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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바지를 입은 하느님

시리즈 : 현대시 기획선 [34]

유금옥 저 | 한국문연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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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1041959 /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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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유금옥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줄무늬 바지를 입은 하느님󰡕이 출간되었다. “쓰는 행위가/ 쓰는 행위를 썼을 뿐이다”라는 「시인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살아 있음’ 자체를 노래한다. 시인에게 살아 있는 순간이란 곧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며 일상을 있는 그대로, 왜곡되지 않도록 빚어내는 일인 것이다. 사물의 내면을 일방적으로 포획하려 하지 않고 이해와 관용을 바탕으로 삶이 지닌 굴곡을 짚어낸다. 그것은 유금옥 시인 특유의 ‘활발발活潑潑’하고 거침없는 감각으로 드러난다. “지상의 모든 발자국에는 門이 달려 있다”(「구름의 행로」), “내가 공을 던지면 공도 나를 던진다”(「공」) 등 수많은 구절에서 다양한 삶들과의 관계성, 사물에 대한 보다 깊은 각성이 전달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감추어져 있었던 생명의 역동성이 펼쳐진다. 그의 작품에서 “나는 유난히 햇볕을 좋아한다”(「개불알꽃」), “노란 나비들이// 마구 태어났어요”(「봄 2」), “따뜻한 햇살 도시락을 쌌죠 허공으로 소풍 갈 거예요 나는 살아 있으니까요, 보세요!”(「살구나무 2」)와 같은 봄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도 ‘살이 있음’에 대한 그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사유가 단순히 생명성의 찬탄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생이 품고 있는 살아 있음과 죽음의 교차 지점들을 명징하게 포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공고히 한다. ‘늘, 겨울 산행 같았던 내 삶이 봄으로 귀환’(「폭설」)하고 있는 역동의 과정인 것이다.

저자 소개

  • 저자 : 유금옥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여 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되었고, 동시집으로 󰡔전교생이 열 명󰡕이 있다.

이메일 : xmfjr@hanmail.net

머리말

나는
다만 쓸 뿐이다

한 손으로
때로는 두 손으로
어떨 땐 온몸으로

다만
쓸 뿐이다

쓰는 행위가
쓰는 행위를 썼을 뿐이다

나는
모자를 읽기 위해
모자를 쓰지 않는다

바람 부는 가을날

모자 하나 흘리며
저쪽으로 걸어간다

책 속에서

줄무늬 바지를 입은 하느님 외 2편



비는 줄무늬다

줄무늬는 삼각형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다 줄무늬는 모서리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줄무늬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이따금 줄무늬도 눕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냇물도 아니고 강물도 아니고 방은 더더욱 아니다

줄무늬는 도착 지점이 없다 줄무늬는 도처에 흐르고 있다 높다란 층층이 책꽂이에서도 줄무늬가 줄줄 내려오고 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줄무늬의 눈은 왠지 슬퍼 보인다 책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사람들도 가느다란 줄무늬였다고 한다 딱딱한 머리통이 생기기 이전의 신생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먹는 일과 사랑하는 일만 하였다 머리통은 줄무늬의 어설픈 매듭이다

사람들은 미장원이나 이발소에 가서 주기적으로 매듭을 치장한다 칼을 든 미용사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끌려다닌다 미장원을 빠져나가려면 공손히 절을 하고 상당한 돈을 줘야 한다 이것은 미용사들이 머리에서 새로운 줄무늬가 나오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하느님도 별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

오늘은 종일 하늘에서 무료 줄무늬가 내려온다 저 물렁한 하느님도, 아름다운 연꽃을 만나면 쉬어 가거나 연못 둘레를 게으르게 어슬렁거릴 수는 있으나

흐르는 일밖에 다른 일은 모른다
봄



성냥개비처럼 마른 오빠가
손바닥에 동백꽃을 한 움큼 토해 놓고 죽었다
봄이었다

꽃들이 마구 전염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날려 다니며 뒤섞이며 웅성거리며 도망치는 봄이었다 하얀 마스크를 쓴 구름이 소독차를 몰고 지나다니는 골목, 둘째야! 양지상점에 가서 외상으로 담배 한 갑 사오너라 아버지가 개나리 진달래 피우는 봄

외상 장부같이 귀퉁이가 너덜너덜한 골목 우리 집은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꽃잎들 기침 소리가 들리고 꽃술이 붉은 꽃잎에선 비린내가 났지만 어린나무들은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 그다음 해 봄에도

키 작은 동백나무 등 굽은 살구나무, 복숭아나무들이 차례로 전염되었고 자주 흰 구름이 들려 종달새를 풀어놓던, 종달새가 물어 온 양지쪽이 그늘을 전염시키던, 환하게 오빠가 사그라지던

봄, 성냥곽 같은 창문을 그으며 지나가고 있다

성냥개비는 가늘지만 뜨거웠고
동백꽃이 지나간 자리에선
한동안 화약 냄새가 났다
개불알꽃



나는 유난히 햇볕을 좋아한다

햇볕 쨍쨍한 날에는
빨랫줄마다 소소한 빨래를 널어놓는다

나지막한 함석지붕 위까지
흰 구름이며 쿠션이며 베개를 얹어놓고

조약돌이나 사금파리에
햇볕을 문질러 시를 쓴다

아마, 나는 죽어서 한 백 년
낙락장송 거름이 될 때까지

캄캄한 땅속에서
지그시 기다리지는 못 할 것 같다

채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햇볕 쬐러 바락바락 기어 올라올 것 같다

풀잎이나 되어 까불까불
까불 것 같다, 이번 生에서도 그랬듯이

나 보란 듯 해와 달 앞에서
개불알꽃이나 피우며 깝죽깝죽
으스댈까 봐 걱정이다

참, 걱정도 팔자다
요따위로 사는 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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