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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0975821 / 292쪽 148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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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생생하게 전하는 임시정부의 항일 루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한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만큼은 명확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몸으로 임시정부와 동지들의 안전을 살피고, 한국광복군 창설과 통합 정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구와 독립을 꿈꾸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선열들의 행적을 좇았다. 일본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천신만고의 피란길을 헤쳐 나간 임시정부 대가족들의 행로를 찾아내어 그대로 체험코자 했다.
-발간사 중에서
출판사 리뷰
2019년 6월 26일 김구 서거 70주기 길고 험난했던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한·중 역사 전문가가 꼼꼼하게 되밟다 1919년 3일 1일. 전국에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퍼져 나간 이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하와이로 투쟁의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굳센 항일 정신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해외 독립 투쟁 여정은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한커우, 창사, 광저우, 우저우, 구이핑, 류저우, 이산, 우산, 구이양, 치장, 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펼친 정치·외교 활동과 일제의 공습을 피해 최대한 몸을 숨기며 생활을 했던 고난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문가 11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어 그들이 걸어간 항일 노정을 되밟았다. 그 길은 비록 꽃길이기보다는 진창길이었지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그 가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을 향한 투지는 한결같이 드높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에서는 상하이에서 전장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치 활동과 피난 생활의 흔적을 따라가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태”며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려 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 상하이에서 시작해 난징에서 새 국면을 맞이하다 『백범의 길-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권은 상하이,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 전장에 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의 흔적을 되밟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처음엔 교민단 사무소를 빌려 쓰다가 1919년 8월 초 샤페이로 321호로 이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자리 잡은 상하이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고인에 대한 장례를 치르며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구는 상하이 거주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들을 상하이에 불러들였는데, 가족과의 화목한 시절도 잠시, 김구의 부인인 최준례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마랑로 푸칭리 4호로 청사를 이전한다. 이때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 자리에 오르지만 경제적으로는 극히 곤궁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도맡아 일제 처단을 위한 작전을 감행한다.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을 일본으로 파견하고, 최홍식, 유상근을 다롄으로 파견하는 등 필사적으로 의거를 추진한다. 일본 헌병이 한인 거주지를 포위하고 한인들의 출입을 경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근거지였던 만큼 일본총영사관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압박했다. 김구를 체포하고자 하는 계획도 여러 차례 실행되었지만 실패하고, 결국 김구에게 60만 원이 현상금이 걸리는 등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는 삼엄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의거는 한인 독립의지를 선양하면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열강에 충격을 주는 효과를 낳았다. 중국인들은 한인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고, 중국국민당도 한인의 항일 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난징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렇듯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은 중국국민당과 중국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얻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한국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독립 의지에 공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미국인 가족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연대의 역사를 피치 목사와 추푸청 가족과의 일화를 통해 자세하게 다루었다. 최초로 밝히는 김구의 상하이 탈출 루트 지도로 본 상하이와 난징의 활동 장소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상권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활과 활동상에 대해 자세히 싣고 있다. 김구가 상하이에 입성할 때 이용한 부두가 어디였는지, 상하이 우정총국과 요코하마쇼킨은행이 독립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한다. 또한 상하이병공창 창장으로 지내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쑹스뱌오와 김구를 비록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몸을 숨겨 주고 자싱으로의 피난을 도운 피치 부부를 조명함으로써 독립 거사의 실행에 한 사람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1932년 5월 중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를 탈출해 자싱으로 향했던 탈출 루트를 소개해 당시의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한다. 또한 난징에 남아 있는 김구와 관련된 사적 위치를 지도로 보여 줌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징에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는 기획에서 출간까지 꼬박 2년이 걸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권역별로 답사를 하고, 연구하고, 취재했으며,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서로 내용을 체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는 데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들을 꼼꼼히 담아 독자들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찾아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그 당시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중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 부대 조직과 대일 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양군관학교 싱쯔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 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 부대를 ‘군’보다는 ‘대’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우한·창사-우한 국민정부청사 p. 15
포산에서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그동안 누려 왔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국이라고는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어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끼니 걱정은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산에서는 일자리를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이 없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늘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나마 임시정부가 가족 수에 맞춰 생활비를 나누어 주었기에 간신히 기본적인 생계는 이어 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언제 또다시 피난을 가야 할지 몰라 늘 짐을 쌀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이러한 불안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는데,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일본군이 10월 초 광둥성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함락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포산에 머무를 수 없어, 임시정부는 짐을 꾸려 일단 싼수이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정정화는 당시의 상황을 『장강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저우·포산-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p. 100
구이핑을 거쳐 류저우에 온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 120명 정도였다. 각종 기록에 나오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거주지는 장시후이관, 징시로 10호, 타이핑시가 18호, 칭윈로 109호, 그리고 랴오레이공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기념관이 위치한 러췬서 등등이었다. 초기부터 분산 수용되었고, 류저우를 떠날 때까지도 변화는 없었다. 류저우에는 잠시 동안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에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교통편이 그때서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즉, 류저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인 판공처를 설치해 운영했다기보다는 조만간의 이동에 대비해 잠시 대기하던 곳이라 하겠다.
