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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

박홍규 조진구 저 | 연암서가 | 2017년 07월

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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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870107 / 252쪽 145 x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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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속으로 추가] 한일 간에 국교정상화를 이끈 한일회담의 타결은 모든 현안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어려운 교섭과정을 거치긴 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양국이 대립을 거듭하였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과거청산의 의미가 담긴 청구권 문제를 국내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협력’의 일괄타결방식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자 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자금도입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1년 ... [책속으로 추가] 한일 간에 국교정상화를 이끈 한일회담의 타결은 모든 현안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어려운 교섭과정을 거치긴 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양국이 대립을 거듭하였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과거청산의 의미가 담긴 청구권 문제를 국내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협력’의 일괄타결방식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자 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자금도입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1년 당시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85달러에 불과하였으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물가상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국의 원조도 1958년부터 양적 감소와 함께 무상에서 유상차관으로 전환되면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과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경제재건을 최우선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51쪽 한국이 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서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는 지난 50여 년간 계속해서 한일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협정 체결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현실적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국력이 196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그간 수많은 외교교섭을 통해 교섭능력 또한 충분히 배양되었다는 점에서 교섭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교섭 상대국인 일본의 과거역사에 대한 인식과 교섭태도에서는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섭을 다시 한다 해도 한국 국민들의 정서상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낼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일 간에 새로운 협상을 거쳐 도출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합의가 한국 내에서 저조한 평가를 받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55쪽 재일한국인은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했다. 연극, 무용, 문학, 영화, 체육 등에서 조선 내와 다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사카 이카이노(猪飼野)의 경우 조선에서 간 공연단이 재일한국인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특히 각종 신문과 잡지 간행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신문』과 『민중시보』는 도쿄와 오사카의 대표적인 지역문제를 다룬 신문이었다. 『민중시보』는 1935년 6월 15일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월 2회 발행되다가 1936년 1월부터는 월 3회 간행되었다. 타블로이드판으로 6∼8페이지 분량이었다. 1면이 사설, 정치 사상문제, 2면이 국제문제, 3면이 조선본토 문제, 4∼6면이 재일한국인의 사회문제 등을 다루었다. -65쪽 일본 정부는 1947년 2월 외국인 등록령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과 대만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하여 외국인등록이 의무화되었다. 이에 따라 재일한국인은 일본국적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해야 했고3, 년마다 갱신해야 했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소비재, 생활물자 등의 부족으로 암시장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재일한국인은 일본인, 중국인과 함께 암시장에서 쌀이나 술 등을 밀매했다. 암시장은 재일한국인에게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1950년대까지 재일한국인은 고물수집상을 많이 했다. 파칭코, 한국식당 등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문제는 이런 경제활동 분야에 아직도 재일한국인이 다수라는 점이다. 재일한국인은 대학을 졸업해도 일본 기업에 취직할 수 없었다. 공영주택의 입주, 국민건강보험의 가입 등을 거절당했다. -67쪽 시간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일본 학교를 다닌 재일한국인 2세는 1970년대부터 등장했다. 일본 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다. 재일한국인 2세는 권리획득운동을 했다. 1970년의 히다치(日立) 취직차별사건을 계기로 일반 시민 사이에서 폭넓게 전개되기 시작했던 역사는 많이 알려져 있다. 박종석은 재판을 통해 취업의 차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2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1974년에 요코하마지방재판소는 재일한국인의 ‘통명(일본식 이름)’ 사용이 해고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1970년대 재일한국인의 차별에 대항하여 승리한 운동은 사법연수생에 대한 국적조항철폐운동이었다. 그 주인공은 김경득(金敬得)이다. 김경득의 경우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생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경득의 관련 서류가 보류되었고, 일본에 귀화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1977년 3월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일본 국적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채용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70쪽 1923년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호경기가 막을 내리고,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또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점점 확산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의 연계가 이루어져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3·1만세운동, 간도에서의 참패 등을 직접 경험한 일본 정부 수뇌부는 자칫 노동운동이 조선으로 확산되어 갈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자연재해를 빙자한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 전파와 계엄령 선포는 이처럼 침체된 일본 경제에 대한 일본 민중의 불만을 조선인에게 돌려 민중으로 하여금 민중을 학살하게 하는 잔인한 근대적 제노사이드를 연출하게 한 것이다. 당시의 현실문제 타개를 위해 일본 정부는 또다시 자국민을 역사 속의 몬스터로 재생하여 타민족 대학살이라는 오명의 역사를 깊게 남겨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록물 보존 기간과 개인정보 보호라는 미명 하에 사건 은폐로 일관하고 있다. -91쪽 일본인의 대부분은 8월 15일을 전쟁이 끝난 날로 기억하고 있지만 중국 동북부(만주), 한반도, 대만, 남양군도 등 ‘외지’에 있던 민간인과 군인을 제외하고 식민지 지배의 종언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내에 있던 대다수의 일본인(1945년 당시 일본의 인구는 약 7,260만 명으로 이 가운데 해외에 있던 일본인은 9%인 약 660만 명이었다. 이들 중 군인과 군속은 310만 명이었다)은 미군의 엄청난 공습이 사라지자 안심하였으며 출정한 아버지나 남편의 안부를 염려하고 그들의 귀가를 기다리며 식량·주택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패전’\u003d‘식민지 지배의 종언’이라는 인식과 기억의 결여는 지금도 일본 사회에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의 뒤처리라고 하면 1941~45년의 연합국과의 ‘제2차 세계대전’ 내지는 중일 전쟁을 포함한 1931~45년 사이의 15년 전쟁’의 뒤처리로 막연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지배의 청산까지는 시야에 넣지 못했다. 아니, 거기까지 시야에 넣는 것을 계속 회피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95쪽 일본 국내의 전쟁 피해자가 보상을 요구하여 1955년부터 법원에 제소하였지만 해외의 피해자가 바다를 넘어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1970년대까지는 불가능하였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보통의 서민이며 해외 도항을 위한 자유도 경제적 여력도 정보도 없었다. 한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도 일본에게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은 친일적인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던 만큼 전쟁 피해를 주장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중국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상호 청구권을 포기하고 피해자가 직접 일본에 개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저자 소개

