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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 1-6권 세트

오희문 저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역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9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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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9946074 / 2704쪽 152 x 224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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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붙임] 1 『쇄미록』미리보기(주요 내용) 의병에 대하여 관군에서 도망쳐 나와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관곡이나 축내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는 왜군의 수급이라고 속이고 살해된 백성의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현실도 고발했다. 그렇지만 김면, 곽재우와 같이 제 역할을 하는 의병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먼 지역에 물러나 움츠린 채 양식만 축내고 나아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욱 우습다. 이름만 의병일 뿐 사실은 도망쳐서 죄를 얻은 관군들이 죄다 모여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인 셈이다. 심지어 좌도의 수군 중에는 물에서 싸우는 것이 싫어서 의병에 가담한 자도 많다. (…) 영남 의병장 김면과 곽재우는 용사들을 많이 모아서 대치한 적을 날마다 공격하여 수급을 바친다고 하니, 이들이야말로 의병의 이름에 걸맞다고 하겠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일)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털만 제거한 뒤 베어 온 것이다. 의병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의 머리라고 여겨 순찰사에게 수급을 바쳤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3일)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조선 군과 연합하여 전과를 거둔 것과는 별개로, 조선의 백성들은 명군의 횡 포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고을의 수령들도 모욕이 두려워 명군의 횡포에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수령들이 이러하니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불문가지인 형편이었다. “낮에 명나라 병사 4명이 저자에 나와 소금 파는 사람의 말을 약탈했다가 도로 말 주인에게 빼앗기자, 노기를 띠고 소지한 은자(銀子) 20냥을 빼앗아 갔다는 핑계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결박하고 수없이 때린 뒤 관아의 뜰에 데리고 와서 벌을 주라고 했다. 현감이 어쩔 수 없이 가두고 좋은 말로 해명했지만 끝내 듣지 않고 기어코 벌을 주게 하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나라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주와 꿀, 병아리 등의 물건을 찾는 일이 많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큰 몽둥이로 마구 매질하며 고을 수령까지 모욕했다. 그들이 가는 곳의 관원은 맞이하고 보내는 근심이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난리가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으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다.” (갑오일록, 1594년 6월 4일) “평강(오윤겸)의 편지를 보니 지난 25일에 쓴 것인데, 명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하여 온갖 포악질을 일삼아서 가진 물건을 다 빼앗겼고 아랫사람들은 많이 맞아 상했으며 평강(오윤겸)도 욕을 당할까 두려워 숨어 지내며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필경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 자방(신응구)의 편지와 딸의 편지를 전해 주어 보니, 위아래 식솔이 무사히 지낸다고 한다. 다만 명나라 군사를 피하여 지난달 초에 봉산에서 신천군(信川郡)으로 옮겨 살았는데, 불편한 일이 많아서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명나라 군사가 다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봉산 옛집으로 돌아와 지내며 여름을 보낸 뒤에 한양으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기해일록, 1599년 3월 3일) 전쟁의 참상 전쟁은 궁핍을 막바지까지 몰아대며 인간성을 시험하는 무대였다. 오희문은 이러한 참상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다. “최근에는 걸인이 매우 드물다. 모두들 두어 달 사이에 이미 다 굶어 죽었기 때문에 마을에 걸식하는 사람이 보기 드물다고 한다. (…)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육촌의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항상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듣자니, 한양 근처에서 전에는 1, 2되의 쌀을 가진 사람이라야 죽이고 빼앗더니 최근에는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서 죽여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갑오일록, 1594년 4월 3일) “어제 오는 길에 7, 8세 되는 아이가 큰소리로 통곡하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감싸고 슬피 우는 것을 보았다. 괴이해서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남편이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밥을 구걸했는데 이제는 구걸해도 얻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기에,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혼자 갔습니다. 우리도 장차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니, 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애통함과 측은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부모 자식은 타고난 지친(至親)이고, 부부에게는 사랑하는 윤리가 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모두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데 심지어 길바닥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니,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극도에 이르렀는가. 애처로운 우리 창생(蒼生)이 장차 다 없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으리니, 안타까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계사일록, 1593년 7월 15일) 16세기 양반과 노비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던 양반으로서는 노비에게 생존을 의존하는 만큼 노비에 대한 오희문의 관심은 절대적이었고, 사안에 따라 모순된 심정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안손과 명복이 2월 20일 새벽에 한꺼번에 도망쳤다. 