이, 불모의 현실과 생산하는 현실이 갈등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의 길이 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_85쪽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_98쪽


이때, 우리의 언어 감각에 충격을 주기도 할 이 외국어적 개입은 저 유행가적 리듬의 억압적 영향 아래 ‘사랑을 잃음’과 ‘글쓰기’라는 두 사실 사이에서 단 하나의 맥락만을 보고 있던 우리의 이해력을 해방시켜 새롭고 다양한 맥락의 설정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_118쪽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대면할 때 그 말의 결을 깨뜨리는 균열을 경험하게 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만나게 된다. (…) 모국어로부터 외국어성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말이 제시하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맥락을 다양하고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 성격과 능력이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고, 번역에 시적 성격을 부여한다. _119쪽


타자는 어떤 성찰과 사랑의 힘으로 저 자신을 전복하는 주체이다. 어떤 둔중한 말도 전복되는 주체에게는 날카로운 구체성을 지닌다. 말의 운명은, 곧 시의 운명은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걸려 있다. 시의 말은 그것이 민족어이건 외국어이건 미래의 말이다. 그것은 현재의 말속에 잠복해 있는 미래적 쓰임의 가능성이며, 미래를 촉발시켜 걸어 당기는 말이며, 미래에 그 진실성이 밝혀질 말이다. 그래서 시의 말이 타자의 말이라는 것은 미래의 주체가 하게 될 말이라는 것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_140-141쪽


시의 모든 전위에는 주체가 타자를, 타자가 주체를 아우르는 특별한 현재가 있으며, 아직은 형태도 색깔도 없는 미래, 어떤 주체의 망상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미래, 곧 타자의 미래가 있다. 타자를 영접하는 주체만이 오직 그 미래에 들어간다. 타자가 되는 주체만이 미래로 쏟아지는 특별한 현재를 경험한다. 형태 없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에 끝나지 않는 이 현재를 우리는 시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_153쪽


석굴암에 들어서면, 온화한 자태와 사려 깊은 얼굴로 의연하게 앉아 있는 대불을 먼저 볼 수 있지만, 그 좌대에는 사지를 비틀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존재들이 새겨져 있다. 세상의 지혜 하나를 들어올리는 일이 그렇게 처절하다는 말일까. 고통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고요하게 앉아 있는 부처가 마치 조각배처럼 보인다. _157쪽


시인이 쓰는 시는 그가 얼핏 보았던 저 빛에 대한 한차례의 기념일 뿐이다. 그는 매듭을 만들면서 매듭을 파괴한다. 그는 매듭을 딛고 매듭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능한 것은 또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시는, 좋은 시일수록, 실패담의 형식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_159쪽


아름다운 것이건, 슬픈 것이건, 놀라운 것이건, 경이로운 것이건, 어떤 것 앞에서 누군가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말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가 성실한 사람일 때, 그는 그 희생된 것들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 ‘이루 형언할 수 없음’을 문제로 발견하고, 계약의 파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을 재조정하여 인간을 헛된 계약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는 시인이거나 소설가일 것이다. 문학의 미학도 윤리도 형언할 수 없는 것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_169쪽

목차

책머리에 ? 5 제1부 시와 말과 세상 시 쓰는 몸과 시의 말 ? 17 문학의 정치성과 자율성 ? 43 잘 표현된 불행 ? 59 불모의 현실과 너그러운 말 ? 78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 86 상징과 알레고리 ? 99 번역과 시 ? 109 누가 말을 하는가 ? 129 끝나지 않는 이야기 ? 142 실패담으로서의 시 ? 154 비평의 언저리 ? 161 얼굴 없는 것들 ? 172 형해로 남은 것들 ? 181 절망의 시간 또는 집중의 시간 ? 198 젊은 세대의 시와 두 개의 감옥 ? 216 위반으로서의 모국어 그리고 세계화 ? 229 정치 대중화 시대에 문학은 가능한가? ? 244 어머니의 환유 ? 254 제2부 현대시의 길목 한용운―이별의 괄호 ? 263 소월의 자연 ? 277 김기림에게 바치는 짧은 인사 ? 288 『오감도』 평범하게 읽기 ? 299 지성주의의 시적 서정―윤동주 시의 모순구조 ? 325 김수영의 현대성 혹은 현재성 ? 339 시의 몫, 몸의 몫 ? 361 관념시에서의 구체성의 자리 ? 381 말라르메 송욱 김춘수―말라르메 수용론을 위한 발의 ? 397 역사의식과 비평의식―송욱의『시학평전』에 관해 ? 408 세속과의 완전한 불화 ? 432 제3부 시쓰기의 현장 인내하는 자의 농업―이문재, 『마음의 오지』 ? 455 꿈의 시나리오 ? 463 고은의 가성에 대해―고은, 『늦은 노래』 ? 475 시의 마지막 자리 ? 494 꿈의 시나리오 쓰기, 그 이후―이수명,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 503 이영광의 유비적 사고―이영광, 『직선 위에서 떨다』 ? 519 김록의 실패담―김록, 『광기의 다이아몬드』 ? 533 나그네의 은유 ? 551 영생하는 여자―이경림, 『상자들』 ? 562 잊어버려야 할 시간을 찾아서―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 573 김근의 고독한 판타지―김근, 『뱀소년의 외출』 ? 586 김이듬의 감성 지도―김이듬, 『별 모양의 얼룩』 ? 596 ‘완전소중’ 시코쿠―번역의 관점에서 본 황병승의 시 ? 607 위선환의 고전주의―위선환, 『새떼를 베끼다』 ? 630 유비의 감옥과 그 너머―송승환, 『드라이아이스』 ? 643 이은봉의 흥취―이은봉, 『책바위』 ? 653 상처 그리고 투명한 소통―정재학,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 666 허전한 것의 치열함―박철, 『불을 지펴야겠다』 ? 677 이문숙이 시를 쓰는 시간―이문숙,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 689 불행의 편에 서서―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 ? 699 부적절한 길 또는 길 밖의 길―김혜수, 『이상한 야유회』 ? 709 말과 감각의 경제학―최승자, 『물위에 씌어진』 ? 722 이녁의 시학―이경림,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 732 소외된 육체의 고통―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 743 가난한 자의 위대한 거부―신현정, 『바보 사막』 ? 750 제4부 이 시를 어떻게 읽을까 「往十里」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763 『烏瞰圖』의「詩第一號」에 과거가 없다 ? 775 꽃이 열매의 上部에 피었을 때 ? 784 「曠野」에서 닭은 울었는가 ? 794 하얀 무지개의 꼭대기 ? 804 『님의 沈默』의 두 시편 ? 812 김종삼과 죽은 아이들 ? 820 이와 책―젊은 김수영의 초상 ? 830 정지용의「鄕愁」에 붙이는 사족 ? 842 김광균의 학교와 정거장 ? 854 이상화의 침실 ? 864 이장희―푸른 하늘의 유방 ? 878 정지용의 ‘누뤼’와 ‘연미복의 신사’ ? 887 이상李箱의 막 달아나기 ? 900 박양균과 오르페우스의 시선 ? 908 조향趙鄕의 초현실주의 ? 917 수록 평론 출전 ?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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