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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호남·제주 편)

정찬대 저 | 한울엠플러스 | 201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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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46063570 / 344쪽 148 x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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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자가 발굴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
그 첫 번째 기록, 호남·제주 편


‘창쟁이’라는 말이 있다. 1950년을 전후로 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무수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총알이 부족했던 시기라 학살의 가해자들은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창으로 민간인들을 찔러 죽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컥컥거리며 쓰러졌다. ‘창쟁이’들은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학살지로 이동했다.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기자 정찬대가 호남과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60여 년 전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를 엮은 책이다. 호남·제주, 영남, 강원, 충청, 서울·경기를 아우르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기획인 이 책은 영암·구례·화순·함평·순창·남원·임실·제주 등 호남과 제주 지역 여덟 곳에 골골이 밴 학살의 기록을 담았다. 그 이야기 속에는 불에 태워 죽이고 창으로 찔러 죽이고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인 폭력의 역사와 함께, 그럼에도 여전히 화해를 갈구하는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출판사 리뷰

기자가 발굴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
그 첫 번째 기록, 호남·제주 편


‘창쟁이’라는 말이 있다. 1950년을 전후로 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무수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총알이 부족했던 시기라 학살의 가해자들은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창으로 민간인들을 찔러 죽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컥컥거리며 쓰러졌다. ‘창쟁이’들은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학살지로 이동했다.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기자 정찬대가 호남과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60여 년 전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를 엮은 책이다. 호남·제주, 영남, 강원, 충청, 서울·경기를 아우르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기획인 이 책은 영암·구례·화순·함평·순창·남원·임실·제주 등 호남과 제주 지역 여덟 곳에 골골이 밴 학살의 기록을 담았다. 그 이야기 속에는 불에 태워 죽이고 창으로 찔러 죽이고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인 폭력의 역사와 함께, 그럼에도 여전히 화해를 갈구하는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당사자 구술로 엮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


“장개석 총통이 말한 것처럼 명주 베에 붉은 물이 들면 빨아도 빠지지 않아. 어린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 별수 없어, 그냥 죽여야 해.” _ 162쪽, 5장 순창

지난 2015년에 시작하여 얼마 전에 연재를 마친 동명의 연재물을 바탕으로, 취재 지역을 추가하고 문장을 다듬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호남·제주 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남겨야 할 어떤 기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책이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에 위치한 국립임실호국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경은 물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지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추모의 공간 옆에는, 반대로 국가에 의해 무참히 살육된 민간인들의 넋도 함께 웅크리고 있다. 1951년 3월 14일, 임실의 한 폐광굴에 남산리 마을 주민 700여 명이 갇힌 채 시커먼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군경은 양쪽에서 입구를 틀어막은 뒤 한쪽 입구 앞에서 고춧대, 솔잎 등을 태운 연기를 굴속으로 들여보냈다. 숨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바깥으로 뛰쳐나온 주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경의 기관총이었다. 이날 700명이 넘는 민간인이 굴 안에서 죽었다. 국가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바로 오른편 언덕 위 국립임실호국원에는 태극기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갈전리에서 만난 류 씨의 팔은 참혹했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총상 자국은 깊게 패어 있었고, 힘줄이 끊겼는지 손은 불구가 돼 펴지지 않았다. …… 그는 “시체 속에서 아기가 울더라고, 그러더니 ‘이놈들 봐라’ 하면서 군인들이 다시 확인 사살을 하는 거야, 그 통에 다 죽었지”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류 씨의 표정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_ 95~96쪽, 3장 화순

병사들은 이미 죽은 시체의 머리통에 콜트 45구경 권총을 대고 총질을 했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한반도의 군경들 역시 ‘악의 평범성’에 매몰되어 기계적으로 학살에 가담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악하고 나약한 존재였을까? 그러나 이런 참혹한 순간 속에서도 인간의 용기는 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장년층을 사살한 기관총의 가늠쇠는 어느새 여성 쪽을 향했다. 그때였다. 세 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은 나순례 씨(당시 29세)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총부리를 틀어잡았다. 방금 전 난사로 총열은 뜨거웠지만, 나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뭣 땜시 우리를 죽인다요?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제발 살려주시오.” 공포감에 떤 채 아무 말 없던 몇몇 주민과 아이들이 하나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냉혈한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그 모습에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군인들은 싸늘하게 널브러진 시체를 방치한 채 급히 철수했다. _ 112~113쪽, 3장 화순

