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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5236443 / 1094쪽 150 x 210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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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고(故) 원암 이규동(圓庵 李揆東, 1905~1991) 교수는 생전에 세인의 관심을 별로 끌지 않았던 인물이다. 원암이 태어난 해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라 그는 평생을 억압과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원암은 3·1만세운동 때 검거된 적이 없으며 고등보통하교 다닐 때도 맹휴를 주동한 적도 없었다. 해방 전 사상불온자로 체포되거나 투옥을 당한 적도 없으며, 4·19때에도 독재 타도를 앞장서서 외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원암도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의 독립 쟁취의 방법은 비폭력적이고, 은밀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불령한 인물을 색출하려던 일경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았고 또 신문의 기사감도 되지 않았다. 그가 숨어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단순한 우리말과 글과 역사가 아니라, 동포의 가슴 속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민족의 혼이었다. 일제강점기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원암은 민족의식이 가장 박약하고 민족정신 교육이 가장 취약한 곳이 공립학교인 것을 알고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전 민족을 상대로 계도하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가까이 있는 철없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그들 하나하나가 장차 민족의 대들보가 되어야 할 막중한 의무가 있음을 눈물로써 각인시켰다. 일제는 공립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 학생을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자 갖은 방법을 썼지만, 원암은 교실 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우리말과 글과 역사와 민족혼을 가르쳤다. 그의 이런 활동은 은밀하면서도 지능적이었기에 어떤 고등계나 신문기자들의 눈도 피해 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글과 민족 문화, 역사를 가르쳐 민족혼을 일깨웠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웠고 민족 정신 창달을 염두에 두고 먼 미래를 내다본 참 교육자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말과 글을 지킨다면 알퐁스 도데의 말처럼 감방에 갇혀도 그 감방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죄수와 같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의 방법이 온유하고 은밀하였기에 제자들의 추억담 외에는 그의 항일 운동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기억하는 제자들은 원암이 그들 정신 속에 뜨거운 민족혼을 심어주었다고 증언한다. 원암은 평생 불쌍한 동포들을 도왔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이 자립하도록 페스탈로치처럼 유도하였고, 그것도 모자랄 경우 자신의 봉급을 쪼갰다. 또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배우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집에 데려와서라도 가르쳤고 자신이 병들어 누웠을 때도 가르쳤다. 페스탈로치가 빈자들을 가르치지 않아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원암도 가난한 학생에게 글과 바른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발을 뻗고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원암은 평생 가난한 삶을 택하고 이웃을 피붙이처럼 사랑하였다. 그의 이웃 사랑은 평등하여 어떤 호오(好惡)도 없었고, 파당을 만들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인조차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세속적인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가진 것은 모두 주변의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진정한 부는 나라의 동량을 키우고 그 동량들을 축적하는 데 있었지 재물에 있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저력은, 지난 세기에 원암 같은 스승의 핍박과 빈곤 속에서도 빛을 내던 올곧은 정신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원암이 남긴 정신은 아팠던 한 시대를 극복하는 ‘슬기’였으므로, 꼭 시대와 함께 꼭 정리해 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전집의 큰 제목을 ‘시대의 스승’으로 정한 이유도 바로 그가 아팠던 시대를 현명하게 극복한 스승이라는 뜻에 있다. 그가 발휘한 이 시대적 슬기와 인고와 사랑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기를 희망하여 이 책을 펴낸 것이다. ■ 원암 연보 1905. 4. 28. 충청북도 영동읍 화신리 291번지에서 출생. 1920. 1. 29. 이갑희(李甲姬)와 결혼. 1926. 3. 21.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1회로 졸업. 1926. 4.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제2부(주요과목 영어)에 입학. 1930. 3. 7.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 1930. 4.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교유(교사) 부임. 1937. 초.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교유(교사) 사직. 가정에서 요양 시작. 1942. 1. 30. 대륜학교(대륜중학교 전신) 강사 부임. 1942. 대륜중학교 교유. 1942. 2.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조사 받음. 1945. 11. 13. 대륜중학교 5대 교장 취임. 1947. 9. 10. 경북여자중학교 7대 교장 취임. 1950. 1. 25. 국립대구사범대학 영문과 부임. 1952. 5. 28. 국립경북대학교 개교. 1952. 중학교 영어교과서 New Life English 출간. 1952. 7. 경북대학교 초대도서관장 취임. 1953. 5. 30. 편저서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Prose Tales 출간. 1956. 3.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 Universal English 출간. 1957. 7. 19.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서리 취임. 1957. 대학 영어음성학 교재 『영어음성학』 출간. 1959. 12. 16. 대구영어영문학회(한국영미어문학회 전신) 초대 회장 피선. 1961. 중고등학교 교과서 Highroads to English 출간 시작. 1965. 2. 21. 와이즈멘 한국 동부지구 총재 취임. 1965. 5. 6. 회갑을 기념하여 ‘원암장학금’ 신설. 1967. 대구시 대학교육회 회장 피선. 1967. 영문법 교과서 『고등영문법』 출간. 1971. 8. 31.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정년퇴임. 1979. 2. 25. 경북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91. 7. 31. 아내 이갑희 소천. 1991. 10. 17. 원암 소천 (향년 87세).