전날에 두 사내종이 서로 약속하고서 말을 가지고 양식을 실어 달아났으니 분통이 터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안손은 계당에 있는 구리 화로[銅爐] 1개와 작두[斫刀] 1개, 낫[鎌子] 3자루를 훔쳐 갔다. (…) 윗전이 오직 말 한 필밖에 없어서 피난할 때 이것을 믿고 타고 다녔는데, 이마저 훔쳐 달아났으니 그 뼈아픔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훗날 붙잡을 수 있다면, 윗전을 사지에 몰아넣은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계사일록, 1593년 2월 20일) 이 기록 이외에도 『쇄미록』에는 도망 노비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일하기 싫어 도망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다른 종과 혼인한 사내종과 계집종이 눈이 맞아 도망하기도 했으며, 붙잡혀 왔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또한 현물이 오가는 운반 과정에서 일부 수량을 가로채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다. “명복이 돌아왔다. 경여의 처가 찰떡을 쪄서 보냈기에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또 베갯모[枕隅]를 팔아서 벼 8말, 콩 3말 5되를 얻어서 짊어지고 왔다. 다만 다시 되어 보니 1말이 모자란다. 분명 명노가 훔쳐 먹은 게다. 괘씸하고 얄밉다.”(계사일록, 1593년 10월 30일) “명복이 함열에서 왔다. 함열 현감이 정미 3말, 생준치 2마리, 꿀 5홉, 녹두 1되를 보냈는데, 다시 되어 보니 쌀 5되가 줄었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병을 앓는 집에서 꿀을 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분명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 충아 어미와 인아가 아파서 이것들을 가져오면 죽을 쑤어 먹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니 더 화가 난다.”(갑오일록, 1594년 5월 8일) 긴장관계는 평소에 경작에 사역하는 노비와의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풀을 베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한 말을 하는 종의 발바닥을 때리며 응징하기도 하고, 게으름 피우는 노비들의 일터에 불시에 들이닥쳐 혼찌검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들도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는 생업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전쟁 중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험도 없던 양봉(養蜂)에 손을 댔다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오희문으로서는 자기 몫의 양잠에만 열중하는 노복이 밉기 마련이었다. “채억복에게 벌통을 지워 보내서 곧장 전날에 온 벌통 오른쪽에 앉혔는데, 오후에 양쪽 벌들이 서로 싸워 물려 죽은 벌이 거의 1되 정도 되었다. 아깝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움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날이 저물어 각각 벌집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뒤에 먼 곳으로 옮겨 앉혔다. 벌의 종류가 다르면 싸워서 죽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탄식할 일이다.”(무술일록, 1598년 3월 8일) “덕노가 보은에서 돌아와서 그 이튿날부터 뽕잎 따는 일을 시작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만일 상전의 일이었다면 반드시 꺼리고 원망도 많았을 것이다.”(경자일록, 1600년 5월 4일) 한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 아들의 과거급제와 딸의 죽음 등을 기록 “오후에 성균관 사람 5명이 한양에서 달려왔다. 급제 방목(榜目, 합격자 명단)을 가지고 나팔을 불며 와서 알리는 말이, 그저께 저녁에 방목이 나왔는데 평강(오윤겸)이 급제했다고 한다. …… 오씨(吳氏) 문중에 우리 5대조 이하로 급제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우리 아들이 처음으로 이루어 냈다. 이제부터 뒤를 이어 나오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문의 경사를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더욱 한없이 기쁘다. 하늘에 계신 선친의 영령도 저승에서 분명 기뻐하실 것이다. 아, 슬픈 감회 또한 지극히 일었다. …… 난리 통에 급제한들 아무도 상관하지 않겠지만,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분명 지극히 기뻐서일 게다. 다만 급제한 뒤에는 음관(蔭官)과는 달라서 벼슬길에 오르면 분명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한없이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한 몸을 이미 나라에 맡겼으면 평안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아야 하는 것은 곧 신하된 사람의 본분이니,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닌 것이다.”(정유일록, 1597년 3월 19일) “이른 식사 뒤에 윤함이 비로소 떠나서 황해도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여기에서 여름을 날 생각이었는데, 사람과 말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다. 작별할 때에 서운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 문밖에 나가 우두커니 서서 아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멀리 바라보았다. 흰옷이 숲 사이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더니 산을 넘어간 뒤에는 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돌아오니, 종일토록 휑하여 마치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게 얼마나 된다고 부자간에 함께 살지도 못하고 해마다 오가며 오랫동안 이별하여 있는가. 한번 헤어진 뒤에는 소식을 전하기 어렵고, 반드시 만난 뒤에야 서로 길하고 흉한 일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이 시절 탓인가, 운명 탓인가. 슬프기 그지없다.”(무술일록, 1598년 5월 6일) “단아의 증세는 조금 나아졌으나 아직도 쾌차하지 않았다. 음식을 비록 조금 더 먹기는 하지만 역시 달지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제 어미가 백방으로 구해다 먹이면서 다만 음식 하나라도 먹고 싶어 하기를 바라면서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는다. 앉으나 누우나 부축하고 안아 주면서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이 오로지 딸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자애로운 어미의 끝없는 은혜라고 할 만하다. 자식 된 자가 부모의 마음처럼만 마음을 쓴다면 효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병신일록, 1596년 11월 16일) “간밤 꿈에 죽은 딸을 보았다. 내가 마침 누구 집인지 모르는 곳에 있었는데, 손에 약과를 들고 여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을 때 죽은 딸이 행랑 아래 서 있었다. 기름을 바른 머리를 빗질해 땋고 분을 바르지는 않았으며 자색 저고리와 반청(半靑) 치마를 입고서 얼굴을 들고 손을 내밀어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너도 여기에 있었느냐?”라고 하고 즉시 대계(大桂) 1잎을 주었더니, 바로 받아서 산적 꼬지에 꿰어 먹는 것이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다. 말소리와 용모가 흡사 생전 모습과 같았고 얼굴과 눈동자가 또렷이 떠올라 절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둘째 딸과 두 며느리는 등불을 밝혀 바느질을 하면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집사람도 잠들지 않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내가 꿈에서 본 일을 말해 주고 집사람과 마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기해일록, 1599년 3월 8일) 이 외에도 『쇄미록』에는 정사(正史)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이면의 역사가 펼쳐진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도 하고, 막연히 알고 있던 개념적 사실에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쉬운 현대어로 정확하게 새로 번역된 『쇄미록』은 우리들을 16세기 조선으로 이동시켜 주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저자 소개