구이핑·류저우-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 p. 129
김효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기와집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 모두들 이곳에 텃밭을 일구어 그동안 중국 땅에서 누려 보지 못했던 농촌의 전원생활을 누렸다 한다. 윤봉길이 의거를 감행한 후 임시정부는 8년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치장에 머물던 일 년 반 동안에도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들은 일본군의 대공습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는데, 그나마 이곳 투차오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시 김효숙은 어린아이들을 한데 모아 한국어와 한글, 동요 등을 가르쳤다. 임시정부 직원의 부인이나 모친들도 허투루 나날을 보내지 않고, ‘한국여성혁명동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한인촌이 있던 산비탈 아래에는 둥칸폭포가 있었다. 폭포수는 비교적 맑고 깨끗하여 그 물이 흘러 화시허를 이루었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화시허의 물을 길어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김자동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신체가 강건했던 김신은 매번 투차오에 올 때마다 물 긷는 일을 도왔다 한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종종 화시허에서 잡은 물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더운 여름날이면 이곳에서 수영도 즐겼다.
충칭·시안-충칭, 투차오와 허상산 pp. 150-151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 중화민국 항전4 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에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 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투쟁의 준비는 그의 도덕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선언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성립된 이후 정식 군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감격과 중국과의 공동 항전을 천명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해방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항전할 것임을 대내외에 선전한 것이다. 이 선언문의 발표는 한국광복군 창설의 복잡다단한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 우한에서 창설된 이후 경쟁적인 관계가 고착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을 완성해야 할 임시정부로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고 결국 한국광복군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충칭·시안-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pp. 172-173
한국광복군은 다양한 계기와 조건 속에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과정 속에서 확대되었다. 초창기에는 30여 명 인원에 장교급 인사만 참여하여 ‘사병들은 거의 없는 군대’였다. 그러나 차츰 초모 활동과 한청반 훈련 과정에 성과를 드러내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통합되면서 큰 규모로 확장되었고, 다시 충칭의 조선의용대와 합쳐졌다. 그러나 중국 측의 지휘 통제 요구로 한국광복군은 다시 재편되었고 시안 소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충칭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전진사령부로서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충칭·시안-한국광복군 전진사령부 기지 p. 197
학도병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이 이들의 존재에 착안하여 대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안을 구상했는데, 이를 위해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중심이 되어 한인지하공작원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작전을 마련했다. OSS는 한국광복군이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출신이 다수라는 사실에서 한반도 침투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임시정부도 OSS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 공작을 전개하는 것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 15일 한국광복군 사령부와 주중국 미군 사이에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광복군을 대상으로 3개월간 비밀 훈련을 실시하고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미군의 상륙을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은 인적이 드문 시안 교외의 미퉈구쓰라는 절 뒤편에 있는 산악 지대를 한국광복군의 훈련지로 택해 5월부터 훈련을 실시했다.
충칭·시안-OSS훈련지 미퉈구쓰 p. 203
발간사 그 멀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따라
우한·창사
우한 국민정부청사: 전쟁의 시작
창사 백범김구 활동기념관: 혼란스러운 정국의 소용돌이
광저우·포산
광저우 둥산 보위안과 야시야뤼관: 임시정부의 임시 거처
광저우의 쑨원 호법정부: 임시정부가 호법정부를 만나다
광저우, 국공합작의 도시: 혁명과 독립을 꿈꾸던 청춘들
광저우 황푸 강변 학생묘지: 중국혁명의 와중에 스러지다
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불안한 미래와 다급한 피난길
임시정부 가족들의 피난길: 충칭으로 가는 길
구이핑·류저우
싼수이에서 류저우까지: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 일본군의 공습 아래서
류저우 취위안극장: 부상병 위문 공연
충칭·시안
충칭, 투차오와 허상산: 임시정부 가족들의 거처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항전을 위해 힘써 일군 터전
한국광복군 전진사령부 기지: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OSS훈련지 미퉈구스: 참전을 위해 땀 흘리던 곳
김구의 충칭 생활기: 독립을 지탱한 버팀목
연보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