“학교를 갓 나온 교사가 청춘의 정열을 학생들에게 바치면서 그 정열을 훨훨 불사르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서 필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31년, 내가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한 다음해라고 기억된다. 4학년 학생들이 2층 자기네 교실에서 농성하면서 단식 맹휴(盟休)에 들어갔다. 첫째, 한국 역사를 가르쳐라, 둘째, 한글을 가르치라는 등 몇 가지 큰 문제를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중 한글은 벌써부터 내가 은밀히 가르치고 있는 일이었다. 이 맹휴는 압박당하고 있던 민족의 울분을 학생들이 대변하여 폭발시킨 것이었으며 광주 학생의거에 대한 동정 맹휴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많은 학생이 퇴학을 당하였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 제1권 49쪽 ‘청춘과 정열을 학생에게 바친 기쁨’ 중에서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대학원 강의도 재작년으로 끝났고, 독서와 산보 외엔 특기할 일과가 없으나, 다방에 나가거나 놀러 다닐 여가는 없고, ‘일하는 노인’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 자녀들을 여기서 길러낸 오래되고 초라한 내 집은 대구시내면서도 닭도 길렀고 각종 채소도 매 가꾸며, 호박 넝쿨이 담장을 덮은 반농가 비슷하므로, 노부부의 작업량도 만만치는 않다. 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 후 생각이 있어 전공과는 무관한 국어순화운동에 정신을 쓰고 있으며, 조그마한 등불을 켜고 신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을 뿐이다.” - 제1권 60쪽 ‘회혼백서(回婚白書)’ 중에서
“교육이란 교사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학생들에게 억지로 주입시키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천품을 통찰하고 거기에 적합한 지도와 계발을 해야 될 것이다. 피교육자란 자기가 구비한 소질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을 교육자가 살펴보고 발견 계발할 때 비로소 만족할 만한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나날의 교수(敎授) 상태를 반성하여 볼 때 각자 취득한 어느 부분의 지식을 학생에게 분여(分與)함으로써 그치고 그 이상 더 나가서 학생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는 노력이 없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교수’에 정지되는 것이지 ‘교육’의 문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활동이란 규정된 그 시간의 형식적 강의만 가지고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 제1권 118쪽 ‘월요회의 밤을 보고’ 중에서)
“선생님께서는 원래 영어 교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그런데 우리의 재학 중에는 ‘조선어’가 정식 교과목으로 들어 있었고, 이 과목도 선생님이 맡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감수성이 강했던 우리에게 단순히 우리말을 가르치시는 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식민지 민중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비하를 슬기롭게 이겨내도록 각별히 신경 쓰신 것으로 기억된다. 바로 민족혼을 일깨워주셨던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을 우리는 오늘날에도 잊을 수가 없다.