  • 저자 : 오희문
저자 : 오희문


엮음 : 오희문


역자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책 속에서


『쇄미록』미리보기(주요 내용)

• 의병에 대하여
관군에서 도망쳐 나와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관곡이나 축내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는 왜군의 수급이라고 속이고 살해된 백성의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현실도 고발했다. 그렇지만 김면, 곽재우와 같이 제 역할을 하는 의병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먼 지역에 물러나 움츠린 채 양식만 축내고 나아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욱 우습다. 이름만 의병일 뿐 사실은 도망쳐서 죄를 얻은 관군들이 죄다 모여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인 셈이다. 심지어 좌도의 수군 중에는 물에서 싸우는 것이 싫어서 의병에 가담한 자도 많다. (…) 영남 의병장 김면과 곽재우는 용사들을 많이 모아서 대치한 적을 날마다 공격하여 수급을 바친다고 하니, 이들이야말로 의병의 이름에 걸맞다고 하겠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일)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털만 제거한 뒤 베어 온 것이다. 의병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의 머리라고 여겨 순찰사에게 수급을 바쳤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3일)

•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조선 군과 연합하여 전과를 거둔 것과는 별개로, 조선의 백성들은 명군의 횡 포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고을의 수령들도 모욕이 두려워 명군의 횡포에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수령들이 이러하니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불문가지인 형편이었다.

“낮에 명나라 병사 4명이 저자에 나와 소금 파는 사람의 말을 약탈했다가 도로 말 주인에게 빼앗기자, 노기를 띠고 소지한 은자(銀子) 20냥을 빼앗아 갔다는 핑계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결박하고 수없이 때린 뒤 관아의 뜰에 데리고 와서 벌을 주라고 했다. 현감이 어쩔 수 없이 가두고 좋은 말로 해명했지만 끝내 듣지 않고 기어코 벌을 주게 하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나라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주와 꿀, 병아리 등의 물건을 찾는 일이 많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큰 몽둥이로 마구 매질하며 고을 수령까지 모욕했다. 그들이 가는 곳의 관원은 맞이하고 보내는 근심이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난리가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으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다.” (갑오일록, 1594년 6월 4일)
“평강(오윤겸)의 편지를 보니 지난 25일에 쓴 것인데, 명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하여 온갖 포악질을 일삼아서 가진 물건을 다 빼앗겼고 아랫사람들은 많이 맞아 상했으며 평강(오윤겸)도 욕을 당할까 두려워 숨어 지내며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필경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 자방(신응구)의 편지와 딸의 편지를 전해 주어 보니, 위아래 식솔이 무사히 지낸다고 한다. 다만 명나라 군사를 피하여 지난달 초에 봉산에서 신천군(信川郡)으로 옮겨 살았는데, 불편한 일이 많아서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명나라 군사가 다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봉산 옛집으로 돌아와 지내며 여름을 보낸 뒤에 한양으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기해일록, 1599년 3월 3일)
• 전쟁의 참상
전쟁은 궁핍을 막바지까지 몰아대며 인간성을 시험하는 무대였다. 오희문은 이러한 참상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다.