  • 저자 : 박홍규 조진구
박홍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법학박사(정치사상 전공)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및 동양 정치사상을 전공하였으며, 저서로는 『山崎闇齋の政治理念』, 『삼봉 정도전-생애와 사상』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 정치사상사-17~19세기』,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마루야마 마사오-리버럴리스트의 초상』 등이 있다.

목차

서문: 한일 역사 화해를 항하여 박홍규
1장 일본 식민지 지배,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최종길
1. 근대, 국민 창출의 과정
2. 식민지시기에 대한 기존의 평가
3. 식민지화와 민족의 탄생
4. 지속되는 민족과 가해의식의 소멸
5. 화해를 위한 첫발, 가해자/피해자 의식의 형성
2장 한일 국교정상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유의상
1. 서론
2. 한일회담의 시작 배경
3. 한일 국교정상화에 이르기까지의 교섭과정
4.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끈 요인
5. 결론
3장 재일한국인,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살아왔는가 김인덕
1. 이주와 정주의 역사
2. 일제시대 재일한국인의 반일운동
3. 전후 재일한국인의 일상
4. 최근 재일한국인
4장 1923년 9월 1일, 그날 도쿄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강효숙
1. 들어가는 글
2.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시작
3. 조선인 학살을 선동한 유언비어, 그리고 학살자 수
4. 맺는 글
5장 일본의 전후 보상 재판, 어떻게 처리되고 남겨진 문제는 무엇인가 아리미쓰 켄
1. 서론: ‘전후 보상’ vs ‘과거사’‘역사 문제’
2. 일본의 ‘전후 보상’ 행보
3. 외국 국적의 전쟁 피해자가 일본에 ‘전후 보상’을 요구한 소송의 개요
4. 일본의 재판 투쟁의 한계와 문제점
5. 한국의 소송이 개척한 근본적인 논의와 해결의 길
6장 강제동원 재판,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최나진
1. 들어가며
2.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3. 1965년 청구권협정의 물적 대상 포섭 여부
4. 국내법 제정으로 인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 여부
5. 소멸시효 제도의 적용 여부
6. 글을 마치며
7장 도쿄 국제군사재판소, 무엇을 단죄하였는가 신희석
1. 문제 제기
2.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도쿄 극동군사재판소의 설립
3. 도쿄 국제군사재판의 관할범죄
4. 도쿄 국제군사재판의 기소 내용
5. 도쿄 국제군사재판의 판결
6.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과제
8장 조선인 B·C급 전범, 그들은 누구인가 강경자
1. 강제동원 된 조선의 포로감시원 186
2. 포로정책을 둘러싼 일본의 책략과 식민 포로감시원
3. B·C급 전범재판 법정의 풍경
4. 고국에 귀환하지 못한 조선인 B·C급 전범의 전말
5. 남겨진 과제
9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무엇이었는가 조진구
1. 한일 ‘위안부’ 합의 전사(前史)
2. 위안부 합의 경위와 한일의 동상이몽
3. 한국 신정부의 과제-재협상이냐 합의 보완이냐
10장 전쟁책임, 전후 독일은 어떻게 단죄되었는가 시바 겐스케
1. 서론
2.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범재판과 독일 사회
3. 독일 국민의 홀로코스트 인식과 역사 서술·해석의 변천
4. 독일 통일, ‘대전환’ 이후의 역사와 기억의 정치학
5. 결론
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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