민족혼을 일깨우는 방법으로서 선생님께서는 그때 민족지로서 꾸준히 발행되고 있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기사 중 사설을 활용하셨는데……” - 제2권 26쪽 ‘민족혼을 일깨워 주신 참스승」(배용광(전 대구교육대학 학장))’ 중에서
“그런 한심한 꼴을 보신 선생님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아무 말씀도 없이 교단에 올라가셔서 교탁 위에 안경을 벗어 놓고는 울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의 온몸에 전류가 찌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한 차례 우신 다음에 손짓으로 우리를 교단 앞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뼈에 사무치도록 따가운 말씀을 하셨다. 한심한 우리의 모습에 실망이 크신 선생님이 그 감정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시어 하신 말씀은 참으로 싸늘한 찬바람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어떠한 사람들인가? 우리 민족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아닌가! 장차 사회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아닌가! 사회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그렇게 표리가 달라서야 되겠는가!” - 제2권 28쪽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오탁근(전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에서
“우리 대륜중학교에서는 일본 선생과 한국 선생이 절반 정도 되었는데 한국 선생 중에서도 우리말을 하는 학생을 적발하여 무기정학이나 퇴학 처벌을 내리는 가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규동 선생님은 혹시 형사들이 복도에서 감시를 하지 않나 살펴가며, 수업 시간에도 우리말을 하곤 했다.
특히 이규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성삼문・하위지・박팽년 등 사육신에 관한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기도 하셨다.
이규동 선생님께서는 깨끗하고 인품이 훌륭한 분이시며 학생들의 어려움을 극진히 보살펴주시는 친아버지와 같은 따뜻한 스승님이셨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양심이 살아 숨 쉬는 교육자셨다. 선생님께서는 젊었을 때 몸이 약하셨는데도 비교적 장수를 하신 것은 바로 욕심 없이 양심대로 편안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제2권 50쪽 ‘양심이 살아 숨 쉬는 교육자(이만섭(전 국회의장))’ 중에서
“원암은 평생 불쌍한 동포들을 도왔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을 도우면서 페스탈로치처럼 자립하도록 유도하였고 그것도 모자랄 경우 자신의 봉급을 쪼갰다. 또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배우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집에 데려와서라도 가르쳤고 자신이 병들어 누웠을 때도 가르쳤다. 페스탈로치가 빈자들을 가르치지 않아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원암도 가난한 학생에게 글과 바른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발을 뻗고 잠을 청할 수 없었다.” - 제3권 6쪽 본문 중에서
“원암은 와병 중이었지만, 천금 같은 제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복 정장 차림을 하고 그들을 정중하게 맞았다. 원암은 누구든 문병을 오면 의복을 가다듬고 곧은 자세로 정좌하여 선비의 모습 그대로 모든 예를 지켰다. 집이 누추하여 수십 명 학생이 다 방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으니 밭에서 인사를 받은 것이다. 원암은 이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몇 년 간의 투병 생활은 비참했으나 그래도 간혹 위로도 받았다. 한번은 졸업식을 마친 학생 일동이 위문을 왔다. 그 많은 학생이 내 집안에 모두 들어설 수 없었으므로 대문 밖 채소밭에 정렬한 학생들 앞에 내가 나가서 인사를 받기로 했다. 그날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동리 사람들까지 눈물을 흘렸다.” - 제3권 133쪽 본문 중에서
“원암이 병환으로 덜컥 눕게 되자 생활비라곤 한 푼도 없었고 또 나올 때도 막막하였다. 한창 또 곧 공부해야 할 네 명의 어린 자녀만 있었다. 원암이 대구고보에 적을 두었을 때에는 쌀 열 가마 가치의 봉급을 받았지만, 원암은 그 봉급 중 아내에게 쌀 한두 가마 값이 될 돈으로 생계를 꾸리게 하고 나머지 돈은 필요한 곳에 희사와 기부를 했다. 한 번은 못 쓰는 자갈밭이 매물로 나왔는데 쌀 한 가마 값이면 살 수 있는 금액이어서 원암의 아내가 원암에게 그 값만 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원암은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나라 없는 백성이니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 제3권 137쪽 본문 중에서
제1권 『격조와 향기』
원암의 글 252p
ISBN 978-89-6523-648-1 03810
제2권 『스승의 곁』
가족과 제자들이 원암 선생을 추억하는 글 242p
ISBN 978-89-6523-647-4 03810
제3권 『청빈한 교육자 원암 이규동』
원암의 전기 342p
ISBN 978-89-6523-646-7 03990
제4권 『An Educator of Devotion and Love』
위 세 권의 책 중 중요한 글을 뽑고 기를 요약하여 영어로 번역한 글 258p
ISBN 978-89-6523-645-0 039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