“최근에는 걸인이 매우 드물다. 모두들 두어 달 사이에 이미 다 굶어 죽었기 때문에 마을에 걸식하는 사람이 보기 드물다고 한다. (…)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육촌의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항상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듣자니, 한양 근처에서 전에는 1, 2되의 쌀을 가진 사람이라야 죽이고 빼앗더니 최근에는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서 죽여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갑오일록, 1594년 4월 3일)
“어제 오는 길에 7, 8세 되는 아이가 큰소리로 통곡하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감싸고 슬피 우는 것을 보았다. 괴이해서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남편이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밥을 구걸했는데 이제는 구걸해도 얻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기에,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혼자 갔습니다. 우리도 장차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니, 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애통함과 측은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부모 자식은 타고난 지친(至親)이고, 부부에게는 사랑하는 윤리가 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모두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데 심지어 길바닥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니,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극도에 이르렀는가. 애처로운 우리 창생(蒼生)이 장차 다 없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으리니, 안타까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계사일록, 1593년 7월 15일)

• 16세기 양반과 노비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던 양반으로서는 노비에게 생존을 의존하는 만큼 노비에 대한 오희문의 관심은 절대적이었고, 사안에 따라 모순된 심정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안손과 명복이 2월 20일 새벽에 한꺼번에 도망쳤다. 전날에 두 사내종이 서로 약속하고서 말을 가지고 양식을 실어 달아났으니 분통이 터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안손은 계당에 있는 구리 화로[銅爐] 1개와 작두[斫刀] 1개, 낫[鎌子] 3자루를 훔쳐 갔다. (…) 윗전이 오직 말 한 필밖에 없어서 피난할 때 이것을 믿고 타고 다녔는데, 이마저 훔쳐 달아났으니 그 뼈아픔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훗날 붙잡을 수 있다면, 윗전을 사지에 몰아넣은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계사일록, 1593년 2월 20일)

이 기록 이외에도 『쇄미록』에는 도망 노비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일하기 싫어 도망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다른 종과 혼인한 사내종과 계집종이 눈이 맞아 도망하기도 했으며, 붙잡혀 왔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또한 현물이 오가는 운반 과정에서 일부 수량을 가로채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다.

“명복이 돌아왔다. 경여의 처가 찰떡을 쪄서 보냈기에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또 베갯모[枕隅]를 팔아서 벼 8말, 콩 3말 5되를 얻어서 짊어지고 왔다. 다만 다시 되어 보니 1말이 모자란다. 분명 명노가 훔쳐 먹은 게다. 괘씸하고 얄밉다.”(계사일록, 1593년 10월 30일)
“명복이 함열에서 왔다. 함열 현감이 정미 3말, 생준치 2마리, 꿀 5홉, 녹두 1되를 보냈는데, 다시 되어 보니 쌀 5되가 줄었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병을 앓는 집에서 꿀을 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분명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 충아 어미와 인아가 아파서 이것들을 가져오면 죽을 쑤어 먹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니 더 화가 난다.”(갑오일록, 1594년 5월 8일)

긴장관계는 평소에 경작에 사역하는 노비와의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풀을 베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한 말을 하는 종의 발바닥을 때리며 응징하기도 하고, 게으름 피우는 노비들의 일터에 불시에 들이닥쳐 혼찌검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들도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는 생업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전쟁 중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험도 없던 양봉(養蜂)에 손을 댔다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오희문으로서는 자기 몫의 양잠에만 열중하는 노복이 밉기 마련이었다.