여전히 역사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

영암 구림마을에는 ‘지와목 사건 순절비’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빨치산 인민유격대는 야간에 마을을 기습해 기독교 신자와 경찰 가족 등이 포함된 우익 인사 28명을 지와목에 있는 주막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며칠 뒤 군경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수복되자 보복 학살이 단행되었다. 지와목에서 죽은 우익 인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한국반공연맹이 주축이 되어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다. 그것이 지와목 사건 순절비다. 물론 좌익으로 몰려 억울한 보복 학살을 당한 주민들을 위한 애도는 없었다. “그래도 좌익한테 죽어서 순절비도 세우고 그랬지, 군경한테 죽으면 뭔 말도 못하고 그랬다.” 구림에서 만난 한 주민의 육성이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왕인박사 유적지 맞은편에 위령탑 하나가 더 세워졌다. 보복 학살의 피해자들을 위한 비석이었다.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는 이름의 이 비문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렇게 영암 구림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추모가 공존하게 되었다.
순창에서 만난 서길동 씨는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민기가 나부끼던 시절 마을 뒷산 굴밭등에서 숨어 목숨을 건졌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니었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에는 수십 년간 이어진 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고택이 있다. ‘한정당(閒靜堂)’이라는 편액이 붙은 이 고택에는 1950년 겨울부터 터를 잡고 살던 문옥례 씨 가족이 지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그녀는 빨치산 유격대원들에게 밥을 해줬는데, 그녀가 퍼준 밥알에는 물론 한 톨의 이념도 없었다. 그녀의 밥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문 씨는 그런 그들이 가여워서 넉넉하게 밥을 퍼줬다. 책을 읽다 보면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각축장으로 알았던 한국전쟁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곳에는 이념도 주의도 사상도 없었다.

7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문 씨는 “밥해주면 그거 먹으면서 동무, 동무 그랬는데……. 다들 죽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빨치산에 대한 연민도, 동정도 아니었다.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함께 관통해온 이들에 대한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_ 194쪽, 5장 순창

한국전쟁은 느닷없이 끝났다. 무책임하게 선포된 평화는 여전히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마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문서 속의 단어일 뿐이었다. “전쟁이 그렇게 대충 끝났다.” 일가족이 몰살당한 뒤 산중 생활을 했던 장재수 씨가 꺼낸 말이다. 2015년 1월에 화순군 맹리에서 만난 임봉림 씨는 군경이 길섶에 사람들을 ?혀놓고 총질을 해댄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부지들이 그런 시상(세상)을 살았어. 그런 거 생각하면 짠해…….” 희생자들은 지나간 폭력의 시간을 ‘그런 시상’이었노라고 담담히 눌러 삼키고 있다. 희생자들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지만 정작 가해자인 국가는 외면하고 있다. 반쪽짜리 화해다. 2005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의해 적지 않은 미규명 피해 사례가 진실로 규명됐지만, ‘진실규명 결정통지서’를 받은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몰라 신청 기간을 넘긴 수많은 희생자가 어떠한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퍼 담지 못한 이야기가 아직 많다

정찬대가 보고 듣고 기록한 것은 한국현대사의 처참한 살육의 역사이지만, 그 안에는 빛나는 장면도 담겨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군경 요직에는 여전히 친일 관료가 즐비했다. 당시 정부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주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좌익계 자수서’를 낼 것을 포고했는데, 서북청년회 등 우익 조직이 중간에 간여해 자수서 제출을 강요했다. 당시 제주 서귀포시 모슬포지서장이었던 문형순은 서청의 개입을 막고자 마을지서가 직접 ‘좌익계 자수서’를 받도록 지시했다. 또 공비 협조자에 대한 밀고가 있을 경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며 도리어 제보자를 겁줘 억울한 희생을 막았다.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장 시절에는 제주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공문을 “不當(부당)함으로 不履行(불이행)”이라고 적어 돌려보냈다. 좌익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덧씌워 언제든 총살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 서장은 괘념치 않았다. _ 297쪽, 7장 제주