“채억복에게 벌통을 지워 보내서 곧장 전날에 온 벌통 오른쪽에 앉혔는데, 오후에 양쪽 벌들이 서로 싸워 물려 죽은 벌이 거의 1되 정도 되었다. 아깝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움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날이 저물어 각각 벌집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뒤에 먼 곳으로 옮겨 앉혔다. 벌의 종류가 다르면 싸워서 죽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탄식할 일이다.”(무술일록, 1598년 3월 8일)
“덕노가 보은에서 돌아와서 그 이튿날부터 뽕잎 따는 일을 시작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만일 상전의 일이었다면 반드시 꺼리고 원망도 많았을 것이다.”(경자일록, 1600년 5월 4일)

• 한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 아들의 과거급제와 딸의 죽음 등을 기록

“오후에 성균관 사람 5명이 한양에서 달려왔다. 급제 방목(榜目, 합격자 명단)을 가지고 나팔을 불며 와서 알리는 말이, 그저께 저녁에 방목이 나왔는데 평강(오윤겸)이 급제했다고 한다. …… 오씨(吳氏) 문중에 우리 5대조 이하로 급제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우리 아들이 처음으로 이루어 냈다. 이제부터 뒤를 이어 나오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문의 경사를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더욱 한없이 기쁘다. 하늘에 계신 선친의 영령도 저승에서 분명 기뻐하실 것이다. 아, 슬픈 감회 또한 지극히 일었다. …… 난리 통에 급제한들 아무도 상관하지 않겠지만,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분명 지극히 기뻐서일 게다. 다만 급제한 뒤에는 음관(蔭官)과는 달라서 벼슬길에 오르면 분명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한없이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한 몸을 이미 나라에 맡겼으면 평안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아야 하는 것은 곧 신하된 사람의 본분이니,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닌 것이다.”(정유일록, 1597년 3월 19일)
“이른 식사 뒤에 윤함이 비로소 떠나서 황해도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여기에서 여름을 날 생각이었는데, 사람과 말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다. 작별할 때에 서운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 문밖에 나가 우두커니 서서 아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멀리 바라보았다. 흰옷이 숲 사이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더니 산을 넘어간 뒤에는 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돌아오니, 종일토록 휑하여 마치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게 얼마나 된다고 부자간에 함께 살지도 못하고 해마다 오가며 오랫동안 이별하여 있는가. 한번 헤어진 뒤에는 소식을 전하기 어렵고, 반드시 만난 뒤에야 서로 길하고 흉한 일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이 시절 탓인가, 운명 탓인가. 슬프기 그지없다.”(무술일록, 1598년 5월 6일)
“단아의 증세는 조금 나아졌으나 아직도 쾌차하지 않았다. 음식을 비록 조금 더 먹기는 하지만 역시 달지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제 어미가 백방으로 구해다 먹이면서 다만 음식 하나라도 먹고 싶어 하기를 바라면서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는다. 앉으나 누우나 부축하고 안아 주면서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이 오로지 딸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자애로운 어미의 끝없는 은혜라고 할 만하다. 자식 된 자가 부모의 마음처럼만 마음을 쓴다면 효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병신일록, 1596년 11월 16일)
“간밤 꿈에 죽은 딸을 보았다. 내가 마침 누구 집인지 모르는 곳에 있었는데, 손에 약과를 들고 여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을 때 죽은 딸이 행랑 아래 서 있었다. 기름을 바른 머리를 빗질해 땋고 분을 바르지는 않았으며 자색 저고리와 반청(半靑) 치마를 입고서 얼굴을 들고 손을 내밀어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너도 여기에 있었느냐?”라고 하고 즉시 대계(大桂) 1잎을 주었더니, 바로 받아서 산적 꼬지에 꿰어 먹는 것이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다. 말소리와 용모가 흡사 생전 모습과 같았고 얼굴과 눈동자가 또렷이 떠올라 절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둘째 딸과 두 며느리는 등불을 밝혀 바느질을 하면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집사람도 잠들지 않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내가 꿈에서 본 일을 말해 주고 집사람과 마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기해일록, 1599년 3월 8일)

이 외에도 『쇄미록』에는 정사(正史)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이면의 역사가 펼쳐진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도 하고, 막연히 알고 있던 개념적 사실에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쉬운 현대어로 정확하게 새로 번역된 『쇄미록』은 우리들을 16세기 조선으로 이동시켜 주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목차

쇄미록 1 임진남행일록
쇄미록 2 계사일록
쇄미록 3 갑오일록
쇄미록 4 을미일록.병신일록
쇄미록 5 정유일록.무술일록
쇄미록 6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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