하지만 문형순 서장의 말년은 불운했다. 퇴직 후 보급소에서 쌀 배급 업무를 맡은 그는 제주 대한극장 매표원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결국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제주시 오등동 평안도민공동묘지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직까지 그의 죽음을, 그가 보여준 용기를 호명해준 이는 없다.
낙선동 전략촌(제주 4·3성) 이야기도 흥미롭다. 제주 4·3 사건 이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목적으로 이승만 정부는 제주 낙선동에 대규모 전략촌을 육성한다. ‘있지도 않은 적’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주민을 한곳에 모아 토성을 쌓았다. 물론 축성은 주민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침 6시에 문이 열리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 6시가 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식구 중 한 명이라도 못 들어오면 나머지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낙선동 ‘전략촌’은 사실상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24시간 성 주변을 감시했고, 대창을 든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 학생들까지 조를 나눠 번(보초)을 섰다. 여자는 여자끼리, 소년단은 소년단끼리, 노인은 노인끼리 조를 짜는 식이었다. 모두 9개 초소에서 5교대로 운영됐으며, 가장 중요한 정문 보초는 특공대가 지켰다. 물론 남자들이 대거 희생된 까닭에 성을 지키는 일 역시 대부분 부녀자와 노인의 몫이었다. 성 안은 몇 개 부락이 집단 거주할 수 있는 함바집과 경찰지서·초소·통시(뒷간) 등의 시설물을 갖추었고, 심지어 함덕초등학교 선흘리분교까지 마련됐다. 새(억새)로 엮은 함바집은 몸만 겨우 뉠 수 있는 공간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게 전부였다. 통시의 똥통이 넘쳐 풍기는 악취는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성벽 주변(성벽 따라 15개가량 통시가 었었음)이 온통 똥물로 질퍽거렸다. 열악한 환경 탓에 이질 등 전염병이 돌았고,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_ 305~306쪽, 7장 제주

본문에서 다룬 민간인 학살 사건(호남·제주)을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함께 시간의 흐름대로 살펴볼 수 있도록 연표로 정리해 책 말미에 덧붙였다. 또한 각 지역의 학살 사건과 관련한 주요 공간을 독자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장마다 지도를 그려 넣었다. 책 맨 뒤에는 취재에 응해준 피해 유가족 및 학살 생존자들의 명단을 출생연도·거주지와 함께 정리해 넣었다. 한국전쟁기 구술사 연구자들에게 분명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호국보훈’이니 ‘국가유공’이니 하는 이름으로 박제된 정사(正史)의 시대 속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국군에 의해 온 가족이 몰살당했음에도 국가로부터 배상은커녕 변변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피해 유가족들의 사연을 읽으며, 또는 마을 주민 수백 명이 질식사한 폐광굴 옆에 버젓이 세워진 어느 국립호국원을 바라보며 역사의 지독한 모순에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편집 말미 저자는 통화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 취재를 하고도 정리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둘러보지 못한 지역도 많다고 했다. 이런 아쉬움 때문일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에 참여 중인 저자는 벌써 다음 지역 취재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그의 ‘발굴’이 기대된다.

저자 소개

  • 저자 : 정찬대
지은이 : 정찬대
1976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했다.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시사월간지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다양한 매체에서 정치 현장의 기록자로 지내왔다. 2015년 인터넷 매체 ≪커버리지≫를 창간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기사와 칼럼 등을 쓰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은 저자의 고향인 영암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궁금점에서 출발했다. 이후 2007년, 여순 사건과 관련해 전남 구례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 문제에 더욱 천착하게 됐다. 현재 전국을 다니며 관련 사건을 취재·발굴 중이며,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와 함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에 참여 중이다.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저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수집 자료를 정리·분석하는 작업을 도맡기도 했다.  

책 속에서


백인기 중령 전사 이후 위기감에 휩싸인 국군의 토벌 작전은 더욱 흉포해졌고, 주민들은 더 많은 피를 흘러야만 했다. 특히 백인기 중령 사망 뒤 부연대장이던 백선엽 소령이 연대장 대리로 부대를 이끌면서 토벌 작전은 한층 더 과감해졌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출신답게 백선엽의 작전은 거침이 없었다. …… 백선엽은 11월 20일 공을 인정받아 17연대장으로 승전했고, 송석하 중령이 그 뒤를 이어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백선엽이 이끈 국군 제17연대는 이후 빨치산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전공은 민간인 학살의 피 위에 세워졌다. _ 73~75쪽, 2장 구례

“전쟁이 그렇게 대충 끝났다.” 지난날을 회고한 장 씨가 인터뷰 말미에 꺼낸 말이다. 전쟁은 전장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총칼을 든 군인들만의 몫도 아니다.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 있는 민간인들은 몇 곱절 이상의 피와 고통, 그리고 가슴 메는 아픔과 살 떨리는 공포를 겪어야만 한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전쟁’이고 또한 ‘지옥’이다. _ 140쪽, 4장 함평

몇몇 빨치산들은 수도 없이 생사를 넘나든 탓에 ‘사형’을 마치 장난처럼 여기며 시시덕댔다. 죽음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재판이 끝난 뒤 광주형무소로 이감된 사형수들은 말없이 집행을 기다렸다. 곧이어 이들이 감금된 사방(舍房)에 다부진 표정의 군인들이 마룻장을 쿵쾅거리며 들어왔다. 집행관의 지시가 공간을 가득 메웠고, 또 한 번 ‘찰카닥’ 장탄 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왠지 모를 자유로움도 함께 느꼈다. 꽃 같은 청춘, 몹시도 고단했다. 마른 침을 겨우 삼켜낸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허공을 갈랐다. _ 160쪽, 5장 순창

실제 쌍치에서 만난 서길동(옥산리 시산마을) 씨의 아버지는 당시 군인에 의해 사망했고,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 부대를 이탈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매형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던 상황에서 서 씨는 1년여 동안(1951~1952년) 옥산리 산실 굴밭등에 있는 동굴에서 숨어서 지냈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니었다. _ 187쪽, 5장 순창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뒤늦게 광주형무소로 이감된 임방규는 다행히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진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돌아누울 때면 쇳소리가 잘그락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느껴졌다. _ 212쪽, 5장 순창

임방규는 출소 후 서울로 올라와 페인트공이 됐다. 총을 들던 손은 솔을 들었고, 산속을 헤매던 두 발은 산업화의 상징인 콘크리트 건물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붉은빛을 지운 채 남은 인생을 색칠했다. 가끔 철탑에 올라 산업화와 도시화의 고도성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20년간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세상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 정치, 도시 빈민 문제, 자본주의 논리 아래 횡행하는 부패와 사회 부조리……. 무등(無等)을 꿈꾸던 스무 살 청년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_ 234~235쪽, 5장 순창

수백의 원혼이 뒤섞인 임실 폐광굴. 그 아래 호국영령을 위한 국립임실호국원이 자리하고 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그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부름에 이유 없이 희생되기도 했다. 국립임실호국원에는 ‘전쟁 영웅’과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또 다른 죽음’이 함께 공존한다. _ 259~260쪽, 6장 남원·임실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회사) 제주 주정공장은 1943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군수 산업 시설이다. 고구마나 강냉이 등을 주정해 알코올을 제조했고, 이렇게 생산된 알코올은 태평양전쟁 시기 군사용 비행기 연료로 이용됐다. 지금도 제주 농가에선 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빼떼기’(절간고구마)가 널리 생산된다. 4·3 사건 이후 포로들이 늘면서 임시 수용소로 쓰인 공장은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도 활용됐다. 그러던 것이 1951년 7월 육군 제5훈련소로 탈바꿈해 신병 양성 기관으로 이용됐다. _ 284쪽, 7장 제주

군인이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격발되지 않은 채 ‘딱딱’ 소리만 났다. 총알이 떨어진 것이었다. 군인은 옆에 있는 청년단(할머니는 이들을 ‘창쟁이’라고 불렀다)에게 다음을 맡겼다. 그리고 가슴팍에 네 번의 창살이 꽂혔다. 할머니는 쓰러졌고, 군인과 청년단도 곧바로 부대원들을 뒤따라갔다. _ 316쪽, 7장 제주

목차

추천의 글_ 그의 ‘학살’, 글 이상의 아픔과 분노를 담다(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
들어가며_ ‘한 조각’ 역사, 애달픈 꽃처럼 살다 가다

1장 영암: 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 학살’

2장 구례: 지리산 품은 구례의 한, 섬진강 따라 굽이치다
좌우 대립 정점에서 ‘학살의 피’ 흘린 사람들

3장 화순: 골골이 서린 상흔,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인민군 복장한 국군, 대량학살 불러오다

4장 함평: 불갑산 꽃무릇에 배인 선불의 절규
5중대의 인간 사냥, 그리고 마지막 살육 ‘대보름 작전’

5장 순창: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패잔의 기록, 빨치산 투쟁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6장 남원·임실: 그들이 겪은 것은 ‘진짜 전쟁’이었다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된 사람들

7장 제주: 미안해서, 그리고 가엾어서 나는 울었다
이승만과 미국의 협잡, 제주는 ‘붉은 섬’이 됐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연표: 호남·제주 편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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